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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주의 】 평등

나스티시즘 2023. 9. 20. 04:38
권리와 책임의 균형

 

■ 공동체주의(영어: communitarianism, 共同體主義)란 자유주의에 반대되는 정치사상으로, 20세기 후반에 등장하였다. 마이클 샌델, 앨러스터 매킨타이어, 마이클 왈처, 찰스 테일러 등이 대표적인 학자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자유주의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의 입장을 절충한 입장을 말한다. 또한 공동체주의는 '미덕' 혹은 '덕성'(virtue)이라 불리는 가치를 중시하는 인간중심적 이론이다. 에치오니(Amitai Etzioni) 등이 주창한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와 달리 개인의 자유보다는 평등의 이념, 권리(right)보다는 책임(responsibility), 가치중립적 방임보다는 가치판단적 담론을 중시한다. 공동체주의는 근대 개인주의의 보편화에 따른 윤리적 토대의 상실, 즉 고도산업사회화에 따른 도덕적 공동체의 와해와 이기적 개인주의의 팽배에 의한 원자화 등의 현상에 대한 불만의 이론적 표출로 볼 수 있다. 정치철학 용어로서의 공동체주의와 달리 일상용어로서의 공동체주의는 집단주의의 동의어로 쓰이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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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평등에는 세 가지의 주요한 형태가 있다. (1) 기회의 평등: 관련되어 있는 사회집단간의 제도나 사회적 위치에 접근할 평등의 조항. 즉 남녀 공학, 모든 계급 출신의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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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신분(身分)·성별(性別)·재산·종족 등에 관계없이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는 모두 동등하다는 뜻. 동일성(同一性)과 공정성(公正性)으로 구분 해석될 수 있으며, 동일성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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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모인 향연에서 ― 새들을 좀더 자세히 관찰하거나 새들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고 새들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의 손으로 우리가 새처럼 길러진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까! 왔다가 날아가버리고 부리에 아무런 명패도 달지 않은 새처럼 사는 것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향연에서 포식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다."

- 니체 -



 
 

【 부와 가난의 대물림 】

 
https://youtu.be/ME20j39gPSQ

 
 

 능력주의(혹은 실력주의, meritocracy)는 이 시대의 수많은 나라들에 적용되는 화두다. 국가는 시스템을 공정하게 만들고, 개인은 열심히 노력하여 자부심을 갖고 그 대가를 향유하게 하는 사회. 이러한 사회는 비단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목표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회, 즉 능력주의 사회는 근본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그 결과로 나타난 미국적 현상이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포퓰리즘 정부의 출현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소위 '아빠 찬스'라는 말로 제기된 공정성 문제와 인천공항공사의 계약직 정규직화 관련 논란들이 이와 연결된다. 이력서에 출신 대학을 명기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블라인드 테스트도 마찬가지다.
 
샌델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의 미국을 트럼프 행정부가 얼마나 엉망으로 다루었는지 언급했다. 또한 코로나 사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한 정신적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연대(solidarity)가 필요한데, 2016년의 포퓰리스트 '반란'을 통해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연대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분열을 부추겨왔다. 공중보건과 국제공조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그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뿐만 아니라 2020년 11월 대선 결과에 대해서도 승복과 협조보다는 대결롸 적대의 태도를 취했다. 대립은 정치가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격렬하게 일어났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능력주의가 그 바탕에서 작용하고 있다.
 
샌델 교수는 "현대 자유주의를 규정하는 능력주의적 정치기획에 대한 재검토"를 요청한다. 자유주의의 능력주의적 정치기획은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오늘과 같은 글로벌한 기술 시대에는 고등교육이 신분상승과 물질적 성공 및 사회적 존중을 얻는 길이다. 둘째,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신분상승을 위한 고른 기회를 통해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재능과 노력의 결실을 향유할 자격이 있다. 샌델 교수는 이런 가치관과 관점이 국가 정책의 중심이 된 것은 최근 수십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능력주의 관점은 아메리칸 드림과 잘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주 어두운 이면이 존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도 이런 생각을 공정하고 타당한 관점이라고 여긴다.
 
능력주의적 이상은 미국의 경우 대학 학위 소지 여부와 관련된 학력주의 문제로 직결된다(물론 우리는 학력주의보다 더 중증인 학벌주의에 감염되어 있다). 그런데 만일 대학 학위가 좋은 직장과 사회적 평가의 전제조건이 된다면, 이는 민주주의를 부패시킨다. 이것이 능력주의의 어두운 이면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학위를 갖지 않은 이들의 사회적 기여는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또 교육을 적게 받은 이들이 선출직 공무원으로 진입하는 문을 좁혀놓아 결국 포퓰리즘과 같은 정치적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그동안 미국 민주당이 가졌던 입장은 현재의 글로벌 경제질서 유지였다. 물가를 저렴하게 유지하려고 많은 일들을 저임금 국가로 아웃소싱했다. 그래서 민주당은 이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받는 타격을 줄이고 악화된 직업 전망을 개선하는 데에만 초점을 두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학위 상황을 개선하여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도록 정책 기조를 잡아왔던 것이다. 고등교육을 통해 신분상을 독려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힐러리 클린턴까지 이어져온 이러한 정책 기조를 유지한 정치가들이 한 가지 놓친 점은 능력주의 중심 사회에 내재한 모욕(insult)의 감정이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만일 당신이 대학에 가지 않아 이런 새로운 경제 환경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그 실패는 바로 당신의 잘못이 된다. 사회의 상층부에 속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 잘못에 따른 것이기에 자괴감을 갖게 된다. 그들이 성공한 자들로부터 받는 모욕은 정당한 것인 반면 자신은 모멸을 당해 마땅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정말로 학위가 없고 성공하지 못한 자는 업신여김을 받아 마땅한가? 미국에는 대학 학위를 갖지 않은 사람의 수가 전체 인구의 삼분의 이에 달한다. 능력주의에 대한 강조는 미국에서는 곧바로 학력주의로 나아가고, 이로 인해 대학 학위를 갖지 못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점차 널리 퍼지게 된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모욕감은 종교나 수양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해도, 실패한 가장으로서 가지는 고통, 계층 전체가 갖는 모욕의 고통은 사회 내에서 (드러나진 않아도) 커다란 부정적 기능을 하게 된다. 샤이한 트럼프주의자들은 이런 감정을 숨기며 지냈다.
 
학력주의라는 편견은 성공한 자들에게 교만한 마음을 준다. 통계에 따르면 이들은 인종주의나 성차별주의에 대해 반대한다. 그러나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이들에 대해서는 상당한 편견을 갖고 있다. 자신들이 그들에게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음을 알아도 그에 대해서는 별로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교육받지 못한 이들은 깔봄을 당해도 싸다는 편견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가진 재능과, 사회로부터 받은 대가는 과연 온전히 내 몫인가? 아니면 행운의 산물인가? 나의 노력은 나의 것이지만, 그런 노력의 패배자도 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재능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한 운이다. 나의 노력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는 사회를 만난 것도 내가 시대를 잘 만난 행운의 결과인 것이다. 성공주의 수사학, 그리고 기술관료적 능력에 대한 이데올리기적 예찬은 우리를 엉뚱한 곳으로 이끌고 갈 뿐이다. 우리는 능력 경쟁을 위해 무장한 사람들보다는, 학위가 없지만 우리 사회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사람들, 자신의 일을 통해 부양가족과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들에게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샌델 교수는 주장한다. 내가 받은 사회적 명성가 대가가 행운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겸손해진다. 이런 겸손의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민적 덕성이다. 우리를 분열하게 하는 성공의 거친 윤리에서 돌아와, 능력주의의 폭정을 뛰어 넘어야 한다. 이런 샌델의 웅변은 곧 우리 사회에 대한 웅변이기도 하다.
 
- 김선욱, 숭실대 철학과 교수 -

 
【 능력 지표 따내기 】

 
https://youtu.be/QrKiB9OtB28

 불평등한 사회에서 꼭대기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공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능력주의가 원칙이 되는 사회에서는 승리자가 '나는 나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으로 여기에 섰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바로 학부모들이 자녀에게 선물하려던 것이었다. 그들이 단지 자녀에게 부를 물려줄 마음뿐이었다면 신탁 기금 등을 포함한 재물을 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뭔가 다른 것을 원했다. 명문대 간판이 줄 수 있는 '능력의 지표' 말이다.
 
능력주의적 대입이 갖는 특질은 뚜렷해 보인다. 정당한 스펙으로 입학한 사람은 자신의 성취에 자부심을 가질 것이며, 이것은 자기 스스로 해낸 결과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 역시 문제가 있다. 그러한 입학과 헌신과 노력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정말로 오직 '자기 스스로' 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그들이 스스로 해내도록 도와준 부모다 교사의 노력을 뭔가? 타고난 재능과 자질은 그들이 오직 노력으로만 성공하도록 했을까? 우연히 얻은 재능을 계발하고 보상해줄 수 있는 사회에 태어난 행운은? 노력과 재능의 힘으로 능력 경쟁에서 앞서 가는 사람은 그 경쟁의 그림자에 가려 있는 요소들 덕을 보고 있다.
 
능력주의가 고조될수록 우리는 그런 요소들을 더더욱 못 보게 된다. 부정이나 뇌물, 부자들만의 특권 따위가 없는 공정한 능력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런 결과를 해냈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준다. 명문대 입학을 위해 요구되는 여러 해 동안의 노력 역시 그들이 '나의 성공은 내 스스로 해 낸 것'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준다. 그리고 만약 입시에 실패하면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는 인식도 심어주게 된다. 이는 청소년들에게 지나친 부담이다. 시민적 감수성에도 유해하다. 우리가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사람 또는 자기충족적인 사람으로 볼수록 감사와 겸손을 배우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런 감성이 없다면 공동선에 대한 배려도 힘들어지게 된다.

대학 입시가 능력주의의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 '누가 여기에 맞는 능력을 갖췄는가?'는 오늘날 정치권의 주요 화두다. 표면적으로 이 논쟁은 공정성 논쟁인 듯 보인다. '탐나는 물건이나 사회적 지위를 놓고 경쟁할 때, 모두가 정말로 공평한 기회를 갖고 있는가?' 그러나 능력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견 불일치는 공정성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성공과 실패 또는 패배를 어떻게 정의하는가도, 그리고 자신보다 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승리자가 어떤 태도를 취해햐 하는가도 문제다. 이러한 문제들은 대체로 외면 받고 있으며, 우리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 문제를 다루지 않으려 한다.
 
오늘날 양극화된 정치 환경을 넘어 길을 찾으려면 능력주의의 장단점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능력주의의 의미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어떻게 달라졌는가? 직업의 귀천 없음을 무너뜨리고, 많은 이들이 엘리트는 교만하다고 여기게끔 달라지지 않았던가? 세계화의 승리자들이 자신들은 '얻을 만한 걸 얻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도록 그리고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지도록 바뀌지 않았던가? 엘리트층에 대한 분노가 민주주의를 위험 수준까지 밀어내게 될 때, 능력에 대한 의문은 특별히 중대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갈등 지향적 정치에 필요한 해답이, 과연 능력의 원칙을 더 믿고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계층을 나누고 경쟁시키는 일을 넘어 공동선을 찾는 것인가에 대해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 입시의 윤리 】


https://youtu.be/_h5SVNcp898?si=Qyk_yNR6v5zUfPZ6

https://youtu.be/A38uOpTVHj4

대학 입학 과정에 부와 특권이 끼치는 영향력은 심지어 부정이 없는 경우에도 심각하다. 실력대로라고? 사실 실력은 경제적 우위와 구별해서 보기가 어렵다돈은 그동안 계속 입시에서 한몫을해왔다. 지원자가 그 부모가 가진 돈이 얼마든 상관 없이 오직 능력, 실력으로만 입학할 수 있다고? 실제로 보면 그렇게 문제가 간단하지가 않다. 사실 실력은 경제적 우위와 구별해서 보기가 어렵다. 실제로는 점수와 수험생 집안의 소득이 비례관계를 나타낸다. 더 부유한 집 학생일수록 더 높은 점수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

 
아이비리그 대학생 삼분의 이 이상이 소득 상위 20% 이상 가정의 출신임은 놀랄 일이 아니다. 프린스턴과 예일에는 미국의 소득 하위 60% 출신 학생보다 상위 1% 출신 학생이 더 많다. 이 엄청난 입학 불평등은 일부 동문자녀 입학과 기여 입학제 때문이지만, 부잣집 학생들은 날개를 달고 정문으로 날아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판론자들은 이러한 불평등을 지적하며, 고등교육이 능력주의를 따르지 않음을 입증한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입시 부정 스캔들은 더 넓고 깊이 퍼져 있는 불공정의 고약한 실마리일 뿐이다. 그리고 그 불공정이란 고등교육 시스템이 능력주의를 따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다.
 
능력주의의 문제는 원칙 자체보다 그 원칙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보수와 진보 사이의 정치 갈등이 그 점을 나타내준다. 우리 사회의 논쟁은 능력주의 자체를 따지지는 않고, 어떻게 그 원칙을 실현하느냐를 놓고 이뤄진다. 가령 보수주의자들은 인종이나 민족을 입학 고려 요소로 보는 소수집단 우대정책이 능력주의적 입학제도에 역행한다고 주장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이러한 소수집단 우대정책이 계속되고 있는 불공정을 시정하는 방법이며, 참된 능력주의는 특권층과 취약계층 사이의 출발선을 고르게 하는 조치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러나 이 논쟁은 능력주의의 문제가 더 뿌리 깊은 것일 수 있음을 돌아보지 않는다. 입시 문제에 사회가 목을 매는 현상은 최근 수십 년 동안 점점 불평등이 늘어난 데서 기원한다. 누가 어디에 발을 들여놓느냐에 의해 전보다 훨씬 많은 것이 결정되는 세상이다. 불평등이 늘어나면서, 또한 학사 학위 소지자와 비소지자 사이의 소득 격차가 벌어지면서 대학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어느 대학에 들어가느냐 역시 중요해졌다. 오늘날 학생들은 너도 나도 소수의 주요 대학들만 선호한다. 부모의 행동방식 역시 달라졌다. 특히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모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소득 격차가 벌어짐에 따라 인생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다. 그런 두려움을 피하고자 부모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적극적으로 자녀의 삶에 개입하게 되었다. 그들의 시간 사용을 간섭하고, 학점을 관리하며, 활동을 지시하는 등 희망 대학의 입맛에 맞도록 자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간섭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및 간섭하는 부모의 태도는 느닷없이 나타난 게 아니다.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여유 있는 부모라면 그 자녀가 '적어도 중산층의 삶을 살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이해할 만한 정서의 결과물이다. 좋은 대학의 졸업장은 그동안 함께 지내온 계층하고만 어울리고 싶어 하는 사회계층의 경직성에 대한 최상의 대응책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는 특권층 부모들이 화들짝 놀라서 자녀의 명문대 입시에 새삼 신경을 쏟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제적 불안이 전부는 아니다. 그보다 덜 민감하지만 더 의미심장한 목적이다. 자녀가 명문대 간판을 달도록 함으로써 그들은 '능력주의의 광채'를 두드려고 한 것이다.
 

【 불평등의 해답은 교육? 】

 
능력주의 체제를 수용하는 사람은, 진정한 기회의 평등을 위해선 차별을 뿌리 뽑는 것 이상이 요구됨을 알고 있다. 그것은 ‘운동장 고르기’를 필요로 한다. 모든 사람들이 지식기반·글로벌 경제 무대에서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결과 1990~2000년대의 주류 정당들은 불평등, 임금 정체, 제조업 일자리 감소 등에 대한 해답으로 일단 교육을 내세우게 되었다. “우리가 맞이한 모든 문제들, 모든 도전들을 생각해 봅시다.” 1991년 조지 H. W. 부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답은 교육입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는 1996년 중앙집권적이고 개혁적인 정책 대안을 발표하면서 이러한 감상적 발언을 했다. “제게 물어보십시오. 정부가 제일 먼저 추구해야 할 세 가지가 뭐냐고.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릴 겁니다. 교육입니다. 교육이지요. 교육이라고요."

빌 클린턴은 교육의 중요성과 일자리의 연관성에 대해 각운을 살려가며 말했다. “우리가 뭘 얻을 수 있느냐, 그것은 우리가 뭘 배울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의 주장으로는 바야흐로 글로벌 경쟁 시대에 대학 학위가 없는 노동자는 그럴듯한 보수를 주는 그럴듯한 직장을 찾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이 대학에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뭘 얻을 수 있느냐는 우리가 뭘 배울 수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죠.” 클린턴은 대통령 임기 동안 이런 표현을 30번 이상 했다. 그것은 당시의 상식을 반영한 것이며, 두 주요 정당 모두의 환영을 받았다. 공화당 상원의원이던 존 매케인 역시 2008년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 이러한 표현을 즐겨 썼다.

버락 오바마도 미국 노동자들이 겪는 경제적 곤경의 해답을 고등교육에서 찾았다. 브루클린의 어느 기술대학에서 그는 이렇게 연설했다. “과거에는 열심히 일하려고만 하면 교육을 많이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고등학교만 다녔어도 공장이나 옷가게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죠. 또 대학을 나온 사람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은 월급을 받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시대가 오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21세기 글로벌 경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글로벌 경제는 일자리를 어디서든 채울 수 있도록 합니다. 기업들은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원합니다. 그들이 어디 사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제 베이징에서, 방갈로르에서, 모스크바에서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으며, 그들은 여러분과 직접 경쟁합니다. 여러분의 교육 수준이 높지 못하다면 생활에 충분한 임금을 주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울 겁니다."

글로벌 경쟁에 대한 이런 불편한 소식을 전한 오바마는 청중들에게 “더 많은 교육이 해답”이라고 확언했다. 그리고 사회적 상승 담론의 보다 활기찬 변형판을 내놓으며 연설을 마쳤다. “저는 계속 싸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든 어디서 왔든 뭘 좋아하든 상관없이, 이 나라가 언제나 ‘하면 된다’는 신념이 이뤄지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수십 년간 진보 및 자유주의 정치권의 주된 담론은 이쪽을 맴돌았으며, 그 끝은 브렉시트, 트럼프, 그 외 포퓰리즘의 반격이었다. 글로벌 경제는 마치 자연법칙에 따르듯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주된 정치적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재편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그것에 적응하느냐’였다. 그리고 ‘그것이 노동자의 임금과 일자리 전망에 주는 악영향을 어떻게 덜어주느냐’였다(엘리트 직업인들은 도리어 혜택을 누리니까 신경 쓸 것 없다).

해답은 이랬다. 노동자의 학력 수준을 높여 그들이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 경쟁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한다. 기회의 평등이 기본적인 도덕적, 정치적 프로젝트 과제였다면 고학력을 이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정책의 제1목표였다. 클린턴-오바마 시대가 끝나갈 무렵 일부 정치평론가들은 대체로 능력주의적 자유주의에 대한 민주당의 노선에 동조했다. 세계화를 수용하고, 대학 학위 취득을 응원하고, 재능 있고 학력이 좋은 사람은 최고의 위치에 올라갈 만하다고 믿는 것 등등을. 작가이자 MSNBC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크리스토퍼 헤이즈는 최근 좌파가 “능력주의를 더욱 능력주의적이게 하는 이슈(가령 인종차별과 싸우고, 여성 고학력자를 늘리고, 동성애자의 권리를 증진하는 등)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소득 불평등 증가세를 완화하는 등 능력주의 관심 밖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실패했다고 덧붙였다.

결과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을 찾는 시스템 틀 안에서는 교육 시스템의 책임이 막중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불평등이 꾸준히 늘어남에 따라 교육에 대한 요구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교육이 이 사회의 다른 죄악들을 사면해주기를 바라며 포퓰리즘 감각으로 글을 쓰는 작가인 토머스 프랭크는 진보파들이 불평등의 해법으로 교육에 중점을 두는 시각을 비판했다. “진보파에게 모든 중대한 경제 문제는 사실 교육 문제일 뿐이다. 루저들은 모두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미래 사회에서 필요한 기술과 학력을 따내지 못한 자들일 따름이다.” 프랭크는 이런 식의 불평등 해법이 엉터리이며, 자기충족적 예언을 담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사실 해답도 뭣도 아니다. 일종의 도덕적 판단이다. 스스로의 성공에 취한 승자들이 그런 판단을 내린다. 전문직업인 계층은 그들의 교육 수준에 따라 정의되며, 그들은 입만 열면 더 많은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불평등이란 시스템의 실패가 아니라 실패자 개인의 실패일 뿐이다."
 
프랭크는 이 모든 교육 운운하는 이야기가 불평등을 직접 초래한 정책에서 민주당의 주의를 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생산성은 1980~1990년대에 증가했으나 임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과연 교육 실패가 불평등의 주원인일까?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진짜 문제는 노동자의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과 상관없으며, 노동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한 데 있다.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생산한 것에서 자기 몫을 요구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이 생산한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사람들은 더, 더 많이 챙겨가고 있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민주당 사람들은 경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 현실이란 독점산업에서 경제의 금융화, 그리고 노동 관리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들은 대신 그런 현실 모두를 방치하게 만드는 도덕적 환상에 젖어 있을 뿐이다.”
 
“스스로의 성공에 취한 승자들이 내린 도덕적 판단”이라는 프랭크의 표현은 뭔가 중요한 점을 꿰뚫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이 대학에 가도록 권하는 일은 좋다. 못사는 집 사람도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은 더욱 좋다. 그러나 불평등과 수십 년 동안의 세계화로 노동자가 떠안게 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오직 교육에만 집중하는 일은 심각한 역효과를 낳는다.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사회적 명망이 추락하는 것이다. 그런 역효과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어느 것이나 노동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지위에 악영향을 준다.
 
첫째, 미국인 대부분은 대학 학위가 없다. 관리자 또는 전문직업인으로서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에겐 이 사실이 뜻밖일 수 있다. 비록 최근에 대학 졸업자 비율이 늘어났지만, 아직도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미국의 성인 세 명 중 한 명 꼴이다. 능력주의 엘리트들은 성공과 실패의 문제를 대학 학력과 긴밀하게 엮음으로써,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이 글로벌 경제에서 힘든 상황을 겪는 것이 자업자득이라며 은연중 멸시하게 된다. 그들은 또한 대졸자의 임금 수준을 한껏 높이는 정책으로 초래된 문제에서 스스로의 책임을 면제해준다.
 
둘째,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의 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꼴이 된 것이다”라고 말해줌으로써 능력주의자들은 사람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일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부지불식간에 학력주의를 조장한다.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에게 고약한 편견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학력주의 편견은 능력주의적 오만의 한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능력주의에 더욱 물들게 되면서, 엘리트들은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을 깔보는 버릇마저 들었다. 대학에 가서 자신의 조건을 향상시키라고 노동자들에게 골백번 되풀이하는 말은 아무리 의도가 좋을지라도 결국 학력주의를 조장하고 학력 떨어지는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과 명망을 훼손한다.
 

【 대중을 내려다보는 엘리트 】

 
■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반격에 힘을 실어준 이 불만은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여론 조사는 다수의 노동계급 유권자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려준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지지받기 힘들 때(힘들지만 완전히 외면되는 것은 또 아닐 때다), 학력주의는 최후의 면책적 편견이 된다. 미국과 유럽에서, 학력이 시원치 않은 사람에 대한 멸시는 다른 부분에서 시원치 않은 집단에 대한 멸시보다 훨씬 두드러진다. 아니면 적어도 훨씬 잘 통용된다.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실시된 일련의 설문조사에서 사회심리학자 연구팀은 대학을 졸업한 응답자들이 다른 약점보다 대학 졸업을 못한 약점이 있는 집단에게 더 반감을 가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전형적인 차별 대상 집단들 즉 무슬림, 터키 출신 유럽 거주민, 빈곤층, 비만인, 시각장애인, 저학력자 등에 대해 고학력 유럽인들이 보이는 반응을 조사했는데, 그 가운데 저학력자가 가장 기피됨을 알 수 있었다. 미국에서 실시된 비슷한 조사에서, 연구자들은 유럽과 다른 차별 대상 집단들을 예시했다. 흑인들, 노동계급, 빈곤층, 저학력자였다. 미국인들은 이 가운데 저학력자에 대해 가장 낮은 평가를 했다. 대졸 엘리트가 그보다 못한 교육 수준의 대중을 어떻게 낮춰 보는지를 넘어, 이 연구보고서들의 저자들은 몇 가지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냈다.
 
첫째, 그들은 교육 받은 엘리트가 교육 수준이 낮은 대중보다 깨어 있어서 더 관용적이라는 익숙한 생각이 어긋남을 포착했다. 그들에 따르면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는 보다 못한 교육 수준의 대중에 비해 편견이 결코 적지 않다. 다만 편견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더욱이 엘리트는 그런 편견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는 반대할지 모르나, 저학력자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는 ‘그러면 어때?’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둘째, 대졸 엘리트들이 편견에 거리낌 없는 까닭은 개인 책임을 중시하는 능력주의와 관련이 있다. 엘리트는 가난이나 출신 계층을 따지기보다 학력을 따져 노동계급을 멸시한다. 학력 이외의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들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낮은 학력은 개인의 노력 부족을 나타낸다고 본다. 그래서 대학에 못 간 것은 그 개인의 책임이라 여긴다. “노동계급과 비교해, 저학력자는 보다 자기 책임이 크고 더 비난받을 만하다 여겨진다. 그들에 대해서는 분노 감정이 많고, 호감이 적다.”

셋째, 저학력자에 대한 이런 안 좋은 감정은 엘리트만의 것이 아니다. 저학력자들 스스로도 그렇다. 이는 능력주의적 성공관이 얼마나 사회에 깊이 파고들어 있으며,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이 그 때문에 얼마나 사기 저하를 겪고 있는지 보여준다. “저학력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손가락질에 저항하는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반대로 그들은 그런 손가락질을 내면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학력자들은 자신들의 상황이 자업자득이며 욕먹어도 싸다고 여기는 듯하다. 스스로에게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연구자들은 능력주의적 사회에서 대학 진학이 계속 강조됨으로써 비대졸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강화된다고 본다. “교육이야말로 사회문제 해결의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의 권고는,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지위의 집단이 더욱 부정적으로 평가되면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될 위험성을 키운다.” 이는 사람들이 불평등을 더 선뜻 받아들이게 하며, 성공은 능력 나름이라고 믿기 쉽도록 한다. “교육을 개인 책임이라 여기게 되면 교육 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줄어들 것이다. 교육 성과는 대체로 개인 하기 나름이라 여겨지게 되고, 그에 따른 사회적 성공 및 실패 또한 그렇게 된다."
 

【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
 

■ 능력주의가 문제라면 해답은 뭘까? 직무 능력보다는 연줄이나 갖가지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채용해야 하는 걸까?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유력한 백인의 아들들, 개신교도이자 상류 계층 출신들만 받아들이고 개별적인 학습 능력은 따지지 않던 때로 돌아가야 할까? 아니다. 능력주의의 폭정을 극복한다는 게, 능력이 직업과 사회적 역할의 배분에 아무 역할도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함을 뜻한다. 그리고 능력이라는 말로 옹호되어 온, 그러나 분노를 퍼뜨리고 정치에 해를 끼치며 사회를 갈라놓는 부와 명망의 불평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포함된다이러한 생각 바꾸기는 능력주의적 성공 개념의 핵심인 두 가지 인생 영역, 즉 교육과 일에 대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

‘인재 선별기’가 된 고등교육이 어떻게 능력에 따른 사회적 상승을 약속하면서도 사실은 특권을 강화하고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공통 도덕성에 유해한 성공관을 심어주는지 알아볼 것이다.  대학들은 현대사회의 기회 배분 시스템을 주도하고 있다. 고소득 직업과 명예로운 지위로의 여정에 있어 관문 역할을 하는 ‘학위’를 발급하기 때문이다. 고등교육에서 이런 역할은 양날의 검이다. 대학은 능력주의적 열망에 피를 돌게 하는 심장이 되었고, 이로써 대학의 문화적 권위와 영예는 엄청나게 높아졌다. 명문대 입시는 과열되었고 다수의 미국 대학들은 수십억 달러의 기부금을 거둬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을 능력주의 질서의 방벽으로 삼음으로써 민주주의에 악영향이 미칠 수 있다. 대학입시 경쟁을 치르는 학생들도, 그리고 심지어 대학 스스로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 상처 입은 승리자들 】

 
능력주의적 군비 경쟁은 부유한 집안 쪽으로 전세를 기울인다. 그리고 부자 부모들이 스스로의 특권을 대물림하기 쉽게 해준다. 이런 식의 특권 대물림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런 판에서 유리한 고지를 찾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매우 불공평하며, 이 판에 자식들이 뛰어들어 있는 상황에서는 지나친 압박이 된다. 능력주의적 경쟁은 침략적이고 성취만 쫓으며 과도한 부모의 압박을 불러온다. 10대 청소년에게 과중한 부담을 준다는 말이다. 극성 학부모의 등장은 능력주의적 경쟁이 과열된 시기와 일치한다. 사실 ‘부모 노릇하다(parent)’라는 단어는 1970년대에 와서야 동사로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자녀가 공부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부모의 책임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지게 되던 때다.
 
대학 입시가 갖는 의미가 커짐에 따라 조바심 내고 나서기 좋아하는 부모들의 태도도 늘상 있는 일이 되었다. 2009년 11월 〈타임〉 표지 기사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과잉 부모 노릇의 폐해: 엄마 아빠는 왜 이제 잡고 있던 줄을 끊어야 하나.” 기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는 아이들의 성공에 너무 집착하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부모 노릇이라는 게 마치 어떤 생산물의 생산 과정처럼 되고 말았다.” 이제 아동기에 개입해 일정하게 관리를 하려는 움직임은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어느 흥미로운 연구에서 경제학자인 마티아스 되브케와 파브리치오 질리보티는 과보호 학부모의 등장을 경제학적으로 설명했다. 그들이 정의한 표현으로는 “과도하게 개입하고, 막대한 시간을 투입하며, 통제적인 육아 방식을 통해 지난 30년 동안 널리 퍼진 방식”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런 부모 노릇은 불평등이 증가하고 교육으로 인한 보상이 커진 데 따른 합리적 대응이었다. 비록 여러 사회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 결 같이 부모의 개입이 심해지긴 했으나, 가장 심했던 곳은 불평등이 가장 크게 두드러진 곳이었다. 가령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였다. 그리고 스웨덴이나 일본처럼 불평등이 비교적 덜 불거진 나라에서는 그러한 극성 부모들도 덜 나타났다.

이해할 만하기는 하지만, 자녀의 인생을 능력주의적 성공으로 몰고 가려는 부모들의 집착은 심리학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다. 특히 대입을 앞두고 있는 10대들에게 그렇게 가혹한 강요를 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2000년대 초 캘리포니아 주의 마린 카운티(샌프란시스코 인근의 풍요로운 교외 지역)에서 젊은이들의 심리 상담을 해온 심리학자 매들린 레빈은 겉으로는 성공적인 여러 유복한 가정의 10대들이 극심한 불행감, 고립감,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소한 문제에 흥분하며, 그들 다수는 우울하고, 불안하고, 분노에 차 있었다. 그들은 부모, 교사, 코치, 동료의 말에 지나치게 복종적이었으며 어려운 일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문제까지도 남들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의 문제가 삶의 어려움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인 건 아니었다. 매들린은 이들이 ‘풍요로움과 지나칠 정도의 부모 간섭 때문에 불행하고 깨져 버리기 쉬운 인간이 되었음’을 차차 알게 되었다.
 
《특권의 대가(The Price of Privilege)》라는 책에서 레빈은 그녀가 “특권층 젊은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질환 증후군”이라 부르는 문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심리학자들은 ‘일촉즉발’의 젊은이는 도시 빈민굴의 불우한 청소년들이라고 생각했다. 어렵고 용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나야만 했던 아이들 말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괴롭다.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레빈은 “미국에서 나타난 새로운 일촉즉발의 젊은이 집단은 부유하고 잘 교육받은 집안의 아이들”이라고 지적했다.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겪은 경험은 이 나라 동 연령대에서 최고 수준의 절망, 약물 의존, 불안 장애, 신체적 호소, 불행감 등이었다. 연구자들이 사회경제적 스펙트럼을 통틀어 동 연령대 아동들을 살펴본 결과, 가장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가진 아동들이 부유한 가정 출신임을 알 수 있었다.
  
레빈은 ‘상류 및 중류 청년들에 대한 뜻밖의 사실, 가장 유명한 대학을 나오고 미국 최고의 경력을 쌓아온 사람들의 어두운 면’이라는 이름의 연구를 한 수니아 루타의 글을 인용한다. 그들은 동년배 10대보다 높은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으며, 그것은 그들이 대학에 합격한 뒤에도 계속된다.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때 풀타임 등록 대학생들은 2.5배나 높은 약물 의존증을 나타낸다(23퍼센트, 보통 사람은 9퍼센트).” 그리고 풀타임 대학생의 절반은 과도한 음주를 하며 불법적이거나 처방 약물을 사용하고 있다.
 
부유한 출신 젊은이들이 과도하게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해답은 능력주의적 사명에서 찾을 수 있다. ‘뭘 해내라’, ‘뭘 이뤄라’, ‘뭘 성공해라’ 하며 끊임없이 떨어지는 사명. 투라는 이렇게 썼다. “부모와 자식 모두 언제 어디서나 들려오는 메시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생애 초기부터 들려오던 것이며 행복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목소리다. 돈을 많이 벌어라. 그러기 위해 명문대에 들어가라.”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자다. 그러나 상처 입은 승리자다. 나는 그 사실을 내 학생들을 보고 알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불타는 고리를 뛰어 통과하는 일을 거듭해왔고, 그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많은 아이들이 아직도 분투하고 있다. 생각하고, 탐구하고,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해야 가치 있게 살아갈 것인가 숙고하면서 대학 생활을 보내지 못하고, 싸우고 또 싸운다. 놀랄 만큼 많은 아이들이 정신 건강에 이상을 겪고 있다. 능력주의의 호된 시험을 통과하는 데 따르는 심리적 피해는 아이비리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100개 이상 미국 대학의 학부생 6만 7,000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대학생들이 전례 없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울증과 불안증이 치솟고 있다. 대학생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설문 이전 1년 이내에 자살을 고려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넷은 정신질환자로 진단을 받거나 치료를 받고 있다. 젊은이(20~24세)의 자살률은 2000~2017년 사이 36퍼센트 늘었다. 지금 그들은 살인보다 자살로 더 많이 죽어간다.

이런 병리학적 상황을 넘어 심리학자들은 이 세대 대학생들의 보다 미묘한 정신적 문제점을 찾아냈다. ‘완벽주의라는 숨은 전염병’이다. 몇 년 동안이나 불안 속에 분투해온 결과 젊은이의 마음은 약하디 약한 자부심, 그리고 부모, 교사, 입학사정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냉혹한 한 마디에도 산산조각 날 자의식으로 채워져 버렸다. “실적과 지위와 이미지만이 한 사람의 쓸모와 가치를 정할 수 있는 세계에서, ‘완벽한 자신’이라는 비이성적 생각이 의미 있는 게 되고 말았다.” 4만 명 이상의 미국, 캐나다, 영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물의 공저자 토머스 쿠란과 앤드류 힐의 말이다. 이들은 1989년부터 2016년까지 완벽주의가 가파르게 증가하는 것을 보았다. 사회적인, 그리고 부모의 기대에 매인 완벽주의의 증가세는 32퍼센트에 달했다.

완벽주의는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병폐다. “젊은이들이 끝도 없이 학교, 대학, 직장에 의해 선별되고, 구분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과정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현대 생활의 한복판에서 싸우고, 실적을 내고, 업적을 이루도록 강요한다.” 성취 요구에 따라,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개인의 능력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가치를 결정한다. 능력주의 기계의 레버와 활차 역할을 해온 사람들은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희생이 있었는지 모른다. 번아웃 증후군에 대한 솔직하고 통찰력 있는 글에서 하버드 입학사정관실은 “고등학교와 대학 재학 시절을 불타는 고리를 뛰어넘는 일로만 채워온 사람들이 결국에는 평생 신병훈련소와 같은 틀 안에서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2000년에 나온 그 글은 아직도 하버드 입학 홈페이지에 일종의 경고용으로 게시돼 있다.
 

오만과 굴욕

 
오늘날 기회의 관리자로서 대학의 역할은 아주 확고하기 때문에 도무지 대안을 찾기 어려운 상태다. 고등교육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볼 때가 왔다. 특권을 얻은 사람들의 고장 난 정신 상태를 고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이 낳은 시민생활의 양극화를 고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인재 선별기를 뜯어 고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면, 능력주의 체제가 그 폭력적 지배를 동시에 두 방향으로 뻗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정상에 올라서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불안증, 강박적 완벽주의, 취약한 자부심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으로서 능력주의적 오만 등을 심는다. 한편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극심한 사기 저하와 함께, ‘나는 실패자야’ 라는 굴욕감마저 심는다.

 
이 쌍방향 폭력은 하나의 도덕적 원인을 공유한다. 능력주의의 금과옥조인 ‘우리는 개인으로서 우리 운명의 책임자다’라는 도덕률이다. 우리가 성공하면 우리가 잘한 덕이며, 실패하면 우리가 잘못한 탓이다. 사기를 올려주는 말 같지만, 개인 책임에 대한 집요한 강조는 우리 시대의 불평등 상승 추세에 대응할 연대 의식이나 연대 책임을 떠올리기 어렵게 한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소득과 사회적 명망의 불평등의 책임이 고등교육 하나에만 있다고 보면 잘못이다. 시장 중심적 세계화 프로젝트, 현대 정치의 기술관료화, 민주 제도들의 과두제화 등에 모두 이런 상황을 초래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에서 직업의 문제를 다루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 과연 능력주의적 선별의 악영향을 줄이기 위해 뭘 하면 좋을지, 그리고 어떻게 쌍방향의 해독을 감소시켜 승자의 상처와 패자의 굴욕을 치유할 것인지를 살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인재 선별기 부숴버리기 】

 
https://youtu.be/87y51sppn20?si=4gjN9sd4O2BUyyLY

■ 이에 적절한 대답은 야심적인 프로젝트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최고 명문대들의 경쟁적 입시를 완화시킴으로써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의 전원을 뽑아버려야 한다.’ 보다 넓게는 4년제 대학 학위가 없어도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일에 영예를 부여하려면 그런 일을 맡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학습과 훈련 프로그램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공립 고등교육의 퇴조 현상을 역전시키고, 기술 및 직업 교육에 대한 무시 경향을 극복하며, 4년제 대학과 그 밖의 중등 이후 교육기관(Post-Secondary Educational Settings) 간 심한 격차를 없애는 것 등을 포함한다. 중요한 수단은 4년제 공립대의 정원을 늘리고 지역사회 대학들, 기술 및 직업교육기관, 직업훈련소 등등에 더 많은 지원을 하는 것이다. 이들은 어쨌거나 국민 대다수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기술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공적 지원금이 퇴조하고 등록금이 오르면서 학생들이 지는 부채 액수도 치솟아 올랐다. 오늘날 대학생 세대는 산더미 같은 빚을 짊어진 채 사회에 나가야 한다.
 
정부가 노동자 훈련과 재훈련을 위해 쓰는 돈의 액수는 고등교육 관련 지출액수와 비교할 때만 약소한 게 아니다. 다른 나라가 쓰는 비용과 비교해도 그렇다. 경제학자들이 ‘능동적인 노동시장 정책’으로 표현하는 정책은 노동자들이 직업 시장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갖추도록 돕는 정부 프로그램을 말한다. 그런 정책은 노동시장이 그 자체로는 부드럽게 돌아가고 있지 못하는 현실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직업 훈련과 알선 프로그램은 종종 노동자들이 자기 기술에 맞는 일자리를 찾는 데 필요하다. 소힐은 경제 선진국들이 평균 GDP의 0.5퍼센트를 능동적 노동시장 프로그램에 투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랑스,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는 그런 프로그램에 GDP 1퍼센트 이상을 쓰고 있다. 반면 미국은 겨우 0.1퍼센트만 쓴다. 그것은 교도소 유지에 쓰는 비용보다 적다.

  능동적 노동시장 정책에 미국이 무관심한 것은 수요(이 경우에는 노동 수요)와 공급이란 자동적으로 맞춰지기 마련이라는 시장 신앙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또한 고등교육이 기회의 주 원천이라는 능력주의적 신념도 반영하고 있다. 소힐은 이렇게 썼다. “미국이 고용과 훈련을 모른 체하는 이유 하나는 고등교육 지원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대학에 갈 필요가 있다는 따위의 생각 등에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다시피 미국인 중 겨우 삼분의 일만이 학사학위를 갖고 있다. 나머지 모두는 우리가 무서울 정도로 경시하고 있는 유형의 교육 훈련을 통해 수입이 좋은 일자리에 접근해야 한다. 아무리 야심찬 주장이라고 해도 4년제 대학 학위가 성공으로 가는 관문이라는 능력주의자들의 주장은 우리가 다수 사람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교육이 무엇인지 헷갈리도록 한다. 그러한 헷갈림은 우리 경제만 멍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계급이 하는 유형의 일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도록 한다.
 

【 명망의 위계질서 】

 
인재 선별기가 끼친 폐해를 바로잡으려면 직업 훈련에 예산을 더 많이 투입하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가 여러 다른 일들 사이에서 무엇을 더 높이 평가하는지에 대한 재고가 있어야 한다. 이를 시작하는 한 가지 방법은 명품 브랜드 대학에 등록한 학생들의 명예를 드높이고 지역사회 대학이나 기술 및 직업훈련학교 등록자들의 명예는 별로 쳐주지 않는 명망의 위계질서를 뒤엎어 버리는 것이다. 배관공이나 전기 기술자, 치과위생사 등이 되는 법을 배우는 일은 공동선에 기여하는 훌륭한 과정으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시험 점수가 낮은 사람이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하는 과정으로 여길 게 아니라 말이다.

고등교육은 그 영예의 대부분을 그것이 공언한 고등 목표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학생들이 직업 세계에서 필요한 역량을 갖추게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도덕적인 인간이자 민주적인 시민으로서 공동선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사람이게끔 준비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을 가르쳐온 나는 도덕교육 및 시민교육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왜 4년제 대학들이 그런 임무를 도맡아야 하는가? 시민의 민주주의 교육에 대한 보다 포용력 있는 생각은 대학의 시민교육에만 한정하는 입장에 반대할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명문대들은 이 과제를 잘 해내지 못하고 있음부터 알아야겠다. 대체로 그들은 도덕 및 시민교육 관련 과목을 많이 개설하지 않는다. 또한 학생들이 공공 문제에 대해 좀 더 현실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도와줄 역사 과목 등도 중시하지 않는다. 대신 ‘가치중립적’인 사회과학 과목들이 앞서나가는 한편, 좁은 범위에다 고도로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는 강좌들이 늘고 있다. 덕분에 도덕 및 정치철학에 관련된 큰 문제들을 따져볼 기회, 그리고 도덕 및 정치적 고정관념들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게 해줄 기회는 줄어들고 있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리고 많은 대학들이 학생들에게 이런 저런 윤리학이나 시민교육 과정을 이수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오늘날 우리의 잘나간다는 대학들은 근본적인 도덕 및 시민적 문제들에 대해 논리적 추론과 숙고를 할 역량을 키우기보다는 기술관료적 스킬과 기술관료적 세계관에 대해 주입시키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이는 지난 두 세대 동안 이어진 집권 엘리트의 잘못에 기여했을 수 있고, 공적 담론에서 도덕 논의가 실종된 데도 한몫했을 수 있다.

그러나 명문대들이 도덕 및 시민교육을 어떻게 운영하는지에 대한 나의 평가가 지나치게 박한 것일지는 몰라도, 4년제 대학들이 도덕교육과 시민교육에서 유일한 중심이 되어야 할 까닭은 없다. 사실 상아탑 밖에서의 시민교육은 오랜 전통이다. 고무적인 사례 하나는 미국의 최초 노동조합 중 하나인 ‘나이츠 오브 레이버(Knights of Labor)’다. 이들은 공장에 독서실을 만들고 노동자들이 공공문제에 대해 스스로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쪽의 수요는 시민 교육을 직업 세계에 녹아든 것으로 보았던 공화주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문화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래시가 본 대로, 19세기에 미국을 찾은 외국인 방문자들은 삶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던 평등에 놀랐다. 그 평등이란 부의 평등한 분배도, 심지어 출세의 기회가 평등하다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시민이 거의 똑같은 기반에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민권이 있다면, 사회의 가장 보잘 것 없는 구성원일지라도 다른 곳에서는 특권층에게만 한정되는 지식과 교양을 접할 기회가 자유롭다. 모두의 복지를 위해 기여하는 노동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인 형태도 띤다. 이런 말이 있다. “미국의 기술자들은 무식한 일꾼이 아니다. 개명되고, 사려 깊은 사람들로, 자기 손을 어떻게 쓸지 알 뿐 아니라 원리원칙을 어떻게 쓸지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술자들을 위한 잡지는 이런 성찰적 주제를 계속해서 다룬다.

래시는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때, 19세기 미국 사회의 평등주의적 성격은 사회적 이동성이 아니라 지성과 교육이 모든 계층과 직업에 널리 퍼져 있던 데서 나온다고 보았다. 이는 능력주의적 선별이 망쳐 버린 평등의 유형이다. 능력주의는 지성과 교육을 고등교육의 상아탑에 온통 몰아넣어 두고서, 누구에게나 그 상아탑에 들어올 공평한 경쟁이 보장되리라고만 약속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접근권 배분은 노동의 존엄을 떨어뜨리며 공동선을 오염시킨다. 시민교육은 담쟁이가 넝쿨진 캠퍼스 못지않게 지역사회 대학,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될 수 있다. 향상심 있는 간호사와 배관공들이 야심적인 경영 컨설턴트보다 민주적 논쟁에서 뒤떨어질 까닭은 없다.
 

【 능력에 따른 오만 혼내주기 】

 
능력의 가장 유력한 라이벌, ‘우리는 우리 운명의 주인이며 뭐든 우리가 얻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의 라이벌은 ‘우리 운명은 우리가 전부 통제할 수 없고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다른 누군가에게, 가령 신이거나, 운명의 장난이거나, 순간의 선택에 따른 예상 밖의 결과 등에 좌우된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내세에서 구원받을지 현세에서 성공할지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믿음에 따라 사는 삶은 자유의 관념,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얻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신념과 좀처럼 양립할 수 없다. 이는 어째서 능력주의가 우리의 호감을 사고 성공자들이 자기 성공은 자기 자신의 덕이라고 믿으며 마찬가지로 실패자들은 스스로를 비하하게 되기 쉬운가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가장 기세등등하던 때조차 능력주의 신념은 그것이 약속한 것처럼 스스로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길을 열지 못했다. 연대의 근거 역시 제시하지 못했다. 패자에게 관대하지 않고 승자에게 압제적임으로써 능력주의는 폭군이 되었다. 그리고 그 폭군에게 우리는 그 고대의 라이벌을 대립시킨다. 이는 ‘삶의 작은 영역에서는 운수가 좌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운을 소환하여 능력의 오만을 혼내주려 하는 것이다.
 

【 한국과 능력주의 】

 
https://youtu.be/iXAvkmaut5g

https://youtu.be/sU8DRDEG86o

https://youtu.be/dlirLYxG4hI?si=9NGapmDbPvQMQcEY

https://youtu.be/lZ4KWFPGVOU

https://youtu.be/iMEWpfXXjVc

■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원고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자못 회의적이었다. ‘이런 책이 한국에서 팔리면 얼마나 팔리겠어? 철학 또는 정치학 전문가들이나 관심 있어 하겠지.” “아무리 잘 팔려도, 3,000부 이상은 어림도 없어!” 그 뒤 일어난 일은 아직까지 내 생애 최대의 오판 베스트 3에 들어갈 만큼 뜻밖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샌델의 역작을 직접 번역한 지금 역시도, 나는 적지 않게 회의하고 있다. 원제 그대로 능력주의를 하나에서 열까지 비판한 책인데, 우리나라야말로 능력주의를 종교처럼 받들어온 참으로 보기 드문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능력주의를 갈구해 왔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최소 수백 년 동안 과거제가 사람으로 태어나 제 몫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여겨졌고, 사실상 과거에 낄 수 없는 중인 이하의 신분들은 한시를 짓고 한문 경전을 공부하는 사설 모임을 만들어서라도 그 한을 달랬다. 일제강점기에는 심훈의 《상록수》 한 장면처럼 문 닫힌 학교 담장을 해바라기를 해서라도 넘겨보며 칠판의 글씨를 외면서 공부하려고 했다. 해방 이후의 향학열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미국인들이 능력주의에 유독 친화적인 까닭을 ‘출신이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에서 찾지만, 현대 한국인들은 ‘출신이 무엇이든, 열심히 공부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코리안 드림’을 오래 가꿔왔다.
 
물론 이런 과열된 능력주의는 폐단이 있다. 점수 하나가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에서, 너무 많은 것이 걸린 시험판에 너무 많은 경쟁이 몰려 있으니 대학이 각자 자율적으로 뽑고 싶은 사람을 각각의 잣대대로 뽑을 수가 없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처럼 주관과 개성이 넘치는 입시를 채택할 수도 없다. 대학 입시는 철저히 ‘객관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최근 정권이 입시 공정성 문제로 좌초하기도 했고, 이 책을 번역하느라 바쁘던 2020년에는 ‘생활과 윤리’ 문제의 정답이 과연 적절한지 판단하기 위해 그 문제와 관련된 저명한 해외 철학자에게 질의가 날아가기도 했다. 심지어 실제 수능도 아닌 모의고사 문제인데도!
 
그런 한편 요즘엔 ‘코리안 드림’의 빛이 바래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나던 때는 점점 과거사가 되어가고, ‘점수 몇 점’보다는 태어날 때 무심코 들고 나온 수저의 색깔이 점점 더 인생을 좌우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 비하면 능력주의에 대한 올인이 아무래도 수지가 맞지 않아 보이는데, 한국인들은 아직도 태세전환을 하지 않는다. 솔직히 달리 방법이 없기도 하다. 그러면 평가 방법에 있어 융통성이 부족한 점, 사회계층화 추세를 압도할 만큼 능력주의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점만이 한계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 책의 저자가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듯 능력주의는 ‘사람 위에 사람’을 두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들 순위가 정해진 게임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가장 좋다는 대학교의 가장 좋다는 학과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평생을 두고 크든 작든 패배감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국민의 절대 다수를 패배자로 만드는 체제가 효율적일 리도, 정의로울 리도 없다. 누군가는 의사를 하고 누군가는 펀드매니저를 하고 누군가는 초등학교 교사를, 누군가는 환경미화원을 해야 하는 사회가 정상일진대, 샌델이 몇 번이고 강조하듯 모든 사람의 직업이 각각의 물적, 심리적 가치를 인정받고 긍지를 얻을 수 있어야만 행복하고 조화로운 사회일 것이다. “물론 내 연봉은 당신보다 적지만, 나는 당신과 비교해서 하등한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지 않아요”라고 누구나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사회 말이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누군가의 말처럼 “모두가 개천에서 난 용이 되려 하지 않아도 되는, 가재, 붕어, 개구리도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사회제도와 사회문화를 만드는 게 정답일까? 그렇다! 그러나 이는 학력고사 시절에 매년 고사출제위원장이 마이크에 대고 “정상적인 고교 과정을 이수한 학생이면 누구나 만점을 받을 수 있는 시험”이라고 한 게 정답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론상 문제는 없지만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직업의 귀천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일찌감치 진로를 인문계와 실업계로 나누고, 어느 쪽을 택하든 물질적 격차는 크지 않도록 배려한다는 북유럽의 경우조차 ‘모두가 자기 직업을 똑같이 자랑스러워하는 사회’는 못 된다. 이 책에서도 나오지 않는가. 미국인들에 비해 유럽인들의 사회 계층 이동성에 대한 믿음이 훨씬 낮다고.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여기서 역자는 조심스럽게, 저자가 그렇게까지 강조하지는 않은 능력주의의 폐단을 지적하고자 한다. 바로 능력주의는 ‘생각하지 않는 백성’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완벽한 사회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후계자들을 위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머리를 굴리고, 머리를 맞댄다. 그것이 생각하는 백성의 본분이며, 고대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정신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라는 명제 위에 서는 한편, 신분제와 능력주의는 ‘사람 위에 사람이 있다’는 명제를 강조한다. 조선시대 백성은 자기 앞가림만 하면 그만이었지, 특별히 나라나 사회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건 잘나디 잘난 나라님과 나리님들의 몫이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명목상 똑같은 시민이지만 능력주의의 기준에 따라 탁월하고 비범한 존재들로 입증된 엘리트들이 우리와 나라의 운명을 정하게끔 맡겨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서구가 신분제를 버리고 민주주의를, 그리고 능력주의를 강구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 운명에 대한 생각을 게을리 했다. 그래서 개인과 민족의 치욕을 겪었고, 그래서 유난히 치열한 능력주의를 종교처럼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너머를 볼 때다. 완벽한 사회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누군가를 부당하게 괴롭히지 않는 사회, 각자의 개성과 꿈이 세상의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는 말이 불편한 지혜가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 방법에 대해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그리고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이 말하는 능력주의의 폐해는 과연 무엇인가를 되새기며..

- 함규진,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

 

 


 

【 공동선( 共同善) 】

■ 공동선( 共同善, the common good ) : 모든 이에게 두루 미치는 선(善) 즉, 개인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를 위한 선(善). 공익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일명 '공공선'(公共善), 혹은 사회 구성원 전체에 공통되는 이익(public interest)이라는 점에서 '공공복지'(公共福祉)라고도 한다. 이 같은 공동선의 추구는 다양한 구성원과 복잡한 사회 체계를 구축한 현대 사회를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하는 핵심적인 원리이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존적 존재(共存的 存在)이기 때문에 개개인이 공익(公益)보다 사익(私益)을 앞세우면 공동체는 혼란에 빠지고 그 사회는 와해되고 만다. 하지만, 공동선을 지나치게 앞세워 개인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변질된 집단주의나 권력 지향주의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공동선이라는 가치의 추구도 결국은 인간 개개인의 가치와 존엄성 존중은 물론, 모든 구성원이 다함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
 
https://youtu.be/cvE8PIvRI2k

https://youtu.be/skp3dyM9dm4?si=3jM6P1_dYqroKoOp

https://youtu.be/dovEgBq8HZ0?si=38y_C3X0Lw147wUS

https://youtu.be/w5E7N17Pwsg?si=kROuPsaC-TyHF1WB

https://youtu.be/GK8j9_-U69I

https://youtu.be/vDKB59VhMRc?si=calHBl0WM2vAFMTR

https://youtu.be/b6n8Iub7YQ0?si=RGQcUBXqaEryF-Dp

https://youtu.be/n2-qwTj6DPw?si=ULlE8v7HdkrgT2A2

 
http://m.knnews.co.kr/mView.php?idxno=1395325&gubun=

한국 노인빈곤율 30%대로 내려왔지만 85세 이상은 오히려 상승

[국민연금연구원의 '노인빈곤 실태 및 원인분석을 통한 정책방향 연구'(안서연) 보고서 캡처] [연합뉴스TV 제공] ...

m.knnews.co.kr

https://www.joongang.co.kr/amparticle/25118816

[준비 안 된 ‘노인공화국’] 노인 빈곤·자살률 OECD 1위, “늙으면 빨리 죽어야지”…농담이 현

보건복지부의 ‘통계로 보는 사회보장 2020’에 따르면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OECD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했다. 이민아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의 65세 이상과 현재 65세 이상은 육체적, 정신

www.joongang.co.kr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2208.html

75살 이상 노인 절반이 가난한 이유는

undefined

h21.hani.co.kr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38120

"연금 끊길까봐"…죽은 엄마 시신 2년 넘게 방치한 40대 딸 | 중앙일보

어머니 사망 후 28개월간 A씨가 대신 받은 연금은 1500만원 정도다.

www.joongang.co.kr

 

【 불평등과 중산층 】


과학 발전과 상업화, 혁신 기술의 확산은 사람들이 다양한 맥락에서 생각과 가치, 이해관계와 사회 규범을 발전시키고 교환하면서 생기는 여러 사회적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기술의 사회적 영향을 완전히 구별하기 어렵다. 여러 요소가 뒤얽혀 우리의 사회와 혁신을 구성하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사회와 혁신이 수많은 요소의 협력적 산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전통적 가치 시스템에서 얻은 자양분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현대적 가치를 흡수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수많은 기본 가설을 시험대에 오르게 하는 제4차 산업혁명은 자신들의 근본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지극히 종교적인 사회와 조금 더 세속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형성된 신념을 가진 사회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갈등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결국 글로벌 협력과 안정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극단적이고 이념적인 동기로 폭력을 행사하는 급진 단체에서 초래할 수도 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애넌버그 커뮤니케이션, 저널리즘 대학의 통신기술과 사회 전공교수로 재직 중인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스(Manuel Castells) 박사는 "주요 기술의 변화가 일어나는 모든 순간마다 사람들과 기업, 기관들은 변화의 깊이를 체감하지만, 변화가 가져올 영향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자주 압도당한다"라고 지적했다. 무지로 인해 압도당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이며, 특히 현대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하며 서로 연계하는지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앞에서 논의한 경제, 기업, 지정학, 국제안보, 지역과 도시에 대한 제4차 산업혁명의 다양한 영향을 통해 새로운 기술혁명이 사회에 다중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이제부터는 변화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동력, 즉 불평등 심화 가능성이 중산층에게 어떠한 압박을 가할지, 디지털 미디어의 통합이 공동체 형성과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 살펴보겠다.
 
제4차 산업혁명이 경제와 기업에 미칠 영향력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까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데 일조한 다양한 구조적 변화를 강조했다. 제4차 산업혁명이 전개되면 이러한 구조적 변화로 인해 불평등이 더욱 심화될지도 모른다. 로봇과 알고리즘이 점차 노동을 자본으로 대체하고, 투자는 (더 정확하게는 디지털 경제하에서 사업을 할 때) 자본집약성이 완화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시장은 전문적 기술이라는 제한된 범위로 더욱 편중될 것이고, 전 세계적으로 연결도니 디지털 플랫폼과 시장은 소수의 '스타'들에게 지나치게 큰 보상을 주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트렌드가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면, 저숙력 노동력이나 평범한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새로운 아이디어와 비즈니스 모델,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혁신이 주도하는 생태계에 완벽히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승자가 될 것이다. 이러한 역학관계로 인해 기술은 고소득 국가에서 인구 대다수의 소독이 정체되거나 심지어 줄어들게 된 주된 요인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오늘날 세계는 실제로 매우 불평등하다. 크레디트 스위스(Credit Suisse)가 발표한 <2015년 세계 부에 관한 보고서(Global Wealth Report 2015)>에 따르면 전 세계 자산의 절반 이상이 전 세계 상위 1퍼센트 부자에게 귀속된 반면, 전 세계 인구 하위 50퍼센트의 자산을 모두 합쳐도 전 세계 부의 1퍼센트에도 못 미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회원국 인구 상위 10퍼센트의 평균 소득이 하위 10퍼센트의 평균 소득의 대략 9배 수준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대다수의 국가에서는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전 소득층에 걸쳐 급속한 성장을 이루고 획기적으로 빈공층을 줄인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한 예로, 중국의 경우 1980년대 약 30 정도였던 지니지수(Gini Index)가 2010년 45로 상승했다.
 
불평등의 증가는 단순한 경제현상이 아니라 중요한 사회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영국의 사회역학자인 리처드 윌킨슨(Richard Wilkinson)과 케이트 피킷(Kate Pickett)은 저서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Why Greater Equality Makes Societies Stronger)>를 통해 불평등한 사회는 더욱 폭력적인 성향을 띠고, 수감자의 수가 더욱 많으며, 정신질환과 비만 수준 역시 훨씬 높고, 기대수명과 신뢰도가 낮다는 데이터를 제시한 바 있다. 당연한 결과로, 평균소득을 조절한 후 더욱 평등해진 사회에서는 아동복지가 좋아졌고, 스트레스와 약물 사용이 줄어들었으며, 유아 사망률 또한 낮아졌다. 다른 연구자들 역시 불평등 수준이 높은 경우 차별이 심화되고 어린이와 청소년의 학업 성취도가 감소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경험적 자료는 확실성이 떨어지지만, 불평등 수준이 높아질수록 사회적 불안 역시 높아진다는 공포는 널리 퍼져 있다.
 
세계경제포럼은 <2016년 세계 위험 보고서(Global Risks Report 2016)>에서 소개한 29개의 세계적 위험 사안과 13개 글로벌 트렌드 가운데 소득 격차 확대, 실업 혹은 불완전 고용, 그리고 심각한 사회불안 사이에 가장 큰 상호연관성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뒤에서 더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연결성과 기대치가 높아진 세상에서 만약 사람들이 번영의 가능성과 삶의 의미를 조금도 찾을 수 없다고 느낀다면 굉장히 심각한 사회적 위험 요인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에는 중산층 직업은 더 이상 그들의 삶의 수준을 보장하지 못하고, 지난 20년간 전통적으로 중산층을 결정지은 네 가지 속성(교육, 건강, 연금, 그리고 주택)의 실적이 인플레이션보다 열악했다. 미국과 영국의 학비는 교육이 사치로 간주될 만큼 높아졌다. 중산층에게 있어 기회를 제한하는 승자독식 체제의 시장경제는 사회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과 포기를 조장할 수도 있다.

【 불평등(Inequalities) 】

 
https://youtu.be/QgCFgedXdSw

누구나 똑같이 감염시킨다는 점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위대한 평등주의자(great leveller)'라 칭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심각하게 잘못된 상투적 비유에 불과하다. 현실은 정반대다. 코로나19는 언제 어디서든 기존의 불평등 상태를 악화시켰다. 그만큼 코로나바이러스는 의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평등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소득, 재산, 기회의 차이를 더 심화시킨 '위대한 불평등주의자(great unequalizer)'다. 코로나19로 인해 경제적, 사회적으로 취약한 전 세계 수많은 사람뿐만 아니라, 취약성(이것은 사회 안전망이 부실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가족과의 유대감이나 사회적 유대감이 약한 나라들에서 더욱 만연된 현상이다)의 깊이와 정도까지 만천하게 드러났다. 물론 코로나19 발발 전부터 이미 상황이 그렇긴 했지만, 다른 범세계적 문제들에서도 목격됐듯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증폭기 역할을 하면서 과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오랫동안 무시해왔던 불평등과 관련된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첫 번째 영향은 다양한 사회 계층이 노출된 위험 정도의 충격적인 차이를 조명함으로서 사회적 불평등이란 거시적 난제를 부각시킨 것이다. 세계 많은 곳에서 봉쇄 기간 동안 이분법적 사회 모습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즉, 상위층과 중산층은 집에서 재택근무와 자율학습이 가능했지만, 일자리가 있는 노동자계층은 집에 머물 수도 자녀 교육을 감독할 수도 없었다. 이들은 병원 청소, 슈퍼마켓 계산, 필수품 운반, 안전 관리 등을 하며 일선에서 (직간접적으로) 사람들의 생명과 경제를 구하는 일에 일조했다. 미국처럼 고도로 발달한 서비스 경제의 경우 전체 일의 약 3분의 1을 재택 또는 원격으로 처리할 수 있는데, 업종별 소득에 다라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금융 및 보험 종사자의 75% 이상이 원격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반면 식품 산업에서는 훨씬 적은 급여를 받는 노동자의 3%만이 그런 식으로 일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 와중(4월 중순 기준)의 감염 사례와 사망자 수를 보면 코로나19가 많은 사람들이 발발 초기에 불렀던 '위대한 평등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람들에게 공정하거나 공평하게 치명적 피해를 주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곧장 드러났다. 미국에서는 코로나19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저소득층, 노숙자와 같은 취약 계층에 특히 더 큰 피해를 줬다. 인구의 15% 미만이 흑인인 미시간주에선 흑인 거주자들이 코로나19 합병증으로 인한 사망자의 약 40%를 차지한다. 코로나19가 흑인 사회에 지나칠 정도로 불균형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단지 기존의 불평등 양상을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다른 많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더 가난하고, 실직하거나 할 일이 많지 않고, 수준 이하의 주거지나 생활환경에서 살 가능성이 크다. 또 이들은 코로나19에 특히 더 치명적인 비만, 심장병, 당뇨병과 같은 지병에 더 많이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코로나19와 그에 따른 봉쇄의 두 번째 영향은 수행되어야 하는 일의 본질적 성격과 내재적 가치 및 그것이 주는 경제적 보상 사이의 심각한 단절을 드러낸 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개인들을 가장 하찮게 여겨왔다. 냉정하게 현실을 따져보면, 당면한 코로나19 위기의 영웅들, 즉 위험을 무릅쓰고 아픈 사람을 돌보고 경제를 어쨌든 돌아가게 만든 사람들은 간호사, 청소부, 배달 기사, 식품 공장과 요양원과 창고에서 일하는 노동자 등 가장 돈을 못 버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경제적, 사회적 복지에 대한 그들의 공헌은 줄곧 무시되어 왔다. 이건 전 세계적 현상이지만, 빈곤과 불안정이 공존하는 앵글로색슨 국가들의 경우 특히 더 극명하다. 이들 나라의 하위 노동 계층은 낮은 임금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실직 위험도 가장 높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지역사회에서 일하는 요양보호사들 60% 가까이가 '제로아워 계약(zero-hour contract)'에 따라 일한다. 즉, 그들은 정해진 노동 시간 없이 임시직 계약을 한 뒤 일한 만큼 시급을 받는 노동 계약을 체결한 상태로 일한다. 마찬가지로, 식품 공장 노동자들은 보통 계약보다 권리가 적고 고용 안정도 보장되지 않는 임시 고용 계약을 맺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부분 자영업자로 분류되는 배달 기사들은 운송 건당 보수를 받고, 병가病暇도 없으며, 공휴일 수당도 받지 못한다. 이런 현실은 켄 로치(Ken Loach) 감독의 최신작인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에서 신랄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영화는 항상 경미한 불행이 닥치더라도 곧바로 육체적, 감정적, 혹은 경제적 파멸을 겪게 되고,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인해 그런 상황이 더욱 악화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사회적 불평등이 커질까? 아니면 반대로 줄어들까? 많은 일화적인 증거들을 살펴보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불평등이 커질 가능성이 크다. 전술한 바와 같이 소득이 없거나 낮은 사람들은 코로나19로 인해 더욱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은 만성질환과 면역 결핍에 시달리기 때문에 코로나19에 감염되고 그로 인해 심각한 고통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흑사병 같은 이전의 팬데믹 사태 때처럼 모두가 의학적인 치료와 백신의 혜택을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부인인 앤 케이스(Anne Case) 프린스턴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와 함께 <절망사와 자본주의의 미래(Deaths of Despair and the Future of Capitalism)>를 공동으로 저술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Angus Deaton) 프린스턴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마약 제조업자와 병원이 가장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을 희생시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부유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추진되는 초완화적 통화 정책은 특히 금융시장과 부동산 분야 자산 가격에 기름을 부음으로서 부의 불평등을 확대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추세가 역전되어 반대로 불평등이 줄어들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부자들이 독점적으로 누리는 특혜의 부당함에 분노한 사람들이 급증하면서 광범위한 사회적 반발이 일어날 수 있다. 미국에서는 다수 또는 아주 목소리가 큰 소수가 의료 시스템에 대한 국가 내지는 지역사회의 통제를 요구할 수 있다. 유럽에서도 의료 시스템에 대한 국가 내지는 지역사회의 통제를 요구할 수 있다. 유럽에서도 의료 시스템에 대한 자금 지원 부족이 더 이상 정치적으로 용인되지 않을 수 있다. 또 코로나19는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가치 있게 생각하는 직업들에 대해 재고해보고, 우리 모두가 그들에게 보상하는 방법을 재설계하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앞으로 사회는 경제, 사회, 복지에 대한 기여도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낮은 공매도(short-selling : 특정 종목의 주가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면 해당 주식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주식을 빌려 매도 주문을 내는 투자 전략으로 주로 초단기 매매차익을 노리는 데 사용되는 기법) 전문가인 스타 헤지펀드 매니저가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반면에 사회 복지에 크게 기여하는 간호사는 그 금액의 극히 일부만을 번다는 사실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낙관적인 시나리오 속에서는 저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를 가진 다수의 노동자들이 우리의 집단적 복지에 꼭 필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점점 더 많이 인식하게 됨에 따라, 이들의 근로 조건과 보수를 높여주는 쪽으로 정책 방향이 조정될 것이다. 기업의 이윤이 감소하거나 물가가 오르더라도 이들의 임금은 더 나아질 것이다. 또 불안정한 계약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허점을 정규직과 더 나은 훈련으로 대체하라는 사회적, 정치적 압박도 거세질 것이다. 단, 그럼으로써 불평등은 감소할 수 있지만, 과거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무엇보다 대규모 사회적 혼란 없이는 이런 낙관적인 시나리오대로 될 것 같지는 않다.

 
빈부격차를 그럴싸하게 설명하는 법 】
 

https://youtu.be/rerfSx5qSJ4?si=pcZKK4dlDY9HdYtu

■ 노동계급 및 중산층 유권자들이 엘리트들에게 분노를 터뜨리게 된 계기는 뭘까? 해답을 얻으려면 지난 수십 년간의 빈부격차 상황부터 알아봐야 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궁극적으로 사회적 인정 및 존중감의 조건과 관계가 있다. 세계화는 그 과실을 불균등하게 배분했다(절제해서 표현한 것이다). 미국의 경우 1970년대부터 지금껏 늘어난 국민소득 대부분이 상위 10퍼센트에게 돌아갔고, 하위 50퍼센트는 거의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실질소득 기준 노동가능 연령 인구의 중위소득은 약 3만 6,000달러인데, 그것은 40년 전보다 낮은 수준이다. 오늘날 가장 부유한 1퍼센트의 미국인이 하위 50퍼센트가 버는 것보다 더 많이 벌고 있다.
 
그러나 불평등의 폭발적 증가만으로는 포퓰리즘의 분노, 그 핵심을 설명할 수 없다. 미국인들은 오래전부터 소득과 재산의 불평등을 참아왔다. 어디서 출발하든 부자라는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사회적 상승 가능성에 대한 이런 믿음은 아메리칸 드림의 핵심이다. 이 믿음에 응해, 주류 정당과 정치인들은 기회의 평등을 늘림으로써 증가하는 불평등에 대응해왔다. 세계화와 기술 혁신으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을 억누르고, 고등교육 이수 기회를 넓혔다(인종, 민족, 성의 장벽을 제거함으로써 말이다). '기회 균등'이라는 수사는 규칙을 지키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재능이 이끄는 만큼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구호로 요약되었다. 최근 몇 년간은 정치인과 정당들이 모두 이 구호에 목매다 못해 성경구절인양 받드는 모습이었다.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부시, 마코 루비오는 물론이고 민주당의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등이 모두 한결 같았다. 오바마는 이 구호를 약간 변형하기도 했다. 팝송 가사를 본떠 "하면 된다(You can make it if you try)"라고 했던 것이다. 그의 집권 기간에, 그는 이 구호를 연설이나 공식 발언 등에서 140회 이상 써먹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상승 찬가'는 이제 속빈 강정이 되었다. 오늘날의 경제 상황상 사회적 상승은 결코 쉽지 않다.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미국인은 대개 가난한 성인이 된다. 소득 기준 하위 5분위 가정 출신자는 스무 명 가운데 한 명만 상위 5분위에 이르렀고, 대부분은 중산층에 도 이르지 못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일은 미국보다 캐나다, 독일, 덴마크, 그 밖의 유럽 국가에서 더 많다. 이는 불평등에 대해 미국이 오랫동안 변명해온 '계층 이동 가능성(mobility)'이라는 말과 들어맞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미국은 계급이 뚜렷한 유럽 사회에 비해 불평등 걱정을 덜 해도 돼. 우리 사회에서는 계층 상승이 가능하기 때문이지." 미국인의 70퍼센트는 '가난한 사람이 자력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으며, 유럽인은 35퍼센트만이 그렇게 여긴다. 이런 사회적 이동성 관련 믿음은 미국이 주유 유럽 국가들에 비해 왜 그처럼 복지제도에 소극적인지 설명해준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적 이동이 가장 잘 일어나는 국가들은 평등 수준 또한 가장 높은 국가들인 경우가 많다. 이를 보면 사회적 상승의 능력은 가난이 주는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의 의지보다는 교육, 보건을 비롯해 직업 세계에서 개인을 뒷받침해 주는 수단에 대한 접근성에 달려 있는 듯 보인다.
 
최근 수십 년 동안의 폭발적인 불평등 증가는 사회적 상승을 가속화시킨 게 아니라, 정반대로 상류층이 그 지위를 대물림해줄 힘만 키워주고 말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명문대학들은 한때 특권층 자녀들의 입학에 걸림돌이 되었던 인종, 종교, 성, 민족 등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SAT는 계층과 가문이 아니라 학업 성적으로 학생을 뽑겠다는 약속과 함꼐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늘날의 능력주의는 세습귀족제로 굳어져가고 있다. 하버드와 스탠포드 대학생 삼분의 이는 소득 상위 5분위 가정 출신이다. 장학금과 기타 지원책이 후하지만, 아이비리그 대학생 가운데 하위 5분위 출신자는 4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하버드와 그 밖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소득 상위 1퍼센트(연간 63만 달러 이상) 출신의 학생은 하위 50퍼센트 가정 출신 학생보다 많다. 노력과 재능 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는다. 기회 균동에 대한 담론이 과거와 같은 반응을 얻지 못하는 이유라 볼 수 있다. 사회적 이동성은 더 이상 불평등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다. 빈부격차에 대한 진지한 대응은 무엇이든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직접 다뤄야만 하며,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 일의 존엄성 하락 】

■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70년대까지, 대학 학위가 없어도 좋은 일자리를 구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편안한 중산층의 삶을 사는 일이 가능했다. 이는 이제는 훨씬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지난 40년 동안 대졸자와 고졸자의 수입 격차(경제학자들이 “대졸자 프리미엄”이라 부르는)는 두 배로 늘어났다. 1979년, 대졸자는 고졸자보다 40퍼센트 정도 많은 수입을 올렸다. 2000년대에는 80퍼센트까지 높아졌다. 세계화 시대가 고학력자에게는 많은 보상을 해주었지만,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1979년에서 2016년까지 미국 제조업 일자리의 수는 1,950만에서 1,200만까지 줄었다. 생산성은 올랐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산품 가격에서 갈수록 더 적은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경영자와 주주의 몫은 점점 더 많아졌다. 1970년대 말 주요 미국 기업 CEO는 일반 노동자보다 30배 정도 많은 보수를 받았다. 2014년 그것은 300배로 늘어났다. 미국 남성의 중위소득은 물가 연동 실질 가격으로 볼 때 반세기 동안 답보 상태다. 1979년 이후 일인당 국민소득은 85퍼센트 늘어났지만, 비대졸자 백인 남성의 소득은 1979년 당시보다 실질적으로 낮다.

그러니 그들이 불행감에 시달리는 건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경제적 곤경만이 아니다. 능력주의 시대는 노동자들에게 더 악랄한 상처를 입히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의 존엄성을 깎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시험 점수를 잘 따고 대입 시험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브레인’을 칭송하면서, 인재 선별기는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들은 시궁창에 빠트렸다. 그것은 학력이 낮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하는 일은 돈 잘 버는 전문직업인들의 일에 비해 시장에서 별가치가 없어요. 공동선에도 별 기여를 하지 않죠. 당연히 사회적 인정이나 명망도 별로 따라붙지 않아요.” 그것은 시장이 승자에게 퍼붓는 과도한 보상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비대졸자 노동자에게 던져 주는 쥐꼬리 만한 보상도 당연시했다.

누가 뭘 가지는 게 정당한가에 대한 이런 식의 사고는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 이런 저런 직업의 시장 가치가 그것이 공동선에 기여하는 정도와 비례한다고 보면 오류다(부유한 마약 딜러와 박봉의 고등학교 교사 이야기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에는 ‘우리가 버는 돈이 우리의 사회적 기여도를 반영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내려버렸다. 그런 주장은 공적 문화 곳곳에서 메아리친다. 능력주의적 선별은 이런 아이디어를 더욱 굳힌다. 1980년 이래 중도 우파 또는 중도 좌파 주류 정당들의 힘을 빌린 신자유주의적 또는 시장 중심적 세계화 역시 그렇다. 세계화가 극심한 불평등을 초래했어도, 이 두 가지 세계관(능력주의와 신자유주의)은 그에 대한 저항력의 핵심을 분쇄했다. 이들은 또한 노동의 존엄성도 깎아내려, 엘리트에 대한 분노와 정치적 반격에 불을 지폈다.

2016년 이후 시사평론가와 학자들은 포퓰리즘의 불만에 대해 논쟁해왔다. 그것은 일자리 감소와 임금 정체 때문인가 아니면 문화적 변동 때문인가. 그러나 그것들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인 것이다. 그것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방법이자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 원천이다. 그래서 세계화가 일으킨 불평등이 왜 그토록 강력한 분노로 이어졌는지 설명된다. 세계화에 뒤처진 사람들은 다른 이들은 번영하는 동안 경제적 곤경에 처했을 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일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함을 깨달았다. 사회의 눈에, 그리고 아마 스스로의 눈으로도 그들의 일은 더 이상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라고 비쳐지지 않는다.
 

【 절망 끝의 죽음 】
 

https://www.youtube.com/live/mBXTUsKSuRM?feature=share

https://youtu.be/8YpqraUgpWg?si=Kv5rAfEefQjntSGL

https://youtu.be/DCYU7qDnyCk?si=7j-fUxN2YD2AJhQ4

https://youtu.be/5Ti8-u0kJHA

https://youtu.be/CJAU4v_lPQY

https://youtu.be/dDlqDw7iC6E?si=cHYeXS-hBExJzo0M

노동계급의 마음의 상처로 빚어진 현상은 구직 포기뿐만이 아니다. 다수가 삶 그 자체를 포기한다. 최악의 비극적 지표는 ‘절망 끝의 죽음(Deaths of Despair)’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표현은 최근 놀라운 발견을 해낸 프린스턴대의 경제학자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튼이 만들었다. 20세기 들어 현대 의학이 질병을 몰아붙이면서 기대 수명은 계속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2014년에서 2017년 사이 그것은 증가세를 멈추더니 오히려 줄어들었다. 10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인의 기대수명은 3년 연속 내림세를 보였다. 그것은 의학이 새로운 치료법이나 질병 대처법을 찾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케이스와 디튼은 사망률의 증가가 자살, 약물 과용, 알코올성 간질환의 만연에 따른 것임을 알아냈다. 그들은 이 만연 현상을 ‘절망 끝의 죽음’이라 불렀는데, 그 대다수가 여러 방법을 통해 스스로 불러들인 죽음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10년간 계속 늘어난 이런 죽음은 특히 중년 백인 남성 사이에서 많았다. 45세에서 54세 사이의 백인 남성과 여성에게 절망 끝의 죽음은 1990년에서 2017년 사이 세 배로 늘었다. 2014년 처음으로 이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심장마비보다 약물, 알코올, 자살로 숨지는 경우가 많게 나타났다. 노동계급 사회와 좀 떨어져 사는 사람들의 경우 이 위기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이 죽어가고 있는지는 일반의 무관심 때문에 가려진다. 그러나 2016년에는 미국인 가운데 약물 과잉으로 한 해에 죽는 숫자가 베트남 전쟁 전체 사망자보다 많아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더욱 놀랄 만한 비교를 들었다. 이제 절망 끝의 죽음으로 2주 동안 희생되는 미국인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18년 동안 희생된 숫자보다 많다.

이런 음울한 전염병은 왜 생겨났을까? 학력 문제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서 그럴듯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케이스와 디튼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절망 끝의 죽음 사례의 증가는 학사학위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예외 없이 발생하고 있다. 4년제 대학 학위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사례에서 제외된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이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 중년(45세~54세) 백인 남성과 여성의 전반적인 사망률은 지난 20년 동안 별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교육을 기준으로 해보면 사망률에 큰 차이가 난다. 1990년대 이후 대학 졸업자의 사망률은 40퍼센트 감소했다. 비대졸자의 경우에는 25퍼센트 늘었다. 여기서 학력의 가치가 또 하나 드러나는 셈이다. 만약 학사학위가 있는 중년이라면 그렇지 않은 동년배에 비해 사망 확률이 사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

절망 끝의 죽음은 이런 차이의 대부분을 뒷받침한다. 저학력자는 오랫동안 대졸자에 비해 알코올, 약물, 자살로 죽을 위험이 높았다. 그러나 죽음에 있어서의 학력 간 균열은 최근에 급격히 커지기 시작했다. 2017년 비대졸자는 대졸자보다 절망 끝의 죽음에 희생되는 경우가 세 배나 많았다. 이는 빈곤에 따른 불행이며, 학력 간 균열에 따른 사망률의 차이는 단지 저학력자가 가난할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겠다. 케이스와 디튼도 그런 가능성을 고려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함을 발견했다. 1999년에서 2017년 사이 절망 끝의 죽음의 급격한 증가는 그에 비례하는 빈곤의 급격한 증가 같은 현상을 동반하지 않았다. 또한 주州별로 조사했을 때 자살, 약물 과용, 알코올에 의한 죽음과 빈곤률 상승 사이에는 이렇다 할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았다. 물질적 빈곤보다 더한 뭔가가 죽음에 이르는 절망을 이끌어낸다. 학력이 모자란 사람이 능력주의 사회에서 특별히 겪는 고통이 있다면 명예와 보상의 문제다. 케이스와 디튼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절망 끝의 죽음이란 저학력 백인 노동자에게 장기적이고 완만한 삶의 방향 상실을 나타낸다.”

학위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격차는 죽음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질에서도 드러난다. 비대졸자는 삶의 고통이 늘어가는 것을 겪는다. 건강은 나빠지고 정신적 스트레스는 심각해지며 일과 사회생활을 감당할 능력은 떨어진다. 그들 사이의 격차는 수입, 가정의 안정성, 지역사회에서의 위치 등에서도 벌어진다. 4년제 대학 학위는 사회적 지위의 핵심 지표가 되었다. 마치 비대졸자의 경우 옷에 ‘학사학위’ 글자 위 빨간 줄을 그은 배지를 달도록 요구하는 것처것처럼 말이다. 이런 삶의 조건은 슬프게도 마이클 영의 예견을 뒷받침한다. “능력을 지나치게 따지는 사회에서는 많은 재능을 무가치하게 평가하기가 쉽다. 하층계급이 이처럼 도덕적으로 취약해진 적은 없다.” 이는 또한 존 가드너가 1960년대 초에 했던 ‘탁월함’에 대한 언급과 교육의 인재 선별 기능에 대한 으스스한 기억을 소환한다. 능력주의의 악영향을 인정하면서 그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모든 젊은이가 자신의 능력과 야심이 허용하는 한 성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시스템의 아름다움에 빠진 사람은, 필요한 능력이 없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언제나 고통은 존재하며, 존재해야만 한다.” 두 세대 뒤 고통을 억누르는 약물인 옥시코돈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증가한 사망률은,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의 어두운 결과를 드러냈다. 선별에서 버려진 사람들의 일이 거의 대접을 못 받는 세상의 어두움을 말이다.
 

【 일의 존엄성 되살리기 】
    

■ 최근 불평등이 증가하면서, 그리고 노동계급의 분노가 힘을 모으면서 일부 정치인들은 일의 존엄성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빌 클린턴은 그 표현을 이전의 어떤 대통령보다도 많이 썼다. 도널드 트럼프도 툭하면 그 표현을 썼다. 이는 정치적 스펙트럼을 통틀어서 정치인들의 관용구가 되었다. 비록 각자에게 익숙한 정치적 입장을 변호하려는 취지이기는 해도 말이다. 어떤 보수파 정치인들은 복지 수혜를 삭감하는 이유로 일의 존엄성을 내세웠다. 어떤 종류의 일은 게으름을 허용하지 않으며, 복지 혜택은 자칫하면 그들이 정부에 의존하도록 몰아갈 수 있다는 이유였다. 트럼프의 농무상은 영양 보충 지원 프로그램(푸드스탬프) 대상을 축소해야 한다며, “우리 국민 상당수를 차지하는 분들의 일의 존엄성을 복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주로 부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2017년의 법인세 삭감 법안을 옹호하며 트럼프는 그의 목표가 “모든 미국인들이 일의 존엄성을, 봉급을 받을 때의 자부심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라 했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자유주의자들은 때때로 사회안전망을 모색하거나 강화하는 일에, 그리고 노동계급의 구매력을 높이는 일(최저임금 인상, 의료보험 강화, 육아휴직, 주간아동, 보호, 저소득층에 대한 세액 공제 등등)에 ‘일의 존엄성’을 들먹인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표피적 정책을 뒷받침하려는 이런 언변은 2016년 트럼프의 승리로 이어진 노동계급의 분개와 분노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그 사실에 당황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조치 덕에 경제적 혜택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에 반대 입장인 후보자에게 표를 던질 수 있단 말인가?

한 가지 친숙한 해답은 문화적 변동에 두려움을 느낀 백인 노동계급이 그들의 경제적 손익을 미처 따지지 못한 채 “가운뎃손가락으로 투표했다(일부 평론가들의 표현을 빌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너무 섣부르다. 그것은 경제적 이해관계와 문화적 지위 사이에 너무 극명한 구분을 짓고 있다. 경제 문제에 대한 고려는 각자의 주머니에 얼마나 들어오느냐의 문제만이 아니며, 각자가 경제 활동에서 갖는 역할이 사회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느냐도 포함한다. 40년 동안의 세계화 과정에서 뒤처지고 불평등까지 심화된 가운데, 고통은 단지 봉급 수준의 정체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오랜 두려움, 즉 ‘내가 고물이 되어버린다’는 두려움의 현실화에 직면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이 더 이상 별 쓸모가 없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
 
1968년에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을 바라던 로버트 케네디는 이 점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실직자들의 고통은 다만 소득이 없다는 데서 나오지 않으며, 그들이 공동선에 기여할 길이 막혔다는 데서도 비롯된다. “실직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뜻이지요.” 그는 설명했다. “일이 없는 사람은 동료 시민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됩니다. 그것은 랠프 엘리슨이 쓴 《투명인간(the Invisible Man)》이 현실화되는 것이죠.” 당시 사람들의 불만에 대해 케네디가 통찰한 내용은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노동계급과 중산층 유권자들에게 분배적 정의를 더 강화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경제성장의 과실에 대해 더 공정하고 더 적극적인 접근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유권자들이 그보다 더 원하는 것은 그들이 정의에 더 기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고, 다른 이들이 필요로 하고 가치를 두는 일을 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이 분배적 정의에 찍은 방점은 오직 GDP를 늘리는 게 최선이라는 입장에 적절한 균형추가 된다. 그것은 정의로운 사회는 전반적인 번영의 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불충분하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그리고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도 염두에 둔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GDP 증대를 위한 정책들(가령 자유무역협정, 저임 국가로의 노동 아웃소싱 등등)은 승자가 패자에게 적절히 보상을 해줄 때만 정당하다. 예를 들어 세계화의 득을 본 기업과 개인의 증대된 이익은 세금을 통하여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실직 노동자들의 직업 훈련 지원비로 쓰여야 한다. 이런 접근은 미국과 유럽의 주류 중도좌파(그리고 일부 중도우파) 정당들이 1980년대 이래 취해 오던 접근이다. 세계화와 그것이 초래한 번영을 받아들이되 그 수익으로 국내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위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적 반격은 그런 프로젝트를 부정했다. 폐허뿐인 과거를 통해 우리는 왜 그런 프로젝트가 실패했는지 돌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위로는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다. 대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불평등을 걷잡을 수 없이 늘리기만 했다. 경제 성장에 따른 거의 모든 수익은 최상층에게 돌아갔고, 대다수 노동계급의 사정은 거의 내지는 전혀 개선되지 못했다. 세금에 따른 조정 뒤에도 말이다. 이 프로젝트의 재분배 전망은 망가져 버렸는데, 부분적으로 금권정치 성향이 증대했기 때문이었다. 민주적 기구들이 ‘과두제적 장악’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문제가 있었다. GDP 증대에 중점을 두는 정책은 비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동반되더라도, 생산보다 소비를 강조하게끔 했다. 따라서 우리는 생산자보다 소비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재정립했다. 물론 실제는 우리 정체성은 양쪽 모두다. 소비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버는 돈 거의 전부로 가능한 한 싸게, 원하는 재화와 용역을 구입하길 바란다. 그런 것들이 해외의 저임노동자의 손으로 만들어졌든, 고임금 미국 노동자의 손으로 만들어졌든 말이다. 그리고 생산자로서 우리는 만족스럽고 수입이 좋은 일자리를 바란다.

우리의 소비자 정체성과 생산자 정체성 사이를 조화시키는 일은 정치의 몫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에 올인하는 세계화 프로젝트는, 그리고 소비자 복지 우선주의는 아웃소싱, 이민, 생산자 복지를 금전적 의미로만 풀이하는 방식이 가져오는 악영향에 눈을 감는다. 세계화를 주도하는 엘리트는 그것이 초래한 불평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일의 존엄성에 끼치는 악영향을 직시하지 못했다.
 

【 사회적 인정으로서의 일 】

 
노동계급과 중산층 가정의 구매력을 높여주는 것으로 그들의 곤경을 보상하려는 정책 대안, 또는 사회적 안전망 강화를 도모하는 정책 대안 등은 지금 한창 불붙고 있는 분개와 분노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이는 그 분노가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잃은 것과 관련되어 있어서다. 구매력의 저하도 분명 문제지만, 노동계급의 분노를 직접 촉발한 상처는 그들이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이 상처는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과 시장주도적 세계화가 주는 효과와 맞물린다. 이 상처를 인식하고 일의 존엄성을 복구해 줄 유일한 정치 어젠다는 정치를 통해 그들의 불만을 제대로 다루는 것이다. 그러한 어젠다는 분배적 정의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기여도에 대한 배려를 포함해야만 한다. 이 분노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사회적 인정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서의 역할에서 공동선에 기여하고 그에 따라 인정을 받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것이다.

소비자와 생산자 정체성의 대조는 공동선에 대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이해 방법에 주목하게 한다. 첫 번째로, 경제정책 결정자들에게 익숙한 접근법은 ‘공동선이란 모든 사람의 선호와 이해관계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함으로써 공동선을 달성할 수 있다. 그 첩경은 경제성장의 극대화다. 만약 공동선이 단지 소비자 선호에 부응하는 것이라면, 시장의 급여는 누가 얼마나 기여를 하고 있느냐에 대한 좋은 척도가 될 것이다.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이 공동선에 가장 많이 기여하는 사람이리라. 그는 소비자가 가장 원하는 재화와 용역을 제공함으로써 그런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접근법은 이러한 소비자 중심적 공동선론을 기각하고, ‘시민적 개념’이라 불릴 만한 대안을 선호하는 것이다. 시민적 이상에 따르면 공동선은 단지 여러 선호를 합산하거나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호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 다시 말해 이상적으로는 그것을 한 단계 위로 올리고 개선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보람 있고 번영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는 경제 활동 자체만으로는 수립될 수 없다. 우리 동료 시민들과 어떻게 정의롭고 좋은 사회를 구현할지 논의해야 한다. 각자 시민덕을 배양하고, 정치 공동체에서 가치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합리적으로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공동선의 시민적 개념은 일정한 유형의 정치를 요구하며, 그것은 공적 숙의의 영역과 사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또한 일에 대한 생각을 어느 정도 달리할 것도 요구한다. 시민적 개념의 관점에서 우리가 경제적으로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소비자보다는 생산자로서의 역할이다. 생산자로서 우리는 우리 동료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재화와 용역을 만들면서, 사회적 명망을 얻을 수 있는 역량을 계발하고 실행해야 한다. 우리가 기여하는 것의 진짜 가치는 우리가 받는 급여액으로 판단할 수 없다. 급여액은 경제학자이자 철학자 프랭크 나이트의 지적처럼 수요과 공급의 우연적 상황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기여분의 참된 가치는 우리 노력이 향하는 목표의 도덕적, 시민적 중요성에 달려 있다. 이는 아무리 효율적일지언정 노동 시장이 제공할 수는 없는 독자적인 도덕 평가와 연관된다.

경제 정책이 궁극적으로 소비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오늘날 하도 익숙해져서 그런 생각을 넘어서기가 어려울 정도다. “소비는 모든 생산의 유일한 목표이자 의미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서 한 말이다. “그리고 생산자의 이익 추구는 오로지 소비자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있어야 한다.” 존 케인스도 “소비란 모든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표이자 대상이다”라고 함으로써 스미스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리고 이는 지금의 경제학자들 대부분도 동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더 오래된 전통적 도덕사상과 정치사상은 생각이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번영이 ‘우리의 본질을 우리 역량의 배양과 실행을 통해 실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미국 공화주의 전통은 일정한 직업(먼저 농업, 그 다음은 수공업, 그리고 널리 자유노동이라고 이해되는 것)은 시민들의 자기 통치가 가능하도록 미덕을 계발해 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20세기에 공화주의 전통의 생산자 윤리는 소비자 중심적 자유 윤리와 경제성장 위주의 정치경제학에 밀려났다. 그러나 복잡한 사회에서도 ‘일은 시민들을 기여와 상호 인정의 틀 안에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때때로 이는 고무적인 표현으로 재인식된다.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암살 직전 행한 연설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청소 노동자들의 존엄을 그들이 공동선에 기여하는 점에 결부시켜 이야기했다. "언젠가 우리 사회는 청소 노동자들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죠. 따져 보면 우리가 버린 쓰레기를 줍는 사람은 의사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질병이 창궐할 테니까요. 모든 노동은 존엄합니다."
 
1981년의 회칙 “인간의 일에 대하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일을 통해 사람은 인간으로서 충족되고, 그리하여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일을 공동체와 결부된 것으로 보았다. “일은 인간의 가장 심층적인 정체성이 국가 전체와 이어지도록 해준다. 그리고 그의 일은 그의 동포와 함께 공동선을 계발하도록 해준다.” 몇 년 뒤 가톨릭 추기경 전국협의회는 경제 관련 사회교육에 대해 가톨릭 교회의 자세한 입장을 담은 〈목회 서한〉을 내놓았다. 그것은 ‘기여’에 대한 명백한 정의를 담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사회생활에서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참여자가 될 책임이 있다. 그리고 정부는 경제 및 사회 제도를 정비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존중받고 노동의 존엄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할 의무가 있다.”

일부 세속 철학자들도 같은 목소리를 냈다. 독일 사회이론가 악셀 호네트는 오늘날 소득과 부의 분배에 대한 논쟁은 인정과 명망에 대한 갈등으로 이해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생각이 헤겔(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사상가)에게서 연유했다고 밝히긴 했지만, 고액 연봉을 받는 운동선수를 놓고 벌어지는 연봉 논쟁에 참여해 본 스포츠팬이라면 아마 직관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팬들이 한 선수에게 “이미 수백만 달러를 받고 있으면서 더 달라고 하느냐”고 불평하면 그 선수는 거의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존중받느냐가 문제죠.”  이것이 ‘인정 투쟁’이라는 용어를 통해 헤겔이 말하려던 것이었다.
 
수요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시스템을 넘어, 노동 시장은 인정을 부여하는 시스템이라는 게 헤겔의 생각이다. 그것은 단지 소득만으로 노동에 보상하는 게 아니며, 각 개인의 일을 공동선에 대한 기여로 공적 인정을 해준다. 시장 자체는 노동자들에게 기술이나 인정을 부여하지 않으며, 그래서 헤겔은 노동조합이나 길드 같은 기구를 제안한다. 그런 기구는 각 노동자의 기술이 공적 명망을 얻을 만한 기여를 하기에 충분함을 보장해준다. 간단히 말해 헤겔은 그의 시대에 등장한 자본주의적 노동 기구는 오직 두 가지 조건에서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보았다. “첫째, 최저 임금을 보장해야 한다. 둘째, 모든 근로 활동에 있어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80년 뒤 프랑스 사회이론가 에밀 뒤르켐은 헤겔의 노동론을 토대로 “노동분업은 사회적 연대의 원천이 되어야 하며, 모든 이들은 공동체에 기여한 실제 가치에 근거해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미스, 케인스, 그리고 여러 현대 경제학자들과 다르게 헤겔과 뒤르켐은 일이 소비만을 위한 수단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일은 그 최선에 있어 사회적 통합 활동이며 인정의 장이고,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우리의 책임을 명예롭게 수행하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 기여적 정의 】

 양극화는 심화되고, 다수의 노동자들이 무시당하고 외면당한다고 여기고 있어 사회적 응집과 연대의 원천이 절망적으로 필요한 지금, 일의 존엄에 대한 보다 견실한 생각이 주류 정치 논의로 파고 들어야 하리라 본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조짐은 없다. 왜 그럴까? 왜 주된 정치 어젠다는 정의의 기여적 측면을 거부하며, 그 기반이 되는 생산자 중심 윤리를 외면하는 것일까? 해답은 단지 우리가 소비를 너무 사랑한다는 데 있을지 모른다. 또한 ‘경제성장이 최고’라는 믿음 역시 한몫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더 깊은 곳에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약속하는 물질적 혜택을 넘어 경제성장을 공공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 까닭은 우리 사회처럼 갈등이 많은 다원적 사회에 매력적이라서다. 이는 골치 아픈 도덕 논쟁을 우회할 빌미가 된다.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지에 대한 견해는 제각각이다. 잘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 일치가 안 된다. 소비자로서 각자의 기호와 욕망은 다르다. 이러한 차이 앞에서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한다는 것은 경제 정책의 가치중립적인 목표로 여겨진다. 소비자 복지가 목표라면 각자 다양한 선호에도 불구하고 많은 편이 적은 편보다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 과실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충돌은 당연히 일어난다. 따라서 분배 정의에 대한 논쟁은 필요하다. 그러나 ‘경제 파이를 키우는 게 작아지는 것보다는 낫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라 여겨진다.

이와 달리 기여적 정의는 인간의 좋은 삶이나 최선의 인생 방식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미국 공화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헤겔에서 가톨릭 사회교육에 이르기까지 기여적 정의의 이론은 ‘우리는 공동선에 기여할 때만 완전한 사람이 되며, 우리가 한 기여로부터 우리 동료 시민들의 존경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 전통에 따르면 근본적인 인간 욕구는 우리가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일의 존엄성은 그런 필요에 부응하는 우리 역량의 발휘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면 소비를 ‘모든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표이자 대상’이라 보는 것은 잘못이다.
 
GDP의 규모와 분배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경제학은 일의 존엄성을 떨어트리며, 시민 생활을 황량하게 만든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 점을 알고 있었다. “우애, 공동체, 공동의 애국심 등 우리 문명의 이런 중대한 가치들은 단지 함께 물건을 사고 소비한다고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런 가치들은 수준 있는 급여를 받으며 존경 받는 직업 생활을 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런 직업은 개인이 그의 지역사회에, 그의 가정에, 그의 나라에,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직업입니다. ‘나는 이 나라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있어요. 나는 이 위대한 공적 모험의 참여자예요’라고.”

오늘날 그런 식으로 말하는 정치인은 거의 없다. 로버트 케네디 이후 수십 년이 지나자 진보파는 공동체, 애국심, 일의 존엄성 같은 것을 대체로 내버렸으며 대신 사회적 상승의 담론만 주구장창 늘어놓고 있다. 임금 정체, 아웃소싱, 불평등, 이민자와 로봇의 일자리 빼앗기 등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통치 엘리트들은 엄청 기운이 나는 조언을 해준다. “대학에 가세요! 재무장을 하고 글로벌 경제전쟁에서 승리하세요!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건 당신이 배운 것에 달려 있답니다. 하면 됩니다!” 이것은 글로벌, 능력주의적, 시장 주도적 시대의 관념론이다. 승자에게 아첨을, 패자에게는 모욕을 던지는 관념론. 2016년 그 환상은 끝장났다. 브렉시트 가결과 트럼프 당선을 맞이하여, 그리고 유럽의 초극우 민족주의, 반이민 정당들을 보며 그 프로젝트는 완전히 너덜너덜해졌음을 고해야 한다. 이제 문제는 그 대안적인 정치 프로젝트가 어떤 것이냐다.
 

【 일의 존엄에 대해 논쟁하자 】


■일의 존엄성 문제는 좋은 출발점이 된다. 겉으로 보면 이는 논쟁거리가 될 만한 이상이 아닌 듯하다. 어떤 정치인이 “일은 존엄하지 않다”고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일의 존엄성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인정의 장으로 여기는) 정치적 어젠다가 나온다면 주류 진보파와 보수파 모두 껄끄러워 할 질문이 더불어 나오게 될 것이다. 그것이 시장 중심적 세계화 주창자들이 널리 공유시킨 전제, 즉 ‘시장의 성과는 각자가 공동선에 기여한 것의 참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한다’는 전제에 정면 도전하기 때문이다.

급여를 생각해 보면, 이런 저런 직업들이 각자의 일 성과에 대해 참된 사회적 가치를 어떤 때는 과대하게 어떤 때는 과소하게 평가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직 열렬한 자유지상주의자만이 부유한 카지노 왕의 사회적 기여가 소아과 의사의 기여보다 정말로 1,000배나 가치 있다고 떳떳이 주장할 수 있으리라.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은 잡화상 계산원들, 배달원들, 방문 의료서비스 담당자들, 그 밖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면서도 박봉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시장 사회에서는 우리가 버는 돈과 우리가 공동선에 기여한 내용의 가치를 혼동하기 쉽다. 그런 혼동은 단지 생각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가 아니다. 그 논리적 결함을 지적하는 철학 논증만 하고 만족스러워 할 일도 아니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는 우리가 받을 몫을 받는다’는 식으로 짜여 있다는 능력주의적 희망에서 비롯된 혼동이다. 그런 희망은 구약성서 시대서부터 오늘날까지 ‘역사의 옳은 쪽에 서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섭리론적 사고를 부추긴 희망이기도 하다.

시장 주도적 사회에서 물질적 성공을 도덕적 자격의 증표로 해석하는 일은 지속성 있는 유혹이다. 그 유혹은 계속해서 우리의 저항을 깨트리려 한다.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논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법을 세우는 것이다. 공동선에 우리가 진정으로 가치 있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시장의 낙인이 잘못되었는지를 반성하고, 숙고하고, 민주적으로 공동의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런 논쟁이 어떤 합의를 반드시 낳으리라 본다면 비현실적이리라. 공동선은 불가피하게 논란의 여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일의 존엄에 대한 새로운 논쟁은 우리의 당파적 경향을 무너뜨릴 것이고, 우리의 정치 담론을 도덕적으로 활성화할 것이며, 우리가 40년 동안 시장의 신앙과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져든 탓에 양극화된 정치 현실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만드는 자와 가져가는 자 】

 
■ 한 가지 차원에서 세금 정책의 도덕적 측면은 익숙하다. 우리는 보통 세금이 공정한지에 대해 논란을 벌인다. 이런 저런 세금이 부자에게 유리한가, 아니면 가난한 사람에게 유리한가 등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것이다. 그러나 세금의 표현적인 차원은 공정성 논의를 넘어선다. 사회가 어떤 활동을 ‘명예와 인정을 부여할 가치 있는 활동’으로 보느냐, 또 어떤 활동을 ‘억제해야 마땅할 활동’으로 보느냐에 이른다. 때때로 이런 판단은 노골적이다. 담배, 주류, 카지노 등에 부과되는 세금은 ‘죄악세(Sin Taxes)’라고 불린다. 그런 세금을 통해 유해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하다 여겨지는 활동(흡연, 음주, 도박)을 억제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세금은 사회가 관련 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올림으로써 그런 활동을 백안시한다는 표현이다. 가당음료(비만 억제), 탄소배출(기후 변화 억제) 등에 대한 과세안도 마찬가지로 대중의 생활 규범을 바꾸고 행동을 변형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모든 세금이 그런 목적을 갖는 것은 아니다. 소득세가 봉급생활을 억제하려거나 사람들이 취업을 단념하도록 하는 효과를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일반판매세 역시 물건 구입을 억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세금들은 단지 세입을 올릴 목적이다. 그러나 종종 겉으로는 가치중립적인 듯한 정책 속에 도덕적 판단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이는 세금이 일과 연관될 때, 그리고 돈을 버는 다양한 방식과 연관될 때 특히 그렇다. 예를 들어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는 왜 근로소득에 대한 과세보다 세율이 낮을까? 워런 버핏은 억만장자 투자가인 자신이 그의 비서보다 낮은 세율로 세금을 낸다는 사실을 알고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일부는 그 까닭이 국가는 근로 장려보다 투자 활동 장려에 더 무게를 두며, 그에 따라 경제성장이 진작되기를 의도하기 때문이라 보았다. 한 가지 차원에서 보면 이런 주장은 온전히 실용적, 또는 공리주의적이다. GDP를 올리는 게 목적이지, 거액을 벌어들이는 부유한 투자가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볼 때 이 겉보기에는 실용적인 주장은 그 설득력 일부를 수면 아래에 있는 도덕적 가정, 즉 능력주의적 가정에서 넌지시 가져오고 있다. 그 가정이란 투자가는 ‘일자리를 만드는 자’이며 따라서 낮은 세율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대놓고 펼친 사람은 공화당 하원의원 폴 라이언으로, 미 하원 의장을 지낸 사람이다. 또한 그는 자유지상주의 작가인 아인 랜드의 열성팬이기도 하다. 라이언은 복지국가를 비판하며 ‘만드는 자(maker :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많은 사람)’와 ‘가져가는 자(taker : 납세액보다 정부에서 받는 액수가 많은 사람)’를 구분했다. 그는 복지국가가 성장하면 소위 ‘가져가는 자’가 ‘만드는 자’를 훨씬 넘어서게 될 것을 우려했다.
 
일부는 라이언이 경제적 기여에 대해 지나치게 도덕주의적인 주장을 한다고 비판했다. 다른 사람들은 만드는 자와 가져가는 자 사이의 구분을 받아들이면서도 라이언이 그들을 잘못 판정하고 있다고 여겼다. 〈파이낸셜타임스〉와 CNN의 비즈니스 칼럼니스트인 라나 포루하는 《만드는 자와 가져가는 자: 금융의 융성과 미국 비즈니스의 몰락(Makers and Takers: The Rise of Finance and the Fall of American Business)》라는 통찰력 있는 책에서 이 두 번째 입장을 인상적으로 밝혔다. 어데어 터너, 워런 버핏을 비롯한 비생산적 금융화 비판자들을 인용하며 포루하는 오늘날 경제의 가장 큰 ‘가져가는 자’란 거액의 불로소득을 노린 투기를 일삼으며 실물경제에는 기여가 전혀 없는 금융업계 종사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이 모든 금융 활동은 우리를 더 번영시키지 않는다. 대신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주기적으로 금융위기를 불러와 위기 때마다 막대한 경제 가치를 파괴한다. 금융은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되고 있다. 금융 분야가 비대해질수록 우리 경제가 성장하지는 않으며 오직 느려질 뿐이다.
 
포루하는 앞서 제시된 ‘만드는 자’란 실제로는 ‘사회에서 가져가는 일만 하는 자들. 소득 대비하여 최소한의 세금만 내며, 경제의 파이를 말도 안 되게 많이 움켜쥐고, 종종 경제성장을 방해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돌리는 자들’이라고 풀이했다. 진짜 ‘만드는 자’는 누구인가? 그녀는 실물경제에서 노동을 통해 유용한 재화와 용역을 공급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런 생산적인 활동에 투자하는 사람들이라 보았다.

오늘날 경제에서 누가 만드는 자이고 누가 가져가는 자인지에 대한 논쟁은 결국 기여적 정의론으로 귀착된다. 어떤 경제 역할이 명예와 인정을 받을 가치가 있느냐에 대한 생각이다. 이런 사고 과정은 무엇이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인가를 따지는 공적 토론을 필요로 한다. 나는 제안한다. 급여세의 전부 또는 일부를 없애는 대신 금융거래세를 일종의 ‘죄악세’로 신설하여 카지노나 다름없고 실물경제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투기 행위를 억제하는 방안을 토론의 주제로 삼을 것을. 당연히 다른 입장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넓게 보아 일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것이고, 그러려면 우리 경제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도덕적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기술관료적 정치가 숨겨 왔던 질문들 말이다.
 
그런 질문 중 하나는 어떤 종류의 일이 인정과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느냐다. 또 다른 것은 우리는 시민으로서 서로에게 어떤 책임이 있느냐다. 이 질문들은 상호연관되어 있다. 무엇이 긍정적인 기여인지 따져 보려면 우리 공동의 생활에서 목표와 수단이 무엇인지부터 가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소속이라는 의식 없이 우리 스스로를 우리가 빚지고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라는 인식 없이 공동의 목표와 수단에 대해 숙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기에, 그리고 그런 의존을 인식하기에 우리의 집합적 복지에 대한 기여도를 평가할 까닭이 있는 것이다. 이는 시민들이 “우리는 모두 함께입니다”라는 말을 위기 때에 건성으로 내뱉는 말로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믿고 할 만큼 건실한 공동체 의식을 필요로 한다. 그런 말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믿음이 가는 묘사여야 한다.
 
지난 40년 동안, 시장주도적 세계화와 능력주의적 성공관은 힘을 합쳐서 이런 도덕적 유대관계를 뜯어내 버렸다. 그들이 뿌려 놓은 글로벌 보급 체인, 자본의 흐름,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체성은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 덜 의존적이 되고, 서로의 일에 덜 감사하게 되고, 연대하자는 주장에 덜 호응하게 되도록 했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 공동체주의 】

【 인간성의 재정의 】

https://youtu.be/d3KqKZIrI-s?si=f3poUp6X4dj8PW0o

 

 【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 】

(The Better Angels In Our Nature or Not)
 
■ 심리학자들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대부분의 변혁적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는 최선과 최악의 것들을 끄집어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천사나 악마를 말이다. 지금까지 나온 증거를 살펴보자. 얼핏 봤을 때 코로나19는 사람들을 단합하게 만든 것처럼 보였다. 2020년 3월 당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이탈리아에서 찍힌 사진들을 보면, 코로나19와 맞서기 위한 집단적인 ‘전시 보급품’이 코로나19 참사의 유일한 긍정적 면이라는 인상마저 주었다. 전 국민이 집에서 격리되자 결과적으로 사람들끼리 함께 보낼 시간이 더 늘어났고, 서로를 더 아끼는 것 같은 사례들이 수없이 많이 등장했다. 처럼 커진 집단적 감수성은, 이웃을 위해 발코니에서 공연하는 유명 오페라 가수, 저녁 8시 정각이 되면 창문을 열거나 발코니에 나와 의료진에 대한 감사와 연대를 표현하기 위해 박수치고 노래하는 의식(이것은 유럽 거의 전 지역으로 확대된 현상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원조와 지원 활동 등 다양한 형식으로 표출됐다.
 
어떤 면에서 이탈리아가 이런 행동들을 주도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후 격리 기간 내내 전 세계에 걸쳐 이와 유사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연대 사례들이 광범위하게 등장했다. 친절함과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보여주는 단순한 행동들이 표준이 되고 있는 듯 보였고 협력, 공동체주의, 공익을 위한 사리사욕의 희생, 배려 같은 개념이 소중히 여겨지며 주목받았다. 반면에 개인적 권력, 인기, 위신을 표출하는 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행동으로 여겨졌고, 코로나19가 진행되면서 ‘부와 명성’이주는 매력은 상당 부분 빛을 잃었다. 한 논평가는 코로나바이러스가 현대성의 핵심적 특징인 ‘명사 숭배 문화’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효과를 냈다고 진단했다. “사회가 봉쇄되고, 경제활동이 중단되고, 사망자가 늘어나고, 북적대는 아파트나 저택 안에서 모든 사람들의 미래가 동결될 때 계급 이동의 꿈은 사라진다. 코로나19 전과 후만큼 차이가 극명했던 적은 없었다.” 이런 가시적인 결과는 사회 평론가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까지도 코로나19가 우리가 가진 최고의 장점을 이끌어내면서 우리가 더 고상한 삶의 의미를 찾게 만드는 데 성공했는지를 곰곰이 따져보게 만들어줬다.
 
우리 머릿속에는 많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코로나19가 더 나은 자아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줄 수 있을까? 뒤이어 우리의 가치관도 바꿔줄까? 인간적 유대감을 공고히 다지고 사회적 인맥을 유지하려는 의지도 강해질까? 한마디로 우리가 더 배려심 많고 동정심 많은 사람으로 변할까?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면, 허리케인이나 지진 같은 자연재해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줬지만 팬데믹은 반대로 사람들을 갈라놓았다. 격렬하고 짧은 자연재해에 갑작스럽게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함께 뭉쳐서 비교적 빨리 회복하는 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팬데믹은 종종 죽음에 대한 원초적 공포에 뿌리를 둔 불신의 감정을 계속해서 끌어내는, 더 오랫동안 지속되는 장기적 사건이다. 심리학적으로 봤을 때 팬데믹이 낳는 가장 중요한 결과는 경이적 수준의 불확실성 생성이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코로나19가 재유행할 것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감염될까? 내 일자리가 유지될까?).
 
불확실성이 커지면 우리는 불안과 걱정에 시달린다. 인간은 확신을 갈구한다. 따라서 ‘평범하게’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을 마비시키는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지우는 데 유용한 ‘인지적 종결(cognitive closure :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과거의 것을 반복하려는 인지적 경향)’ 욕구를 느낀다. 팬데믹이 주는 위험은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렵고, 대부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팬데믹이 닥쳤을 때 우리는 불시에 자연재해 등이 닥쳤을 때 그렇듯이 (사실 언론에 의해 받게 되는 재해에 대한 일반적인 첫인상과는 다르게) 타인에게 필요한 것에 관심을 쏟기보다는 자신만을 챙길 가능성이 더 크다. 이는 결국 강한 수치심을 낳는데, 수치심은 팬데믹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의 태도와 반응을 이끄는 핵심적 감정이다. 이 수치심은 기분 나쁜 감정과 동일시되는 도덕적 감정으로, 후회, 자기혐오, 올바른 일을 하지 않은 데 대해 모호한 치욕감이 뒤섞인 불편한 감정이다. 이 수치심은 과거 팬데믹을 소재로 쓴 수많은 소설과 문학 작품에서 묘사되고 분석되었다.
 
수치심은 아이들을 운명에 맡기고 버린 부모처럼 급진적이고 끔찍한 형태를 띠기도 한다. 1348년 흑사병으로 황폐해진 피렌체의 한 별장에 은신해 있던 한 무리의 남녀 이야기를 다룬 단편 소설집 《데카메론(The Decameron)》의 서문에서 저자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는 “부모가 아이들을 돌보지도 찾지도 않고 운명에 맡긴 채 버린 것으로 나타났다”고 썼다. 같은 맥락에서 영국 소설가 대니엘 디포(Daniel Defoe)의 《전염병 연대기(A Journal of the Plague Year)》에서부터 이탈리아 역사 소설가 알레산드로 만초니(Alessandro Manzoni)의 《약혼자(The Betrothed)》에 이르기까지 과거 발발한 팬데믹을 다룬 수많은 문학 작품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어떻게 인간의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할 만큼 강해질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어떤 상황이 닥치건 개인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기적 선택 때문에 나중에 깊은 수치심을 느끼게 되더라도 자기 생명을 구하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코로나19 사태 동안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으로 목격했던 사건처럼 항상 예외는 있다. 직업상 의무를 초월해서 동정심과 용기를 보여주는 행동을 수없이 많이 한 간호사와 의사들의 모습이 그런 예외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로 그냥 ‘예외’인 것 같다! 스페인 독감이 제1차 세계대전 말 미국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책인 《대大독감(The Great Influenza)》에서 저자인 역사학자 존 배리(John Barry)는 당시 의료 분야 종사자들을 도와줄 자원봉사자가 충분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독감의 기세가 맹렬해질수록 자원봉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만 제1차 세계대전보다 12배나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는데도 불구하고 1918~1919년 동안 일어난 팬데믹에 대한 지식이 그렇게 부족한 이유는 팬데믹 직후 생긴 집단적 수치심 때문일 수도 있다. 이것이 당시의 팬데믹을 다룬 책이나 연극이 현저히 적은 이유를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심리학자들은 인지적 종결이 일어나면 종종 흑백 논리적 사고에 빠지거나 단순한 해결책을 모색하게 된다고 말한다. 음모 이론이 등장하고 소문과 가짜 뉴스와 불신과 기타 해로운 생각이 전파되기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리더십과 권위와 명확함을 추구한다. 즉, 우리가 속한 지역사회와 우리를 이끌어주는 리더들 사이에서 누구를 신뢰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누구를 불신하는가에 대한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뭉치고 단결하려는 욕구가 커져서 우리는 씨족이나 집단을 중심으로 모이고, 그들의 ‘뒤’가 아닌 ‘속’에서 보통 더 사회적으로 변한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우리가 연약하고 취약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애착은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등 모든 사람들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끼면서 강해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두운 측면도 있다. 그런 감정이 애국심과 민족주의 정서를 고조시키고, 동시에 골치 아픈 종교적·민족적인 문제에 대한 고려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유독한 혼합물은 사회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만든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은 전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사람들은 항상 소문과 거짓 정보를 퍼뜨리고, 그것을 외국에서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국내로 유입시킨 질병으로 묘사하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다가 우리는 희생양을 찾게 되는데, 역사를 통틀어 전염병이 발생할 때마다 항상 이런 일이 되풀이됐다. 파묵은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 이후 전염병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면 예상하지 못한 채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난 폭력, 풍문, 공포, 반란이 흔하게 등장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전염병에 대한 역사와 문학을 보면 전염병에 시달리는 민중이 겪는 고통, 죽음의 공포, 형이상학적 두려움, 그리고 괴상한 느낌의 정도가 그들의 분노와 정치적 불만의 깊이를 결정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국가간에서나 종종 심지어 국가 내에서도 연대 의식은 매우 부족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봉쇄 기간 내내 주목할 만한 개인적인 연대 사례들이 등장했지만, 이들과 대조되는 이기적인 행동 사례들 역시 등장했다. 세계적인 수준에서 상호협력의 미덕은 역설적으로 협력이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두드러졌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서로 협력하고, 또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보다 더 크고 위대한 뭔가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란 인류학적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협력하지 않곤 했다. 코로나19가 사람들을 이기적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타고난 공감과 협동심을 키워줌으로써 사람들이 더 연대하고 싶은 마음을 북돋을 것인가? 과거 일어났던 팬데믹 사례들은 그다지 고무적이지 않지만 이번 팬데믹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우리 모두 더 열심히 협력하지 않으면 우리가 집단적으로 직면한 세계적인 도전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존적 도전(무엇보다 환경과 글로벌 거버넌스의 자유낙하)에 맞서기 위해 협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관적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본성의 더 나은 천사를 소환할 수밖에 없다.

 
도덕적 선택 】

(Moral Choices)

 
■ 코로나19 팬데믹은 시민, 정책 입안자 등 모든 집단 내부에서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공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논쟁에 불을 지폈다. 이로써 우리는 진정 공익이란 게 뭔지를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공익이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하나의 공동체로서 우리에게 최선인 것을 어떻게 모두가 함께 결정할 것인가? 실업률 상승을 막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GDP 성장과 경제활동을 유지하는 게 공익인가? 공동체의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을 돌보고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게 공익인가? 혹시 그 중간에 있는 무엇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트레이드오프가 일어날까?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시하는 자유의지론(libertarianism)과 최대 다수를 위한 최고의 결과를 추구하는 걸 더 합리적으로 보는 공리주의 등 일부 철학 사상들이 공익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의인지를 두고 논쟁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 이 두 대척적 관계의 도덕적 이론들 사이의 갈등이 해소될 수 있을까?
 
코로나19가 갈등을 부추겼고, 그로 인해 두 반대 진영 사이에선 격렬한 설전이 일어났다. 오로지 경제적·정치적·사회적 고려에 따라 추진되는 냉정하고 합리적인 결정으로 포장된 다수의 결정이 사실은 도덕 철학, 즉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찾으려는 노력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사실 코로나19에 대한 최선의 대응 방법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결정은 윤리적 선택으로 재포장될 수 있다. 인간이 어떤 경우에나 도덕적인 문제를 고려하며 일한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그렇다.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야 할까?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표시해야 할까?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대중에게 거짓말을 해도 괜찮을까? 코로나19에 감염된 이웃을 돕지 않아도 될까?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사업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 위해 상당수의 직원을 해고하는 게 옳을까? 나만의 안전과 안락함을 위해 휴가지로 탈출해도 괜찮을까? 아니면 나보다 더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대신 휴가지를 제공할까? 친구나 가족을 돕기 위해 격리 명령을 무시할까? 크고 작은 결정 하나하나가 윤리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며, 우리가 이 모든 질문에 답하는 방법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갈구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이다.
 
모든 도덕적 철학 개념처럼 공익이란 개념 역시 규정하기 힘들고 논쟁의 여지도 있다. 코로나19 확산을 억제하려고 할 때 공리주의적 계산(utilitarian calculus)을 적용할 것인지 아니면 신성불가침한 생명의 존엄성 원칙을 고수할 것인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촉발됐다. 봉쇄 기간 중 공중보건과 경제 타격 사이에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느냐를 둘러싸고 일어난 격렬한 논쟁만큼 윤리적 선택의 문제를 명확히 보여주는 건 없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소수의 생명을 희생하면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미신이 틀렸음을 밝혀냈지만, 이러한 전문가들의 판단과 상관없이 논쟁과 논란은 계속되었다. 미국에서만 그랬던 건 아니지만, 특히 미국에선 일부 정책 입안자들이 사람의 목숨보다 경제를 중시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그러한 선언이 정치적 자살[이 사실을 깨달은 존슨 영국 총리는 전문가와 언론이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 사례로 묘사하곤 했던 집단 면역을 옹호하던 초기 정책을 서둘러 철회했다]이나 다름없는 아시아나 유럽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법한 정책적 선택을 옹호했다.
 
생명보다 경제를 더 우선시하는 생각은 1665년 런던에서 일어난 대역병 때 이탈리아 중부 시에나의 상인들에서부터 1892년 콜레라 발병을 은폐하려 했던 독일 함부르크의 상인들까지 이어지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모든 의학적 지식과 과학적 자료를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이런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건 사실 얼토당토않은 것처럼 보인다. ‘번영을 위한 미국인들(Americans for Prosperity)’ 같은 일부 보수 단체들은 경기 침체로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고 주장한다. 분명 맞는 주장이지만 이것은 본래 윤리적 고려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선택에서 비롯된 사실이다. 미국에선 실제로 경기 침체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사회안전망의 부재나 부족이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앞에 나왔던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턴의 광범위한 분석 대로 사람들은 국가 지원이나 건강보험 없이 실직하면 자살, 약물 과다 복용, 알코올중독 등으로 ‘절망사’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 외 지역에서도 경기 침체로 숨지는 사람들이 나타나지만, 건강보험과 노동자 보호 측면에서의 정책적 선택이 숨지는 사람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개인주의적 특성과 공동체의 운명을 선호하는 특성 중에서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지를 둘러싼 도덕적 선택이다. 이것은 (선거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집단적이자 개인적인 선택이지만, 코로나19의 사례를 보면 고도로 개인주의적인 사회의 경우 연대감을 표현하는 데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2020년 초 코로나19 1차 유행에 뒤이어 전 세계적으로 많은 국가들이 깊은 침체로 빠져들고 있는 시점에서 봉쇄 강화는 정치적 고려 대상이 될 수 없을 듯했다. 아무리 부유한 나라라도 무기한 봉쇄를 견뎌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1년 남짓한 봉쇄도 견뎌내기 힘들다. 특히 실업 측면에서 봉쇄는 최빈곤층뿐 아니라 일반적으로도 개인의 웰빙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의 말대로 “사람들은 질병에 걸려서도 죽지만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을 때도 죽는다.” 따라서 이제 검사와 접촉자 추적이 광범위하게 실시됨에 따라 많은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의사결정을 할 때 필연적으로 복잡한 비용 편익 분석과 함께 때로는 ‘잔혹한’ 공리주의적 계산을 하게 될 것이다. 모든 정책 결정은 가능한 한 많은 생명을 구하는 문제와 가능한 한 경제가 완전히 가동되도록 하는 문제 사이의 극도로 미묘한 타협이 될 것이다.
 
생명윤리학 교수이자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The Life You Can Save)》의 저자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의 수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수명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이론을 고수하는 대표적 인사다. 그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이탈리아에서는 코로나19로 사망하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이 80세 가까이 된다는 점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사망한 사람들 중 다수가 연로할 뿐만 아니라 지병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탈리아에선 과연 몇 년의 수명이 사라졌는가?”라고 묻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 일부 경제학자들은 이탈리아인들이 대략 평균 3년의 수명을 잃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것은 전쟁 발발 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었을 때 잃어버리게 되는 40년이나 60년의 인생과 비교했을 때 훨씬 짧은 시간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례를 든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오늘날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국의 봉쇄가 너무 심했는지 아닌지, 단축되거나 연장됐어야 하는지, 적절히 시행됐는지 아닌지, 적절한 강제성을 갖고 시행됐는지 아닌지에 대해 각자 의견을 내세우면서 본인의 의견을 ‘객관적 사실’로 포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끊임없이 내리는 이러한 모든 판단과 선언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기본적인 윤리적 고려에 따라 결정된다. 즉, 우리가 사실이나 의견이라고 드러내는 것이 팬데믹이 드러내준 우리의 도덕적 선택이란 뜻이다. 그것이 우리가 옳거나 그르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내리는 선택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누군지를 정의해준다.
 
부연 설명 차원에서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WHO와 대부분의 국가 보건 당국은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착용을 권한다. 그런데 역학적 필요성이 충분하면서도 손쉬운 위험 완화 조치로 간주되는 마스크 착용이 어느 순간 정치적 논쟁거리로 바뀌었다. 미국뿐 아니라 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몇몇 다른 나라들에서 마스크 착용 여부를 둘러싼 결정이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마스크를 의무적으로 착용하게 하는 게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적 선언의 이면에서 보면 공공장소에서의 마스크 착용 거부는 실제로 마스크 착용을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윤리적 결정일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선택과 결정을 뒷받침하는 도덕적 원칙에 대해 뭔가를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상당히 주관적이면서도 사회적 조화를 위해 필수적인 개념인 공정성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됐다. 공정성에 대한 고려는, 경제학의 가장 기본적인 몇 가지 전제에 도덕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예를 들어,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살펴볼 때 공정성이나 정의를 고려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 자신에 대한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러한 본질적인 도덕적 문제는, 기름과 화장지 등 일부 기본 생필품과 마스크와 인공호흡기처럼 코로나19 예방과 치료에 꼭 필요한 필수품 부족 사태가 생기기 시작한 2020년 초 표면화되었다. 정답은 무엇이었을까?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마법을 써서 물가를 충분히 높이 끌어올려 시장에 아무도 없게 만들어야 하나? 아니면 오히려 수요뿐 아니라 심지어 물가까지 잠시 규제해야 하나?
 
1986년에 작성된 한 유명한 논문에서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과 리처드 탈러(Richard Thaler, 두 사람은 이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는 이 문제를 연구해 비상시 물가 상승은 불공정다고 인식되기 때문에 사회적 관점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촉발된 물가 상승이 일명 ‘패닉 바잉(panic buying : 가격 상승, 물량 소진 등에 대한 불안으로 가격에 관계 없이 생필품이나 주식, 부동산 등을 사들이는 일을 가리키는 말)’을 억제하는 한 효과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이것이 경제와 거의 관련이 없고 공정성, 다시 말해 도덕적인 판단에 대한 심리와 더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할 것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 점, 즉 코로나19 사태처럼 극단적인 상황에서 특히 마스크나 손 소독제 같은 필수품의 가격 인상은 사람들을 언짢게 만들 뿐만 아니라 도덕적·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아마존은 사이트 내에서 바가지 가격을 금지했고, 대형 유통업체들은 상품 가격 인상이 아니라 고객 1인당 구매량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공급 부족 문제에 대처했다.
 
이러한 도덕적 고려가 리셋에 해당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도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 장기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다. 최소한 우리는 이제 우리의 결정이 가치로 가득 차 있고, 도덕적인 선택에 기반해 내리는 것임을 개인적으로 더 잘 인식하게 됐다고 추정할 수 있다. 미래에 사회적 상호작용을 어지럽히는 사리사욕을 버린다면, 포용성과 공정성 같은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쏟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이자 시인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이미 1892년에 냉소주의자를 ‘모든 것의 가격을 알지만 그 어떤 것의 가치도 모르는 사람’으로 묘사하면서 이 문제를 환기시킨 바 있다.
 

 

【 가족 제도 폐지 &
모든 아동 공동 양육 】


① 정서적 환경의 문제


https://youtu.be/9EEf5jFgQT4

https://youtu.be/RB3s4P3DGH4

https://youtu.be/cvkdVS6eKSM?si=cXHcZfIZ5BAEDagW


② 경제적, 육체적 구속의 문제


https://youtu.be/xI8rUbaY3XM

https://www.youtube.com/live/Doa8QaecKgk?si=Gy4dodv9sQMA5WD

https://www.youtube.com/live/ibcz6_KFcmI?feature=share

https://youtu.be/WEXn5278Doo

https://youtu.be/WLRWJobWEds?si=_JlxQQcMKWMRvTjM

https://youtu.be/nKplLHk0g9Q

https://youtu.be/j93EYMqjhSA?si=FILkYhxhjGNyT-TO

https://youtu.be/JcnmadoBWZ8

https://www.youtube.com/live/ockt27euS14?feature=share

https://youtu.be/NSLLz2Jm9e4?si=op1559TukKdfYqAL


③ 삶에 대한 선택권의 문제
 

https://youtu.be/zCBOLiaw9j4

https://youtu.be/VIdwp-TteUc

https://youtu.be/0mAAxNQoR9M

https://youtu.be/mNwxSQmXFI4?si=jKXb0i7QHP_M5xSQ


④ 극단적 이기주의


https://youtu.be/spj_nWAf0d4


민주주의와 겸손 】


우리는 오늘날 조건의 평등을 별로 많이 갖고 있지 않다. 계층, 인종, 민족, 신앙에 관계없이 사람들은 한 데 모을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은 얼마 없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40년 동안 시장 주도적 세계화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가져오면서 우리는 제각각의 생활 방식을 갖게 되었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하주 종일 서로 마주칠 일이 없다. 우리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살고 일하고 쇼핑하고 논다. 우리 아이들은 각기 다른 학교에 다닌다. 그리고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가 일을 마치면, 꼭대기에 오른 사람은 자신이 그 성공의 대가를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밑바닥에 떨어진 사람도 다 자업자득이라고 여긴다. 이는 정치에 매우 유해하며 당파주의가 하도 팽배하여 이제 사람들은 신앙이 다른 사람끼리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혼을 껄끄럽게 보게 되었다. 우리가 중요한 공적 문제에 대해 서로 합리적으로 토론하거나 심지어 서로의 의견을 경청할 힘조차 잃어버리고 만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능력주의는 처음에 매우 고무적인 주장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믿으면 신의 은총을 우리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주장 말이다. 이런 생각의 세속판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유쾌한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 운명은 우리 손에 있고, 하면 된다'라는 약속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자유의 비전은 공동의 민주적 프로젝트에 대하나 우리의 책임에서 눈을 돌리도록 했다. 공동선의 두 가지 개념을 되새겨 보자. 하나는 소비주의적인 공동선, 다른 하나는 시민적 공동선이다. 공동선이 단지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라면, 조건의 평등은 고려할 게 못된다. 민주주의가 단지 다른 수단에 의한 경제일 뿐이라면, 각 개인의 이해관계와 선호의 총합 차원의 문제라면, 그 운명은 시민의 도덕적 연대와는 무관할 것이다. 소비자주의적 민주주의 개념에 따르면 우리가 활기찬 공동의 삶을 영위하든, 우리와 같은 사람들끼리만 모여 각자의 소굴에서 사적인 삶을 살든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공동선이 오직 우리 동료 시민들이 우리 정치공동체에는 어떤 목적과 수단이 필요한지 숙려하는 데서 비롯된다면, 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질 수 없다. 그것은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의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 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