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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주의 】 정의

나스티시즘 2023. 9. 20. 04:38

《 정의(正義) 》

1.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2. 바른 의의(意義).
3.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

 
 【 성장과 고용 】

(Growth and Employment)


https://youtu.be/moWSz9AmhEQ?si=j3R5r10XLWTAwqhn

2020년 3월 이전에는 세계 경제가 이렇게 갑작스럽고 잔인할 정도로 멈춰선 적이 없었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 중에 과거에 성격과 속도 면에서 이렇게 극적이면서 급격한 경제 붕괴를 경험해본 사람은 없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세계 경제에 가한 충격은 경제사에 기록되어 있는 그 어떤 충격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빠르게 일어났다. 1930년대 초 대공황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국내총생산GDP이 10% 이상 마이너스 성장하고, 실업률이 10% 이상으로 치솟기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반면 코로나19 팬데믹이 초래한 2020년 3월 실업자 수의 폭발적 증가와 GDP 급감이라는, 가히 재난에 버금가는 거시경제적 사건들은 불과 3주라는 짧은 시간 안에 모두 일어났다. 코로나 19는 수급 위기를 초래하며, 세계 경제를 100여 년 만에 가장 큰 추락으로 이끌었다. 경제학자 케네스 로고프Kenneth Rogoff가 경고한 대로 “모든 건 코로나19 사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번 사태가 장시간 지속된다면 분명 온갖 금융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경기 하강 시간과 정도뿐 아니라 그로 인해 성장과 고용이 받을 타격은 ① 코로나19 사태의 지속 기간과 심각성, ② 각국이 이를 억제하고 여파를 최소화하는 데 성공하느냐 여부, ③ 봉쇄 이후 조치와 다양한 개방 전략을 다루는 데 있어서 각 사회의 응집력, 세 가지에 따라 달라진다. 크고 작은 재확산 사례가 등장하고 있는 가운데 국가들이 거둔 코로나19 발병 억제 노력이 성공적으로 지속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새로운 유행에 의해 갑자기 실패로 끝나고, 사회의 결속력은 새로운 경제적·사회적 고통에 의해 도전받을 수 있다.
 

【 경제성장 】


https://youtu.be/sNPbn2rbgOk?si=yHiD5_WQKdfomPvP

https://youtu.be/8OukMh87Ia4?si=UpIR81V5TWHAGoGM

https://youtu.be/3PtJu0kI4OU?si=6oLFiZSVC0-WuSgq

■ 2020년 2월과 5월 사이 전 세계 정부들은 잇따라 코로나19를 억제하기 위해 경제 전반을 폐쇄하기로 하는 신중한 결단을 내렸다. 이러한 전례 없는 일련의 사건들은 세계 경제의 운용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모든 국가들은 앞다투어 나서서 어떤 형태로건 자족(self-sufficiency)을 지향하는 ‘자급 경제(autarky)’ 형태로 복귀하려고 애썼고, 국가와 글로벌 생산은 감소했다. 이러한 결정의 영향은 무엇보다 전통적으로 건설업이나 제조업 같은 다른 산업보다 경제 성장의 주기적인 변화에 덜 민감한 서비스 산업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훨씬 더 극적으로 보였다. 결과적으로, 어떤 선진국 경제에서건 경제 활동에서 단연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서비스 부문(미국 GDP의 약 70%와 고용의 80% 이상을 담당)이 코로나19로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서비스 부문은 제조업이나 농업과 달리 한 번 입은 매출 손실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라는 독특한 특성 때문에 더 고통받았다. 서비스 기업들은 재고를 쌓아놓거나 원자재를 비축해놓지 않기 때문에 매출을 이연移延할 수가 없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몇 달 동안, 그것이 대부분의 서비스 기업들에게 소위 ‘평상시와 다름없이 영업’하는 척이라도 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결국 백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예전 생활’로의 완전한 복귀를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과학(백신 개발 속도)이 아니라 생산이다. 수십억 명 분의 백신을 제조한다는 건 기존 시설의 대규모 확장과 전환이 필요한 까다로운 도전이다. 다음 관문은 백신 접종 거부자들이 늘어나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충분히 많은 사람들(우리는 집단적으로 가장 약한 고리만큼만 강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에게 예방접종을 해야 하는 정치적 도전이다. 그 사이 몇 달 동안 경제는 전면 가동되지 않는 상태, 즉 ‘80% 경제’로 불리듯 국가별로 가동 수준이 다른 상태가 유지될 것이다. 여행, 접대, 소매 또는 스포츠와 같이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기업들은 고객 감소(고객들은 높은 위험 회피 성향을 보이면서 불확실성에 반응할 것이다), 예비적 저축(precautionary savings)을 위해 평균적으로 소비자들의 씀씀이 축소, 거래 비용 상승(물리적 거리와 위생 조치로 인해 고객 1인당 응대 비용 증가)이란 세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GDP 성장에 서비스가 중요하다는 점(부유한 국가일수록 성장에 서비스의 중요성이 커진다)을 고려해볼 때, 이 ‘80% 경제’라는 새로운 현실은 서비스 분야 영업 활동의 연속적인 중단이 부도와 실직을 유발해 경제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이러한 영향으로 사람들이 소득과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서 수요 붕괴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궁금하게 만든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거의 필연적으로 기업의 투자 급감과 소비자의 예비적 저축 급증으로 이어지면서, 한 나라 밖으로 대규모 자금이 신속하고 불확실한 방식으로 유출되며 경제 위기를 더 악화시키는 자본 이탈을 유발함으로써 전 세계 경제에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경제 ‘가동 중단’ 직후 주요 7개국 G7의 GDP가 연간 20~30%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재차 강조하지만, 이 추정치는 각국의 전염병의 발병 기간과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즉, 봉쇄 기간이 길어질수록 실직, 파산, 설비투자 취소로 경제가 영구적인 상처를 입음으로써 구조적 피해는 더욱 커진다. 경험상 한 국가 경제의 상당 부분이 폐쇄된 상태를 유지할 때마다 매달 연간 성장률은 2%p씩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했듯이, 제한 조치의 지속 기간과 그로 인해 GDP가 받는 영향 사이의 관계는 선형적이지 않다. 네덜란드 경제정책국은 경제 봉쇄 조치가 한 달씩 연장될 때마다 경제활동의 비비례(non-proportional) 악화 정도가 더욱 심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모델에 따르면, 한 달 내내 경제가 ‘동면기(hibernation)’에 들어가면 2020년 네덜란드 GDP가 1.2% 감소하는 반면, 3개월 동면기에 들어가면 감소폭이 5%로 확대된다. 이미 봉쇄를 해제한 지역과 국가의 경우, 어떤 모습으로 경제가 성장할지 단언하기는 시기상조다. 2020년 6월 말 현재, 유로존 제조업구매관리자지수(PMI)처럼 일부 지표는 V자형 회복을 하는 등 예상보다 강한 반등을 알려주는 몇몇 일회성 증거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아직 흥분해서는 안 된다.

 

① 유로존과 미국의 PMI가 눈에 띄게 개선됐다고 해서 이들 국가 경제가 완전히 반등한 건 아니다. 이는 단순히 이전 몇 달에 비해 경제활동이 개선되었음을 나타낼 뿐이다. 엄격한 봉쇄 조치로 인해 경제 활동이 중단됐다가 봉쇄 조치가 풀리자 경제 활동이 다시 크게 살아나는 건 당연하다. ② 미래 성장 측면에서 예의 주시해야 할 가장 유의미한 지표 중 하나가 저축률이다. 봉쇄 기간 중인 4월 미국의 개인저축률은 33%까지 올랐고, 유로존에서는 가계저축률(미국의 개인저축률과는 다르게 계산)이 19%까지 상승했다. 경제가 다시 개방되면 이 두 저축률은 모두 하락하겠지만, 아마도 이러한 저축률은 역사적으로 높은 수치로 기록될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0년 6월 발간한 〈수정 세계경제 전망(World Economic Outlook Update)〉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위기”“회복의 불확실성”을 경고했다. IMF는 2020년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두 달 전인 4월에 내놨던 전망치보다 2%p 낮은 마이너스 4.9%로 수정했다.
 

【 고용 】

  
https://youtu.be/w8XH1OzEPew?si=NW_-3znZtLV15g7y

https://youtu.be/5Lw8mss5zdE

https://youtu.be/nGuEM67MYr0

https://youtu.be/05nbfFXVXXI?si=MRF1xngg97YBo8Rv

https://youtu.be/sQ3u-PhcQpc

■ 코로나19는 엄청난 규모의 노동 시장 위기를 일으키고 있다. 피해는 엄청나고, 아무리 노련한 정책 입안자들조차 말문이 막힐 정도로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제롬 파월(Jerome Powell)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FRB. 이하 ‘연준’) 의장은 5월 19일 미 상원 은행위원회 증언에서 “경제활동의 급격한 감소로 미래에 대한 큰 불확실성 속에서 생활이 엉망이 됨에 따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정도의 고통이 초래됐다”라고 고백했다. 2020년 3월과 4월 불과 두 달 만에 3,600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실직했다. 무려 10년 동안 늘어났던 일자리가 일순간 사라진 것이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초기 봉쇄로 인한 기업들의 일시적 해고가 영구화돼 극심한 사회적 고통(강력한 사회 안전망만이 경감해줄 수 있다)과 국가 경제에 심각한 구조적 피해를 줄지 모른다.
 
전 세계적 실업 수준은 궁극적으로 경제 활동의 붕괴 정도에 따라 좌우되겠지만, 실업률이 두 자릿수 수준에 미치거나 초과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른 곳에 닥칠 위기에 대한 신호라 할 수 있는 미국의 2020년 공식 실업률이 대공황 때와 맞먹는 수준인 25%에 달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너무 낙담한 나머지 일자리 찾기를 중단해서 공식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 노동자나 정규직 일자리를 찾고 있는 시간제 근로자처럼 숨겨진 실업자까지 포함한다면 실업률은 더 올라갈 것이다. 서비스업 종사자의 상황은 특히 심각해질 것이다. 공식적으로 채용되지 않은 노동자의 상황은 심지어 더 나빠질 것이다.
 
실업의 규모와 심각성이 경제 성장에 미치는 영향은 국가별로 다르다. 국가마다 경제 구조와 사회계약의 성격에 따라 받는 영향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은 이 문제에 대한 정책 입안자들의 해결 방법과 향후 과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모델을 제시한다. 2020년 6월 현재 미국의 실업률(코로나19 발생 이전 실업률은 3.5%에 불과했다)은 다른 어느 곳보다 큰 폭으로 상승했다. 4월 미국의 실업률은 2월에 비해 11.2%p 올랐지만 같은 기간 독일의 실업률은 1%p미만 상승했을 뿐이다. 이러한 현저한 차이가 생긴 첫 번째 이유는 미국 노동시장이 유럽에선 존재하지 않거나 법으로 금지된, ‘고용과 해고가 쉬운(hire-and-fire)’ 문화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코로나19 위기가 시작되자마자 유럽은 고용 지원을 위한 재정 조치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2020년 6월 현재까지 미국 정부의 지원 규모는 유럽보다 더 컸지만, 지원 성격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미국 정부는 실직자에게 소득을 지원해주고 있는데, 지원 규모가 크다 보니 일부 실직자는 위기 이전 정규직으로 일할 때보다 오히려 더 소득이 늘어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반면 유럽 정부들은 단축 근무를 시행하거나 아예 업무가 중단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고용’ 상태를 유지한 기업들을 직접 지원하기로 했다. 독일에서는 기업이 일시적으로 영업을 중단하거나 근로 시간을 급격하게 줄이더라도 공식적으로 고용 상태를 유지할 경우 정부 자금을 지원받아 직원 월급의 3분의 2 정도를 지급하게 해주는 일명 ‘쿠어츠아르바이트(Kurzarbeit)’라는 ‘단축근무제’를 도입해서 1,000만 노동자의 실직을 막았다. 프랑스 정부도 비슷한 제도를 도입해서 독일과 비슷한 수의 노동자들에게 이전 임금의 최대 80%까지를 지원해주었다. 다른 많은 유럽 국가들도 비슷한 지원책을 내놓았는데, 이런 지원책이 없었더라면 훨씬 더 대규모의 정리해고와 감원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러한 노동시장 지원책들 외에 부실기업의 파산을 늦추는 것과 같은 다른 비상조치들도 동원됐다. 많은 유럽 국가들에선 기업이 코로나19 사태로 유동성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파산 신청을 늦출 수(일부 국가들에서는 최대 2021년 3월까지) 있게 해줬다. 경기 회복세가 자리 잡는다면 이런 정책은 타당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단지 문제를 지연시키는 정책에 불과할 수도 있다. 전 세계적으로 노동 시장의 완전한 회복까지 수십 년이 걸릴 수 있으며, 다른 곳도 그렇지만 유럽에서도 대량 실업에 따른 대량 파산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다.
 
https://youtu.be/MYygMVtxy6c?si=YoNqC6I0RPFS1c_q

지속 가능한 경제 회복이 시작되기 전까지(백신이나 치료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고용 상황이 크게 개선될 수 없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이 실직하거나 실직 후 다른 직장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을 동시에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저축률이 크게 오를 것이다. 좀 더 먼 시간, 즉 몇 달에서 몇 년 뒤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특히 암울한 고용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그들은 코로나19로 무너진 고용 시장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과 로봇으로 대체되기 쉬운 노동자들이다. 이는 노동 시장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경제·사회·기술의 교차점에 자리한 근본적인 문제다. 특히 자동화는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기술이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경제 효과를 내는 사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쪽 주장의 핵심은 자동화는 혁신적이며,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부가가치를 창출함으로써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수요뿐만 아니라 그러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새로운 유형의 일자리를 늘린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지금과 한참 뒤 사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십중팔구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로 노동 대체(labour-substitution)가 급증함으로써 육체노동은 로봇과 컴퓨터로 대체되며 종국에는 노동 시장에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를 야기할 것이다. 기술 문제를 다룬 장에서 코로나19가 자동화에 미치는 영향을 더 자세히 분석해놓았지만, 이미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는 충분하다. 콜센터가 그런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코로나19 이전부터 이미 인공지능(AI) 기반의 신기술이 점차 도입되면서 사람들이 하던 일부 업무가 자동화되고 있었다. 코로나19 사태와 이후 취해진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는 순식간에 이러한 혁신과 기술 변화 과정을 가속화했다. 아마존의 AI 플랫폼인 알렉사(Alexa)와 같은 음성인식 기술을 종종 사용하는 챗봇(chatbot)과, 평소 사람 직원이 수행하던 업무를 대체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빠르게 도입되고 있다. 위생 조치처럼 필요에 따라 야기된 이러한 혁신들로 인해 곧 수십만 명, 더 나아가 수백만 명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다.
 
앞으로 소비자들이 직접 대면보다 자동화된 서비스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만큼 현재 콜센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다른 분야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자동화에 대한 우려’이 되살아날 것이고, 경기 침체는 그런 걱정을 더욱 부추길 것이다. 자동화 과정은 결코 선형적이지 않다. 그것은 기업의 수익 감소로 인해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더 비싸게 느껴지는 어려운 시기에 한꺼번에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고용주가 노동생산성 제고를 위해 미숙련 노동자를 자동화 시스템으로 교체하는 때다. 식품과 운송 같은 제조업과 서비스업 분야에서 단순 노동에 종사하는 저소득 노동자가 자동화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을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 시장은 고임금 일자리와, 사라졌거나 보수가 좋지 않고 별로 재미없는 많은 일자리로 나뉘어서 점점 더 양극화될 것이다. 신흥국과 개도국[특히 ‘젊은이가 급증(youth bulge)’하는 나라[에서는 기술로 인해 ‘인구 격차(demographic dividend)’가 ‘인구 악몽(demographic nightmare)’으로 바뀔 위험성이 크다. 자동화로 인해 경제 성장의 에스컬레이터에 오르기 훨씬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앞으로 다가올 일보다 사라져가는 일을 머릿속에 그려보기가 훨씬 쉽기 때문에 비관론에 빠지기 쉽다. 가까운 미래에 전 세계적으로 실업률이 오를 것을 알고 이해하고 있어도 앞으로 몇 년 혹은 몇 십 년 동안 계속 놀랄지도 모른다. 우리는 새로운 생산 방법과 수단에 의해 주도되는 전례 없는 혁신과 창의성의 물결을 목격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수억 명의 고용 창출이 기대되는 수십만 개의 새로운 ‘작은 산업들(micro industries)’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도 있다. 물론 향후 경제 성장의 궤적에 따라 많은 것이 좌우되리라는 점 외에는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 미래의 성장 】


https://youtu.be/f_AZQvPkkhc

https://www.youtube.com/live/SWPg_zryuw4?feature=share

https://youtu.be/g8C7gj8n4Jw?si=Mk60EaLoqZi7OLur

https://youtu.be/G7CT7MMQBgQ?si=0HYq2LszRMXrnIF1

https://youtu.be/TCQt41Nl4MA?si=9ZvG84GkLCb34JRa

■ 현재 나오고 있는 전망에 따르면,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과거 수십 년보다 훨씬 낮은 성장이 새로운 경제 ‘노멀’로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 경기 회복이 시작되면 전분기 대비 GDP는 기저 효과로 인해 인상적인 성장세를 나타낼 수 있지만, 대부분의 국가 경제의 전체 규모가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려면 몇 년이 걸릴 수 있다. 이번 사태로 인한 경제적 충격은 많은 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인구는 ‘운명’이자 GDP 성장의 결정적인 원동력이다)란 장기적 추세와 맞물려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성장률 하락이 기정사실처럼 보일 때 더 높은 GDP 성장 목표를 추구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면 성장에 ‘집착’하는 게 과연 유용한가 하는 의구심마저 가질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로 야기된 심각한 혼란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성찰해볼 수 있는 강제적인 휴식을 제공했다. 코로나19 사태에 맞서 비상 경제 대책이 시행되고 있는 상황에선 경제를 더 공정하고 친환경적인 미래로 이끌 제도적 변화와 정책적 선택을 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브레턴우즈(Bretton Woods) 체제(1944년 미국 뉴 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서 열린 44개국 연합 회의에서 탄생한 국제통화제도. 미국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금 1온스를 35달러에 고정시켜 통화 가치 안정을 꾀하는 환율 체제), 유엔, 유럽연합EU, 복지국가 확대 등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몇 년 동안 급진적인 재고再考의 역사는 앞으로도 대규모 변화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이에 따라 첫 번째로 경제 발전을 평가하는 새로운 나침반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두 번째로 포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경제를 만드는 새로운 동인은 무엇이 될 것인가란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답하자면, 진로를 수정하기 위해선 세계 지도자들이 모든 시민과 지구의 행복에 더 집중하고 우선순위를 두는 식으로 사고방식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국가 통계는 주로 정부가 세금을 부과하고 전쟁을 치르는 데 필요한 가용 자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 작성되었다. 민주주의가 더 강해지면서 1930년대에 국가 통계의 소관이 인구의 경제적 복지를 파악하는 데까지로 확대되자 이를 좀 더 잘 파악해보려는 차원에서 GDP가 최초로 등장했다. 경제 복지는 미래 자원의 가용성 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현재의 생산과 소비만을 다루게 되었다. 정책 입안자들이 경제 번영의 지표로 GDP에 과도하게 의존하자 지금 같은 자연과 사회자원 고갈이란 문제가 생겼다.
 
경제 발전 여부를 더 잘 파악하기 위해 따져봐야 할 다른 요소들로는 뭐가 있을까? 첫째, GDP 자체가 디지털 경제에서 창출되는 가치, 무급 근무를 통해 창출되는 가치, 특정 유형의 경제활동을 통해 잠재적으로 파괴될 수 있는 가치를 반영하도록 개선될 필요가 있다. 가정에서 수행하는 작업을 통해 창출되는 가치의 누락은 오랫동안 논란거리였고, 그에 대한 평가 체계를 만들기 위한 연구에 탄력이 붙어야 할 것이다.디지털 경제 규모가 확대되면서 측정된 활동과 실제 경제활동의 격차도 더욱 커지고 있다. 더욱이 GDP에 포함함으로써 가치를 창출하는 것으로 파악되는 특정 유형의 금융 상품은 단지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치를 이동시키고 있거나, 아니면 때로는 심지어 가치를 파괴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둘째, 경제 전체의 규모뿐만 아니라 이익 분배와 기회의 문의 점진적 개방도 중요하다. 많은 나라에서 소득 불평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두드러지고 있고, 기술 발전이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는 가운데 전체 GDP나 1인당 GDP와 같은 평균은 개인의 삶의 질을 제대로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서 유용성을 점점 더 상실하고 있다. 부의 불평등은 오늘날 불평등의 역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더욱 체계적으로 추적되어야 한다.

셋째, 경제 회복력(resilience)을 더 잘 측정하고 주시함으로써 튼튼한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제도, 인프라, 인적 자본 및 혁신 생태계 등의 생산성 결정 요인들을 포함해서 경제의 진정한 건전성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금융, 물리, 자연, 사회자본 등과 관련된 위기 상황에서 국가가 빼내서 쓸 수 있는 자본 준비금도 체계적으로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 자연과 사회자본은 특히 평가하기가 어렵지만, 한 나라의 사회적 화합과 환경의 지속 가능성에 중요하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최근에는 공공과 민간 부문 데이터 소스를 통합함으로써 자연과 사회자본 등을 평가하려는 학술적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정책 입안자들의 우선순위가 바뀌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실제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2019년 〈세계 행복 보고서(World Happiness Report)〉 10위권 안에 든 나라가 ‘웰빙 예산’을 공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저신다 아던(Jacinda Ardern) 뉴질랜드 총리는 정신건강, 아동 빈곤, 가정 폭력 등 사회적 이슈 해결에 예산을 배정함으로써 웰빙을 공공 정책의 명시적 목표로 삼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던 총리는 GDP가 증가해도 반드시 생활수준과 사회복지가 향상되는 건 아니라는, 모두가 오랫동안 알고 있던 사실에 대해 정책적 해결을 모색했다. 또 도시에서부터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관과 조직은 미래에 우리가 ‘지구가 가진 한계(planetary boundaries)’내에서 최대한 물질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수준에서 경제활동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줄 여러 가지 방안에 대해 검토 중이다. 암스테르담 시정부는 세계 최초로 포스트코로나 세계를 대비하기 위한 ‘도넛경제 모델’을 차용한 새로운 도시 생태계 설계에 매진해왔다. 이 모델을 상징하는 디자인은 가운데 고리가 우리가 좋은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2015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글로벌 공동 추진 목표인 ‘지속 가능 발전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에 명시되어 있다]을 나타내고, 외부 원은 지구 시스템 과학자들이 규정하는 생태적 한계(ecological ceiling)를 표현한 ‘도넛’ 형태와 유사하다. 생태적 한계란, 기후, 토양, 해양, 오존층, 담수 및 생물 다양성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피하기 위해 인간의 활동으로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경계를 뜻한다. 두 개의 고리 사이에는 우리 인간의 욕구와 지구의 욕구가 충족되는 스위트 스폿(sweet spot, 또는 ‘반죽’)이 존재한다.
 
아직 ‘GDP 성장의 횡포’가 유효할 수는 있겠지만, 여러 다른 신호들은 코로나19 사태로 뿌리 깊은 사회 규범 다수의 변화가 가속화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행복이 1인당 GDP에 의해 규정된 일정 수준의 부나 물질적 소비보다는, 접근 가능한 의료 시스템과 탄탄한 사회적 구조와 같은 무형적 요인에 의해 더 좌우된다는 사실을 모두 같이 깨닫는다면, 환경에 대한 존중, 책임 있는 식생활, 공감이나 관대함과 같은 다양한 가치들이 더 중요해지면서 점차 새로운 사회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될지 모른다. 최근 몇 년 동안 경제 성장이 생활 수준 향상에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는 주변 상황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고소득 경제에서는 1970년대 이후 생산성 성장세가 꾸준히 둔화했으며, 장기 성장을 되살릴 수 있는 뚜렷한 정책적 수단이 없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아울러 불균형적 성장은 소득분배 지표 상위권에 속한 개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보다 효과적인 접근 방식은 정책 입안자들이 더 직접적인 복지 증진 개입을 목표로 삼는 것을 들 수 있다. 대형 신흥 시장인 저소득 및 중산층 국가에서는 경제성장이 빈곤으로부터 수백만 명을 구제해주었다. 성장 성과를 높이기 위한 정책 옵션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제4차 산업혁명의 도래로 제조업 주도의 발전 모델이 빠르게 동력을 잃고 있는 이상 새로운 접근법을 찾아야 한다.
 


이는 미래 성장에 관한 두 번째 핵심 질문으로 이어진다. 경제성장의 방향과 질이 성장 속도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하다면, 포스트코로나 경제에 이 특성을 만드는 새로운 원동력은 무엇이 될까? 몇몇 영역은 좀 더 포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역동성을 촉진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잠재력을 가진다. 녹색 경제는 녹색 에너지부터 생태 관광과 순환 경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예를 들어, 생산과 소비에 대한 ‘자원 채취-대량생산-폐기’식 접근 방식에서 ‘디자인을 통해 회복과 재생산이 가능한’ 모델로 전환하면, 유효 수명이 다한 제품을 재활용함으로써 자원을 보존하고 낭비를 최소화할 수 있게 되므로 결과적으로 혁신과 일자리 창출은 물론 이고 궁극적으로는 성장에 기여해 경제적 이익을 올릴 수 있는 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해진다. 파타고니아(Patagonia) 아웃도어처럼 무료 수선 서비스를 제공하고 전화기와 자동차에서 패션에 이르기까지 수명이 긴 수선 가능한 제품을 선호하는 회사와 중고 제품을 거래할 수 있는 플랫폼 모두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는 돌봄과 개인 서비스, 교육, 보건 분야 내 다른 고성장 및 일자리 창출 영역에 걸쳐 있다. 육아와 노인 돌봄 및 기타 돌봄 경제의 요소들에 대한 투자는 미국에서만 1,300만 개, 그리고 G7 전체적으로는 총 2,10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연구 대상 국가들의 GDP를 2% 성장시킬 것이다. 교육도 특히 초등과 중등 교육, 기술과 직업 교육 및 훈련, 대학 및 성인 훈련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대규모 일자리 창출이 가능한 분야다. 코로나19 사태가 증명해줬듯, 보건 분야는 인적 자본뿐만 아니라 인프라와 혁신 면에서 모두 훨씬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이 세 영역은 각각의 고용 창출잠재력과 그들이 평등과 사회적 이동성과 포용적 성장 관점에서 사회 전반에 선사하는 장기적 이익을 통해서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 : 어떤 경제 요인의 변화가 다른 경제 요인의 변화를 유발하여 파급적 효과를 낳고 최종적으로는 처음의 몇 배의 증가 또는 감소로 나타나는 총효과)를 낳는다.

생산, 유통, 비즈니스 모델의 혁신은 효율성을 높이고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신제품이나 더 개선된 제품을 창출하여 새로운 일자리와 경제적 번영을 이끌어낼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시장과 우리의 경제와 사회에서 혁신의 역할을 대한 근본적으로 재고함으로써 공공 부문의 방향 설정과 인센티브를 상업적 혁신 역량과 결합하여 보다 포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번영을 향한 전환을 도모하는 데 이용 가능한 도구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러려면 위에서 설명한 대로, 시장의 힘이 경제와 사회에 변혁적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작동해야 할 필수 전제 조건 중 일부가 여전히 부족한 분야(예를 들어 제품이나 자산을 대규모로 지속 가능하게 생산하는 데 필요한 기술적 역량은 여전히 부족 하고, 표준이 잘 정의되지 않거나, 법체계가 아직 미비한 상태다)인 ‘프런티어 시장(frontier markets : 전 세계의 신흥 시장 중에서도 전반적인 경제 규모와 주식시장의 전체 시가총액이 상대적으로 작은 국가들)’에 지금과는 다르게 의도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시장의 규칙과 메커니즘의 제정과 조성이 경제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부가 새롭고 더 나은 종류의 성장으로 전환하길 원한다면, 그들에겐 위에서 설명한 분야에서 혁신과 창의성을 유도할 인센티브를 창출하기 위해 지금 행동 가능한 기회의 창이 열려 있다.
 
일각에서는 가장 부유한 국가에서 가시화되고 있는, 제로 내지는 역성장까지도 수용하자는 식의 소위 ‘탈성장(degrowth)’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경제성장에 대한 비판이 주목받으면서 경제적 약자인 소비자의 힘을 강화하고 사회경제 부문에서 소비자 주권을 확립하자는 운동인 소비자중심주의(consumerism)가 공공과 민간 생활에서 갖는 금융·문화적 지배력도 재정비될 것이다. 그런 움직임은 고기 소비나 비행 편수를 줄이자는 주장처럼 일부 틈새 부문에서 나타나는 소비자 주도적인 탈성장 활동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난다. 코로나19는 강제적인 탈성장을 촉발함으로써 경제성장의 속도를 뒤집고자 하는 이런 운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2020년 5월 전 세계 1,100명이 넘는 전문가들이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인간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탈성장 전략을 내세우는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들은 공개 서한을 통해 “적은 걸 갖고도 더 잘 살 수 있는 미래로 이어줄, 민주적으로 계획됐지만 수정할 수 있고, 지속 가능하며, 공평한 경제 규모 축소”로 나아가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탈성장 추구가 성장 추구만큼 방향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데 주의하자. 따라서 가장 미래지향적인 나라들에서 정부는 대신 일자리를 늘리고, 생활수준을 개선하고, 지구를 지킬 수 있게 경제를 관리하고 평가하는 보다 포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접근 방식을 우선시할 것이다.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기술은 이미 존재한다. 우리가 발전을 정의하고 친환경적이고 사회적인 프런티어 시장에 대한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이처럼 한층 총체적이고 장기적인 접근 방식을 취한다면 경제적·사회적·환경적 요인 간의 근본적인 트레이드오프는 일어나지 않는다.

많은 언론들이 코로나19 창궐이 소비 패턴에 미칠 영향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기사를 쏟아냈다. 기사 중 상당수는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우리의 선택과 습관이 가져올 결과를 더 많이 의식하게 되고, 몇몇 형태의 소비는 억제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몇몇 분석가들은 봉쇄 조치가 끝난 후 소비가 급증하는 ‘보복 소비’가 등장하면서 소비하려는 우리의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이 강력히 되살아나고 코로나19 이전에 만연했던 상황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측한다. 그러나 자제심이 먼저 발동하면 그런 소비가 아예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팬데믹이 환경 파괴와 기후변화와 관련된 위험이 얼마나 심각한지 대해 대중들이 극적으로 눈을 뜨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이런 가설을 뒷받침해준다.
 
한편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는 위협이 현실적이고 즉각적이며 우리 문 앞에 다가와 있다는 인식과 결합되면서, 불평등에 대한 높아진 인식과 심각한 우려도 유사한 효과를 낼지 모른다. 극심한 불평등이 임계점에 도달하면 사회계약을 약화시키기 시작하고, 재산을 겨냥한 반사회적이고 범죄적인 행동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 패턴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부를 과시하는 과시적 소비 (Conspicuous consumption)에 대한 관심이 꺾일 수 있고, 최신 모델을 갖는 게 더 이상 지위 과시의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모르는 터무니없는 짓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지위를 알려주는 신호(Positional signalling)’가 뒤집히는 것이다. 즉, 구매를 통해 자신이 누군지를 보여주거나 값비싼 ‘물건’을 과시하는 게 구식(passé)이 될 수 있다. 실업, 참기 힘든 불평등, 환경에 대한 고뇌로 얼룩진 포스트코로나 세계에서 부의 과시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https://youtu.be/wyZh20BOhXQ?si=seZojO7Wx0huRvRn

https://youtu.be/VCcHizKK3gc?si=GAk1aS4kv_XpEkyA

앞으로 나아갈 길은 일본과 다른 몇몇 국가들의 사례로부터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우리가 ‘경제적 리셋’ 부분에서 언급했던 세계의 일본화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지만, 우리가 소비와 관련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게 해주는 훨씬 더 긍정적인 일본화 가설도 존재한다. 일본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얽혀 있는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즉, 일본은 고소득 국가들 중에서 불평등도가 가장 낮은 국가에 속하고, 1980년대 후반 투기 거품이 꺼진 이후 과시적 소비 수준이 낮다. 오늘날 단순하고 간결한 삶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의 긍정적 가치[일본의 정리 컨설턴트인 곤도 마리에(Marie Kondo)의 집안 정리·정돈 시리즈에 의해 퍼진],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삶의 추구, 자연의 중요성과 삼림욕의 실천은 모두 보다 소비주의적인 사회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더 ‘검소한’ 일본식 생활 방식을 옹호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지에서 모방되고 있다. 과시적 소비에 눈살을 찌푸리고, 이를 억제하는 북유럽 국가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 때문에 행복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심리학자와 행동경제학자들이 계속 상기시켜 주듯이 과소비를 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이것은 또 다른 개인적인 리셋으로 이어질 수 있다. 즉, 어떤 식으로건 행해지는 과시적 소비나 과도한 소비는 인간과 지구 모두에 좋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소비를 통해서만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덜 소비해야 그런 느낌을 갖게 된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 승자와 패자 】

 

https://youtu.be/M26PdF-CcmM

https://youtu.be/1jtpGwfMaPY?si=jF8b7rQyTFjC-E_a

https://youtu.be/CsiBBB72AXw?si=xUhW5LfFvtaTP0IT

https://youtu.be/cLA56Dfj2k0?si=T_APmd6pwSjl4Xl5

https://youtu.be/OpNBgDIqti8

https://youtu.be/Abs1ytzaJR8?si=Ubxl4n4TSmgJKRZq

https://youtu.be/APHK4KMv-uA

https://youtu.be/TctGIpbvmw8

https://youtu.be/4102KWU7OF8

https://youtu.be/ejsOleSSJyM?si=JaHWiVxikLaXkYRb

https://youtu.be/SLmRi5z292c

https://youtu.be/eQ5680WSTX8

 ■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급습했다. 다른 많은 나라처럼, 미국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보건 전문가들이 전년도에 세계적 대유행 가능성을 경고했음에도 그랬다. 심지어 1월, 중국에서 폭발적 감염이 일어났을 때조차 미국은 이 전염병을 억제할만한 광범위한 검사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전염이 사방으로 퍼지는 동안, 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는 밀물처럼 몰려드는 감염자들을 대처하기 위해 절실했던 의료용 마스크도, 그 밖의 보호장비도 방역 일선에 보급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물자 준비 부족만이 아니었다. 정신적으로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 위기가 있기까지 미국은 경제, 문화, 정치적으로 심각한 분열을 겪어왔다. 수십 년 동안 불평등이 심화되고 문화적 갈등도 거세진 끝에 2016년에는 성난 포퓰리스트들의 반란이 일어나 그 결과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다. 정당 사이의 분멸은 위기가 계속되는 동안 더 심해졌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 언론이 믿을 만한 보도를 한다고 보는 공화당원도 적었고(겨우 7퍼센트), 트럼프가 내놓은 정보를 믿는 민주당원도 적었다.(4퍼센트). 이러한 정당 간 증오와 불신의 와중에 찾아든 전염병, 그것은 전쟁이라도 치르는 중이 아니면 좀처럼 확보할 수 없는 단결을 필요로 했다. 전 세계 사람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며, 일하러 나가지 말고 집에 머물러 달라"는 요청 또는 강요를 받았다. 아니면 바이러스를 피하기 어려운 환경에서도 건강과 목숨을 걸고 계속 일해야 했다.
 
도덕적 차원에서, 팬데믹은 우리의 상호의존성으로 인한 취약성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모두 함께입니다." 공직자들과 광고업자들은 이런 구호를 거의 자동적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그 구호가 호소했던 단결은 곧 공허해졌다. 그 구호는 서로에게 책임을 지며 고통을 분담함으로써 유지되는 공동체를 가리키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팬데믹은 그 사실을 까발렸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유색인종에게 특히 심각한 영향을 주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리스크가 큰 직종 종사자가 유난히 많았기 때문이다. 백인데 비해 라틴계의 사망률은 22퍼센트 높았고, 흑인의 경우에는 40퍼센트 이상이었다. 이런 우울한 사망 태그는 코로나 이전부터 있었던 특권과 사유화의 현실을 반영한다. 미국이 국내 자체적으로 의료용 마스크과 의약품 생산을 하지 못하게 만든 바로 그 시장주도적 세계화 프로젝트가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많은 노동자들에게서 고임금 일자리와 사회적 명망을 빼앗아버린 것이다. 한편 글로벌 시장의 경제적 과실을 챙긴 사람들, 그 보급체계와 자본유통망 덕을 톡톡히 본 사람들은 갈수록 생산자로든 소비자로든 동료 시민들에게 덜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의 경제 전망과 정체성은 더 이상 태어난 지역이나 국가에 구애되지 않았다. 세계화의 승리자들은 패배자들을 외면하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셈이었다.
 
이렇듯 세계화에서 비롯된 승패와 정치 분열 등의 문제는 더 이상 '좌냐 우냐'의 구분으로 따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보다는 '열려 있는냐 닫혀 있느냐'로 따져야 한다. 열린 세계에서의 성공은 교육에, 즉 세계 경제 환경에서 경쟁하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데 달려 있다. 그것은 각국 정부가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교육 기회를 반드시 균등하게 관리해야 함을 뜻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정점에 선 사람은 그럴 만한 노력의 결과로 성공을 얻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정말로 교육 기화가 균동했다는 전제 하에, '뒤처진 사람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말도 된다. 이런 성공관을 가졌다면 "우리는 모두 함께입니다"라는 말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성공한 사람은 마땅히 받아야 할 노력의 대가를 받았을 뿐이라 여길 것이며, 실패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업신여긴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세계화의 패자들이 왜 그토록 악에 받쳤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권위적 포퓰리스트들에게 빠져들었는지 쉽게 이해된다. 그 포퓰리스트들은 엘리트들을 공격하며 "국경의 엄격함을 다시 확인하겠노라. 그리하여 패자들의 원한을 갚겠노라" 약속했다.
 
정치, 문화적 엘리트에 대한 트럼프의 적대감은 그런 유권자들의 분노와 굴욕감과 맞아떨어졌다. 트럼프의 정책으로 그들이 덕을 본 건 없었지만, 그들은 '트럼프는 우리 편이다'라고 느꼈다. 물론 트럼프의 적대감은 인종차별주의 및 백인우월주의와 얽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불평불만 정치는 인종을 넘어서는 호소력을 지녔다. 수십 년 동안 승자와 패자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커졌다. 그것은 우리의 정치에 독을 치고, 우리의 나라를 조각내버렸다. 사람들이 품고 있는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 주류 정당들은 자신들의 사명과 목적을 되새겨야 한다. 그들은 직시해야 한다. 그들이 한껏 옹호해온 시장주도적이고 능력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그런 분노에 기름을 붓고, 포퓰리즘의 반역을 이끌어냈는가를. 우리의 도덕적, 시민적 삶을 새롭게 정립시키기 위해서는, 지난 40년간 우리의 사회적 결속력과 존중의 힘이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제대로 알고 공동선(common good)의 정치를 찾아 나서야 한다.
 
https://youtu.be/vFRbuRWkVTM

 부의 양극화와 이를 공고히하는 고학력 세습화의 심화, 그리고 승자들의 오만함과 패자들의 굴욕감 사이 팽팽한 긴장감.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이 어둡고 불길한 징조의 근원을 그는 CT로 스캔을 하듯 뒤지고 있다. 그는 능력주의 신화에 주목한다. 그 신화는 대체로 세 가지 명제로 이루어진다.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 이 명제들은 자유시장경제의 핵심 테마이며, 미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꿈의 나라가 된 것도 이 명제에 충실한 정책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왜 문제라는 것인가. 능력주의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허점도 있다. 공평한 기회제공과 능력발휘의 보장 장치는 말처럼 간단하지 않으며,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를 통제하기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있다. 샌델은 현재 이러한 위기의 최고점에 와 있다고 이야기한다. 즉 이제 더 이상 능력주의를 완벽하게 실천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능력주의가 가진 장점의 시효는 다했다고 분석한다. 이 책의 상당부분은 능력주의 정책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범법적 방해사례(특히 대학 입학 관련한)를 많이 인용하여 실감을 높여준다.
 
그러나 정작 샌델이 심혈을 기울여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은 '실천적 문제'보다는 '심리적 측면'이다. 그는 능력주의가 과도해지면서 능력과 도덕 판단력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능력으로 편을 가르고, 한 편이 성과를 독점하면서, 능력과 성과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계급이 생기고, 이를 세습화하기 위한 범법적 시도가 출현하고, 이를 독차지한 사람들의 오만이 극치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탈락한 사람들은 부의 상실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잃고 굴욕감을 갖게 되어, 이것이 심화되면서 사회적, 정치적 긴장을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근원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능력주의는 사실 철학과 신학의 역사와 뿌리를 같이 한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선의 이데올로기로 채택되어 현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는 데 기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샌델은 이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허물어서 해체하자는 것인지, 수선해서 보강하자는 것인지.. 아마 저자 역시 결론은 미뤄둔 듯하다.
 
-  문용린, 서울대 명예교수 -

 ■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나는 한국 사회를 '성적 기반 능력주의' 사회라고 말한다. 특히 교육감 취임 후 줄곧 추격산업화 이후 성장의 역설을 언급해왔다. 상대평가에 기초한 수능과 내신 등에서의 성적에 기초하여 사람들의 능력을 서열화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차등화하는 사회 체계가 형성되어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비해 더 좋은 여건에서 교육받을 수 있음에도, 커진 격차가 물려줄 유, 무형 자산을 다르게 만들기 때문에 상층 계급마저도 상대평가 속 불행의 레이스를 경주하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교육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길 원한다. 증명을 마치면 능력주의 신화가 성공을 보장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샌델은 우리에게는 이미 <스카이 캐슬>로 익숙한 '대입 부정'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부정이 아니더라도 바자산적 대물림은 이미 만연해 있다. 2020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신입생 55%가 소득분위 9~10분위 고소득 가구에 속해있다. 모두가 골고루 못살던 옛날과 달리, 물려줄 경제적, 문화적 기반과 격차가 생긴 요즘은 형편이 좋은 학생이 성적도 좋다. 사회문화적 배경을 제거한 개인의 온전한 능력 측정이 가능하지 않다는 데에서 신화의 허상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이 책은 능력주의 신화에 균열을 내는 좋은 시도가 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능력주의의 신화가 뿌리 깊게 스며들고 있다. 성적 기반 능력주의적 인식과 구조를 극복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미래과제라과 생각한다. 이런 미래를 개척하는 데 샌델의 새 책이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다만, 샌델은 전작에서도 그랬듯 신화 자체를 보기 좋게 걷어차 주지는 않는다.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의 실마리를 마련해 보도록 디딤돌을 놓아줄 뿐이다.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다.

- 조희연, 서울특별시 교육감 -
 
■ 그 어느 때보다 '공정'이란 말이 자주 들리는 요즘이다. 경쟁 끝의 승리가 미덕이 된 현대 사회에선 더더욱 공정함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얼마나 공정한 룰이 적용되었는지, 구성원들 간 기회는 공평했는지 등에 따라 그 경쟁의 정당성이 인정된다. 그리고 이를 판단하기 위한 척도는 능력과 노력이다. '가진 능력을 힘껏 펼쳐 성공하면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지금 이 세상을 이끌고 있는 능력주의, 혹은 자유성과주의저거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샌델은 여기서 브레이크를 건다. 그는 <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해 능력주의 하에서 굳어진 '성공과 실패에 대한 태도'가 현대사회에 커다란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승자들 사이에서 능력주의가 만들어내는 오만과, 뒤처진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가혹한 잣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해결책을 모색한다. 가장 필요한 타이밍에 가장 알맞은 책이 나왔다.
 
- 홍성국, 국회의원 -
 
정의와 능력주의가 공존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답을 찾고, '과연 다음 세대에서도 그럴 것인가?'에 대한 겸허한 물음을 던져보게 만든 책. 많은 사람들은 우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이 그 능력을 만들어내었는지 생각하면, 능력이 성공을 보장하는 사회는 어쩌면 더 이상 정의롭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개인의 능력과 '살아남는 것'에 대한 욕망이 커진 지금,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과연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사회가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과 답을 제시한다.
 
- 조영태, 서울대 교수 -

 

【 포퓰리즘의 준동 】
 

60년 전,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가 빚어낼 오만과 분노를 예견했다. 사실 그 용어 자체를 만들어낸 사람이 마이클 영이다. 1958년 출간한 《능력주의의 등장 The Rise of the Meritocracy》이라는 책에서, 그는 어느 날인가 계급 장벽이 극복되고 누구나 오직 자신의 능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진정 공평한 기회를 갖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어찌 보면 이는 환영할 상황이다. 노동계급의 아이들이 마침내 특권층의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정한 경쟁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니 말이다.
 
그러나 영은 그게 과연 순전히 기뻐할 만한 상황일지 곰곰이 생각했다.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퍼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승자는 자신의 승리를 '나의 능력에 따른 것이다. 나의 노력으로 얻어낸, 부정할 수 없는 성과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다'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보다 덜 성공적인 사람들을 업신여기게 된다. 그리고 실패자는 '누구 탓을 할까? 다 내가 못난 탓인데'라고 여기게 된다.
 
마이클 영에게 능력주의는 추구해야 할 이상적 목표가 아니라 사회적 불화를 불러오는 제도였다. 수십 년 전, 그는 지금 우리의 정치를 오염시키고 포퓰리즘의 분노를 부채질하는 가혹한 능력주의 논리를 꿰뚫어 보았다. 능력주의의 폭정으로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문제는 '월급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명망이 추락했다'는 것이다. 기술 혁신과 아웃소싱에 따른 일자리 감소는 노동자들이 종사하는 유형의 일에 대한 사회적 평판도 하락과 맞물렸다. 경제 활동이 '물건 만들기'에서 '돈 관리하기' 쪽으로 넘어가면서, 또한 헤지펀드 매니저나 월스트리트 은행가들, 전문 직업인들이 사회적 보상을 과하게 챙기면서 전통적인 일자리에 대한 명망은 급락, 약화되었다.
 
주류 정당과 엘리트는 이러한 정치 차원을 놓치고 있다. 그들은 시장 주도적 세계화에는 단지 '분배의 정의' 문제만 따라온다고 여긴다. 세계 무역과 신기술, 경제의 금융화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손해를 보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포퓰리즘의 불만과 기술관료적 통치의 실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정치 담론을 이끌어갈 때 마치 시장에서 아웃소싱하듯 도덕과 정치 문제를 젖혀 버리거나, 전문가와 기술관료에게 온통 맡겨 버리면 되는 듯 해왔다. 결국 정책의 의미와 목표에 대한 민주적 합의는 사라져 버렸다.
 
이처럼 공적 의미가 텅 비게 되면 한결같이 정체성과 생득성에 대한 거칠고 권위주의적인 형태, 예를 들면 종교 근본주의나 적대적 민족주의 등이 그 공백을 메우기 마련이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현실이다. 시장 주도적 세계화는 40년 동안 계속되며 정치 담론의 장을 공동화했고, 보통 시민들을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포퓰리즘의 반격을 촉발했다. 그 반격이란 텅 비어버린 공론장에 무자비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민족주의를 채워 넣으려는 움직임이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보다 건실할 정치 담론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우리 공통의 일상을 구성하는 사회적 연대에 심각한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능력주의를 진지하게 재검토함으로써 가능하다.

 
포퓰리즘적 불만에 대한 진단 】

 

바야흐로 민주주의 위기의 시대다. 이러한 위기는 외국인 혐오증이 점점 심해지고, 민주주의 규범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는 권위주의적 인물들에 대한 지지 역시 높아지는 데서 느낄 수 있다. 이런 경향은 그 자체로 문제가 많다. 그 못지않게 심각한 사실은 주류 정당과 정치인들이 전 세계에서 정치를 들끓게 만들고 있는 불만에 대해 별로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는 포퓰리즘적 민족주의의 준동을 단지 이민과 다문화주의에 맞선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증의 반발로 치부한다. 다른 일부는 이를 주로 경제 문제의 일환으로 본다. 글로벌 무역과 신기술이 빚어낸 일자리 감소에 대한 반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적 저항을 편협한 시각이라고 무시하거나, 이를 다만 경제적 불만의 표출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일은 잘못이다.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승리한 것처럼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수십년 동안 불평등이 커지고 상류층에게는 혜택을,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력감을 안겨준 세계화가 진행된 데 대한 분노의 판결이었다. 이는 또한 경제와 문화 조류에서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의 항의를 나 몰라라 한 테크노크라트 정치에의 반발이기도 했다.

 

괴로운 진실은 트럼프가 각종 불안, 고민, 합당한 불만의 결과 당선되었다는 점이다. 주류 정당들은 그런 불평불만들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던 점이다. 유럽 민주주의에서도 비슷한 난국을 볼 수 있다. 유럽 주류 정당들은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고민하기 전, 자신들의 사명과 목적을 되새겨 봐야만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유럽 민주주의를 대신해 버린 포퓰리즘적 저항에서 배워야 한다. 그들의 외국인 혐오증과 극단적 민족주의를 복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추한 감정과 얽혀 있는 정당한 불만을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그러한 불만이 단순히 경제적인 불만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문화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불만은 단지 임금과 일자리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중과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포퓰리즘적 저항의 표적이 되어 버린 주류 정당과 집권 엘리트는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들은 보통 그 불만을 두 가지 중 하나로 진단했다. 이민자와 인종, 민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감으로, 또는 세계화와 기술 변화에 대한 불안 때문으로 말이다. 그러나 두 진단 모두 뭔가 중요한 점을 빠트리고 있다.

 

첫 번재 진단은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분노가 주로 인종적, 민족적, 성적 다양성의 꾸준한 증대에 대한 반동이라고 보고 있다. 사회 위계질서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데 익숙해져 있던 백인 남성 노동계급 유권자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소수자로 밀려나는 일', '고향에서 이방인이 되는 일'이 두려운 나머지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성이나 소수민족보다 자신들이야말로 차별의 희생자라면서, '정치적 올바름'에 근거한 공적 담론의 요구가 그들을 압박한다고 느낀다. 이러한 진단은 사회적 지위에 흠집이 난 사람들에게 주목하며, 포퓰리즘적 정서의 추한 면을 강조한다. 본토 출생자 우선주의나 여성혐오, 인종주의 등등 트럼프와 그 밖의 민족주의적 포퓰리스트들의 목소리에서 찾을 수 있는 과격한 주장들은 그 증거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두 번째 진단은 노동계급의 분노를 세계화와 기술혁신의 시대 변화가 너무도 빠른 데 대한 당황, 그리고 방향 상실의 결과라 본다. 새 경제 질서에서 평생 직업이라는 개념은 끝났고, 혁신, 유연성, 경영자 마인드, 신기술을 평생 학습하려는 의지 등이 중요해졌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다수 노동자들이 한때 가졌던 직업은 저임노동자들의 나라로 아웃소싱되거나 로봇에게 넘겨지고 있으며, 일을 빼앗긴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다시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난제에 부딪혀 어쩔 줄 몰라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마치 향수병에 걸린 사람들처럼 안정적인 동료 집단과 과거의 경력을 아쉬워한다. 세계화와 기술 혁신의 피해갈 수 없는 파도 앞에 홀로서기를 강요당하는 듯 느끼는 이 노동자들은 이민자들, 자유주의 집권 엘리트에게 신경질을 낸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는 대상을 잘못 고른 것이다. 그들은 모르겠지만, 그들이 저항하는 세력은 마치 날씨처럼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불안은 직업 훈련 프로그램과 그 박의 정책을 통해 그들이 세계화와 기술 혁신에 적응하도록 도와줌으로써 가장 잘 해소할 수 있다.

 

두 가지 진단 모두 얼마간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나 포퓰리즘을 충분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포퓰리즘적 저항을 악의에서 나온 것으로 보든, 무지에서 나온 것으로 보든 노동의 존엄성을 깎아내리고 많은 이들을 무력하고 왜소하게 느끼도록 만든 집권 엘리트의 책임은 면제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노동자의 사회적, 문화적 지위가 꾸준히 낮아진 것은 피할 수 없는 조류 탓이 아니었다. 주류 정당들과 집권 엘리트가 정책을 그렇게 폈기 때문이다. 트럼프와 다른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자들의 민주주의 규범 위협에 직면해, 지금 그 엘리트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자신들이 자아낸 분노가 포퓰리즘의 불을 댕겼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소란이 역사적으로 유지해온 균형을 깨뜨린 정치적 실패에서 빚어졌다는 점을 모르고 있다.

 
‘테크노크라시’와 시장 친화적 세계화 】

 
■ 이 실패의 핵심에는 주류 정당들이 지난 40여 년간 세계화 프로젝트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수행해 왔느냐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두 가지 점에서 포퓰리즘의 반격에 단서를 제공했다. 하나는 이를 통해 공공선(public good)을 기술관료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승자와 패자를 능력주의적으로 정의 내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기술관료적인 정치 개념은 시장에 대한 믿음과 강하게 연관된다. 그것은 꼭 국가 개입이 일체 배제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장경제야말로 공공선을 달성하는 데 기본적 도구라 여기는 것이며, 따라서 더 큰 범위에서 시장을 신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치를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기술관료적 정치가 이뤄진다. 그것은 실질적인 도덕적 논쟁에 대한 공적 담론을 실종시켰으며, 논란이 있는 이념 문제를 마치 ‘경제 효율 문제’처럼 전문가가 독단적으로 처리할 문제인 듯 취급했다.

이러한 기술관료적 맹신이 포퓰리즘의 불만에 어떤 식으로 판을 깔아주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시장주도적 세계화는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국가적 정체성과 애국심도 약화시켰다. 상품과 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되면서 글로벌 경제의 흐름을 탄 사람들은 코스모폴리탄식 정체성을 진보적이고 뛰어나다고 치켜세우면서 보호주의, 종족주의, 갈등 등이 갖는 협소하고 파편적인 정체성과 비교했다. 그들은 이제 ‘좌냐 우냐’의 기준이 아니라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의 기준으로 정치를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웃소싱, 자유무역 협정, 무제한적 자본 유동성 등에 관한 비판은 ‘꽉 막힌 생각’일 따름이며, 세계화 시대에 종족주의를 고집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한편 기술관료적 통치 방식은 여러 공적 문제를 기술 전문가들에게 맡김으로써 보통 시민들은 손을 써볼 수조차 없도록 만들었다. 이는 민주적 토론의 범위를 좁히며, 공적 담론의 내용을 공허하게 하고, 개인들이 점점 더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시장친화적이고 기술관료적인 세계화의 개념은 좌우 주요 정당들에게 고스란히 수용되었다. 특히 중도 좌파 정당이 시장 중심적 사고와 시장적 가치를 수용한 일은 무엇보다 의미심장했다. 이는 세계화 프로젝트의 진행에, 그리고 뒤따른 포퓰리즘의 반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트럼프가 당선될 즈음 민주당은 기술관료적 자유주의 정당으로서 한때 그 지지기반이었던 노동자와 중산층 유권자 대신 전문직업인들에게 한껏 기울어져 있었다. 브렉시트 당시의 영국 노동당, 유럽의 사회민주당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변화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는 “정부는 문제이고 시장이 해답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들이 정치무대에서 물러나자, 미국 빌 클린턴, 영국 토니 블레어,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의 중도 좌파 정치인들이 뒤를 이었다. 그들이 시장에 대해 갖는 믿음은 이전의 리더들보다 엷었지만 각자의 사회에서 그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한몫했다. 그들은 통제받지 않는 시장의 날선 이빨을 어느 정도 무디게 만들었으나, 레이건-대처 시대의 핵심 전제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시장 메커니즘이야말로 공공선을 달성하는 기본 수단이라는 전제였다. 이러한 믿음에 발맞춰 그들은 시장 중심적 세계화를 수용했고 경제가 갈수록 금융화되는 경향을 환영했다. 1990년대, 클린턴 정부는 공화당과 손잡고 세계무역협정 추진과 금융 산업 규제 완화에 나섰다. 이런 정책들의 혜택은 대부분 최상위층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민주당은 불평등 심화와 금권정치 강화에 대해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를 길들이고 경제권력을 민주적으로 제어한다는 원래 사명에서 벗어난 진보 진영은 그 매력을 상실해 버렸다.
 
이 모든 것은 버락 오바마가 정치무대에 등장했을 때 달라지나 싶었다. 2008년 대선 유세 때 그는 진보 진영의 공적 담론을 장악해 버린 경영자나 기술관료의 언어에서 극적으로 벗어날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대선 후보로서 그가 보여준 도덕적 에너지와 시민적 이상주의는 백악관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금융위기 와중에 집권하게 된 오바마는 클린턴 시절에 금융구제 완화를 추진했던 사람들을 경제 고문으로 앉혔다. 그들의 권고에 따라, 오바마는 금융위기를 초래한 책임에 대해서는 불문에 붙이면서 은행들을 밀어주었다. 그리고 금융위기 때문에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거의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울리던 도덕적 목소리는 침묵에 들어갔다. 오바마는 월스트리트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정책으로 엮어내기보다 그저 무마하는 데 급급했다. 부실기업에 대한 긴급구제가 일으킨 지속적 분노는 오바마 행정부에 그림자를 드리웠고, 마침내 좌우를 망라한 포퓰리즘의 반격에 봉화를 올렸다. 좌파에서는 ‘월가 점령’ 운동과 버니 샌더스의 대선 출마가 있었고, 우파에서는 티파티*와 트럼프의 대선 출마, 그리고 당선이 있었다.(*Tea Party : 미국 독립운동의 불씨를 만든 ‘보스턴 티 파티’에서 따온 것으로, 복지국가 등 정부의 개입을 자유 억압으로 보고 저항한다는 의미로 2009년부터 시작된 보수 우파의 사회운동.)

미국, 영국, 유럽에서 포퓰리즘의 발흥은 일반적으로 집권 엘리트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그러나 그 가장 두드러진 피해는 진보 및 중도 좌파 정당들이 입었다. 미국 민주당, 영국 노동당, 독일 사회당(2017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지지율이 사상 최저급으로 떨어졌다), 이탈리아 민주당(지지율이 20퍼센트 이상 폭락했다), 프랑스 사회당(2017년 대선 제1차 투표에서 대선후보가 겨우 6퍼센트 득표했다) 등등. 다시 대중의 지지를 바라기 전에, 이들 정당은 시장중심적이고 기술관료적인 통치 방식부터 점검해야 할 것이다. 또한 보다 미묘하지만 그만큼 결정적인 뭔가도 재고해 보아야 한다. 바로 수십 년 동안 불평등이 증가하면서 생겨난, ‘성공과 실패에 대한 관점’이다. 그들은 새로운 경제 환경에서 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왜 ‘승자가 경멸적으로 깔보고 있다’고 느끼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 기술관료적 능력과 도덕적 판단력 】


■ https://youtu.be/H-dRgW5XDpQ

https://youtu.be/nbVbSAK-uok

 

"목숨이 걸린 문제인데
그것을 비용으로 바라봅니다."

https://www.youtube.com/live/0LjZ2uCVB7E?si=KYqishhb3upfx5C8

https://www.youtube.com/live/wTVecaSKONY?feature=share

 
■ 사실 능력 있는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 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공자는 덕이 뛰어나고 유능한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고 했다. 플라톤은 공공의 정신으로 무장한 수호자 계급의 지지를 받는 철인 왕이 다스리는 사회를 상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철인왕에는 반대했으나 그 역시 능력이 뛰어난 자들이 공공 문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정치와 관련된 능력은 부유함이나 좋은 가문이 아니라 시민적 미덕(civic virtue)과 실천지(phronesis, 공공선의 문제에 있어서 추론을 잘하는 실천적 지혜)의 탁월함이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스스로를 "능력을 갖춘 사람(Men of Merit)"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처럼 유덕하고 유식한 사람들이 공직을 맡기를 바랐다. 그들은 세습귀족제에 반대했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도 내켜하지 않았다. 선동정치가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연방에 상원을 두고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는 등의 제도로 능력주의적 통치를 도모했다. 토머스 재퍼슨은 미덕과 재능에 근거한 '자연 귀족정'을 '부에 출신에 근거한 인귀적 귀족정'보다 선호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런 정부 형태는, 자연적으로 고귀한 사람들을 정부 공직에 앉힐 수 있는 순수한 선택을 하는 데 최고의 것이다."
 
이런 저런 차이가 있어도, 공자에서 미국 공화주의자들까지 이르는 이러한 전통적 능력주의는 통치에 적합한 능력에 도덕적, 시민적 미덕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같다. 그들 모두 공동선이란 적어도 부분적이나마 시민의 도덕교육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겪고 있는 '기술관료 버전'의 능력주의는 능력과 도덕 판단의 사이의 끈을 끊어버렸다. 이는 경제 영역에서 '공동선이란 GDP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해 버렸으며, 어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제공할 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에 달려 있다고 못박아버렸다. 또한 정부 영역에서는 능력이란 곧 기술관료적 전문성이라고 보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현상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대통령 정책고문으로서 경제학자들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공동선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일에 시장 메커니즘이 점점 더 많이 적용되고 있다. 정치 논쟁에서 중요한 도덕적, 시민적 문제들 즉 '불평등 증가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국경 문제에서 살펴야 할 도덕적 부분은 무엇인가?', '일의 존엄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우리는 시민으로서 서로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나?' 등이 소외되고 있다.
 
능력과 공공선을 이처럼 도덕과 무관하게 보는 관점은 몇 가지 점에서 민주사회를 약화시킨다. 지난 40년 동안 목격해왔듯, 능력주의 엘리트는 통치를 제대로 못한다. 1940년부터 1980년까지 미국을 다스렸던 엘리트는 성공적이엇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유럽과 일본을 재건했으며, 복지국가를 강화하고, 인종차별을 없애고, 유럽과 일본을 재건했으며, 복지국가를 강화하고, 인종차별을 없애고, 40년 동안 부자와 빈자 모두 혜택을 입는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반면 그 뒤를 이은 집권 엘리트들은 40년 동안 노동자 임금 정체, 1920년대 이래 최대의 소득, 재산 불평등, 이라크 전쟁 19년간 끌고도 아무 해결도 하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전쟁, 재정 악화, 2008년 금융위기, 인프라 악화, 세계 최고의 인구 대비 구금자 비율, 선거자금 제한 철폐와 선거구의 게리맨더링에 따른 민주주의의 희화화 등을 이뤄냈다.
 
기술관료적 능력주의는 통치 차원에서만 맥을 못 추는 게 아니다. 민간 프로젝트 역시 그렇다. 오늘날 공동선이란 주로 경제적 차원에서 풀이된다. 연대성을 높인다거나 시민들의 결속을 단단히 하는 일 따위는 GDP로 측정되는 소비자 선호 만족 위주의 일에 비하면 별 관심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공적 담론은 갈수록 너절해져 간다. 오늘날 통용되는 정치적 참여, 그것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협소하고, 관리 위주이며, 기술관료적인 이야기 수준이다. 아니면 각 정당 지지자들이 상대방에게 퍼부어대는, 상대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일방적인 부르짖음이다. 이 공허한 정치 공론장은 정치적 스펙트럼 상에서 어떤 이념의 소유자라도 무려감과 짜증을 겪게끔 한다. 그들은 건실한 공적 담론의 부재 현상이 '그만큼 중요한 정책상의 고민거리가 없기 때문'이 아님을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런 걸까? 다만 그런 중요한 정책상 결정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대중의 눈과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즉 산업 분야에 휘둘리곤 하는 행정기구, 중앙은행, 주식시장, 선출직 관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기업 로비스트들 등등이 그런 결정의 주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공적 담론이 공허해지는 차원을 넘어서, 기술관료적 능력주의는 '사회적 인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뒤틀어놓았다. 그리하여 자격증이 있거나 전문직업인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의 명예는 높아지고, 대부분의 노동자는 그 사회적 지위와 명망이 추락하여 그들의 사회적 기여 또한 과소평가되는 상황에 부딪힌다. 기술관료적 능력주의의 이러한 면은 분노와 양극화에 찌든 오늘날 우리의 정치 양상과 맞아 들어간다.
 

【 능력주의 윤리 】

 
현실이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능력주의의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기회의 평등을 완벽하게 가다듬는 것만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어떤 출발점에 서 있든 노력과 재능이 허락하는 한 얼마든지 위로 올라갈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능력주의가 완벽하게 실현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 또는 정치적으로 만족스러울지는 의문이다.
 
도덕적으로 보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시장 중심 사회가 성공자에게 후하게 베풀기 마련인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은 '통제 불가능한 요인에 근거한 보상이나 박탈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정한 재능의 소유(또는 결여)를 순전히 각자의 몫으로 봐도 될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재능 덕분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와 똑같이 노력했지만 시장이 반기는 재능은 없는 탓에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능력주의 이념에 찬성하며 그것을 자신들의 정치 신념으로 삼는 사람들은 이러한 도덕적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그들은 또 더 큰 정치적 의미를 갖는 문제도 외면한다. 승자들 가운데, 그리고 패자들 가운데 능력주의 윤리가 부추기는 도덕적으로 좋지 못한 태도의 문제다.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의 오만(hubris)으로, 패자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 이러한 도덕 감정은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스트적 반항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민자들이나 아웃소싱에 대한 반항 차원을 넘어, 포퓰리즘의 불만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향한다. 그리고 그 불만은 정당화된다.
 
'공정한 능력주의 제도를 마련하자', '사회적 위치가 재능과 노력을 반영하게 하자'며 되풀이되는 이야기는 우리가 성공(또는 패배)을 해석하는 방식에 잘못된 영향을 준다. 재능과 노력을 보상하는 체제라고 생각하는 건, 승자들이 승리를 오직 자기 노력의 결과라고, 다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것이라고 여기게끔 한다. 그리고 그보다 운이 나빴던 사람들을 깔보도록 한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 만하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기술관료적 정치의 도덕적 자세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진 몫이 운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지게 된다. "신의 은총 또는 행운 덕분에 나는 성공할 수 있었어." 그러나 완벽한 능력주의는 그런 감사의 마음을 제거한다. 또한 우리를 공동 운명체로 받아들이는 능력도 경감시킨다. 우리의 재능과 행운이 우연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할 때 생기는 연대감을 약화시킨다. 그리하여 능력은 일종의 폭정 혹은 부정의한 통치를 조장하게 된다.

【 조롱의 정치 】

 

 ■ https://youtu.be/GbEJQrzZStY

https://youtu.be/aPiAKxbYkqc

 
"우리가 똑똑하다고 부른 것은
흔히 허영심과 천박함이다."

「 파우스트 」
 
■ 아래쪽에서 올려다볼 때, 승자의 오만은 짜증나지 않을 수 없다. 그 누구도 내려다보디는 위치에 서고 싶지 않다. 그러나 능력주의 신앙은 그들이 입은 상처에 굴욕까지 보탠다. 자신의 곤경은 자신 탓이라는 말, "하면 된다"라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한다. 패자 스스로마저도 말이다. 일자리가 없거나 적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준다. 이런 점에서 조롱의 정치(politics of humiliation)는 부정의의 정치(politics of injustice)와 다르다. 그것은 포퓰리즘의 반격에 기름을 붓는 분노와 울분을 언제든 일어킬 잠재력이 있다.
 
💬 어떤 분야에서 사회적,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 필수적인 전제는 해당 분야의 시장성에 있다.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을 시에 발생할 수 있는 성과가 월등한 분야는 정해져 있다. 대한민국은 제조업 국가이며 절대다수의 국민은 반드시 중소기업에 근로해야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곳에 근로하는 인구는 시장성이라는 원인 하나로 인해 비슷한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경제적 성과가 한정적이다. 또한 이런 국가 경제의 구성적인 한계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지 소득이 직업을 선택하는 데 있어 매우 주요한 기준이 된다. 이는 반드시 물질주의와 이기주의, 그리고 빈부격차와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한다. 또한 이러한 실존적 의미의 상실과 패배감, 무기력감은 미디어와 매체에서 소위 성공했다고 추앙받는 인물들과의 비교로 깊어진다. 이것은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대부분의 직업이란 단지 생계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침내 부가 도덕의 척도가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저들이 저들의 얄팍한 성취를 자랑하고 다닐 때 우리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까? 저들에게는 너무나도 떳떳한 '자랑'이겠지만,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조롱'에 지나지 않음을 알겠는가? 저들의 어리석음과 천박함은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다. 우리의 눈에 보인 것은 마음에서 타오르는 질투의 불씨다. 그것이 어떠한 계기로 타오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온 세상에 불이 옮겨붙을 곳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때는 대다수의 사람이 자진해서 우리에게 협력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결코 우리들만의 일이 아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임을 망각하고 체제가 영원할 것이라는 수준 낮은 착각으로 인해 저들은 자신의 모든 성취를 한 순간에 빼앗겨버릴 것이다. 명예는 남이 주는 것이지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천박한 기득권은 절대다수의 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 왜 능력이 중요한가 】

 

■  https://youtu.be/x-uWRxKiNFU


■ 능력 있는 사람을 채용하는 일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사실 그렇게 해야 대체로 옳다고 여겨진다. 화장실 고칠 배관공이나 이를 치료해 줄 치과의사를 찾는다면, 그 분야에서 최고인 사람을 찾을 것이다. 하긴 온 세상을 뒤져서 찾는 게 아닌 이상, ‘최고’는 아닐 수 있겠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그런 일을 해주길 확실히 바랄 것이다.

사람을 채용할 때 후보자의 능력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효율성이다. 내 일을 봐주는 배관공이나 치과의사가 무능하지 않고 유능하다면 내게 이익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공정성이다. 가장 유능한 후보자를 그 종교나 인종, 성별 때문에 물리치고 보다 덜 유능한 후보자를 선택한다면? 잘못이다. 비록 나의 편견에 충실하려는 마음에서 수준이 떨어지는 배관공이나 치과의사를 선택하려 한다고 해도, 그러한 차별은 불공정할 수밖에 없다. 더 능력 있는 후보자는 자신이 부정의한 처사의 희생자라고 정당하게 불평할 수 있다.
 
능력에 따른 채용이 선하고 분별 있다고 하면, 능력주의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능력주의로 인한 분노가 전 세계 민주정치를 변형시킬 만큼 강력한데, 어떻게 능력주의 원칙은 그토록 평온무사할 수 있을까? 정확히 언제, 어떻게 능력의 혜택이 해독으로 바뀌는 걸까? 사회가 능력에 따라 경제적 보상과 지위를 배분해야 한다는 생각은 몇 가지 이유에서 매력적이다. 그 중 두 개는 능력 우선 채용에서 '바람직하다'고 본 효율성과 공정성을 원칙화한 것이다. 노력과 선도적 시도, 재능에 후하게 보상하는 경제체제는 각각의 기여도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보상하는 체제나 정실주의로 정해진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등 보상하는 체제보다 더 생산적일 것이다. 오직 각자의 능력대로만 보상하는 시스템은 공정성을 갖는다. 오로지 실제 성취만으로 사람들이 구별될 뿐, 다른 어떤 기준으로도 차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 위주로 보상하는 사회는 또한 야망이라는 차원에서도 매력적이다. 효율성을 늘리고 차별을 배제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이는 우리 운명이 우리 손 안에 있다는 생각, 우리의 성공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좌우되지 않으며 오직 우리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과 연결된다. 우리는 상황의 희생자가 아니며 우리 운명의 주인이다. 재능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높이 오르고 꿈을 이룰 수 있는 존재다. 이는 인간 능력에 대한 기분 좋은 낙관론이며, '우리는 우리가 가질 자격이 있는 것을 갖는다'는 도덕적으로 뿌듯한 결론을 수반하기도 한다. 나의 성공이 스스로의 덕이며 재능과 노력으로 성취한 것이라면 그 성공을 자랑할 만하다. 내 성취에 따른 보상은 당연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말이다. 따라서 능력주의 사회는 이중으로 고무적이다. 자유를 강력하게 옹호하며, 각자 스스로 필요한 것을 정당하게 얻을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 원칙은 폭압적으로 변할 수 있다. 사회가 그 원칙에 따르지 못할 때뿐만 아니라, 따를 때도 (더더욱) 그렇다. 능력주의 이상의 어두운 면은 가장 매혹적인 약속, 즉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말 안에 숨어 있다. 이 약속은 견디기 힘든 부담을 준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개인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은 바람직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자이자 시민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각자가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 삶에서 주어진 결과'라는 말조차 무한 책임론에 일정한 한계를 도덕적으로 부과한다. '주어진 결과(목, lot)'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운명이나, 우연이나, 신의 섭리 등에 따라 정해져 주어진 것이지,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개인의 능력과 선택을 넘어서 행운 또는 은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로써 우리는 소득과 직업은 능력 문제가 아니라 신의 은총 문제라는 옛 논쟁을 떠올린다. 그런 것들은 우리 스스로 얻는 것들인가, 받는 것들인가?
 

【 우주적 능력주의 】

 
운명이 능력의 반영이라는 관념은 서구 문화의 도덕적 직관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성서 신학은 '자연의 사건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좋은 날씨와 풍성한 수확은 사람들의 선행에 대한 신의 보답이다. 가뭄과 역병은 죄악에 대한 징벌이다. 배가 폭풍을 만나면, 선원 중에 누가 신을 노하게 했는지를 찾으려 한다. 과학의 시대에 사는 우리가 보기에 이런 사고방식은 순진하고 무지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이 사실 그렇게 우리와 동떨어져 있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이야말로 능력주의 사고의 기원이다. 그것은 권선징악의 도덕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나타낸다. 부는 재능과 노력의 상징이며, 가난은 나태의 상징이라는 현대의 친숙한 시각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성서적 관점의 두 가지 특징이 오늘날의 능력주의와의 유사성을 드러낸다. 우선 인간의 능력에 대해 한껏 강조한다. 또한 불운한 사람들에 대해 둘 다 냉혹하다. 다른 점이라면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인간의 능력과 의지에 중점을 두는 반면, 성서적 능력주의는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린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상과 벌을 나눠주는 주체는 신이다. 홍수든 가뭄이든, 아니면 가뭄 끝의 단비든. 하지만 신이 인간의 선에 상을, 악에 벌을 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다는 것은 너무 인간중심적인 시각이다. 역설적으로 신은 우리에게 구속받게 되며, 신이 정당한 이상 우리에게 응분의 대가를 내려야만 하게 된다. 신이 상벌의 주체라 하지만 그는 각자의 실적에 따라 처리할 뿐 임의대로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신 앞에서라도 인간은 자기가 받을 것을 받으며 따라서 자기 운명에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은 불운을 겪는 사람에게 냉혹한 태도를 부추긴다. 그 고통이 심할수록 '오죽 제대로 못했으면 저럴까' 하는 의심이 짙어진다. 성서의 <욥기>를 떠올려 보자. 당당하고 의로운 인물이던 욥은 아들과 딸들이 폭풍우에 희생된 것을 비롯해 말 할 수 없는 고통과 수난을 겪었다. 늘 신께 신실했던 욥은 어째서 그런 고난이 자신에게 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자신이 우주적 도박의 대상이 되었음을, 신이 사탄에게 욥의 신심이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증명하려고 했음을 모르고 있었다). 욥이 잃어버린 가족을 위해 통곡하고 있을 때, 그의 친구들은(과연 친구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뭔가 말도 못할 죄를 지었음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그에게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떠올리라"고 윽박질렀다.
 
이것을 초기적인 능력의 폭정 사례라 볼 수 있겠다. 고난은 곧 죄의 표시라는 가설로 무장한 욥의 친구들은 그의 고통이 뭔가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며, 따라서 욥이야말로 그의 자녀들의 살해자라고 잔혹하게 을러댔다. 비록 욥 자신은 스스로가 무죄임을 알았지만 그 역시 친구들처럼 능력의 신학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는 신께 부르짖었다. 대체 왜 내가, 의로운 사람인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느냐고.
 
마침내 신이 욥에게 말씀하실 때 그는 욥과 그 친구들이 가졌던 능력주의 가설을 부정함으로써, 희생자를 단죄하는 잔인한 논리를 부정한다. 발생하는 모든 일이 사람의 행동에 대한 보상이나 처벌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고 천명한다. 모든 빗방울이 선한 자의 곡식을 축복하려 내리는 것도 아니고, 모든 가뭄이 사악한 자를 징계하려 드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에도 비는 내린다. 신의 창조 또한 오직 인간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우주는 인간중심적 시각으로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크며, 신의 뜻 역시 인간의 이해력을 벗어나 있다.
 
신은 욥의 의로움을 인정한다. 그러나 신의 질서를 인간의 도덕 논리로 이해하려 했던 점에 대해서는 비난한다. 이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나타난 능력주의의 신학에서 급격히 이탈하는 것이다. 자신은 우주적 능력주의의 주재자가 아니라 하면서, 신은 스스로의 무한한 권력을 강조한다. 그리고 욥에게 굴욕 속에서 교훈을 얻으라고 가르친다. 신에 대한 믿음은 창조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이 각 개인의 능력이나 성과에 따라 합당한 상이나 벌을 내리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 구원과 자기 구제 】


■ 능력주의 논쟁은 구원을 논의할 때 다시 기독교에서 등장한다. 신앙이 독실한 사람은 교리를 따르고 선행을 함으로써 구원을 얻어낼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신이 각자의 생활 태도와 상관없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가? 첫 번째가 더 정당해 보인다. 권선징악의 틀에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 신의 전능함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게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며 따라서 받아 마땅한 것이라면 신은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의 능력을 인정해야만 하게 된다. 구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며, 따라서 신의 무한한 힘에는 한계가 생기게 된다.

두 번째는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선물로 보며, 따라서 신의 전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신이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악의 존재 역시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두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견해가 병립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렵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

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나쁜 일을 한 자는 현세 또는 내세에서 신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위반에 대한 징벌이다. 일찍이 이런 해답을 지지했던 사람으로 5세기 영국 수도승 펠라기우스가 있다. 그가 비록 잘 알려진 사람은 아니나 최근의 일부 주석자들은 그가 초기 기독교 신학에서 자유의지와 개인 책임을 내세운 대표적 인물이며, 그야말로 자유주의의 선구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펠라기우스의 생전에 그의 해답은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적어도 그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해답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것은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며 최고의 은사,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갖는 중요성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구원을 스스로 얻어낼 만큼(비록 선행과 계율에 맞는 삶을 살아야겠지만) 자족적이라면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내려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의 은총 앞에서의 겸허함은 스스로의 노력에 대한 자부심으로 바뀌고 만다.

구원은 오직 은총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행동은 능력주의를 다시 불러들였다. 교회의 예식과 절차들(세례, 기도, 미사 참석, 성사 참례 등등)은 그것들이 참여자들에게 일정한 효과를 주지 않는다면 계속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신앙과 종교 계율을 잘 지키고 선행을 한다 해서 신의 총애를 받거나 신에게 점수를 딸 수는 없다는 믿음을 오래 유지하기란 어렵다. 신앙이 외적 행동으로 표현되고 교회의 복잡한 예식들로 전달·강화될 때, 감사와 은총의 신학은 피치 못하게 자부심과 자기 구제의 신학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이것이 적어도 마르틴 루터가 자기 시대의 로마 교회를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비록 이미 그때로부터 11세기도 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능력에 따른 구원론을 비난했지만 말이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능력에 대한 반론에서 피어났다. 당시 가톨릭 교회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저항은 부분적으로는 교회의 일탈에 대한 것이었다. 부자들이 구원을 돈으로 사는(엄격하게 보면 이는 구원을 산다기보다는 참회 기간을 감면받는 일, 다시 말해서 연옥에서 보내야 할 시간을 줄여 주는 일이었지만) 부패한 관행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의 보다 폭넓은 관점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비슷했다. 구원이란 오직 신의 은총일 뿐이며, 선행이든 계율 준수든 신의 마음에 들기 위한 개인의 노력과는 상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천국으로 가기 위해 기도할 뿐이며 그 이상의 일을 할 수는 없다. 루터에게 있어 구원받을 자의 선택은 오로지 주어지는 것, 개인의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성도들과의 교우나 미사 참석, 그 밖의 일들로 신을 설득해서 우리의 구원받을 자격을 인정하도록 하는 일, 그것은 신성모독이라는 것이었다. 루터의 엄격한 은총론은 분명 반反능력주의적이었다. 그것은 선행에 따른 구원의 여지를 없애고,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자유를 일체 부정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청교도들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들이 가져오게 될 치열한 능력주의적 직업(노동)윤리들로 이어졌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막스 베버는 그렇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루터처럼 청교도에 큰 영향을 미친 장 칼뱅은 구원이란 신이 내린 은총의 산물일 뿐이며 인간의 실적이나 자격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누가 구원받고 누가 단죄 받을지는 예정되어 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성례聖禮도 아무런 효험이 없다. 그래도 신자는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은총을 받기 위한 수단이 전혀 아니다. 칼뱅의 예정론 교리는 견디기 힘든 압박감을 주었다. 사후에 가게 될 자리가 이 세상에서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여긴다면, 자신이 구원받게 될지, 저주받게 될지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일 것이다. 그러나 신은 그에 대해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행동을 보고서 누가 구원받았는지 정죄받았는지도 판단할 수 없다. 선택받은 이들은 ‘신의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해 있다.

베버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과연 선택 받았을까 하는 의문은 반드시 교인들의 다른 모든 관심사를 뒤로 돌려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과연 이 은총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떠오른다.” 이 의문의 지속성과 절박성 때문에 칼뱅주의자들은 일종의 직업윤리를 만들어냈다. 모든 사람이 신에게서 직업을 소명으로 받았기에 그 직업에 매진하는 일은 구원의 징표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핵심은 ‘일이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신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돈을 벌어 마음껏 써보려고 일하는 것은 이러한 목적에서의 일탈이며, 일종의 부패로 여겨졌다. 칼뱅주의는 근면과 금욕주의를 결부시켰다. 베버는 열심히 일하되 소비는 되도록 절제하는, 이런 규제된 접근이 부의 축적을 통한 자본주의의 발흥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애초의 종교적 동기가 사라진 뒤에도,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와 금욕주의는 자본주의적인 축적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에 충실해서 보면 이 드라마의 주요 포인트는 능력과 은총 사이의 고조된 긴장에 있다. 평생 묵묵히 힘들게 일한 삶, 그것은 분명 구원의 티켓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장본인이 (이미) 구원받았음을 나타내는 표시는 될 수 있다.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증명한다. 하지만 세속적 행동을 구원의 증표로 여기는 관점에서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는 관점으로 미끄러지는 일을 방지하는 건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심리적으로, 신이 그의 영광을 높여줄 신실한 노력을 일체 외면한다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나의 선행으로 이미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 있음을 추정해도 된다고 권유받는다면, 나의 선행이 나의 구원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추론을 피하기 힘들다. 신학적으로 ‘행함을 통한 구원’이라는 생각, 능력주의적인 생각은 이미 배경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가톨릭에서는 예식과 성례를 잘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유대교에서는 신의 율법을 잘 지키고 시나이 산의 계명(십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소명으로서 직업이라는 칼뱅주의적 관념이 청교도의 직업윤리에 녹아들면서, 그 능력주의적 함의는 더 이상 제어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구원은 힘써 얻는 것이며, 직업은 그 수단이지 단순한 증표가 아니다. 베버는 이렇게 본다. “이는 실질적으로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칼뱅주의자는 때때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 자라고 표현하고, 더 정확하게는 자기 구원의 확신자라고 표현한다.” 일부 루터파는 그런 견해가 “행함을 통한 구원이라는 교리로의 후퇴”를 의미하며 그 교리야말로 루터가 신의 은총에 대적하는 것으로 배척했노라고 비판했다.
 
칼뱅의 예정설과 구원은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통해 반드시 현시된다는 생각과 결합됨으로써, ‘세속적 성공은 구원받은 사람의 훌륭한 증표’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베버는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신의 섭리는 각자 어떤 직업을 갖고 뭐에 힘써야 할지 제시하였다”고 설명한다. 이는 노동 분업에 신성한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경제 질서가 섭리의 작용이라고 이해하려는’ 접근을 지지해준다.

세속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구원 여부를 증명하는 일을 통해 능력주의는 복귀한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세속적인 추구를 금욕적으로 외면함으로써 일종의 ‘영적 귀족주의’를 추구했다. 그러나 칼뱅주의와 함께 기독교적 금욕주의는 “수도원의 문을 박차고 나와, 생활의 장바닥으로 발을 내디뎠다.” 모든 기독교인은 직업을 갖고 세속적 활동에서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도록 요구받았다. “예정설에 뿌리박은 교리를 세움으로써” 칼뱅주의는 “수도사들이 추구하고 있는 세상 밖 영적 귀족주의를 대신하여, 세상 속에서 신의 예정된 성자들로 이루어지는 영적 귀족주의”를 수립했다. 자신들이 선택 받았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 영적 귀족들은 정죄 받게 될 자들을 멸시한다. 여기서 베버는 내가 ‘능력주의적 오만의 초기판’이라 부르는 것을 살짝 제시한다. “선택된 자들과 성스러운 자들에게 주어진 은총을 알고 있다고 믿으면서, 이들은 그 이웃들의 죄에 대해서도 일정한 태도를 지닌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약한 자들’이라는 인식에서 나오는 동정적 이해가 아니다. 신의 적으로써 영원히 정죄 받은 자들에 대한 증오와 혐오다.”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는 자본주의 정신을 생겨나게 할 뿐만이 아니다. 자기 구제와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의 윤리, 즉 능력주의적 사고 방식에 적합한 윤리를 장려한다. 이런 윤리의식은 큰 부를 축적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책임과 함께, 자수성가의 어두운 면이라 볼 수 있는 ‘불안하면서도 치열한 경쟁’을 초래한다. 은총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이 주었던 겸손함. 그것은 이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는 데서 나오는 오만으로 대체된다.

 

과거와 지금의 섭리론

 

루터, 칼뱅, 청교도에게 능력에 관한 논쟁들은 구원과 연관되어 있었다. 신에게 선택된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은 것인가? 아니면 인간 통제 범위 밖에 있는 은총의 선물로서 구원을 얻은 것인가? 한편 지금 우리에게 능력에 관한 논쟁들은 세속적 성공과 연결된다. 성공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한 것인가? 아니면 통제 범위 밖의 요인들이 작용해 성공한 것인가? 얼핏 보면 이 두 가지는 공통점이 별로 없어 보인다. 하나는 종교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적 문제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우리 시대의 능력주의에는 그것이 탄생했을 당시 신학적 논쟁의 딱지가 붙어 있다.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는 은총과 능력, 무력함과 자기 구제 사이의 치열한 변증법에서 시작되었다. 자수성가의 윤리는 감사와 겸손의 윤리를 압도했다. 일과 노력은 칼뱅주의의 예정설과 열띤 구원의 증표 탐색에서 출발해, 독자적으로 중대성을 갖게 되었다.

자수성가론과 능력주의의 승리는 오늘날 세속 위주 경향의 결과라고 여기기 쉽다. 신에 대한 믿음이 퇴보하면서 인간 능력에 대한 신뢰가 힘을 얻었다. 우리가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존재, 자기충족적 존재로 볼수록 우리의 성공에 대해 빚진 느낌이나 감사의 마음을 가질 까닭은 줄어든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공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가 종종 떠올리는 ‘섭리에 대한 믿음’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자유로운 인간 행위자이며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공도 실패도 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은 능력주의의 일면일 뿐이다. ‘성공한 사람은 그럴 만해서 성공했다’는 신념이 공통적으로 중요한 포인트다. 이러한 승리주의(triumphalism)적 측면으로부터 승자들 사이의 오만, 패자들 사이의 굴욕이 나온다. 이는 세속 사회에 남아 있는 섭리론의 도덕적 어휘를 반영한다.

“운 좋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막스 베버는 이렇게 보았다. “이를 넘어서, 그는 자신이 그런 행운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납득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이 ‘그럴 만하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에 비해 ‘그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기를 바란다. 그는 또한 운이 나쁜 사람들도 자신의 당연한 업보일 뿐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능력의 폭정 중 일부는 이러한 충동에서 비롯된다. 오늘날의 세속적 능력주의 질서는 이전의 섭리론 신앙처럼 성공에 도덕의 틀을 씌운다.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권력과 부를 통해 신의 섭리를 불러온 게 아니라 해도(그들은 스스로의 노력과 근로에만 감사할 뿐이다), 성공은 그들의 탁월한 덕성을 반영한다. 부자는 가난한 자보다 부자일 만해서 부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주의의 승리주의적 측면은 일종의 ‘신 없는 섭리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간사에 개입하는 신이 없이도 일정한 섭리가 발동한다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성공했다. 그들의 성공은 그들의 미덕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사고방식은 경제 경쟁에서의 도덕론에서 더욱 고조된다. 이는 승자를 추켜올리고 패자를 깎아내린다. 문화역사학자 잭슨 리어스는 칼뱅주의의 섭리론과 원죄론이 사그라진 뒤에도 섭리론적 사고가 존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칼뱅과 청교도에게 모든 사람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 그 누구도 구원받을 만한 자격은 없고, 구원은 오로지 신의 은총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를 강조하는 신학자들이 스스로를 구원할 인간 능력을 강조했을 때, 성공은 개인의 능력과 섭리적 계획의 일치를 나타내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의 섭리론은 때로는 지지부진하고 때로는 멈추기도 하면서, 그렇지만 확실하게 경제적 현상 유지를 정신적으로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섭리는 암암리에 부의 불평등을 지지했다.

리어스는 미국의 공공 문화를 운의 윤리의식과, 보다 강력한 자수성가의 윤리의식이 벌이는 불공평한 각축장으로 보았다. 운의 윤리는 인간의 이해와 통제력을 벗어나는 삶의 차원을 중시한다. 세상이 반드시 각자의 능력에 맞는 보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인생에는 신비, 비극,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다음과 같은 〈전도서〉의 내용은 이런 윤리의식을 잘 표현한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았다. 빠른 경주자라고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자라고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자라고 음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명철한 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다. 기능을 갖춘 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다. 이는 때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로다.”

반면 자수성가의 윤리는 인간의 선택을 영적 질서의 중심에 놓는다. 이는 신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섭리적 질서에서의 역할을 뒤바꾼다는 뜻이다. 리어스는 자수성가와 자기통제의 윤리가 복음주의 개신교 내부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면서, 결국 그 계열의 지배적 사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은총에 의한 구원’에서 루터가 매도했던 ‘일을 통한 구원’으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18세기 중반까지, 일이란 성사가 아니라 (전통 가톨릭에서처럼) 세속적인 도덕적 행위를 의미했다. 그러나 그런 세속적 노력은 아직도 섭리론적 틀에서 힘을 얻고 있다.

개신교 신앙에 따르면 섭리는 아직도 모든 것을 다스린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계획이 펼쳐지는 과정에 자유롭게 참여하거나 참여하지 않을 수 있다. 신의 목표에 동조자가 될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복음주의적 합리성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섭리와, 전례 없이 유력한 인간의 노력 사이에 균형 잡힌 신앙적 태도를 마련했다.

인간의 노력과 섭리에 따른 성별聖別을 하나로 엮는 일은 능력주의로의 발전에 결정적인 동력을 제공했다. 이는 운과 언약의 윤리를 때려 부수고, 세속적인 성공과 도덕적인 자격을 결합시켰다. 리어스는 이를 도덕적 손실로 보았다. “자기 운명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덜 강조하는 문화는 보다 관대하고 인자할 수 있다.” 운이 예측 불가능한 것임을 더 중시하는 경우, 행운의 소유자들이 ‘내가 만약 불운했더라면?’ 하는 상상을 해보도록 만든다. 그리고 능력주의 신화에 따른 오만방자함을 넘어서, 사람의 팔자는 예측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끔 한다. 리어스는 도덕적, 그리고 시민적 손실을 뚜렷하게 지목한다.


자기 통제의 문화는 기독교적 섭리론을 뽐내며 저속하게 구는 형태로 지속되었고, 이것이 두 세기 동안 미국 도덕성의 근간이 되었다. 비록 이제는 즐겨 쓰는 용어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기술관료적이지만 말이다. 섭리론에서 세속적인 성공에 신성함을 부여하고, 우리가 신의(또는 ‘진화의’) 계획 중 일부일 뿐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인 체제를 운영하는 우리 스스로의 계획 중 일부이기도 하다는 그럴듯한 설명을 하고, 그런 관점을 심지어 국제 분쟁에까지 적용하는 모든 태도에는 오만함이 깃들어 있다.


저마다 가질 만한 것을 갖는다는 섭리론적 관념은 지금의 공적 담론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목소리는 두 종류다. 하나는 오만한 목소리, 또 하나는 징벌의 목소리다. 두 가지 다 우리 스스로 운명을 책임질 것을 강조하며, 성공도 실패도 자기 탓이라고 본다. 2008년 금융위기는 섭리적 오만의 두드러진 예다. 월스트리트 은행가들의 모험적이고 탐욕적인 행동이 세계 경제를 파멸 직전까지 몰고 갔다. 세금을 털어서 막대한 구제금융이 동원되었다. 주택 소유자와 우량기업들까지도 피해 복구에 애를 써야 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은행가들은 얼마 뒤 스스로에게 수백억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했다. 대중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토록 후할 수 있었느냐고 질문받자, 골드만삭스의 CEO였던 로이드 블랭크페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자신과 그의 동료 은행가들을 일컬어) 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섭리적 징벌론은 최근 일부 기독교 보수파에서 막대한 태풍 피해를 비롯한 여러 재난 이후에 들고 나왔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자,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는 그 폭풍이 마디그라* 같은 성적 타락, 집단 성교, 그 밖의 죄업으로 얼룩진 ‘악의 도시’에 대한 신의 응보라고 선언했다.30 2009년 아이티에서 지진으로 20만 명 이상이 숨지자 TV 설교자인 팻 로버트슨은 그 재난이 1804년 프랑스에 맞서 아이티 노예들이 봉기했을 때 악마와 맺은 계약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 Mardi Gras : 본래 가톨릭 교회에서 사육제의 마지막 날을 의미하는데, 회개 기간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마음껏 즐기자는 뜻에서 예부터 화려한 축제와 음주가무 등이 있었다. 최근에는 가톨릭교도가 아닌 사람들도 이때를 이용해 여러 일탈을 벌이는 경우가 일반화됨으로써 ‘난잡한 축제’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9.11 테러가 자행된 며칠 뒤, 제리 폴웰 목사는 로버트슨의 기독교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 테러를 미국의 죄에 대한 신의 응보라고 풀이했다.

낙태 찬성론자들은 이 사건에 대한 부담을 져야만 할 것이다. 신께서는 조롱을 참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4,000만 명의 죄 없는 아기들을 없앰으로써 신을 격분케 하였다. 나는 이교도들과 낙태 찬성론자들, 그리고 여성주의자들,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다른 생활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미국 시민자유연맹ACLU’에서는 하나같이 미국을 세속화하려고 애쓴다. 나는 그들의 얼굴 앞에 손가락을 내밀고 말할 것이다. “당신들이 이 일을 초래했어.”

큰 재난을 신의 징벌로 풀이하는 일은 기독교 섭리론의 전유물은 아니다. 2011년 대지진이 일본을 덮치며 후쿠시마 원전에 사고가 났을 때, 유명한 극우파였던 도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는 이 사태를 “일본이 물질주의에 빠진 데 대한 천벌”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일본 정신을 오랫동안 좀먹어온 이기주의를 씻어 내릴 쓰나미가 필요했습니다.”


부와 건강


최근 수십 년 동안 미국 기독교는 ‘번영의 복음’이라 불리는 떠들썩한 신종 섭리론을 내놓았다. TV 설교자들과 이 나라의 초대형 교회들의 전도사들 일부가 이끌었던 이 섭리론은 신이 믿는 자에게 부와 건강을 내리신다고 했다. 은총을 인간이 감히 주장할 수 없는 신의 선물이라 보는 시각에서 한참 떨어져서, 이 번영의 복음은 인간 능력과 의지를 한껏 강조했다. 이 운동의 배경을 마련한 20세기 초의 전도자인 케니언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여기도록 권했다. “신의 능력은 나의 것이다. 신의 힘도 나의 것이다. 그의 성공은 내 것이니, 나는 승리자다. 나는 정복자다.”

 

번영 복음주의 역사가인 케이트 바울러는 그 가르침이 다음의 구절로 집약된다고 한다. “나는 축복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축복의 증거는 부유하고 건강하다는 사실이다. 미국 최대의 교회인 휴스턴 교회의 유명한 번영 전도사 조엘 오스틴은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우리가 유복한 삶을 살도록 돌아가신 겁니다.” 그의 베스트셀러 저서는 신앙에서 비롯된 축복의 사례를 여럿 들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그가 살고 있는 고급 맨션, 또 그의 비행기 좌석이 비즈니스 클래스로 승격되었을 때의 이야기도 들어 있다. 축복의 복음이란, 부와 건강이 유덕함의 증표라는 능력주의적 신념과는 달리 행운 앞에서의 겸손함을 불러일으킬 것도 같다. 그러나 바울러가 보듯, “축복받은”이란 은사와 보상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표현이다.

이는 순수한 감사의 표현으로 읽힐 수 있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저 스스로는 이렇게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될 만해서 되었다는 뜻도 될 수 있다. “감사하다. 나 자신이여. 이로써 나는 될성부른 나무로 자라났다.” 이야말로 행운이 아니라 고된 노력으로 성공한다는 아메리칸 드림을 믿는 미국 사회에서는 최적의 해석이다.
  
비록 번영 복음을 설파하는 대형 교회에 다니는 미국인만 100만 명에 이르지만, 그것이 고된 노력과 자기 구제에 대한 미국적 믿음에 주는 영향력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타임〉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기독교인의 거의 삼분의 일이 “신께 헌금을 하면 신은 더 많은 돈으로 갚아주신다”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61퍼센트는 “신은 그의 성도들이 물질적으로 번영하기를 바라신다”고 믿었다.  21세기 초, 번영 복음은 근면한 노동을 장려하고 사회적 상승, 적극적 사고 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아메리칸 드림 자체와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번영 복음 운동은 미국인들에게 ‘자수성가한 국민의 나라’라는 자부심에 들어맞는 복음만 준 것이 아니었다. 바울러의 말이다. “그것은 개인 경제활동의 기반인 기본 경제구조의 정당성도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번영은 미덕의 증표라는 믿음 또한 강화했다. 이전의 성공 복음처럼 시장을 신뢰했다. “시장이란 성공과 실패로 보상과 처벌을 구분해준다. 유덕한 사람은 풍족한 보상을 받고, 사악한 자는 끝내 파멸할 것이다.”

 

번영 복음의 매력 중 하나는 그것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이는 성급하면서도 개인에게 힘을 심어주는 관념이다. 신학적으로 이는 구원이 일종의 성취이며 우리 힘으로 얻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에게 충분한 노력과 믿음만 있다면 부와 건강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 매우 능력주의적인 이야기다. 모든 능력주의 윤리처럼, 개인의 책임을 극찬하는 그 개념은 일이 잘되어갈 때는 기꺼워할 만하다. 하지만 반대로 일이 잘못될 때는? 사기를 꺾고 심지어 자책에 시달리게 만든다.

건강 문제를 생각해 보자. 우리 건강이 우리 손에 있다는 말처럼 힘이 솟을 말이 어디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아프다면 기도로 나을 수 있고, 병이란 착하게 살고 신을 사랑하면 걸릴 일이 없다고 한다면? 그러나 이렇게 인간 능력을 드높이 띄워버리면, 그만큼 그림자도 짙어진다. 이런 생각을 가진 상태에서 병이 들기라도 하면 그것은 단지 불운이 아닌 ‘병자의 덕 없음’으로 해석된다. 심지어 죽음조차 정신적 피해를 더한다. 바울러는 이렇게 말한다. “신자가 아프거나 죽거나 하면 수치심이 슬픔과 뒤섞인다.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는데 그들의 믿음에 대한 신뢰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번영 복음적 사고의 거친 면은 건강보험 논쟁에서 드러난다. 트럼프와 공화당 상원의원들이 오바마케어를 반대하고 폐기하려 했을 때, 그 대부분은 그들의 시장친화적인 대안이 경쟁은 늘리고 비용은 줄일것이며 사람들을 기존 방식으로(조건들로) 보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앨라배마 출신의 보수적인 공화당 하원의원인 모 브룩스는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공화당의 계획이 더 건강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하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이는 악덕이 아닌 미덕만을 계산한 것이다. 삶을 잘 살아간 사람에게 응분의 보상을 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더 높은 보험 요건을 가진 사람에게 더 많은 보험료를 부담시키는 보험회사의 시스템은 다만 비용-편익 분석상 타당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정당하다. 환자에게 보험료를 더 받는 것은 ‘좋은 삶(선한 삶)을 산 사람, 건강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일을 한 사람들’의 비용을 경감시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정도만 걸어온 사람이 치솟는 비용을 감당하게 되었다.

 

브룩스의 주장은 청교도에서 번영 복음으로 이어지는 혹독한 능력주의 논리를 재조명하는 것이다. 만약 번영이 구원의 증표라면 고난은 죄의 증표일 것이다. 이런 논리는 꼭 종교하고만 관련되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를 거침없는 의지로 설정하고, 인간이 기본적으로 자기 운명의 책임을 지는 주체라고 보는 모든 윤리 의식에 해당된다. 2009년 오바마케어 논쟁이 한창일 때, 홀푸드Whole Foods 설립자인 존 매키는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건강보험의 정당성에 대해 비판했다. 그의 주장은 종교와는 무관한 자유방임주의 논리에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번영 복음 전도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개인의 책임을 꾸준히 강조하면서 건강을 지키는 일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건강보험의 문제들 대부분은 자체적으로 비롯된 것들이다. 미국인의 삼분의 이가 과체중이며 삼분의 일이 비만인 것이 현재 상황이다.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의 대부분, 가령 심장병, 암, 뇌졸중, 당뇨병, 비만 등에 들어가는 비용이 건보료 지출액의 70퍼센트에 이른다. 이는 또한 적절한 식습관, 운동, 금연, 적정량의 음주를 비롯한 건강한 생활 습관으로 예방될 수 있는 질병이기도 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건강을 해치는 사람들 다수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탓을 해야 한다. 신앙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과학과 의학의 증거들, 예를 들면 채소와 저지방 위주의 식단이 ‘고치려면 거액이 드는 치명적인 질병을 예방하고 종종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려고만 하면 90대까지, 심지어 100세까지 병치레 없이 살 수 있다.” 그가 병자는 병에 걸려도 싸다고 노골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동료 시민들에게 기대려 해서는 안 된다고는 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삶과 건강에 책임을 진다.” 매키에게는 (번영 복음 전도사들이나 마찬가지로) 건강이 곧 미덕의 증표다. 그 미덕이라는 것이 대형 교회에 꼬박꼬박 나가는 것이든 홀푸드의 유기농 식품을 꼬박꼬박 먹는 것이든 말이다.


과연 “하면 된다”가 맞나? 】

 

https://youtu.be/mfOP51vgwy


정치인들이 제대로 먹히지도 않는 공허한 말을 지겹도록 반복할 때는, 그것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는 심증이 가게 마련이다. 바로 사회적 상승 담론이 여기에 들어맞는다. 불평등이 위험수위까지 올라왔을 때 이러한 담론이 가장 구역질나게 들렸음은 우연이 아니다. 가장 부유한 1퍼센트가 전체 인구의 50퍼센트보다 더 많이 벌고 있으며 중위 소득이 40년 동안 줄곧 제자리걸음만 한 상황에서, ‘노력하고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성공한다’는 말이 빈말로 들리지 않을 리 있겠는가.
 
이러한 빈말은 두 종류의 불만을 낳았다. 하나는 체제가 능력주의적 약속을 충족하지 못함에 따라 나타나는 불만으로,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일한 사람도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기 때문에 빚어졌다. 또 다른 불만은 능력주의적 약속이 이미 지켜졌고, 자신들은 볼 장 다 봤다는 절망에서 우러났다. 후자가 더욱 사기를 떨어트리는 불만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뒤처졌으며 그 잘못은 순전히 자신들에게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미국인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 ‘자기 운명은 자기 손에 달려 있다’는 믿음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국제 공공여론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미국인(77퍼센트)이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고 믿는다. 독일인의 경우 그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프랑스와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응답자가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고 대답했다. “앞서가는 삶을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란 질문에, 미국인들 대다수(73퍼센트)가 열심히 일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가 굳건히 버티고 있는 셈이다. 독일에서는 그 절반에 못 미치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성공의 최대 요인으로 꼽았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네 명 가운데 한 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조사에서 으레 그렇듯 응답 성향은 질문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왜 어떤 사람은 부유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가”라는 질문에, 미국인들은 일과 성공에 대해 포괄적인 질문을 했을 때보다는 노력의 중요성을 덜 확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부자가 부자인 까닭은 남보다 열심히 일해서일까, 살다 보니 운이 좋아서일까”라는 질문에서는 미국인의 의견이 반반으로 갈렸다. “가난한 사람은 왜 가난할까”라는 질문에는 다수의 미국인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환경 탓이라고 대답했다. 겨우 열 명 중 세 명이 노력 부족을 가난의 원인으로 들었다. ‘일만 열심히 하면 성공으로 곧장 달려갈 수 있다’는 믿음은 ‘우리가 우리 운명의 주재자이며, 앞날은 스스로의 손에 달려 있다’는 보다 범위가 큰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미국인은 다른 대부분의 국가 국민들보다 인간의 자수성가 능력을 더 많이 믿는다. 과반수의 미국인(57퍼센트)이 “인생 성공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더 많이 좌우된다”는 말에 반대한다. 반면 대부분의 유럽 국가를 포함한 타 국가 국민들 과반수는 성공이 자신의 통제 범위 밖의 변수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고 본다.
 
일과 자기구제에 대한 이런 입장은 연대와 시민의 상호적 책임에 대한 입장에도 영향을 준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성공하리라 믿어도 되고, 실패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게 옳다면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이 공감을 얻기 어렵다. 이것이야말로 능력주의의 혹독한 면이다. 오직 자기 외에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말할 사람이 없다면 최고의 자리에 서는 사람과 최저의 자리에 서는 사람 각자의 사회적 위치가 정당화된다. 자는 부자일 만해서 부자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가장 잘나가는 사회구성원이 자기 이외의 요인, 가령 행운이나 신의 은총이나 공동체의 지원 덕분에 그 자리에 섰다면 그런 사람이 다른 이들의 운명에 힘을 보태줘야 한다는 도덕적 주장은 힘을 얻는다. 우리 모두가 공동 운명체라는 주장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운명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굳건한 미국은 사회민주주의 유럽보다 덜 관대한 복지국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자신의 삶이 자기 통제 밖의 변수에 더 많이 휘둘린다고 생각한다. 노력하고 열심히 일함으로써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면, 정부는 ‘일자리와 기회가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확인만 해주면 그만일 것이다. 미국의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 정치인들은 현재 정책이 기회의 평등 원칙에 부합하느냐에 이견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그런 정책의 목표가 ‘출발점이 어디든 모든 이에게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려는 것’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달리 말해 그들은 사회적 이동성이 불평등의 해답이라고 본다. 따라서 상승에 성공한 사람은 그 결과물을 오롯이 누릴 권리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노력과 근성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미국적 믿음은 더 이상 현실과 맞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수십 년간 미국인들은 자기 자녀들이 자신들보다 경제적으로 나은 삶을 살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1940년대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거의 전부(90퍼센트)는 부모보다 많은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1980년대 생은 겨우 절반이 부모보다 많이 벌어들인다. 사회적 상승에 대한 흔한 믿음에 반해, 가난뱅이가 부자 되기도 훨씬 어렵다. 미국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상류층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거의 없다. 사실 대부분이 중산층조차 되지 못한다. 사회적 상승에 대한 연구에선 보통 소득 수준을 다섯 단계로 구분한다. 그 가운데 가장 하층에서 태어난 사람은 겨우 4~7퍼센트만 최상위층에 도달한다. 그리고 삼분의 일 정도만이 중간층이나 그 이상까지 간다.
 
정확한 숫자는 연구 결과마다 다르지만, 아메리칸 드림에서 찬미 받는 ‘자수성가한 부자’의 삶을 실현하는 미국인은 매우 드물다. 사실 다른 많은 나라들보다 미국에서 사회적 이동성이 떨어지고 있다. 부나 가난의 대물림 현상은 독일, 스페인,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스웨덴, 캐나다,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보다 미국에서 더 자주 일어난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부모의 부가 자녀에게 고스란히 이어지는 일이 거의 절반에 이르지만, 캐나다,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이동성이 가장 크다)에서는 그 절반 정도일 뿐이다. 밝혀진 대로라면 덴마크와 캐나다의 청소년은 미국 청소년에 비해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가 부자가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이런 기준에서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이 아니라 코펜하겐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볼 일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베이징에서도 살아 숨쉰다. 〈뉴욕타임스〉의 최근 기사 하나는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보여주었다. "내기를 건다고 가정해보자. 열여덟 살짜리 소년이 두 명 있다. 한 사람은 중국에, 다른 한 사람은 미국에 살고 있다. 둘 다 가난하며 장래 상황이 나아질 전망도 어둡다. 자, 둘 중 한 소년을 골라보자. 어느 쪽이 더 사회적으로 출세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독자는 누구를 골랐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답은 뻔했다. 어쨌든 “아메리칸 드림”. 미국에서라면 누구든 열심히 일한다면 더 나은 삶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정답은 당황스럽다. 미국보다 중국이 개인의 생활 향상을 훨씬 빨리 성취해 주고 있는 것이다.
 
1980년 이후 중국의 예상을 뒤엎은 경제발전을 생각하면 이런 결론이 그다지 놀랍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국에서는 부자와 빈자 모두 소득 수준을 개선했다. 그 사이에 미국은 소득 수준 개선이 대부분 상류층에 집중되었다. 1인당 국민소득에서는 미국이 아직 중국을 훨씬 앞서고 있지만 오늘날 중국 젊은이들은 그 부모 세대보다 부유하다. 더 놀라운 점은 세계은행에 따르면 중국의 소득 불평등 수준이 미국과 엇비슷하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중국은 이제 미국보다 세대 간 이동성 정도가 높다. 이는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이 중국보다 밑바닥에서 위로 올라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다.
 
내 학생들이 그 사실을 접했을 때 그들은 웅성거렸다. 대부분은 미국 예외주의를 마음 속 깊이 믿고 있었으며, 미국이야말로 열심히 일한 사람이 앞서갈 수 있는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상향성에 대한 믿음이 미국이 불평등에 대해 줄곧 해온 대답이었다. ‘그래. 미국이 다른 민주국가들보다 소득 불평등이 클지도 몰라. 하지만 유럽처럼 계층 이동이 어려운 사회보다 우리나라에서는 불평등의 의미가 덜하지. 누구든 태어날 때의 계층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으니 말이야’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이 다른 많은 나라보다 더 불평등할 뿐 아니라 이동성도 덜하다는 사실을 알면 충격과 당황에 빠지게 된다.
 
어떤 사람은 사회적 이동성 지표를 애써 부정하며 “나 때는 말이야. 힘써 노력만 하면…”이라는 식으로 개인 경험에 집착한다. 텍사스 출신의 어느 보수적인 대학생은 자기 경험상 노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제가 다닌 고등학교에서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죠. 학업에 충실하고 성적이 좋으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일자리를 얻어요. 그렇지 않으면 유전에서 일하게 되고요.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 말예요.” 다른 학생들은 자기들도 고등학교 때 열심히 노력했다고 회상하면서도, 다른 뒷받침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음도 인정했다.
 
내 학생들 중 일부는 이렇게 주장했다. 비록 아메리칸 드림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 해도 그 사실을 널리 퍼뜨리지 말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이러한 신화를 보호함으로써 사람들이 계속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 상승할 수 있다’고 믿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메리칸 드림은 플라톤이 말한 “고귀한 거짓말”(Noble Lie :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신들이 간통을 저지르거나 실수를 했다는 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아동들에게 학습하면 신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질 것이므로 그런 내용을 교육에서 삭제하고 가르쳐야 하며, 이를 “고귀한 거짓말”이라고 불렀다)이 될 것이다. 즉 사실은 아니지만 시민들이 불평등을 정당하다고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사회의 조화를 유지한다는 말이다.
 
플라톤의 경우, ‘신이 각기 다른 금속으로 영혼을 만들어 사람을 창조했다’는 신화는 철인왕이 이끄는 수호자 계급이 나라를 다스릴 때 계급 구분을 정당화하기에 적당했다. 현대 미국의 경우, ‘아무리 부자와 빈자 사이에 큰 격차가 있더라도 노력만 한다면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얼마든지 올라갈 수 있다’가 곧 그런 신화가 되는 셈이다. 내 학생들만 사회적 상승의 전망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니다. 연구자들이 미국과 유럽의 시민들에게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될 가능성이 각자의 나라에서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미국과 유럽의 응답자들은 대체로 현실과 다른 대답을 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정반대로 틀렸다는 점이다. 미국인들은 자국의 사회적 상승 가능성을 과대평가했고, 유럽인들은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기술관료의 지배냐 귀족의 지배냐


한 사회는 귀족정이며 소득과 재산은 어떤 집에서 태어나느냐에 달려 있고 고스란히 대물림된다고 가정하자.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유하며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가난을 면치 못한다. 그들의 자녀도, 자녀의 자녀도 똑같은 운명이다. 그리고 다른 한 사회는 능력주의 사회다. 재산과 소득의 불평등은 세습 특권에 따른 것이 아니고, 각자가 노력과 재능에 따라 얻은 결과물이다.

이 정보를 알면 아마도 두 번째 사회가 첫 번째보다 낫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출생에 따라 계급을 매기는 귀족정은 부정의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리라. 반면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각자 재능과 창의력으로 스스로의 조건을 낫게 만들 수 있다. 이는 매우 유력한 옹호론이다. 물론 능력주의 아래서도 불평등은 있다. 정확히 말해서 사람마다 재능과 야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보다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불평등은 출생 조건보다 각자의 능력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평등 상황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를 바랄 수 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조차 적어도 일부 최상위층은 ‘남다른 출발점에서의 유리함(사랑과 지지를 아끼지 않으며 아마도 부유한 가족, 헌신적인 교사와 훌륭한 학교 등등)’ 덕을 보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가 정의롭다고 판단하기 전에, 이 회의주의자들은 ‘모든 아이들에게 그 출신 가정과 무관한 교육, 문화적 기회를 최대한 보장하는 정책’이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과연 무엇이 그 사회를 정의롭게 하는가를 생각해 보는 하나의 방법이 있다. 자신이 부잣집에서 자라날지 가난한 집에서 자라날지 모른다는 전제 하에 어떤 사회를 선택하고 싶은가 따져보는 것이다. 이 기준으로는 대부분의 사람이 능력주의 사회야말로 귀족제 사회보다 참된 평등사회라고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제쳐 두고, 두 불평등 사회의 또 다른 실태부터 살펴보자. 처음부터 내가 최상위층이 될지 최하위층이 될지 알고 있다고 하자. 자신이 부자라면, 또는 가난한 사람이라면 둘 중 어느 사회에서 살고 싶겠는가?

잊지 말자. 두 나라의 불평등 정도는 똑같이 매우 높다. 두 나라 모두 최상위 1퍼센트에 속한다면 연간 평균 소득은 130만 달러에 이른다. 최하위 20퍼센트에 속한다면 연소득이 겨우 5,400달러일 뿐이다. 자, 이제 이런 결론에 이를지 모르겠다.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두 사회 모두에서 극심하므로, 어느 계층에 속할지를 미리 안다고 해서 어느 사회를 택할지 고르는 데 별 도움이 되진 않을 거라고.

그러나 소득과 재산만이 우리가 고려할 전부는 아니다. 내가 부자라고 할 때, 나는 나의 부와 특권을 내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사회를 선호할 수 있다. 그러면 귀족제 사회가 정답일 것이다. 내가 가난하다면 나 자신 또는 내 자손들이 사회적 상승의 기회를 갖는 사회를 선호할 것이다. 따라서 능력주의 사회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살펴보면 두 경우 모두 정반대로 생각할 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부 또는 가난은 각각의 사회적 지위와 자부심을 상징한다는 점 말이다. 귀족정 체제에서 상류계급 집안에 태어났다면 자신의 특권이 큰 행운임을(스스로의 성취가 아니라) 인식할 것이다. 한편 능력주의가 허용하는 최정상까지 스스로의 노력과 재능으로 치고 올라갔다면, 자신의 성공은 물려받은 게 아니라 쟁취한 것임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귀족적 특권과 달리 능력주의적 성공은 스스로의 자리를 스스로 얻었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이런 관점에서, 부자가 된다면 귀족제에서보다 능력주의 체제에서가 더 낫다. 비슷한 이유로 능력주의 체제에서 가난하다면 맥이 빠지는 일이다. 만일 봉건사회에서 농노로 태어났다면 힘들게 살아야 하겠지만, 그런 낮은 지위가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부담은 지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죽도록 일해서 받들어야 할 지주가 자신보다 더 유능하고 탁월해서 그 지위를 얻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자신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볼 것이다.

이와 달리 능력주의 사회의 밑바닥에 놓인 상황을 생각해보자. 자신이 겪고 있는 불우함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스스로의 탓이라고, 위로 올라가기 위한 재능과 야심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회적 상승을 허용하는 사회, 하물며 그런 상승을 찬양하는 사회에 산다는 것은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혹독한 판결을 내리기 마련이다.
 

【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 】


■ ‘능력주의’라는 용어는 그로 인한 부정적 상황을 염려하는 가운데 만들어졌다. 마이클 영은 노동당과 뜻이 통하던 영국 사회학자였다. 1958년에 그는 《능력주의의 등장》이라는 책을 썼다. 마이클 영에게 능력주의란 결코 이상이 아닌 디스토피아였다. 그는 영국 계급체계가 무너지고 있던 때 그 책을 썼는데, 바야흐로 출생 신분보다는 능력에 바탕을 둔 교육과 직업 선택이 제도화되던 시점이었다. 이는 좋은 일이었다. 노동계급 출신 아동이 자기 재능을 계발하여 숙명과도 같은 육체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영은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 또한 엿보았다. 마치 자신이 2033년에 사는 역사가로서 과거를 돌이켜보듯 쓴 저술에서, 그는 능력주의 사회의 도덕 논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살던 전후 영국에서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한 논리였다. 영은 사라져 가고 있던 계급 중심 질서를 옹호하지는 않으며, 그 도덕적 자의성과 명백한 불공정성은 그것이 사라지는 게 바람직함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상류계급의 자만심을 부추기는 한편 노동계급이 스스로의 종속적 상태를 개인적 실패로 보지 않도록 해준다고 했다. “그 부모의 부와 영향력으로 저절로 상류층까지 올라가는 사람은 스스로 확신에 차서 ‘나는 이 일에 최적격인 사람이야’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 자리를 공개경쟁으로 따낸 게 아님을 알고 있고, 만약 그가 정직하다면 자신의 하급자 가운데 그와 동등하거나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여럿임을 알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상류계급 사람은 아주 무감각해지지 않는 이상, 적어도 살면서 가끔씩은 자기 부대의 사병, 저택의 집사나 파출부, 택시나 버스 운전사, 객차나 지방 술집에서 볼 수 있는 주름살 많은 얼굴에 눈빛이 매서운 일꾼 등 그런 보잘것없는 지위의 사람들이 적어도 자신 못지않은 지성, 위트, 지혜를 갖추고 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비록 일부 ‘상류계급 사람’이 자신은 그런 위치에 걸맞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더라도 그의 아랫사람들은 그런 환상을 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상위계층 사람들은 많이 알아서가 아니라 누구를 아는지, 누가 부모인지에 따라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 시스템에 부정이 있다는 걸 알면 노동계급은 그것에 정치적으로 도전할 힘이 생긴다(그것이 노동당 수립의 밑천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건 계급 체제의 자의성이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낮은 사회적 지위를 본인들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지 않게 해준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자, 나는 막노동자야. 그런데 내가 왜 막노동자지? 다른 일에는 맞지 않은가? 물론 아니야.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줄 적당한 기회가 없었다고. 의사? 양조업자? 목사? 나는 뭐든지 될 수 있었어. 그런데 기회가 전혀 없었지. 그래서 지금 나는 막노동자야. 하지만 내가 밑바닥 인생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는 절대 생각 안 해.” 마이클 영은 누군가의 사회적 지위가 우연한 이유로 정해짐을 성찰하는 것이 꽤 득이 된다고 보았다. 덕분에 승자와 패자 모두 자기 인생은 자업자득이라는 인식을 하지 않는다. 덕분에 현행 계급질서를 마냥 옹호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는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역설적인 효과를 준다. 직업과 기회가 능력에 따라 배분되더라도 불평등은 줄어들지 않는다. 불평등 구조를 능력에 따라 재구축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재구축은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자리를 가졌다는 생각을 굳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를 더 벌려놓는다.

이제 능력에 따라 계급이 분류된 사람들에게 계급 간 격차는 필연적으로 더 넓어진다. 상류계급은 더 이상 자기 의심이나 자기 비판에 시달리지 않는다. 오늘날 잘나가는 사람들은 그 성공이 단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보상이요, 노력에 따른 대가라고만 여긴다. 그리고 누구도 그 성공에 대해 가타부타할 수 없다고 본다. 그들은 상류계급에 속할 만하니까 속해 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시작할 때부터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뿐 아니라, 타고난 재능을 일류 교육으로 갈고 닦을 수 있었음도 알고 있다.
  
 마이클 영이 엘리트의 능력주의적 오만함만을 예견한 건 아니다. 그는 그런 엘리트가 기술관료적 전문가와 친화적임을, 그들이 그럴듯한 학위가 없는 사람을 내려다볼 것임을, 그리고 이런 태도가 공적 담론에 미칠 악영향까지 내다보았다. “새로 등장하는 엘리트는 그 누구보다도 우리 기술문명의 완전함과 계속 복잡해지는 성향을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과학에 숙련되어 있다. 이 땅을 물려받은 자들은 과학자들이다.” 그들의 우월한 지성과 교육 수준 때문에 비대졸자와는 토론을 벌일 이유도 없고 그럴 일도 없다. 그들이 어찌 하층계급과 쌍방 대화를 벌일 수 있겠는가. 그들 엘리트는 다른, 더 풍부한, 더 정확한 언어를 쓰는 종족인데? 오늘날 엘리트는 그들보다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의 사람들이 다른 두 가지 중요한 가치에 있어서도 열등함을 알고 있다. 바로 ‘지성’과 ‘교육’이다. 이는 21세기에 더욱 확고부동한 가치체계로서, 가진 자들에겐 자부심의 원천이 된다.
 
영은 이렇게 관찰한다(잊지 말아야 할 것이 그는 2033년에 살면서 ‘관찰’하듯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 특유의 문제 중 하나는, 일부 능력주의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중요성에 취한 나머지 그들이 다스리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잊은 것이다.” 또 그는 신랄한 투로 덧붙였다. “일부 능력주의자들의 경우 얼마나 안하무인인지, 낮은 지위의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조롱하곤 한다.”(힐러리 클린턴이 2016년 유세 때 도널드 트럼프의 지지자들을 두고 “한심한 족속들”이라고 말했던 걸 떠올려보자) 엘리트에 대한 분노는, 능력주의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유발하는 자격지심과 합쳐진다. 오늘날 모든 이들은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자신에게 모든 기회가 주어져 있음을 안다. 기회가 없었던 과거와 달리 자신이 낮은 지위에 매여 있지도 않은데, 그럼에도 자신은 실제로 낮은 지위라는 걸 생각하면 어떨까?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하층민이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근거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이클 영은 이러한 오만과 분노의 독소가 정치적 반동의 연료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2034년에는 저학력 계급이 능력주의 엘리트에 맞서 포퓰리즘 폭동을 일으킬 거라고 예측하며 자신의 디스토피아 이야기를 끝맺는다.

 

능력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내가 앞서 사례로 든 두 개의 사회는 순전히 가설에 따른 것만은 아니다. 거기 묘사한 소득 불평등은 오늘날 미국의 만연한 현실을 그대로 갖다 쓴 것이다. 대부분 이런 불평등에 대한 옹호(옹호라는 게 있기는 하다면)는 능력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아무도 “부자는 부잣집에서 태어나니까 부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불평등 비판론자는 “상속세를 없앤 자들은 은연중 세습 특권을 공인한 것”이라고 불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공공연하게 세습 특권을 옹호하지 않으며, 재능에 따른 경력 쌓기라는 원칙에 논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논쟁은 기회 평등이라는 원칙에서 출발하여 일자리, 교육, 공직 등에 대한 접근 기회가 어떤가를 놓고 벌어진다. 우리가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는 건 대부분 그 원칙 자체에 대한 것보다 원칙의 실현을 위한 방법 쪽이다. 예를 들어 고용이나 대학 입학에 있어서 소수집단 우대정책의 비판자들은 그런 정책이 기회의 평등과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능력 이외의 것으로 지원자들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소수집단 우대정책의 옹호자들은 그런 정책이야말로 차별이나 불이익을 겪고 있는 집단 구성원에 실질적인 기회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적어도 원칙 수준에서, 그리고 정치 언어 차원에서 능력주의는 오늘날 패권을 쥐고 있다. 세계 전역의 민주국가에서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책에 대해, ‘모든 시민이 그 인종, 성별, 계층 등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하며 그 노력과 재능이 허용하는 한 상승할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능력주의에 대해 불평하는 건 보통 그 이상에 대한 게 아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불평이다. 부유하고 유력한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들의 특권을 영구화하고, 전문직업인 계급은 자신들의 유리함을 자녀에게 물려줄 방법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능력주의를 세습 귀족제로 탈바꿈시킨다. 대학들은 능력에 따라 학생을 선발한다고 하면서 부자와 인맥 좋은 사람들의 자녀를 유리하게 만들어준다. 이런 불평들에 따르면, 능력주의는 신화이며 아직 실현되지 못한 공허한 약속이다.

이 불평은 분명 옳다. 하지만 문제는 좀 더 깊은 곳에 있지 않을까? 만약 능력주의의 현실적 문제들이 그 이상을 이루지 못한 결과가 아니라, 이상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라면? 사회적 상승 담론이 더 이상 고무적이지 않다고 할 때, 단지 사회적 이동성의 정체 때문이라기보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사람들이 성공의 사다리 위로 발을 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경쟁적 능력주의 아래서는 시민권과 자유가 빠진 공허한 정치 프로젝트에 불과하기 때문일까? 이처럼 문제를 더 깊이 살펴보려면 도덕, 그리고 정치 프로젝트로서 능력주의에 대한 두 가지 반론을 검토해야 한다. 하나는 정의에 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공과 실패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반론은 설령 능력주의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해도, 그리하여 각자의 직업과 보수가 노력과 재능에 완전히 비례한다고 해도 그게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두 번째 반론은 만약 능력주의가 공정하다 해도 과연 그것이 좋은 사회일지 의문을 제기하는데,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과 불안을 자아낼 것이며 패자에게는 분노를 자아낼 것이기 때문이다어느 태도든 정신적 번영에는 해로우며 공동선 개념에는 치명적일 것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철학적 반론은 주로 첫 번째에 집중된다. 오늘날의 철학자들 대부분은 사회가 각자의 몫에 걸맞도록 직업과 보수를 배분한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이러한 관점은 “철학자들의 생각은 일반인들의 생각과 잘 안 맞는다”는 말이 나오게끔 하는 이유가 된다. 따라서 ‘철학자가 옳은가? 일반인이 옳은가?’를 따져볼 만하다. 비록 정의에 관한 첫 번째 반론이 철학자 집단에서는 더 친숙하다 해도, 오만과 굴욕에 대한 두 번째 반론이 우리의 현재 정치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더 도움이 된다. 능력주의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스트의 저항은 공정성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적 명망 때문이기도 하다. 이 저항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활성화한 슬픔과 분노를 제대로 보고 따질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정당한가, 잘못되었는가? 슬픔과 분노가 정당하다고 한다면, 이를 해소하기 위해 어찌해야 하는가?


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어느 순간, 성공에 대한 모든 불공정한 장애물을 제거했다고 상상해 보자. 그래서 별 볼일 없는 배경을 가진 사람까지 포함해 모두가 특권층 자녀와 공평하게 겨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해보자. “우리는 원칙적으로 모든 시민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 성공할 수 있도록 기회의 평등을 이룩했노라”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해보자. 물론 그런 사회는 이룩하기 어렵다. 차별 극복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가족 제도는 모든 개인에게 평등한 기회를 준다는 계획을 이루기 어렵게 만든다. 부유한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유리함을 차단하기란 쉽지 않다. 부의 대물림만이 아니다. 그 경우라면 강력한 세금이 해답이 될 수 있겠지만, 내가 우려하는 것은 성실하고 양심적인 부모가 일상적으로 자녀에게 주는 도움이다. 최선을 다하더라도, 가장 포괄적인 교육체제 하에서라도 가난한 집 아이가 풍부한 관심, 자원, 인맥을 갖춘 집안의 자녀와 평등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해졌다고 치자. 모든 아이에게 학교에서, 작업장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경쟁하는 데 공평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치자. 그러면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진 셈일까?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요, 물론이죠. 그거야말로 아메리칸 드림 아닌가요? 농장 일꾼의 아이든 무일푼의 이민자의 아이든 자라서 CEO가 될 수 있는 열린 사회, 이동성이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게요!” 그리고 이러한 꿈이라면 미국인에게는 특별히 유혹적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민주사회에서도 환영받을 꿈임에 틀림없다. 사회적 이동성이 완벽한 사회는 두 가지 점에서 이상적이다. 첫째, ‘자유’의 아이디어가 일정하게 충족된다. 우리 운명은 태어난 환경에 속박되지 않으며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둘째, 우리가 성취한 것은 우리가 얻을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희망을 준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선택과 재능에 따라 뻗어갈 수 있다면, 성공한 사람은 성공할 만하니까 성공했다고 말하는 게 공정하리라.

그러나 그 강력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비록 완벽하게 실현된 능력주의라 해도 정의로운 사회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먼저,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능력주의는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벌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단지 부자의 자식과 빈자의 자식이 장기적으로, 능력에 근거하여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볼 뿐이다. 오르거나 떨어지거나 모두 그들의 노력과 재능의 소관이다. 그 누구도 편견이나 특권에 따라 억지로 아래로 떨어지거나 위로 올려질 수 없어야 한다.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건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다리의 단과 단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이는 그 자체로는 능력주의의 반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다. ‘능력주의적 경쟁에서 비롯된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능력주의 옹호론자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모두가 공평한 조건에서 경쟁한다면 그 결과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에서도 승자와 패자는 나온다. 문제는 모두가 같은 지점에서 경주를 시작하느냐 그리고 훈련, 교육, 영양 등등에 똑같이 접할 수 있느냐다. 그렇다면 경쟁의 승자는 보상받을 만하다. 누군가가 다른 이보다 빨리 달렸다고 부정의하다고 볼 수는 없다.


재능은 자신만의 것인가?


이 주장의 타당성은 ‘재능의 도덕적 지위’에 달려 있다. 요즘 공론장에서 유독 눈에 띄는 사회적 상승 담론을 돌이켜 보자. 정치인들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배경의 사람이라도 자기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 상승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체 왜 그렇게 해야 할까? 우리의 재능이 우리 운명을 결정해야 하며, 따라서 그에 따른 보상은 당연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 가정에 의문을 제기할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내가 이런 저런 재능을 갖게 된 것은 내 노력이 아니라 행운의 결과다. 그리고 행운에 따른 혜택(또는 부담)은 내게 당연히 보장된다고 할 수 없다. 능력주의는 내가 부잣집에 태어났다고 해서 혜택을 누릴 당연한 자격은 없다고 한다. 그러면 다른 종류의 행운, 가령 특별한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거나 하는 것은 다르게 보아야 하는가? 내가 만약 복권을 사서 100만 달러에 당첨되었다면, 나는 그 행운에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노다지를 얻었다고 해서 그것이 내 능력의 성과라고 주장한다면 어리석게 들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복권을 샀는데 꽝이었다면, 나는 실망하겠지만 내가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을 놓쳤다며 불평하지는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 내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것 역시 우연이며, 내 능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또한 행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르브론 제임스는 매우 인기 있는 스포츠인 농구를 하며 수백만 달러를 벌었다. 탁월한 운동 재능을 가진 것 말고도, 르브론은 그 재능을 가치 있게 여기고 보상해 주는 사회에서 산다는 행운을 누린다. 그가 잘할 수 있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 살고 있음은 그가 노력한 결과가 아니다. 가령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처럼, 농구선수가 아닌 프레스코 화가가 각광을 받던 사회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우리 사회가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는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이라면 어떤가. 팔씨름 세계 챔피언은 르브론의 농구 능력만큼 귀한 재능을 팔씨름이란 분야에서 보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가 상대의 팔을 테이블에 내리꽂는 걸 보고자 돈을 내려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능력주의 신념의 매력 대부분은 ‘우리 성공은 우리 몫’이라는 생각(적어도 적절한 조건에서는)으로 이뤄져 있다. 경제판이 평평한 운동장이며 특권이나 편견에 영향 받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운명에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 능력에 따라 성공하거나 실패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을 받는다. 이것은 해방을 약속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자수성가하는 인간, 운명의 설계자, 삶의 주인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기 때문이다. 또한 도덕적으로도 만족스러울 듯하다. ‘각자에게 그 몫을 준다’는 고전적인 정의에 경제가 응답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재능이 노력의 결과가 아님을 인식하면 이러한 자수성가의 그림이 복잡해진다. 그것은 편견과 특권을 극복하는 것만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에 충분하다는 능력주의 신념에 회의를 가져온다. 우리 재능과 천분이 누군가에게 빚진 것이라면(유전이든, 우연의 결과든, 신의 선물이든), 우리가 거기서 비롯된 혜택을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 하는 것은 실수이자 자만일 것이다.


노력이 가치를 창출하는가? 】
 

https://youtu.be/TEuqK1S0llc?si=eTmcdNhQx1eL_8cI

 

■ 능력주의의 옹호자들은 노력과 수고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고 답할 것이다. 그들은 고된 일을 해서 성공한 사람은 그 성공의 대가를 누릴 자격이 있고, 그 성실함에 대한 찬사를 누려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진실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노력은 중요하다. 그리고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지 않고 성공할 수는 없다.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음악가라도 오랜 시간 연습을 해야 카네기 홀에서 연주할 만큼 훌륭해질 수 있다. 가장 천부적인 운동선수라도 몇 달 동안 고된 훈련을 해야 올림픽 팀에 낄 수 있다.
 
그렇지만 비록 노력이 그만큼 중요하더라도, 노력만 가지고 성공하기란 드문 일이다.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거나 NBA 농구 스타가 되려면 고된 훈련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르브론만큼 열심히 연습하는 농구선수는 많다. 그러나 코트에서 그와 같은 기량을 보이는 선수는 많지 않다. 내가 밤낮으로 수영 연습을 한들 마이클 펠프스보다 빨리 헤엄칠 수는 없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주자로 여겨지는 육상 금메달리스트 우사인 볼트는 훈련 파트너인 요한 블레이크(역시 천부적인 육상선수)가 자신보다 훨씬 열심히 훈련한다고 밝혔다. 노력은 다가 아니다.

능력주의 옹호자들도 물론 이를 알고 있다. 그들은 열심히 훈련하는 운동선수가 누구나 금메달을 딸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가장 성실한 과학자가 노벨상을 받아야 한다고도, 가장 많이 노력한 노동자가 가장 많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성과가 중요하다. 그들은 성공이란 재능과 노력의 혼합물이며, 두 가지는 쉽게 분리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성공은 성공을 낳으며,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사회가 보상을 주기 위한 동기 부여는 매우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능력주의의 주장은 노력의 효과성에 대한 사회학적 주장을 위주로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인간 능력과 자유에 대한 도덕론을 앞세운다. 능력주의가 노력과 수고에 대해 강조하는 건 ‘적절한 조건에서는 우리 스스로 성공에 책임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롭다’는 생각을 뒷받침한다. 또한 ‘경쟁이 정말 공정하다면 성공은 미덕과 연결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일하고 규칙을 지켜 경쟁하는 사람은 받을 자격이 있는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공이 (스포츠에서든 인생에서든)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라 믿고 싶으며,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천부적 재능과 유리한 배경의 문제는 능력주의 신념의 소유자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그것은 노력만으로 칭찬과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신념에 의혹을 제기한다. 이렇듯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는 노력과 수고의 도덕적 중요성을 한껏 강조한다. 이러한 왜곡은 종종 올림픽 TV 보도에서 접할 수 있다. 그런 보도를 보면 해당 운동선수가 이룬 스포츠상의 위업은 별로 다루지 않는다. 대신 그 선수가 극복해야 했던 어려움에 대한 눈물 빼는 이야기, 그가 뛰어넘은 장애물, 부상이나 어려운 유년기, 고국의 정치적 혼란 등의 악조건을 극복한 성공담 등등을 한껏 늘어놓는다.
 
이는 압도적 다수(77퍼센트)의 미국인이 현실에 펼쳐진 사회적 상승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조사 결과에서도 나타난다. 나 스스로도 나의 하버드 대학생들에게서 그런 과장된 인식을 본다. 그들은 자신들의 뛰어난 재능과 (대개의 경우) 유복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자신은 노력과 수고 덕분에 하버드에 입학했다고 입을 모은다. 능력주의의 이상이 재능의 우연성을 외면함으로써, 또한 노력의 중요성을 과장함으로써 도덕적 흠을 갖는다면 과연 다른 어떤 정의 개념이 대안일 수 있는지를 따져볼 때다. 그리고 그런 개념에서는 어떤 식으로 자유와 자격 문제에 접근하는가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 시장 가치냐 도덕적 가치냐 】

 

 ■ 시장 성과에 따라 도덕적 자격이 갖춰진다는 생각에 대한 아마도 가장 파괴적인 비판은 1920년대 신고전파 경제학의 대부 중 하나인 프랭크 나이트가 내놓았다. 뉴딜정책의 비판자였으며 시카고대 교수였던 나이트(그의 학생들 중에는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선도적 자유지상주의 경제학자들이 여럿 있었다)는 시장이 능력을 보상한다는 관념에 맹비난을 퍼부었다. “생산적인 기여가 보상 자격의 윤리적 기준이 된다는, 널리 통용되는 가설이 있다. 그렇지만 이를 따져 보면 생산적인 기여는 윤리적 중요성과 상관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음을 알게 된다.”

나이트는 도덕적 자격과 시장 성과를 연결 짓는 데 두 가지 반론을 제기한다. 하나는 하이에크와 롤스처럼 재능과 관련된 반론인데, 사실 그 두 사람은 나이트를 인용하며 각자의 반론을 폈다. 내가 시장 수요에 부응할 수 있게 해주는 재능을 갖는 일은 가치 있는 재산을 물려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내가 어찌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수요가 있는 서비스를 수행할 능력을 갖는 일이 사회적 배분 과정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할 윤리적 근거가 된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런 능력이 양심적인 노력의 결과 획득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더욱이 나의 재능으로 얼마만큼의 소득을 얻을 수 있느냐는 얼마나 많은 타인들이 그런 재능을 가졌느냐에 좌우된다. 어쩌다 보니 희귀한 재능이지만 높이 평가되는 재능의 소유자가 되었다면 내 소득은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그 사실에 어떤 기여를 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능력이며, 가치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나이트의 두 번째 반론은 더 의미심장하다. 하이에크가 당연시했던 가정을 문제 삼고 있다. ‘시장 가치와 사회적 기여도를 등치시킬 수 있는가’이다. 나이트의 지적대로 시장 수요에 부응하는 일이 반드시 사회에 가치 있는 기여를 하는 걸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시장 수요에 부응한다는 건 단지 사람들이 우연히 갖게 된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켜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욕구 충족이 윤리적 중요성을 갖느냐는 확실히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러한 문제의 해답은 경제 분석으로 마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재능 문제를 제쳐두고라도, 사람들이 소비자의 선호에 부응해서 벌어들인 돈이 능력이나 도덕적 자격을 반영한다고 보면 잘못이다. 그 윤리적 중요성은 경제 모델로는 설명 불가능한 도덕적 고려에 좌우되는 것이다.
 
우리는 욕구 충족을 가치의 최종 결정인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욕구를 최종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취향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말이 있지만, 오히려 취향에 대해서야말로 그 어느 것보다 갑론을박해야 할 것이다. 가치를 평가할 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우리의 욕구 자체를 평가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장 골치 아픈 욕구는 ‘올바른’ 유형의 욕구만 가져야 한다는 욕망이다.
 
나이트의 통찰은 하이에크가 억지로 배합해버린 두 개념을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바로 시장에 의해 계량되는 경제적 기여의 가치와, 그 실제 가치라는 개념들이다. 미국 TV 시리즈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에 나온 고등학교 화학교사를 생각해보자. 그는 자기 전문지식을 살려 인기가 아주 많은(그러나 불법인) 메스암페타민 약물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약물은 순도가 아주 높아서 마약 시장에 내놓으면 수백만 달러를 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소득은 그가 교사로서 벌 수 있는 소득을 훨씬 뛰어넘는다. 하지만 그가 교사로서 기여하는 것의 가치가 마약 딜러로 기여하는 가치보다 훨씬 크다는 점에는 대부분이 동의할 것이다. 이것은 ‘시장의 불완전성 또는 마약 보급에 대한 법적 규제 때문에 공급이 항상 모자라기에 수익이 높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등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비록 매스암페타민이 합법이라 해도, 유능한 화학자가 학생을 가르치는 일보다 그걸 제조하는 일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해도 그것은 마약업자의 기여를 교사의 기여보다 높게 쳐줄 이유는 못 된다.
 
카지노 업계의 대부인 억만장자 셸던 에이들슨의 경우를 보자. 그는 세계 최고의 부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간호사나 의사보다 수천 배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카지노 시장과 보건 시장이 모두 완전경쟁 시장이라고 할지라도, 그 시장 가치가 그들의 사회 기여도를 나타내는 진실한 척도라고 볼 까닭은 없다. 그들이 소비자 수요에 얼마나 부응하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의 도덕적 가치에 기여도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는 일은 슬롯머신을 즐기고 싶어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일보다 더 큰 도덕적 중요성을 갖는다.

더 나아가 나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경제 시스템이 보상하는 욕구는 대체로 그 시스템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경제 질서는 그 이전에 존재하는 수요를 단순히 충족시키지 않는다. “그 활동은 욕구 자체의 구성, 극적인 변형, 또는 순전한 창조에까지 미친다.” 절대로 ‘특정 시간에 존재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준의 효율성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려는 나이트가 ‘완전경쟁 시장에서는 각자가 자기 노동의 한계생산물에 따라 도덕적 자격을 얻는다’는 맨큐의 주장을 거부하도록 만든다. 나이트는 그런 주장을 “경제학이 변명할 때 쓰는, 익숙한 윤리적 주장”이라고 비하한다.

비록 나이트가 야심찬 사회개혁 계획에 회의적이며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의 대부로 기억되긴 하지만, 그는 시장 가격이 도덕적 자격이나 윤리적 가치의 기준이 된다는 생각에는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생산물이나 기여는 항상 그 가격으로 가치가 측정된다. 윤리적 가치나 인간 생활에서의 중요성 등과는 별 관계가 없다. 어떤 생산물의 금전적 가치는 ‘수요’에 따르며, 이는 다시 소비자 대중의 취향과 구매력, 그리고 대체재의 유무 등에 따른다. 이 모든 요인들은 대체로 경제 시스템 자체가 작동되면서 창출·조절된다. 따라서 그 결과는 자체적으로 그 시스템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만한 윤리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
  
비록 나이트가 여러 욕구와 욕망의 중요성에 대한 윤리학 이론을 내놓지는 않지만, 그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흔한 관점 즉 ‘기준이 되는 취향이란 없으며 어떤 욕구가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고 볼 수는 없다’는 관점을 부정한다. 경제 시스템은 소비자 수요를 만족시키는 효율성보다는 “그것이 창출하는 욕구로, (그리고) 대중에게서 그 욕구가 갖게 되는 성격 유형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윤리적으로 올바른 욕구를 창출하는 일이 욕구를 충족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생산적 기여의 시장 가치가 윤리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생각에 도전함으로써, 나이트는 능력주의를 하이에크보다 더욱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능력주의에서 비롯되는 자기만족에 더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하이에크는 부자들에게 비록 그들의 부가 곧 능력의 징표는 아니지만, 사회에 그만큼 크게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했다. 그러나 나이트에게 이는 과한 아부일 뿐이다. 돈을 잘 버는 일은 그 사람의 능력과도 무관하고 그가 한 기여의 가치와도 무관하다. 성공한 사람이 솔직하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가 뒤죽박죽된 욕구와 욕망(중대하든 하잘것없든 어느 시점에 소비자의 수요를 구성하는 요소들) 속에서 관리(천재성과 교활함, 시의성과 재능, 행운과 오기, 고집 등의 종잡을 수 없는 혼합)를 잘 해냈다는 것밖에 없다. 소비자 수요의 충족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게 아니다. 그 가치란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의 도덕적 지위에 따라 정해진다.

 

【 능력주의의 등장 ]

 

■ ‘능력주의’라는 말은 본래 비하의 의미를 갖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찬양과 갈망의 용어가 되어버렸다. “새로운 노동당은 능력주의를 신봉합니다.” 토니 블레어가 영국 수상이 되기 1년 전인 1996년에 한 말이다. “우리는 개인이 각자의 출생이나 특권이 아닌 자신의 재능으로 성공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2001년 제2기 집권을 위해 유세하면서, 그는 자신의 임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을 막는 장벽을 무너뜨리고, 진정으로 사회적 상승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능력에만 기반을 둔 열린 사회, 모두의 가치가 공평히 취급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경제와 사회를 능력과 재능에 활짝 열어젖힐, 철저히 능력주의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수립하겠습니다.”

당시 85세였던 마이클 영은 낙심했다. 〈더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영은 블레어가 자신(영)이 수십 년 전 풍자적 저작에서 비판했던 이상을 떠받들고 있다고 불평했다. 영은 자신의 음산한 예언이 들어맞게 된 것을 두려워했다. “나는 가난한 사람과 불우한 사람의 지위가 격하되리라 예측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사회에서 이처럼 많은 재능을 무가치하게 평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층계급이 이처럼 도덕적으로 취약해진 적은 없다.”

“그러는 사이에 부자와 권력자들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거만해졌으며, 능력주의자들이 그들의 성공은 그들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고 믿는다면(점점 더 그렇게들 믿고 있다), 그들은 뭐든 자신들이 얻은 것은 얻을 자격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 결과 불평등은 해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한때 평등을 목 놓아 외쳤던 이 당의 수뇌부에서는 불평 한 마디 나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더욱 극단화된 능력주의 사회”를 어찌해야 할지는 알 수가 없다면서, 다만 이렇게 희망했다. “블레어 씨가 그 말을 자신의 공적 발언에서 빼기를, 아니면 적어도 그 악영향을 인정하기를.”
 
지난 수십 년 동안, 능력주의의 언어는 공적 담론을 지배했지만 그 악영향에 대해서는 거의 인식되지 않았다. 심지어 불평등의 심화를 눈앞에 보면서도 말이다. 사회적 상승의 담론은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정당이 도덕적 진보와 정치 개혁을 말할 때 즐겨 써먹는 이야기가 되었다.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자는 누구나 자기 재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성공할 수 있으리라.” 능력주의 엘리트는 이 주문을 외우는 데 바빠서 그것이 효력 없는 주문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세계화의 전리품을 나눠 갖지 못한 사람들의 높아져 가는 분노에 귀를 막은 채, 그들은 불만이 꽉 찬 공기 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녔다. 포퓰리즘의 반격은 그들에게 너무도 뜻밖의 상황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내놓은 능력주의 사회 시스템에 내재된 대중을 향한 모욕을 도무지 모르고 있었다.

 


 

 

【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
 

■ 역대 최고의 야구선수 중 하나인 행크 애런은 인종분리 체제가 횡행하던 남부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전기작가 하워드 브라이언트는 그의 소년 시절을 이렇게 묘사한다. “헨리(행크)는 상점에서 백인이 들어오면 자기 아버지가 서 있던 자리를 넘겨줘야 하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재키 로빈슨이 최초의 흑인 프로야구 선수가 되면서 당시 13세였던 헨리는 자신도 언젠가는 메이저리거가 될 거라는 꿈을 품었다. 하지만 배트도 공도 없었던 그는 그의 형이 던지는 병뚜껑을 막대기로 때리며 연습을 했다. 노력을 거듭한 끝에 그는 결국 베이브 루스의 최다홈런 기록을 갈아치웠다. 브라이언트는 날카로운 관찰력을 발휘해 이렇게 썼다. “뭔가를 때리는 것, 그것은 헨리의 인생에서 최초의 능력주의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를 애호하지 않고서 이 문장을 읽기는 어렵다. 그것은 부정의에 대한 최후의 해답, 편견, 인종주의, 불평등한 기회에 맞서 재능을 옹호하는 것으로 비쳐진다. 그런 생각에서 ‘정의로운 사회란 능력주의 사회’라는 결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 성공할 평등한 기회를 갖는 세상’이라는 결론에 이르려면 한 발짝만 더 가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행크 애런 이야기의 모럴은 우리가 능력주의를 애호해야 한다는 게 아니며, 오직 홈런을 때려야만 벗어날 수 있는 인종주의의 부정의한 시스템을 혐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회의 평등은 부정의를 교정하는 데 필요한 도덕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정적 원칙이며, 좋은 사회를 만드는 적절한 이상은 아니다.
 
그런 구분을 유지하는 게 쉽지는 않다. 극소수 사람들의 영웅적인 성공 사례에 고무되어 다른 이들도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들이 벗어나고픈 환경을 개선하려 하기보다, ‘불평등의 해답은 이동성’이라는 말만 늘어놓는 정치를 추구할 수 있다. 장벽을 허무는 일은 좋다. 누구도 가난이나 편견 때문에 출세할 기회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좋은 사회는 ‘탈출할 수 있다’는 약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회적 상승에만 집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보다 사회적 상승에 보다 성공적인 나라라도 상승에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만족할 수 있도록, 그리고 스스로를 공동체 구성원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소속이 어디인지 정체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조건의 평등의 두 가지 뛰어난 설명은 대공황 중에 나왔다. 1931년 출간된 《평등(Equality)》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영국의 경제사학자이며 사회비평가인 토니는 기회의 평등이란 기껏해야 부분적인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성공할 기회는 거시적으로 본 실질적 평등을 대체할 수 없다. 소득과 사회적 조건의 극심한 불평등을 없는 것처럼 만들어버릴 수도 없다.” 사회적 복지는 응집과 연대에 달려 있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높은 수준의 일반 문화, 그리고 강력한 공동 이해관계 의식의 존재를 내포한다. 개인의 행복은 각자가 자유롭게 새로운 안락과 명성의 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존엄과 문화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함도 요구한다. 후자는 반드시 출세할 것을 요하지 않는다.
 
같은 해에 대서양 건너편에서 제임스 애덤스라는 사람이 〈미국의 서사시(The Epic of America)〉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조국에 바치는 송가를 썼다. 이 책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가 그 책의 결론부에서 처음으로 쓴 문구는 모두가 알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 우리 시대에서 돌아보면 그가 말한 아메리칸 드림이란 우리가 쓰는 사회적 상승 담론을 의미한다고 생각해버리기 쉽다. 그러나 애덤스가 미국은 “인류에게 내려진 독특하고 유일한 선물”이라고 쓴 까닭은 그 꿈이 “그 땅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더 낫고, 더 부유하고, 더 온전한 삶을 살아갈 기회가 누구에게나 자신의 역량이나 성취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지 자동차나 높은 급여에 대한 꿈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뭔가를 최상까지 이뤄낼 수 있는, 그리고 태생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자기 자신으로서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질서의 꿈이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 보면 애덤스가 말하는 꿈은 단지 사회적 상승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더 폭넓고 민주주의적인 조건적 평등을 말하고 있다. 확실한 예로, 그는 미국 의회도서관을 가리켜 “민주주의가 그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상징”이라고 말했다. 모든 삶의 영역의 미국인들이 자유롭게 와서 공공 학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 열람실을 보면, 물어볼 필요조차 없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 1만 권이나 비치되어 있다. 자리마다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 노인도 젊은이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흑인도 백인도, 경영자도 노동자도, 장군도 사병도, 저명한 학자도 학생도 한 데 섞여 있다. 모두가 그들이 가진 민주주의가 마련한 그들 소유의 도서관에서 함께 책을 읽는다." 애덤스는 “이 장면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확실한 사례다. 사람들 스스로가 쌓은 자원으로 마련된 수단, 그리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대중 지성. 이 예가 우리 국민 생활의 모든 부문에 그대로 실현된다면 아메리칸 드림은 살아 있는 현실이 되리라”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