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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통합 】 유대교

나스티시즘 2023. 9. 20. 03:25
초종교(超宗敎) 시대의 개막

【 𝓚𝓐𝓑𝓑𝓐𝓛𝓐𝓗 】

 
"우리 왕국의 모든 인민은
카발라(Kabbalah, 유대 신비주의)
교리를 의무적으로 따라야 한다."

https://www.instagram.com/p/Ch02Q99viQM/?igshid=MzRlODBiNWFlZA==
【 종교 통합 : 진리의 초종교(超宗敎) 】
 

세계 정복에 필요한 부분은 경제, 정치, 종교의 통합이다. 현재 뉴에이지 운동이나 에큐메니컬 운동을 통해 종교 통합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개신교, 천주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유대교, 그리스 정교 등 지구상에 인류의 모든 종교가 하나가 될 것이다.

https://youtu.be/pmk5z_PvLpY

【 격암유록 정각가 】


道道敎敎獨主張(도도교교독주장)
'여러 도와 여러 교들이 각기 자신의 것을 주장하나'
信仰革命不知(신앙혁명부지)
'신앙혁명을 알지 못한다.'
何不覺而亂世生(하불각이난세생)
'어찌 깨닫지 못하고 난세에 살 수 있겠는가.'
天降大道此時代(천강대도차시대)
'하늘에서 큰 도가 내려오는 지금의 시대이다.'
從道合一解寃知(종도합일해원지)
'도를 좇아 합일해야 원통함을 푼다는 걸 알아라.'
 
https://youtu.be/tlr-c4y8eRk?si=LIRbPGuTUEz3LIgT

https://youtu.be/kvPwdwUcc_Q?si=cL39DbtkTvCA2A_Q

https://youtu.be/6sQZ8r_gcqo?si=Sq2yz9cYMLo4zDsD

https://youtu.be/V45sq1TUqOY?si=6_693nKxOAyD4XsY

 


 

【 사이비 종교 】

 

 ■ https://youtu.be/c_qPkgoJKWE

 ■ https://youtu.be/tprNLRlEMaE?si=aRLi7rwBuaKxHxoN

 ■ https://youtu.be/w2K469ys6tA?si=c1CMNykHa-whvG7T

https://youtu.be/G8Wui22Z-bA?si=CN29lOgEtvMu6Y5r

https://youtu.be/V3WsSaS6CKU

 


 
 기독교 】

 
 ■ https://youtu.be/l7WVif8U8Hs?si=mvc7pkyTx1bIgj4F

https://youtu.be/8wc1nkDfK-E?si=H5OTZuIVGqlaFX3J

https://youtu.be/-j4EFbXv6-I

https://youtu.be/oVpUXoFzcYk

https://youtu.be/wXYLApgNqD8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면서
똑같은 말을 계속하는 자가
필경 언쟁에서 이기게 된다."

파우스트 』
 


 
"교회는 위장이 워낙 튼튼해서
온나라를 통째로 집어 삼켜도
배탈이 나지 않는다."
 
파우스트 』
 
 


 

 불교 

【 기독교 일부 부흥사,
성철 스님 유언 유아적 윤색 】

성철 스님과 지장보살과 붓다. (한겨례 자료 사진)

■ 휴심정 개똥소똥방에 ‘부처는 지옥에 있다’는 글이 연달아 올라오고 있다. 누구 누구의 증언이 있다면서 홈페이지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제는 미국이나 유럽에선 찾아보기 쉽지않은 근본주의자들이 서울의 명동과 지하철에서 외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견지에서 보면 예수를 믿지않는 사람은 모두 지옥에 간다.
 
현재 비기독교인뿐 아니라 예수를 들어본 적도 없이 사망한 우리의 조상들도 모두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다. 부처도 공자도 예외가 아니다. 살아온 삶 참회하며 지옥에 간다고 고백했다? 이들은 성철 스님의 유언을 빌어 ‘성철 스님이 최후의 유언에서 살아온 삶을 참회하며, 자신은 지옥에 간다’고 고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철 스님이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하니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라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이여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이로다."
 
"일생 동안 미친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수미산을 덮은 죄업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산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서 한이 만갈래나 된다.
한송이 꽃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일부 기독교 부흥사와 목사들은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 내가 80년동안 포교한 것은 헛것이로다 /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 시에 찾게 되었다. /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고 했다며 유언 내용을 첨삭 윤색해 퍼트리고 있다.
 
하지만 그런 기독교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해 언젠가 마음이 열려 종교간 대화에 앞장서는 한 기독교 목사가 종교 세미나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오직 자신이 천국가는 구원을 받기 위해 목매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불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게 ‘불보살들이 지옥에 가는 것’과 ‘살불살조’(殺佛殺祖·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여라)라는 것이었다. 불교에선 곧바로 성불(부처가 됨)할 수 있는데도,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한명도 남김 없이 구제할 때까지 지옥을 떠나지 않겠다고 발원한 지장보살이 있다.
 
또 선가(禪家)에선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과 예수는 커녕 바울과 교리의 틀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기독교에선 이해할 수 없는 점이라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위대한 점은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 현실을 개혁해나가는 것이라면, 불교에서 위대한 점이라면 개인 구원을 넘어서 부처와 조사도 넘어서면서, 모든 중생을 위해 지옥까지도 마다하지않는 보살정신”이라고 평했다. 불교의 약점이 아니라 되레 위대한 점을 부각시켜주는 셈. 그러니 위 부흥사들의 주장은 불교의 약점이 아니라 위대한 점을 부각시켜주는 셈이다.
 
`내편은 천국, 네편은 지옥'으로 편가르는, 초등학교 1학년 수준. 하지만 성철 스님의 유언은 이런 세간적 시비를 넘어선 초세간적인 정신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내편은 천국, 네편은 지옥'으로 편가르는, 초등학교 1학년 땅따먹기 수준이 아닌 것이다. 또한 일부 기독교 부흥사는 성철 스님의 초파일 법문을 들어 성철 스님이 ‘사탄 숭배자’라고도 비방하고 있다. 성철 스님의 ‘부처님오신날’ 법어 가운데 ‘사탄이여 당신도 부처입니다. 당신을 존경하고, 예배드립니다. 어서오세요’라는 내용을 두고서다.
 
그 법문 또한 약점이 아니라 해탈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월드컵 4강신화’를 이룰 당시 끝까지 분위기 파악 못하고 ‘붉은 악마’ 대신 ‘백의천사’란 이름으로 바꿔야한다며 떼쓰던 극소수의 근본주의 기독교인 외 대다수는 이미 그런 정신세계를 경험한 바 있다. 악마니 사탄이니 손가락질하며 저주하는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해탈돼, 전국 방방곡곡에서 네 종교, 내 종교, 네 지역, 네 지역, 빈부귀천을 따지지않고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천국을 연출하지 않았던가. 선사의 법문은 터부와 고정관념과 편견의 동굴을 막은 바윗돌을 단칼에 쳐부수어 해방시키는 것이다.
 
어찌보면 그런 정신 세계의 파옥(감옥을 깨부수고 나옴)은 타종교보다 한국 기독교에서 더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한국엔 장로교 한 뿌리에서만도 백개 넘는 교단이 나와 난립해 있다. 그들이 다 나름의 교리를 가지고 있고, 사람들마다 자신의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자기야말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있다고 여기고, 상대를 사이비니 이단이니 사탄으로 저주한다. 그러니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의 하나님과 예수님 중의 어느 분이 진짜 하나님이고, 진짜 예수님인가. 모두가 자신이 고집하고 주장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내려놓기 전까지 한 분이신 그 분이 어찌 온전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인가.
 
선(禪)에서 부처와 조사를 죽이는 살불살조도 내가 고집하고 내 마음대로 그린 부처와 조사를 죽이는 것이다. 고정관념과 편견과 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크리스찬이 진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워내 성령이 충만해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는 극락에 집착하는 이의 극락에 대한 착을 베어내고,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집착으로 묶여 있으면 그 지옥착을 베어내는 것이다. 마귀도 자처하고, 지옥도 들어가고, 부처조차 단칼에 베어버리면서 그 고정관념을 180도, 360도 돌리며 깨부수고 해탈케 하는 것이다. 이분법적 편견으로부터 해방돼 5천만 동포도 하나같이 ‘귀염둥이 악마’(붉은악마)가 되어 춤을 취고 뛰었는데, 부처와 성철이 어찌 지옥에 들어가 함께 춤추지 못할 것인가.

- 조현 종교전문기자 -

https://m.hani.co.kr/arti/well/mind/942931.html?_fr=gg%2523ace04ou

‘불신자’ 성철 스님 참회하고 지옥 갔나

기독교 일부 부흥사, 유언 유아적으로 윤색  초파일 법문 들먹이며 ‘사탄 숭배자’ 비방도 ...

www.hani.co.kr

■ https://youtu.be/t6kMmgw7Hrk

https://youtu.be/0TX0tuJesgM?si=eHFqSYNHliP8fmo0

【 대승적 포용 가르침 】
 

"사탄이여 오십시오, 당신은 거룩한 부처."

■ 1987년의 5월 한국 사회는 일촉즉발의 긴장이 팽팽히 흐르고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야기됐던 긴장은 마침내 6월 민주항쟁의 봇물로 터져 나왔다. 역사의 그런 엄중한 흐름은 심심유곡 도인의 마음에까지 닿았다. 당시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이었던 성철 스님은 그해 부처님오신날(당시 5월 5일)을 맞아 묘한 법어를 발표했다. '사탄의 거룩한 본 모습'이라는 제목으로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입니다'로 시작하는 법어는 일부 성급한 기독교인들로부터 '사탄 숭배'라는 비판을 받았을 정도로 논란을 일으켰다.
 
6월항쟁 20주년을 맞은 지금, 다시금 성철 스님의 20년 전 법어가 현재적 의미를 지니며 주목을 받고 있다. 성철 스님의 맏상좌 천제(현 부산 해월정사 회주) 스님은 "그 같은 파격의 법어를 내린 것은 갈등과 대립이 치솟던 당시 정국에 대한 성철 스님 나름의 해법을 보인 것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1987년 5월은 군사정권의 탄압과 그에 따른 대중의 저항이 절정으로 치닫던 무렵이다. 마군(魔軍)이나 악마 대신 기독교적 개념인 사탄을 법어에서 언급한 것은, 군사정권의 탄압 등 제반 악과 갈등을 불교를 넘어서는 보다 넓은 틀에서 승화시키자는 의도로 파악된다.
 
또는 당대의 극악한 상황을 사탄에 비유하면서 그 극악한 상황마저도 '좋은 시대'를 위한 전조의 의미를 지녔다는 뜻이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법어에서 '일체의 불행과 불안은 본래 없으니 오로지 우리의 생각에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가장 근본적인 길은 거룩한 부처인 당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에 온 세계는 본래 부처로 충만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원수도 사랑하라'는 기독교적 가르침과는 또 다른, 대승적인 끌어안음 혹은 보다 큰 틀에서의 적극적인 긍정으로 읽힌다.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한 채 막연한 무엇으로 답을 구하는 것도 어리석다. 천제 스님은 "해인사 장경각 법당 주련에 '원각도량하처 현금생사즉시(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是)'라는 글귀가 있다"고 했다. '깨달음의 경지인 원각도량이 어디 있느냐? 지금 생사가 원각도량이니라'는 뜻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혹은 당대)를 떠나서 열반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일러주는 이야기다. 시대 속에서 시대를 넘어서는 무엇을 두 눈  뜨고 보라는 것이다.
 
성철 스님도 법어에서 '더러운 뻘밭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가득 피어 있으니 참으로 장관입니다. 이 밖에서 진리를 찾으면 물 속에서 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일렀다. 결국 선과 악을 초월해 지옥과 천당이 없는, 대립이 없어지고 선악이 융통하는 그런 연화의 세계를 직관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을 가져야 하며, 그를 위해서 부단히 수행정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럴 때 세상은 온전하게 불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선악이 융화상통할 때에 시방세계에
가득히 피어 있는 연꽃을 바라보게 됩니다.
연꽃마다 부처요, 극락세계 아님이 없으니
이는 사탄의 거룩한 본 모습을 바로 볼 때입니다.'
 
그렇게 끝나는 성철 스님의 법어는 그로부터 20년이나 지났지만 1987년 6월의 흥분과 감격을 잊지 않고 오늘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할 듯싶다. 감히 따르기에는 너무 어려운 가르침이라고? 그렇다면 불경에 나오는 '빈녀(貧女)의 등(燈)'처럼 지극한 신심의 등불을 달고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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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이여 오십시오, 당신은 거룩한 부처'  대승적 포용 가르침

1987년의 5월 한국사회는 일촉즉발의 긴장이 팽팽히 흐르고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야기됐던 긴장은 마침내 6월 민주항쟁의 봇물로 터져 나왔다. 역사의 그런 엄중한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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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지주의와 불교 】

 
■ 영지주의는 동양의 또 하나의 위대한 종교인 불교와도 유사성을 갖는다. 무엇보다도, 불교의 최종 목표 - 영지주의의 궁극 목표에 정확히 상응하는 - 몸을 입은 존재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미래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liberation)에 있다.(보살이라는 이상과 그 밖의 가르침들은 이 근본 가르침을 더욱 세분해 놓은 것일 뿐이다.) 유명한 불교 학자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에 따르면 영지주의와 불교 - 특히 대승 불교 - 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보인다.
 
구원은 그노시스(즈나나)를 통해 얻어진다.
현실 존재들이 의존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 곧 해방이다.
 
무지가 악의 진짜 뿌리다.
영지주의에서는 아그노시스(agnosis),
불교에서는 아비디아(avidya)라고 말한다.
 
③ 영지주의자의 지식과 불교인의 지식은
평상의 방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 계시의 결과로서 얻어진다.
 
④ 어리석은 물질주의자(hyletic)의 상태로부터
깨달은(pneumatic, 영적인) 현자의 상태에까지
이르는 영적 성숙 단계가 있다.
 
⑤ 영지주의와 불교에서는 지혜의 여성적 원리 [각각 소피아와 프라즈나(Pragna)]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콘즈는 《헤바즈라 탄트라(Hevajra Tantra, 大悲空智金剛)》를 인용하여 "프라즈나는 세상을 낳기 때문에 어머니라고 불린다"라고 말한다. 불교에는 소피아에 필적하는 다라多羅보살, 관음보살 같은 다른 신적 존재들도 있다.
 
⑥ 영지주의와 불교는 사실보다 신화를 선호한다.
붓다와 그리스도는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는
원형적 존재로 제시된다.
 
도덕률 폐기론의 경향(규율과 계명에 대한 경시)이 두 종교 체제 속에 내재해 있다. 영적 사다리의 낮은 단계에서는 행동의 법칙들이 중요한 것으로 때로는 결정적인 것으로 고려되지만, 높은 영적 상태에서는 그런 법칙들의 중요성이 상대적인 것으로 변한다.
 
두 종교 체계는 값싼 대중성을 혐오한다.
이들의 가르침은 영적 엘리트를 목표로 한다.
숨겨진 의미와 신비한 가르침을
일반적인 특징으로 삼는다.
 
⑨ 영지주의와 불교는 모두
형이상학적인 일원론을 취한다.
이는 이 두 종교가 현실 존재들의 다양성을
초월하여 궁극의 합일 상태에 이르기를
열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사성이, 대승 불교에 속하는
티베트 불교(Vajrayana, 金剛乘)오늘날
서구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는 데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 영지주의와 힌두교 】

 
https://youtu.be/wniL0JRScb8?si=aFMepmX5QTsiE-tX "지상 최대의 악은 무지(無知)."

 
■ 영지주의와 동양의 몇몇 위대한 종교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인정되어 왔다. 그노시스(gnosis)라는 단어는 '지식', 특히 영적인 지식을 뜻하는 산스크리트 어 즈나나(jnana)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주요한 요가 전통 중에 즈나나 요가가 있는데, 이는 '지식을 통해 하나가 되는 길' 이라는 뜻이다. 영적 실재에 대한 직접적 지식의 전수는 수준 높은 요가에서는 수행으로서 인도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이 점에서 영지주의는 힌두교라고 알려진 인도의 고대 종교와 아주 유사하다. 힌두교는 여러 종파들의 집합체로, 서구에서 이해하는 의미의 종교와는 다르다. 힌두교에는 엄청난 다양성이 존재하며, 심지어는 서로 공통점이 거의 없는 종파들도 있다. 예컨대 사변적인 베다 교는 신앙적인 비슈누 교나 비교적인 탄트라 교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공통된 전통이 있다. 영지주의 전통의 다양성도 확실히 이와 유사하다. 영지주의와 힌두교를 하나도 묶는 몇 가지 분명한 특징이 있다.
 
첫째로, 인간의 영 안에 깃들어 있는 신성한 존재에 관한 가르침이다. 아트만(Atman)은 브라만(Brahman)과 동일한 본성을 지니는데, 이는 우주적 신성이 모든 인간 속에 축소된 형태로 현존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와 비슷하게, 영지주의에서 프뉴마(영)는 신의 화염(flame)에서 방출된 불꽃이며, 영지주의자는 프뉴마를 알게 됨으로써 그것이 나온 영적 근원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힌두교인과 영지주의자는 자신의 가장 깊은 자기를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둘째로, 영지주의와 힌두교는 궁극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 사이의 중간 세계에 수많은 신적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힌두교는 현대 세계의 대표적인 다신론 종교인 반면, 영지주의는 유일신론을 그 모체로 하고 있다. 하지만 영지주의가 순수한 유일신교라과 간단히 말하기는 힘들다. 더욱이 인드라(Indra) 신이나 프라자파티(Prajapati) 신 같은 힌두교의 베다 신들은 영지주의의 데미우르고스와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셋째로, 힌두교에는 이원론적인 특성과 비非이원론적 특성을 함께 언급하는 수많은 가르침이 있다. 영지주의를 종종 이원론적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영지주의 관점은 힌두교의 이 두 가지 특징에 정확히 상응한다. 힌두교에서 마야(maya)라고 부르는 세계에서는 이원론이 지배적이며 빛과 어둠의 투쟁이 벌어지지만, 궁극적인 실재의 세계에서는, 비교컨대 영지주의자들에게 플레로마로 알려진, 그 와 같은 존재의 충만이 있다.
 
 


 
영지주의
 

"완전해지는 것의 시작은
인간을 아는 것이고,
완전해지는 것의 완성은
신을 아는 것이다."
 

 

영지주의 용어에 대한 간략한 소개


■ 영지주의 경전에 등장하는 신화적 존재의
이름과 영지주의적 개념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이다.
종합적인 목록은 아니지만, 영지주의 문서를
읽고 이해하는 데 기초적인 도움은 될 것이다.

그노시스 》 Gnosis (그리스어)
우주 밖에서 온 신성한 사자들이
인간에게 전해준 가르침 및 신비 의식을 포함한,
다양한 자극에 의해 도움을 받긴 하지만
직관적으로 도달하는 구원의 지식.

데미우르고스 》 Demiurgos (그리스 어)
드러난 저급한 세계의 조물주.
아르콘들의 우두머리이며
제한된 지혜를 가진 불완전한 존재이다.

로고스 》 Logos (그리스어)
지고의 하느님의 말씀.
영지주의 경전에서는 예수의 칭호이기도 하다.

만다 》 Manda (그리스 어) 그노시스
이 단어에서 만다교인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만다교인들은 고대 영지주의자들의 유일한, 직접적인
후손들이며, 지금도 중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바르벨로 》 Barbelo (히브리 어)
신성한 존재의 여성적 모습에 붙여진 이름.
때때로 어머니 하느님으로 여겨진다.

방출 》 Emanation (라틴 어)
근원적 관점에서 창조를 상상한 영지주의의 방식.
모든 만물과 존재는 근원적으로
신성한 존재로부터 방출되고, 오직 그 후에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우주적 체계를 따라 만들어진다.

복음 》 Gospel
(고대 영어 - 그리스 어 evangelion과
라틴 어 evangelium에서 번역된
godspell, 즉 '좋은 소식')
영지주의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깨달음,
곧 그노시스를 촉진시키도록 마련된 경전을 뜻한다.

사클라스 》 Saclas (아람 어)
어리석은 자. 눈먼 바보.
데미우르고스의 이름 중 하나.

소테르 》 Soter (그리스 어)
구원자, 구속자.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로 가장 자주 쓰인다.
 
소피아 》 Sophia (그리스 어)
지혜를 의미하는 히브리 어 호크마에서 유래한 말.
일부 기독교 자료에서처럼 영지주의에서
소피아는 지고의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초월적 존재의 고유한 이름이다. 영지주의 자료는
그녀가 충만에서 하강하여(타락하여)
혼돈스러운 저급한 세계에서의 여행을 괴로워하다가
자신의 근원으로 복귀했다고 묘사한다.
 
아르콘 》 Archon (그리스 어)
통치자. 피조물을 통치하고
그들에게 한계를 가하는 열등한 우주적 존재.

아브락사스 》 ABRAXAS (이언異言)
영지주의자들이 붙인, 일곱 번째 하늘의
통치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온 소피아의 아들,
곧 구원받은 아르콘을 부르는 이름.
수탉의 머리와 사람의 몸,
뱀의 모양을 한 다리를 가진 존재로 묘사된다.
아브락사스는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영지주의 운동 발생 이후 발견된
많은 영지주의 부적에 새겨져 있다.

아카모트 》 Achamoth (히브리 어)
지혜를 의미하는 호크마(Chokmah)의
철자를 바꿔 만든 단어.
일반적으로 소피아의 낮은 측면과 관계된다.

안트로포스 》 Anthropos (그리스 어)
인간. 궁극적 실재에서 방출된,
천상에 있는 인류의 원형.

알다바오트 》 IALDABAOTH (이언)
'유치한 신' 을 의미하는
데미우르고스의 이름 중 하나.

에온 》 Aeon (그리스 어)
신성한 실재의 방출된 모습(aspect).
에온들은 자주 상대와 결합하여
조화를 이루는 쌍(남성과 여성)으로 제시된다.
(에온은 영원한 영역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플레로마에 있는 권능자들을 뜻하기도 한다.
때론 데미우르고스 아래 있는 영역을 에온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영원한 영역을
어설프게 모방한 것일 뿐이다.)

우주 》 Cosmos (그리스어)
체계. 지성과 자비심에 한계가 있는
창조 행위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실재의 조직화된 외형.

Barbarous words 》 (異言)
대개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영지주의 경전과 의식 에서
종종 주문으로 사용된다.
그 언어적 기원이 알려져 있지 않다.

크리스토스 》 Christos (그리스어)
기름부음 받은 자.
영지주의적 의미에서 크리스토스는
역사 속에서 한 번은
예수와 연합한 천상의 에온을 가리킨다.

프뉴마 》 Pneuma (그리스어)
영. 인간 속에 내재하는 최고의 본성.
프뉴마, 프시케(psyche), 힐레(hyle)가
인간의 세 가지 구성 요소인 영, 흔, 몸을 이룬다.

플레로마 》 Pleroma (그리스어)
충만. 충만한 공간,
곧 신성한 실재의 초월적 영역을 의미한다.
방출을 통해 이곳으로부터
모든 현실적인 존재가 나오며, 현실적인 존재는
또한 그리로 돌아가도록 운명지어졌다.

피스티스 》 Pistis (그리스어)
믿음. 주로 자신의 그노시스,
곧 직관적 지식에 대한 영적인 신뢰의 자질.
빛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를 가진 피스티스 소피아가
이 자질의 좋은 본보기이다.

 


 
【 한낮에서 한밤으로 】


■ 이 책을 시작하면서 나는 밤하늘을 지상의 어둠과 대조되는 그노시스의 빛을 상징하는 은유로 사용하였다. 이 책의 결론 부분에 도달한 지금, 이 은유를 확장시켜 낮의 하늘과 밤하늘을 대조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 같다. 한낮의 빛 속에서 물질적 대상들은 아주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세속적인 삶의 활동은 그 정도의 분명한 시력을 요한다.
 
하지만 민감하고 훨씬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밤의 시력은 낮의 밝음에 압도되고 만다. 하늘의 발광체들은, 비록 존재하긴 하지만, 낮의 밝은 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낮에는 별빛은 완전히 가려지고 아주 가끔 달의 윤곽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눈부신 태양 빛이 사라지고 밤하늘이 다시 나타나면, 몇 광년 떨어져 있는 별들의 빛이 다시 우리의 눈에 와 부딪치고 가까이 있는 지상의 사물들은 그림자처럼 어렴풋해진다.
 
밤하늘을 볼 수 있는 능력을 부정하고 오직 햇빛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세상, 그런 현실을 상상해 보라. 별을 볼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단절된 사람들은 오직 한낮의 세계, 그리고 근본적으로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는 세속 세계의 뚜렷한 대조물들만 경험하게 될 것이다. 더욱 비참한 것은, 별빛을 통해 전해지는 상상력의 자극이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아무도 검은 베일 위의 천공穿孔들이 보증하는 무한한 빛의 세계를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밤하늘을 부정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르네상스 이래 인류의 문명은 물질적 데이터라는 한낮의 세계에 근거한, 그리고 그 데이터로부터 추론해 낸 합리적 이론에 근거한 세계관에 점점 자신을 내어맡기고 있다. 우리는 한낮의 햇빛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현란한 의식의 세계에 갇혀 있다. 그 세계에서 우리는 더욱더 많은 사실들을 수집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아직껏 더 큰 행복을 얻지는 못했다.
 
우리는 갈수록 더 작은 것들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지만, 신비로운 빛을 품고 있는 밤하늘을 볼 줄 아는 영지주의적 시력을 빼앗긴 상태에서는 경험의 비물질적인 측면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우리는 중요한 조화와 귀결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근시를 앓고 있으며, 그래서 마치 바로 눈앞에 보이는 시공간에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실패한 신들 】


■ 이 세상 너머에서 비쳐오는 빛을 부정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적인 구원의 수단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19세와 20세기 초, 우리는 사회 경제적인 진보설이 인간 역사의 영광스러운 대단원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다. 칼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을 통해 세계를 구원하려고 시도했지만 스탈린과 마오쩌둥, 폴 포트 같은 그의 추종자들은 동료 인간을 역사상 가장 잔인하게 몰살했다. 히틀러는 인종주의와 영토 확장을 통한 구원을 강구하며 자국민을 포함해 약 5천만 민중에게 고통과 죽음을 안겼다.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선 지금, 적어도 지난 200년 동안 약속과 달리 지상천국 대신 고통만 안겨준 정치 이론가들에게 속고 이용당해 왔다는 사실을 점점 수긍하게 되었다. 정치적 구원의 신은 실패한 신으로 판명되고 있는 것이다.

세속적 구원의 또 다른 길이자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실망시킨 또 하나의 신은 과학이다. 과학이 물질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확장시키고 그 세계를 지배할 도구를 우리에게 선사하기는 했지만, 결코 실존적 곤경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지는 않았다. 과학(science)이라는 단어는 지식(knowledge)'을 의미하는 라틴어 '시엔티아(scientia)' 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그노시스라는 단어가 뜻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지식이다. 근본적으로 그노시스에는 과학적이거나 이성적이라는 의미가 없다. 그리스 어에서는 상당히 정확하게 과학적 지식("그가 화학을 안다"에서처럼)과 경험으로부터 온 지식인 그노시스("그녀가 나를 안다" 에서처럼)를 구별한다.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는 또 다른 신은 환경 보호주의라는 신이다. 과학 기술의 계속적인 발달에 놀란 우리는 자연 세계 - 혹은 우리가 역설적인 이름을 붙인 환경 - 를 걱정하는 보호자가 되었다. '환경' 이라는 말은 자연 세계를 인간을 둘러싼 무언가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인간 중심적 용어이다. 하지만 자연 혹은 지구를 구한다고 하는 애매한 범신론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과 영을 구하는 것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우리 내면의 영적 존재가 오염되어 있다면, 우리의 의식이 불충분한 상태로 남아 있다면, 아무리 환경이 깨끗하다 한들 우리를 우둔함과 실존적 불안에서 구원하겠는가? 사람들이 곧 닥치리라 예언하는 생태적 위기를 해결한다고 해서 마음과 가슴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가? 아니 완화시키기라도 할 수 있는가?

서구 문명은, 특히 18세기와 19세기 이후,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알아냈다. 동시에 우리는 내면 세계와 우리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는 완전한 무지 속에 있다. 이 두 세계는 때때로 의식(consciousness)이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의식은 과학이 강점을 보이는 부분이 아니라고들 말하기도 하는데, 정말 그렇다. 20세기에 두각을 보인 심리학, 심지어 심층심리학조차도 진정 과학과 효과적인 다리를 놓는 데는 실패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이 '새로운 과학' 으로 인정받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났지만 지금도 그의 바람은 실현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의식 연구(consciousness studies)' 라는 이름의 학문 분야는 있지만 '의식 과학(science of consciousness)'은 없다. 근본적으로 의식은 과학적 원리인 반복 실험에 제대로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적 절차와 방법으로 조사되기 어렵다. 실패 직전에 놓인 초심리학(parapsychology) 분야가 아주 그럴듯한 예가 될 듯하다. 텔레파시와 그와 관련된 ESP(초감각적 지각) 능력에 대한 실험 결과는 실험이 반복될수록 점점 확신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반복 실험에는 덜 의존적인 반면 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특정 상태의 지각을 끌어올리는 데는 더 의존적인, 일종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사실을 안다. 간단히 말해, 의식을 다룰 때 우리는 그노시스의 영역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융이 알아낸 것이었고, 이런 인식을 통해 융은 그노시스와 영지주의를 심리학과 연결시키는 천재성을 발휘했다. 융이 생각한 대로, 고대 영지주의자들은 의식의 영역에서 비범한 것들을 발견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에고 및 그것의 합리적 • 외향적 성향이라는 기준에 붙잡히지 않은 지각의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과학이 점점 자신 너머로, 심지어 의식에까지 눈을 돌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마땅히 지적해야겠다. 특히 이론 물리학은 물리학적이라기보다는 사실상 형이상학적인 영역으로 과감히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정식 과학자들만이 자신들이 연구하는 분야의 형이상학적인 차원을 진지하게 붙들고 있을 뿐이다. 물리학이나 과학의 다른 분야에서 일종의 도道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과학계에서 무시당하는 대중 과학자들이다. 지금까지도 일반 대중은, 심지어 교육받은 교양인들조차도, 뉴턴과 다윈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 세계에는 아인슈타인이나 플랑크(Planck) 같은 학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응용 과학은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담긴 이론에 근거하고 있지만, 그런 의미는 훨씬 더 정교한 과학 기술의 축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거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인정하기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의식, 곧 그노시스의 관점에서 보면 과학은 실패한 또 다른 신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언급한 실패한 신들의 목록은 구원의 능력을 자부하는 수없이 많은 신들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세속적 구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결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신은 실패하게 되어 있다. 진짜 잘못된 것은 형식과 방법 따위의 개별적인 결함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본질적이고 영구적인 욕구가 단순히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자원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세속적 사고와 같은 한낮의 빛은 구원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상 너머에서 비쳐오는 다른 빛이다.


【 영지주의자와의 마주침 】

■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에 우리를 가두어두는 근본적인 곤경 앞에 늘 깨어 있으며, 그 곤경을 그노시스의 부재와 동일시한다. 구약 성서에서 영지주의적인 인물에 꽤 가까운 예언자 호세아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물의 비참함이 신적인 그노시스(하느님에 대한 지식)의 부재에 있다고 꾸짖는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 그렇기 때문에 땅은 탄식하고, 주민은 쇠약해질 것이다. 들짐승과 하늘 을 나는 새들도 다 야위고, 바다 속의 물고기들도 씨가 마를 것이다." < 호 세아 > 4:2~3

이런 영지주의 관점은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 세계의 관계를 바라보는 우리 문화의 두 가지 입장과 철저하게 대조된다. 첫 번째 입장에 따르면, 인간이 모든 가치의 근원이고 자연 세계는 단지 인간의 목적을 위한 도구일 뿐이며, 하느님은, 적어도 존재한다면, 부적절한 존재이다. (이런 입장은 아마 프랜시스 베이컨에 의해 맨 처음 조심스럽게 제시된 것 같고, 계몽주의 시대에 널리 퍼졌다.) 두 번째 이보다 최근의 입장에 따르면, 자연 세계가 모든 가치의 근원이고 인간은 우주 생태계의 침입자이며 하느님은, 적어도 존재한다면, 자연 속에 내재하며 사실 자연과 구별할 수 없다. 영지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과 자연 질서는 참된 가치가 있는 하느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멀어졌기 때문에 어느 것도 모든 가치의 근원이 될 수 없다. 오직 인간의 의식이 분리의 심연 너머로 뻗어 올라 하느님과 맞닿을 때만 참된 가치가 파악될 수 있다.

하느님과의 이런 소외를 극복한 영과 혼을 가진 영지주의자는 이 세상과 다른 사람들에게 이방인이다. 참 영지주의자와 마주치는 것은 이방인과 만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영지주의 경전을 읽고 간접적으로 그런 사람을 만나거나, 현대 영지주의자와의 만남을 통해 그런 이방인과 직접 만날지도 모른다. 두 가지 경우를 통해 우리는 낯선 사상을 전해주는 이방인과 만나왔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이방인과의 창조적인 사귐을 갖는다면, 그 이방인은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영적인 문제들에 관해 의지할 수 있는 통찰력 있는 친구가 될 수 있다. 먼 나라까지 이르는 길을 우리보다 앞서 여행한 자는 우리의 안내자가 될 자격이 있다. 그러므로 이 만남은 성공을 보장할 것이다.

또한 마니와 붓다가 사용한 비유를 빌리면 영지주의자들은, 우리를 만나서 우리가 강 건너편으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노를 젓는 뱃사공과 같다. 영지주의자는 자신이 강 건너편 지역에 밝다고 말할 것이고, 그곳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놀라운 경이들이 숨어 있다고 우리를 확신시킬 것이다. 그는 또 자신의 나룻배를 타기 위해서는 현재 머물고 있는 대지를 떠나야 한다고 우리를 일깨울 것이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대지는 개인마다 다르다. 세속의 회의론자들은 영적인 헌신을 외면하고 누려온 안락함을 버려야 할 것이고, 독실한 신자들은 종교적 이상, 특히 하느님에 대한 개념을 재평가해야 할 것이며, 소심한 자들은 실존적 용기를 불러내 위대한 모험을 떠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뉴 에이지 영성 가게의 단골손님들은 주변의 값싼 천박함을 버리고 큰 노력을 필요로 하는, 전혀 다른 세계관과 접목된 의식적 자기 개발의 과정을 밟겠다고 다짐해야 할 것이다.

영지주의 경전은 인간의 곤경을 무지와 잠, 만취, 그리고 망각과 동일시한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비참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 로 변장하고 다가온다. 우리는 그런 곤경에 갇혀 사는 삶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문이 열려도 우리(cage)를 떠나기를 거부하는 짐승과 같다. 그노시스가 가져다주는 자유보다는 차라리 잠자며 혼수 상태에 빠져 있는 지금의 삶의 방식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문화 안에서 합의된 세계관이나 종교적 도그마에 대해서는 거의 문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영지주의적 통찰에서 나온 가르침을 문제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의문 중에 더러는 유익한 것도 있다. 하지만 영지주의자와 그들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질문하는 자에 대해서도 우리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영지주의의 원리가 대다수의 생각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그것을 깊이 숙고하기를 꺼려하고 있지 않는가? 영지주의의 사상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뿌리 깊은 신념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 사회가 강요한, 검증되지도 않은 가설들에 불과한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영지주의는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때론 분개를 촉발시키기까지 한다. 영지주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믿고 따라온 것들에 대한 도전의 상징이다. 이 세상을 본래 그 자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영지주의에 의해, 그리고 세속적인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영지주의의 참된 인식에 의해 겁에 질린다. 이 세상은 자력에 의해서는, 아무리 그 힘이 정치적 • 경제적 • 과학적 • 생태학적 혹은 그 무엇으로 그려지든지 간에, 나아질 수 없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세상 밖에 있는 무엇 - 지혜, 곧 지구와 우주의 한계를 초월해 있는 내면의 지식 - 이다. 사회적 진보라는 가치에 사로잡혀 있는 현대 혹은 탈현대의 사람들에게 그런 입장은 다른 세상에서 온 기괴한 것처럼 보일 것 이다. 사회의 현상 유지를 지지하는 자들 또한 편견을 가지고 영지주의자를 바라보기는 마찬가지이다. 조물주에게 부정한 이름을 붙이고 창조와 관련된 모든 것에서 결함을 인식하며 종교의 계명이나 사회의 규율을 구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자가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자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삶을 비극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자신들의 무력함 속에서 의식의 절망과 소외를 느끼는 사람은 영지주의 메시지에 응답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현세적 삶에서 충분히 고통당하고, 다행히 그 고통으로 인해 의식을 최대한 일깨우며, 그 결과 올곧은 의지와 성실성을 지니게 된 자들이 고대의 낯선 목소리 - 현대의 새로워진 힘을 더한 - 로 자신들을 부르는 영지주의자에게 응답하기가 더 쉽다. 이런 자들의 영혼과 정신이 합리성과 외향성의 현란한 한낮으로부터 그노시스의 빛이 발견될 수 있는 밤하늘의 신비로운 발광체로 시선을 돌리기가 쉬운 것이다. 영지주의 가르침에 마주치는 것이 그런 이들에게는 유익한 일이다. 오랫동안 한낮의 빛에 가리어졌던 별빛이 다시 나타나고, 한낮의 빛에 의해 드리워진 어둠의 그림자가 물러간다. 그리고 별빛 한가운데서 고대의 입교자(영지주의자)들이 보았던 신비로운 한밤의 태양이 반갑게 얼굴을 내민다.
 

【 영지주의 세계관 】

영지주의의 중심에는 환상과 합일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영적 경험이 있는데, 그것은 신학이나 철학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기보다는 신화를 통해 표현하며 그 특성도 신화와 꽤 유사하다. 여기서 신화란 진실되지 않은 이야기라는 뜻이 아니라, 신학적 도그마나 철학적 이론과는 다른 종류의 진실을 체현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고대 세계에서 신화는 중요하게 여겨졌다. 19세기나 20세기 초만 해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던 신화가 오늘날에 들어서 점점 그에 합당한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20세기 후반, C.G. 융과 미르치아 엘리아데, 조셉 캠벨 등의 주도로 조그마한 신화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그들의 작업에 힘입어 신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조성되었고, 고대나 여타 신화 속에 담긴 의미가 밝혀짐으로써 우리 문화의 개인적, 집단적 심리 안에 팽배한 소외감과 불안정감이 해소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우리는 한 세기 전 사람들보다 영지주의자들의 신화적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훨씬 나은 위치에 있다. 영지주의 신화의 주요 모티프들을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설명은 원문처럼 시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언어가 아니라 건조한 산문의 언어로 이루어지는 만큼, 신화의 매력과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 떨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 하느님과 우주 】

■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의 체계에 따르면, 어떤 형태로든 세계는 불완전한 것으로 그려진다. 이 불완전한 세계에 대해 어떤 제안을 하느냐에 따라 서로의 차이가 생겨난다. 수많은 전통들에서 인간은 악한 존재로 규정된다. 예를 들어 주류 유대 기독교 사상에서는 최초의 인간 부부가 하느님의 법을 어김으로써 인류뿐 아니라 온 피조물의 타락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지상의 삶에 따른 결함과 악은 이 타락의 결과이다. 일부 극단적인 환경론자들은 마치 이 타락 교리를 현대의 세속적인 방법으로 해석한 듯한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이 입장에서 인간은 약탈자, 곧 자연의 천국을 영구히 파괴하는 원죄인인 셈이다. 이 문제에 대한 영지주의자들의 관점은 아주 놀랍고 독특하다. 그들은 이 세계가 불완전한 방법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결함을 지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영지주의는 지상의 삶이 고통과 덧없음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삶은 힘들고 그래서 너희는 죽는다"는 격언에, 이 격언의 앞부분을 수정 교체하기를 바랄지는 모르지만, 동의한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을 살리려고 다른 생명체를 먹어야 하고, 그로 인해 다른 생명체에게 고통과 공포, 죽음을 선사한다. 이런 사실은 초식 동물에게도 적용되는데, 그들도 식물의 생명을 파괴함으로써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이른바 자연의 재앙(지진, 홍수, 화재, 가뭄, 화산 폭발, 전염병)도 고통과 죽음의 흔적을 남긴다. 유기체의 구조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고통과 괴로움도 더 커진다.

이 끔찍한 사실들을 똑바로 직시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삶을 어떤 의미에서 따듯하고 행복한 것으로 인식하고 싶어하는 강한 심리적 욕구를 갖고 있다. 세상의 어두운 측면을 기꺼이 직시하기 때문에 영지주의자(와 불교인)에게는 종종 염세주의자니 세상을 혐오하는 자니 하는 딱지가 붙곤 한다. 하지만 영지주의자나 불교인이나 모두 고통과 무지를 벗어나는 길이 있으며 그 길은 바로 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다고 확신한다.

자신의 의식을 물질 세계에서 더 높은 영적 실재의 차원으로 끌어 올리지 않는 한, 어둠(외적 물질 세계의 어둠이든 정신 세계의 어둠이든)에 갇힌 영혼의 노예 상태는 계속된다. 마치 몸과 마음이 영혼(soul, 또는 영spirit)을 가두는 새장의 창살과도 같은. 갇혀 있던 존재가 새장을 빠져나와 하늘로 날아오를 때 비로소 궁극의 의미와 행복이 있는 영적 세계들로 올라가게 된다. 이 세계들을 통과해 계속 비상함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본향, 곧 신성한 존재에게 이른다.

"영지주의자는 염세주의자다"라는 진술은 물질적인 영역, 개인의 심리적인 영역이 유일한 실재라고 주장할 때만 타당성을 지닌다. 유감스럽게도 현대 문화에서는 이런 관점이 세속적 사고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 이와 달리 영지주의자는 자기를 해방시키는 초월적 의식의 잠재력에 진정한 가치를 둔다.

독자들은 플라톤의 유명한 동굴 비유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동굴에 갇혀 바깥을 볼 수 없던 죄수들은 어리석게도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가 실재라고 믿는다. 하지만 참된 실재는 그림자를 생기게 한 근원인 빛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이 벽에 비친 그림자에서 영원히 돌아서서 실재와 직접 교제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의 근거가 된다. 영지주의자는 인간 마음의 주요 부분을 포함해 창조된 세계를 악한 것으로 여긴다. 그 주된 이유는 창조된 세계가 우리의 의식을 신성한 존재에 관한 지식에서 딴 데로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적 상태가 불가피하게 우리를 외적인 것(심리학적으로는 '외향성')으로 이끌어간다면, 사람들 마음의 소란스러움은 그 소란스러움 자체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이런 이중의 방해로 인해 내적 자기(inner self)는 잊혀지고 만다. 그러나 내적 자기[('영(spirt)' , 그리스 어로 프뉴마(pneuma)]만이 궁극의 신성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 경험의 장場에서 초월이 이루어지는 지점은 바로 이 내적 자기이다. 초월의 경험을 통해서, 영지주의자가 진정한 '원죄' 라고 여기는, 곧 신성한 존재로부터의 인간의 소외와 분리가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다.

"영지주의는 우주의 질서를 부정한다", "영지주의자는 세상을 혐오하는 자다" 라는 진술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말이다. 영지주의자는 우주가 아니라, 유일신론자들의 언어로 이른바 '하느님' , 곧 우주의 바탕이 되는 궁극적 실재로부터 의식이 소외되는 것에 맞서 투쟁한다. 그노시스 없는 영혼에게 우주는 유일한 실재처럼 보인다. 따라서 우주는 물질과 정신 너머에 있는, 다시 말해 모든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대용의 실재들 위에 있는 참 실재를 향한 의식의 상승이라는 영지주의자의 참된 목적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된다.

고대 영지주의자들은 유일신론이 널리 퍼져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았다. 유대인과 기독교인, 심지어 이교도인 헤르메스주의자까지 유일신 하느님을 믿었다. 유일신론자들은 하느님을 조물주로, 더 나아가 우주의 관리자요 입법자, 법의 집행자로까지 그린다. 영지주의자는 인류의 조상인 타락한 부부가 온갖 악과 고통을 세상에 들여왔다는 주장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태도가 더욱 타당해 보인다) 유일한 범죄자, 곧 조물주 하느님에게 그 책임을 떠넘겼다. 세계는 타락한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불완전했다고 영지주의자는 말한다.

세계가 불완전한 신에 의해 그의 결함 있는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영지주의에서 가장 파악하기 힘든 하느님 개념을 이해할 때 훨씬 납득하기가 쉽다. 영지주의자들의 하느님은 창조된 세계 너머에 있는, 어떤 점에서는 창조된 세계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궁극의 실재이다. 카발리스트(Kabbalist, 유대 신비주의자)들과 전 세계 대부분의 비교 신봉자들처럼, 영지주의자들도 창조라는 관념 대신 신성한 존재로부터의 방출(emana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초월적 하느님은 창조에 참여하지 않는다. 신적 본질이 방출되어 나아감에 따라 드러나지 않던 것이 드러나고, 그 과정이 더 진행되면서 훨씬 더 구체적인 창조가 이루어진다. 근본 하느님은 시종 제일원인으로 남아 있으며, 그 대신 다른 존재들이 창조의 부차적인 혹은 이차적인 원인이 된다.

가까운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넓은 땅을 개발하려고 마음을 먹은 투자가나 땅주인이 있다. 하지만 땅주인이나 투자가가 직접 그 땅을 치우거나 정리하는 일, 건물을 설계하거나 짓는 일에 관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건축가와 기술자, 설계가 등이 그 일을 대신할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계가 창조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불합리할까? 영지주의자들은 늘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비유를 더 확장시켜 보자. 만일 땅주인은 갈수록 개발에 덜 관여하고, 총책임을 맡은 건축가는 무능하고, 일꾼들은 게을렀다면, 땅주인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개발을 마음먹었더라도 최종 결과는 결코 온전하지 못할 것 이다. 고대 영지주의자들에게 건축가에 해당하는 존재가 그리스 어로 '반쪽짜리 제작자'를 뜻하는 데미우르고스(Demiurgos)인데, 그것은 그가 세계의 틀만 만들었을 뿐 내면의 생명은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꾼과 장래의 경영자에 해당하는 존재들은 그리스 어로 '통치자 라는 뜻을 가진 아르콘(archon)들이다.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행동과 말이 대부분 데미우르고스의 기질과 일치한다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야훼(구약 성서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영지주의자들의 경멸감은 정확하게 이런 배경의 결과임에 틀림없다.

 
인간 】

영지주의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물질 세계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여긴다. 앞 문장에서 중요한 단어는 '본질적으로' 라는 말인데, 이는 영지주의가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본질이지 이 본질을 둘러싸고 있는 육체적 • 정신적 용기容器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진화론이 고대 영지주의 시대에는 없었지만, 우리는 주류 기독교인들과 달리 영지주의자들은 진화론에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인간의 몸이 지상에서 생겨나고 인간의 영은 아득히 먼 곳, 진정한 근본 하느님(Godhead)이 머물고 있는 중만(Fullness)의 세계에서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썩어 없어지고 말 육체적 • 심리적 요소들과 함께 신적 본질의 파편인 영적 요소(때로 신의 불꽃이라 불리는) 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이원론적 본성(인간뿐만 아니라 세계의)을 인정하기 때문에 영지주의는 이원론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 안에 깃들어 있는 신의 불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이런 무지로 인해 사람들은 빛의 불꽃을 노예 상태로 가두어두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우주의 노예주 노릇을 하는 아르콘들의 이익에 봉사하게 된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정신적 개념들을 포함해 지상적인 것들에 집착해 있도록 우리를 부추기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 열등한 우주 통치자들에게 우리를 계속해서 예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대다수 인간은 낙원에서 잠자던 아담과 같다. 현대 비교 전통의 스승들, 특히 게오르기 구르지예프(Georgei Gurdjieff, 20세기의 대표적인 영적 지도자로서 에니어그램을 현대에 전함) 같은 이는 이런 영지주의의 개념을 받아들여 인간을 몽유병자 무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해방을 향한 인간의 열망과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천상의 도움이 하나로 결합된 결과이다.

영지주의는 아주 분명하고 정교한 구원론(곧 구원과 구원자에 관한 가르침)을 전한다. 잠자는 인간의 영은 신의 사람들 혹은 빛의 사자使者들을 통해 전해진 저 궁극의 신성한 존재의 부름에 의해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런 존재들은 전 역사를 통해 참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그들은 영혼들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최고의 영적 세계에서 내려온다. 인간의 영을 본래의 의식 상태로 회복시켜 신성한 존재에게로 다시 이끌기 위해서, 이처럼 구원으로 이끄는 존재들 중 영지주의 경전에 언급되는 존재는 극히 일부이다. 꽤 중요하게 여겨지는 존재들로 세트(Seth, 아담의 셋째아들), 예수, 그리고 예언자 마니(Mani)가 있다. 때로는 구약 성서의 일부 예언자들이 구원으로 이끄는 역할을 맡기도 하며, 후기의 (마니교적) 영지주의 전통에서는 붓다와 조로아스터(Zoroaster) 같은 다른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가 빛의 참 사자로 인식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를 으뜸가는 구원자로 여겼다. 이란과 아시아에서 활동한 마니조차도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자로 여기고 예수를 구원자로 경외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구원이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점에서 영지주의의 구원 개념은 힌두교와 불교 전통에서 볼 수 있는 해탈(해방)의 개념과 가깝다. 영지주의자는 죄(원죄나 그 밖의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죄의 원인이 되는 무지로부터의 구원을 바란다. 그노시스를 통해 신성한 존재를 알게 된 자는 모든 죄를 벗어버리지만, 그노시스가 없는 자는 죄 안에 머물 수밖에 없다. 무지(곧 영적 실재들에 대한 무지)는 그노시스에 의해 일소되고 만다. 그노시스의 결정적인 계시는 빛의 사자들, 특히 이 시대의 사자로 인정받는 예수에 의해 전해졌다.

영지주의의 구원 개념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영지주의 사상을 피상적으로 이해한 영성 연구가들은 그노시스에 의한 구원을 중재자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곧 자기 혼자서 하는 영적 기획쯤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잦다. 영지주의 전통을 이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대개 종교와는 거리가 먼, 우리의 세속적인 시대와 사회가 낳은 산물이다. 구원이 외부의 어떤 도움 없이도 가능한 것이었더라면 거의 대다수 인간은 진작 해방되었을 것이 다. 하지만 구원의 그노시스는 단순한 독서와 지적 사색, 담화의 결과물이 아니다. 영적 무지라는 곤경에서 해방되려면, 자신의 노력과 더불어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 개인의 구원 】

영지주의는 그노시스와 구원의 잠재력이 누구에게나 깃들어 있으며, 구원이 대속적 ·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임을 인정해 왔다. 따라서 주류 기독교가 주장하는 대속 신학(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 교리)의 메시지는 영지주의자에게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세계는 완전하게 창조되지 않았고, 현재 상태는 타락의 결과가 아니며, 인류는 누구에게나 전해진다고 하는 원죄의 영향 아래 있지도 않다. 따라서 분노한 아버지를 진정시키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당해야 할 하느님의 아들도 필요 없다. 죄에 해당하는 그리스 어 하마르티아(hamartia)가 '본래 과녁을 벗어나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생각해 볼 만하다. 이런 뜻으로 사용될 때, 대부분의 인간은 죄인이다. 우리 모두는 과녁을 벗어나 있다. 참되고 신성한 것들에 무지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위대한 빛의 사자들은 이 무지를 떨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온다. 우리는,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해방의 잠재력을 펼치도록 돕고자 빛의 사자들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의 가르침과 해방의 신비 의식(성례전)이 필요하다.

빛의 사자들에 의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난 사람 - 그래서 필요한 만큼의 영적 노력과 성실성을 갖춘 사람 - 은 참된 영지주의자[아는 자, 곧 영의 사람(pneumatic), 진실로 영적인 사람]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세속에 얽매인 상태에 남는다. 오늘날 평등주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영지주의의 이런 관점을 엘리트주의적이라며 거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타인과 구별하여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을 선택된 무리라고 여기는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엘리트주의와, 엘리트적인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존재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영적 스승인 J. 크리슈나무르티(Krishnamurti)는 <선생의 발 아래서(At the feet of tbe Master)>라는 이미 고전이 된 조그만 책에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 곧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라고 적었다. 옛날이든 지금이든 어떤 영지주의자도 이보다 더 훌륭하게 표현한 적이 없다. 영지주의자의 적들(이단 연구가들로 활동한 교부들부터)은 영지주의자가 나머지 인간을 경멸하는 거만한 엘리트주의자라는 비난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 곧 동일한 영적 신념을 지니지 않거나 자신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자를 학대하거나 박해한 영지주의 신자들에 대한 기록은 없다. 종교 재판과 십자군, 지하드는 영지주의자들이 발명해 낸 게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영지주의자를 박해하기 위해 발명된 것들이다.

영지주의가 세상을 부정하는 태도를 지녔다는 잘못된 억측에서 영지주의가 자살이라든지 여하한 살생을 부추긴다는 오해가 빚어진 경우가 많았다. 20세기 말에 벌어진 종교 집단의 자살 사건들, 예컨대 존스타운(Jonestowm) 사건(1978년에 메시아를 자처하는 존스 목사와 그의 추종자 912명이 가이아나의 정글에 위치한 자신들의 거주지 존스타운에서 대량 학살 및 자살을 저지른 사건), 태양신전단(Order of the Solar Temple) 사건(유럽의 한 비교 종파인 태양신전단이 1994년, 1995년, 1997년 세 차례에 걸쳐 대량 자살과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유립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 천국의 문(Heaven's Gate) 사건(1997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외계인 우주선의 존재를 믿고 승선하기 위해 39명이 집단 자살한 사건) 중 일부가 영지주의 교리와 의식儀式의 결과라고 대중과 매스컴에 알려졌었다. 진실에서 이보다 더 심하게 왜곡될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사실 영지주의자들이 여러 가지 점에서 지상의 삶을 어둠의 세력들에 예속된 상태로 여기긴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이 고된 상태를 저절로 벗어나도록 해준다고 믿은 영지주의자는 아직 없다. 해방의 지식은 몸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얻어져야 하며, 그런 영적 해방에 이른 사람은 몸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상관없이 자유를 누린다. 그에 반해 의식의 해방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몸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족쇄 속에 갇혀 있다. 몇몇 영지주의 문서들에서는, 인간은 변화된 의식이 더 이상 환생還生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반복해서 지상의 세계로 되돌아온다(곧 재생한다)고 말한다.

죽음에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죽음에 대해 묻느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영지주의 복음서 <도마복음(Gospel of Thomas)>에 보면 이와 유사한 물음에 예수가 다음과 같이 답한다. "태초를 알고 있어서 종말에 관해 묻느냐? 태초가 있는 곳에 종말도 있다. 태초에 서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끝도 알게 될 것이며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말씀 18)" 이 말씀이 분명히 의미하는 바는, 영혼이 기원한 영원한 세계를 영지주의자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앎이 삶과 죽음의 모든 문제를 자명하게 만들고 세상이 죽음이라 부르는 것으로부터 오는 온갖 두려움을 몰아낸다. 우리의 근원이 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성한 실재와 연결될 때 우리는 또한 어떤 상태로 돌아가야 할지를 알게 된다. 이 앎이 없다면 몸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은 죽은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자살 - 종교에 의한 것이든 그 밖의 동기 에 의한 것이든 - 은 대단히 비생산적인 행동임이 드러난다.

영적 엘리트주의라는 비난에 더해, 영지주의자들은 전문 용어로 '도덕률 폐기론' 이라고 하는 도덕 허무주의 또는 법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자들이라는 혐의를 받아왔다. 여기서도 영지주의적 관점의 미묘함이 쉽게 오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종교가 인간은 신이나 신에 준하는 존재에 의해 계시된 법(예컨대, 마누나 함무라비, 또는 모세의 법)에 복종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런 견해에는 분명 심리학적 정밀함이 결여되어 있다. 인간은 진공 속에서 행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은 의식 상태에서 나온다. 살인은 마음이 잔학한 상태의 결과요, 거짓말은 마음과 영혼 속에 온전함과 진실함이 결핍되어 있음의 표현이다. 위대한 영지주의자인 붓다는 바른 생각은 반드시 바른 행동을 낳는다고 말했다. 영지주의는 내면의 심령적(psychospiritual) 경험에 근거한 사고 체계이다. 이런 까닭에 영지주의가 그 본질과 중요성에 있어 행동보다도 마음의 상태를 더 우위에 두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늘 외적 행동이 아닌 의식이 도덕 가치의 참된 지표라고 주장했다. 윤리와 도덕이 규율들의 체계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한, 영지주의자들은 그것들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면의 근거를 밝혀주는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런 규율은 무익하다. 그러기에 수많은 영지주의자들이 구원은 오직 그노시스를 통해 오며 법과 규율 그 자체는 구원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반면, 도덕이 우리 속 천상의 불꽃에 그 뿌리를 둔 광명에서 생겨나는 내면의 온전함이라고 정의된다면, 그런 도덕은 영지주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영지주의의 중심 사상에 대한 이런 개론적인 설명에는 해석 및 적용과 관련해 몇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노시스의 경험은 필연적으로 그 통찰에 어울리는 세계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영지주의 없는 그노시스는 존재할 수 없다. 영지주의 세계관은 경험적인 성격을 띤다.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영지주의 세계관의 일부분을 제거하거나 희석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게 수정된 세계관은 더 이상 영지주의의 경험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는 독특하고 특수한 종류의 경험에서 기인하며, 따라서 하나의 세계관으로서도 다른 형식의 신비주의와 구별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Cross, 1542~1591, 에스파냐의 신비가, 교회학자, 시인)이나 아빌라의 성 테레사(St. Theresa of Avila, 1515~1582, 에스파냐의 신비가, 여성 최초의 교회학자)가 인식한 것과, 발렌티누스(Valentinus, 2세기경 이집트 출신의 대표적인 영지주의 철학자) 같은 영지주의 현자의 신비주의 사이에는 분명 유사점이 있다. 하지만 성 요한과 성 테레사가 로마 가톨릭의 세계관을 공유하고(비록 교회의 관료주의자들이 그들의 세계관을 불편해하는 때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있는 데 반해 발렌티누스는 뚜렷하게 영지주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전통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공통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전통들을 구별 짓는 분명한, 사실 때론 독특해 보이기까지 하는 특징들은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들이다.

우리는 절충의 시대에 살고 있다. 종종 뭘 선택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물건이 많은 슈퍼마켓에서 자기한테 필요한 먹을거리를 찾아 구입하듯, 우리는 선택의 폭이 아주 넓은 일종의 시장 같은 곳에서 영적 양식을 고를 수 있다. 심령의 슈퍼마켓에서 영지주의와 마주칠 때 우리는 영지주의 세계관의 일부는 받아들이지만 나머지는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의 참 자아를 초월적 충만함으로부터 생겨나온 신적 불꽃으로 보는 데는 기꺼워하면서도, 데미우르고 스라든지 그의 사악한 아르콘들, 근본적인 결함을 지닌 우주의 본성, 그 속에 존재하는 악과 같은 아주 어둡고 곤혹스런 영지주의 통찰은 유보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영지주의 세계관은 내적 일관성을 갖춘 하나의 완전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부를 제거해 버린다면 그 완전성은 파괴되고 만다.

또 하나 중요한 질문은 영지주의 세계관을 이루는 요소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이다.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주류 기독교에서 아주 빈번히 볼 수 있는 문자주의와 교조주의(dogmatism)는 분명 영지주의에 반反하는 관점이다. 영지주의는 세계관은 가지고 있지만 믿어야 할 교리와 신학은 가지고 있지 않다. 영지주의 경전은 내용면에서 근본적으로 신화적이며, 모든 신화는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융이 크게 힘을 쏟은 현대 심층심리학은 원형(archetype), 개성화(individuation), 그림자(shadow) 및 유사 개념들과 영지주의 신화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영지주의 신화를 탐구했다. 다른 신화와 마찬가지로 영지주의 신화도 서로 에끼는 일 없이 얼마든지 공존이 가능한 다양한 의미들을 지닐 수 있다. 다른 분야의 진리와 더불어 심리학적 진리도 영지주의 신화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이러한 진리 가운데 어떤 것도 거부될 필요가 없다.

그노시스라고 하는 '가슴의 지식(knowledge of the heart)' 과 늘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영지주의 세계관은 영원한 매력을 자아낸다. 영지주의가 세 번째 천년이 시작되는 지금 이 시기와 특별히 잘 맞는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 지난 천년은 시대의 질문을 감당해 내지 못한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이 철저히 붕괴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영지주의 현자들은 인간이 처한 곤경과 관련한 질문에 명석하고 솔직하고 믿음성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한 답변을 주고 있다. 우리는 그 점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내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 창조에 대한 창조적인 관점 :
< 창세기 > 다시 읽기 】

■ 몇 해 전, 영지주의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누구보다도 크게 불러일으켰던 일레인 페이절스라는 학자가 수단의 수도에서 그 나라 외무부장관과 대화를 가졌다. 딩카(Dinka) 족 출신으로 명망 있는 이 장관은 페이절스에게 자기 부족의 창조 신화가 사회적 · 문화적 측면에서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영향을 미쳐왔는지 들려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이절스는 미국의 사회적 관습들이 변화하고 있다는 지난 호 기사에 대한 독자의 편지 몇 통이 실려 있는 《타임》지를 읽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 편지들은 대부분 바람직한 행동 기준의 논거로서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었다. 편지들은 한결같이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를 가지고 오늘날의 도덕과 윤리를 정당화했다. 딩카 족만이 아니라 미국인도 여전히 자신들의 창조 신화에서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페이절스는 미국인과 딩카 족이 그다지 다르지 않으며 양측의 신화가 오늘날에도 그들에게 의미와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https://youtu.be/qWGfowuE9tk?si=6nGwkJYoz7WUYwfw


대부분의 서양인은 자신들의 문화에 딱 하나의 창조 신화가 있다고 믿는다.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창조 신화가 그것이다. 그것과는 다른 영지주의자들의 창조 신화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색다르고 그래서 놀랍기는 하겠지만, 영지주의자들의 창조 신화는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창조와 삶의 관점을 제공한다. 19세기 초의 영지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 둘이서 밤낮 성서를 읽어도 내가 하얀색을 읽은 곳에서 당신은 까만색을 본다." 어쩌면 초기 영지주의자들도 유대교와 기독교의 반대자들을 이와 비슷하게 언급했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 세계의 반영지주의적 입장 혹은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대부분의 성서가 교훈의 역사로 여겨졌다. 그 중에서도 <창세기>는 특히 더 그랬다.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비극적인 불순종이 타락의 원인이 되고 후대의 인류가 그들의 타락에서 엄숙한 도덕적 교훈을 배우게끔 되어 있는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창세기>를 이런 식으로 읽게 되면 이르게 되는 한 가지 결론은 여성의 지위가 모호하게, 아니 저급하게 된다는 것이다. 곧 여성은 낙원에서 불순종한 이브의 공모자로 간주되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를 혐오했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한 기독교 모임의 여성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 보냈다.
 
그대들은 사탄의 통로다. ••• 그대들은 사탄이 감히 공격하지 못한 남자를 꾀었던 여자다. ••• 그대들 각자가 이브라는 사실을 아는가? 그대들의 성性 위에 내린 하느님의 선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필연적으로 죄 또한 유효하다. (《여자의 옷차림에 대하여》 1.12)

보석 같은 나그함마디 문서를 통해 확인되는 바 거룩한 문학의 유산을 남긴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은, <창세기>를 교훈을 지닌 역사로 읽지 않고 의미를 지닌 신화로 읽었다. 그들은 아담과 이브를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 안에 내재한 두 가지 심리 내적 원리의 전형으로 보았다. 아담은 프시케(psyche), 곧 '혼(soul)' [생각과 느낌(feeling)이 생겨나는 마음 - 감정의 복합체(mind-emotion complex)]의 극적인 표현이다. 이브는 그보다 상위의 초월적 의식을 상징하는 프뉴마, 곧 '영(spirit)' 을 나타낸다. 첫 번째 여성의 창조와 관련된 성서 기사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 브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창세기> 2:21)고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첫 인간 한 쌍, 곧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창세기> 1: 26~27)고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 기사는 조물주 하느님이 남녀의 성품을 모두 갖춘 양성兩性적 본질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두 번째 기사를 받아들여 거기에 다양한 해석을 덧붙여왔다. 이 기사가 여성과 남성의 평등함을 이야기한다면, 여성이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기사는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킨다.

고대 영지주의자들에게 전통적인 이브 상像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전통적인 이브 상에 따르면 이브는 사악한 뱀에게 속아 넘어 간 자요 여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아담을 꾀어 하느님께 불복종하도록 만든 자이다. 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이브는 구변 좋은 요부로 타락한 귀 얇은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이브는 지혜로운 여성, 곧 천상의 지혜인 소피아(Sophia)의 참된 딸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이브야말로 잠자는 아담을 깨운 존재가 된다. 〈요한외경(Apocryphon of John)>(<요한의 비밀서>)라고도 번역됨)에서 이브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육체의 옥사인 지하 감옥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리고 말했다. "듣고 있는 자, 그를 깊은 잠에서 깨워라." 그러자 그(아담)가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 그가 입을 열어 물었다. "이 감옥의 쇠사슬에 묶여 있을 때, 나의 이름을 부른 이가 누구이며, 이 희망은 어디로부터 나에게로 왔는가?" 나는 대답했다. "나는 참 빛의 예지(foreknowledge)요, 나 는 순결한 영의 숙고(thought)이다. ••• 일어나 기억하라. ••• 그리고 너의 근원인 나를 따르라. ••• 깊은 잠을 경계하여라."
 
또 다른 경전 <세상의 기원에 관하여(On the Origin of the World)>에서 이브는 신성한 소피아의 딸로, 특히 소피아의 사자使者로 묘사된다. 사자의 자격을 지닌 이브는 아담의 교사로 와서 그를 무의식의 잠에 서 깨운다. 대부분의 영지주의 경전에서 이브는 아담보다 우월한 존재로 나타난다. 이런 경전들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교부들의 결론과 분명히 다르다. 영지주의 경전들에 따르면 남자가 생명과 의식을 얻게 된 것은 여자 덕택이다. 만일 이브에 대한 영지주의적 관점이 널리 받아들여졌더라면 여성에 대한 서구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발전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https://youtu.be/wqrhVXbNCJY?si=vpNDXaL9l3_BvCih

https://youtu.be/RxFT_bAkeUA?si=sERwKEAeZZ_bwdgN


【 뱀과 인간에 관하여 】

■ 정통적인 관점에서 이브의 실수는,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이 자신과 아담을 지혜롭게 하고 영생하게 만들 것이라고 꾄 사악한 뱀의 말을 들은 것이다. 영지주의의 나그함마디 문서에 속한 경전 <진리의 증언(Testimony of Truth)>은 이 해석을 뒤집는다. 악의 화신과는 거리가 멀게 뱀은 낙원에서 가장 지혜로운 창조물로 여겨진다. <진리의 증언>은 뱀의 지혜를 극찬하고 조물주에게 심한 비난을 퍼부으며 이렇게 묻는다. "이 하느님, 그는 어떤 종류의 신인가?" 이에 대해 과실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한 까닭은 인간이 더 높은 지식으로 깨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은 하느님의 질투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대답한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조물주 하느님의 위협과 분노 역시 이들의 비난을 받는다. <진리의 증언>에서 조물주 하느님은 '질투하는 비방자', 곧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자에게 잔인하고 부당한 처벌을 가하는 질투의 하느님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경전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가 자신을 믿고 자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말한 (그리고 행한) 것들이다." 이것이 분명히 암시하는 바, 이런 하느님과 함께라면 우리에게는 적도, 어쩌면 악마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적과 악마보다 더 사악하기 때문에.)

나그함마디 문서에 있는 다른 경전 <아르콘들의 본질(Hypostasis of the Archons)>은 이브뿐 아니라 뱀도 신성한 소피아에 의해 영감을 받고 인도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소피아는 뱀에게 자신의 지혜가 들어가도록 허락하고, 그래서 뱀은 교사가 되어 아담과 이브에게 그들의 참된 근원에 대해 가르쳐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데미우르고스(이 경우는 <창세기> 이야기에 나오는 조물주)에 의해 창조된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자신들의 영적 자아가 이 세상 너머, 궁극의 근본 하느님의 충만함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류 기독교에서 정본으로 삼는 <창세기>에서는 금지된 과실을 먹은 후 아담과 이브가 낙원의 은총을 상실했다고 말하지만, 영지주의 쪽 <창세기>에서는 "그들의 눈이 열렸다" (곧 그노시스를 가리키는 은유)고 말한다. 그 결과 첫 인간들은 자신들을 창조한 신들이 짐승 얼굴에 흉물스런 외모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고 공포에 젖어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을 치게 된다. 비록 데미우르고스와 아르콘들에게 저주를 받기는 했지만, 이들 첫 인간 한 쌍은 이미 그노시스의 능력을 얻은 터였다. 그들은 자기 후손 중 원하는 이들에게 그 능력을 넘겨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브는 자신의 딸 노레아(Norea)에게, 아담은 자신의 셋째아들 세트에게 그노시스를 선물했다.


【 영지주의 신화의 시작: 노레아와 세트 】

■ 이브의 딸 노레아는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노레아는 착하지만 통찰력이 떨어지는 남자 노아(Noah)와 결혼했다. 그 당시 인간의 수는 급증하고 있었고, 아담과 이브에 의해 자극받아 인간은 지상의 주인인 아르콘들을 불신하고 불복종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사악해져 하느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창조를 후회하게 만들었다는 '공식적인' <창세기>의 언급과 달리 인간은 지혜롭게 되었고, 그래서 아르콘들로부터 자유를 갈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 세일 산[세일(Seir)이라는 지명은, <시편>에 홍수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한 번 나오긴 하지만 <창세기>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꼭대기에 두라는 조물주의 명령을 받는다. 노레아는 단순한 남편이 아르콘들에게 협력하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쓰며 설득했다. 심지어는 노아가 나무로 만든 배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그러자 조물주와 그의 어둠의 무리들이 노레아를 에워싸고 벌로 그녀를 강간하려고 했다. 노레아는 그들과 언쟁을 벌이면서 자신을 강력히 방어하다가 마침내 참 하느님(True God)께 도와달라고 소리를 쳤다. 이에 참 하느님은 황금 천사 엘렐레트(Eleleth, 총명)를 보냈다. 천사는 노레아를 구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편으로 그노시스의 지혜를 가르쳐주고 또 한편으로 그녀의 후손들이 진정으로 진리를 아는 자들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나그함마디 문서의 몇몇 주요 경전 <아르콘들의 본질>, <요한외경>, <노레아의 숙고(Thought of Norea)>에 노레아와 방주 이야기가 나온다. 이 경전들에 따르면 노아의 후손은 '공식적인' <창세기>에 언급된 것처럼 방주에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빛나는 구름 속에 숨어 있었으며, 그곳에서 참 하느님의 천사들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아담의 셋째아들(가인과 아벨 다음에 태어난) 세트는 오랫동안 신비스러운 인물로 여겨졌다.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37~100년경, 유대인으로서 유대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로 잡힌 후 로마 군에 협력했으며. <유대 고대사>와 <유대 전쟁사>를 썼다)는 세트가 매우 위대한 사람이며 세트와 그의 가족은 점성학을 비롯한 수많은 비술秘術의 후견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세트의 자손은 후세에 물려줄 목적으로 자신들의 오컬트 지식을 두 개의 기둥에 새겨 기록으로 남겨놓았다고 한다. <아담의 계시(Apocalypse of Adam)>라는 경전에서 영지주의 저자는 세트(와 그의 아버지 아담)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다가올 영지주의 전통의 미래에 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아담의 계시>에서 아담은 자신에게 "영원한 하느님의 그노시스의 말씀" 을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이브였다고 세트에게 말한다. 나아가 조물주가 어떻게 아담과 이브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는지, 인간이 "두려움과 노예 상태에서" 자신을 섬기게 만들기 위해 조물주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일러준다. 그러고 나서 아담은 "세트와 그의 후손들" 이 계속해서 그노시스를 경험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들 또한 조물주로부터 더욱 심한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아담의 예언에 따르면 두 가지 큰 재앙이 이어질 텐데, 그것은 홍수,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가 불에 타 파괴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재앙은 인간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노시스의 지혜를 얻은 인간을 용인할 수 없는 조물주 데미우르고스의 질투와 분노 때문에 발생한다. 홍수 때처럼 고모라의 재앙 때에도 참 하느님은 수많은 에온(aeon, 영원한 영역. 모든 존재가 방출되어 나오는 충만한 공간인 플레로마의 권능자들을 뜻하기 도 함)의 존재들을 보내 아르콘들의 세계 위로 영지주의자들을 데려가 그들을 화염 속에서 구해낸다. 영지주의 전통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세트는 <세트의 세 비석(Three Steles of Seth)>과 <이집트인 복음(Gospel of Egyptians)>을 포함한 몇몇 경전에서 중요하게 언급된다. 현존하는 영지주의 경전들은 영지주의자들이 이 세상에 늘 존재해 왔다고 분명히 지적한다. 비록 어둠의 세력들에 의해 처음부터 계속 학대받고 그래서 때론 완전히 소멸될 위험에 처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세트의 위대한 자손' 이라고 불리는 영지주의자들은 때로 예수와 동일시되기도 하는 '빛의 사람(Illuminator)' (Phoster)이 지식과 해방의 시대를 열어줄 미래의 시간까지 견디어낸다. 세트의 영적 자손들이 계속 벌이게 될 투쟁은 오늘날의 교회나 과거의 종교 재판소와의 싸움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아르콘들의 본질>이 들려주는 초자연적인 적들과의 싸움이다. "위대한 사도가 어둠의 세력들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우리의 싸움은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 그리고 사악한 영에 붙어 다니는 세계의 세력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 '위대한 사도' 는 물론 성 바울이며, 실제보다 짧게 인용된 글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다. (<에베소서> 6: 12)


【 영지주의 해석의 특징 】

■ 영지주의자들이 <창세기>를 해석하면서 창조 이야기를 이렇게 이례적인 모습으로 변형시킨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교부들이 주장한 것처럼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혹독하게 비방하고 싶었던 것일까? 몇 가지 가능한 이유들을 들 수 있는데, 이것들은 서로 배타적이지도 않거니와 때론 상호 보완적이기도 하다.
 
첫째, 일부 초대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도 구약 성서의 하느님을 당혹스럽게 여겼다. 초대 기독교 세계에서 교육을 많이 받은 축에 속한 이들은 어느 정도 영적 안목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플라톤과 필로(Philo), 플로티누스(Plotinus) 등의 가르침에 정통한 이들로서 하느님이 복수심과 분노, 질투, 타민족에 대한 혐오, 독재자의 허세 등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데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예수의 자상하고 숭고한 성품과 그의 가르침에는 품위 있는 영지주의 철학이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었는가!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분열로부터 구약 성서의 하느님이 우주의 열등한 존재, 곧 데미우르고스라는 논리적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둘째, 앞서 지적했듯이 영지주의자들은 구약 성서를 상징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에 가깝게 <창세기>를 해석할 때가 종종 있는 폴 틸리히(Paul Tillich) 같은 현대 신학자들은 영지주의자들에게 꽤 친근감을 느꼈을 법하다. 틸리히는 타락 이야기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 상태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한다. 타락은 "꿈속의 천진무구한 상태로부터의 떨어짐(fall)", 곧 잠재의 영역으로부터 현실의 영역으로의 깨어남을 나타낸다(이 장의 앞부분에서 살펴본 바 영지주의적인 해석과 다르지 않은 해석)고 틸리히는 적고 있다. 틸리히는 또 자신의 '하느님 너머의 하느님(the God above God)' 이라는 개념이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두 하느님(two Gods) 개념과 상당히 가깝다고 시인한다.
 
셋째, 영지주의자들의 <창세기> 해석은 영지주의적 환상 경험과 연관되어 있었을 것이다. 신성한 신비를 탐험하고 경험해 봄으로써 영지주의자들은, 성서에서 주장하는 것과 다르게, <창세기>에 언급 되는신은 유일한 참 하느님이 아니며 그보다 상위의 하느님이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기원후 몇 세기 되지 않은 그리스 · 이집트 · 로마라는 시대 환경 아래 살던 사람들 눈에는 이 세계의 창조와 관리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 초월적인 하느님이란 존재가 충분히 있음직해 보였을 것이다. 지극히 인간적인데다 심각한 결함을 지닌 구약 성서의 하느님은,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필로와 같은 이가 증명하듯이, 많은 유대인들한테도 이미 신뢰를 잃고 있었다. 독실한 유대인이지만 박식한 학자였던 필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개념을 플라톤 사상으로 버무려내는 데 자신의 재능을 쏟은 사람이었다. 로고스와 소피아와 같은 신적 위격位格(신의 방출된 모습)들도 그 중 일부인데, 이 둘 모두 영지주의자들의 큰 관심 대상이었다. 나그함마디 경전에 기록을 남긴 훨씬 더 급진적이고 미래적인 입장을 취한 해석가들은 <창세기>나 여타 구약 성서에 묘사된 하느님은 순종이나 경배를 받을 자격이 없는 위선자요 강탈자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신화적인 것으로, 곧 별도의 해석이 필요한 신화로 이해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신화를 비유(allegory)로 이해한 반면, 일반 대중은 신화를 준準역사적인 것으로 여겼고, 엘레우시스(Eleusis, 아테네 북서쪽의 도시로, 그곳에서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신비 의식이 비밀리에 행해졌다고 한다) 신비 의식 등의 입교자들(mystae)은 환상 경험을 통하여 신화들에 생명을 불어넣기도 했다. 영지주의자들이 실제로 이들과 다른 방식으로 신화에 접근했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

오늘날 자유주의적 입장의 성서학자들은 성서의 설화들을 사람들이 자기를 둘러싼 혹은 자기 위에 있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신화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만일 이 관점이 맞다면 <창세기> 창조 신화의 모순은 단지 삶에 일반적으로 내재해 있는 모순의 반영에 불과하다. 고대 세계의 수많은 신비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도 신화의 진실을 다르게 바라본다.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세계를 설명하기보다는 내면의 세계를 이해하고 깨닫는 데 더 큰 관심을 두었다. 내면의 세계는 저 너머의 세계, 곧 초월을 가리켰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신화는 개별 영혼을 자극해 세상의 한계를 초월하는 경험을 가져보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초월이란 물질과 마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아르콘, 데미우르고스라고 부른 것과 유사한 것을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다름 아닌 심리(psyche)의 영역에서 찾아냈다. C.G. 융이 자기(self)와 에고(ego, 심리 안의 두 '신')를 구별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도 초월적인 신과 별 볼일 없고 부차적인 신을 구분해서 말했다. 심층심리학은 자유주의적인 성서 신학 쪽보다는 유대 기독교의 창조 신화에 대한 영지주의적 이해 쪽에 더 기울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신화소神話素(신화를 이루고 있는 최소 단위)들, 즉 신화의 주제들에는 심리학자도 성서학자도 헤아리지 못한 의미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창세기>와 같은 경전들의 성격과 의미를 깊이 또 논리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한, 영지주의자를 종교적으로 불경스러운 이단아라고 여기기가 쉽다. 또 그런 경전들에 묘사되어 있는 조물주의 비난받을 만한 성품과 예수의 아버지의 성품이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닫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영지주의의 '두 신(two Gods)' 교리는, 주류 유대 기독교의 유일신론자들이 지금까지 언급된 아주 분명한 모순들을 감추고자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것보다도 훨씬 더 인간 정신의 윤리적 · 논리적인 상식에 부합하는 것 같다.
 
어린아이가 어른의 아버지이듯이 다양한 문화의 창조 신화는 그 민족과 국가의 역사 위에 깊은 각인을 남긴다. 영지주의자들은 아직 젊은 당대의 서구 문화를 유대 기독교 창조 신화의 그림자에서 자유롭게 하려는 용감한 시도를 했음이 분명하다. 그들이 대안으로서 제시하는 창조 신화가 급진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기존의 <창세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 창조 신화가 함축하고 있는 수많은 의미들은 21세기 문화에 실로 유익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서구의 창조 신화를 다른 가치 기준으로 재평가할 시간에 다다라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영 지주의야말로 우리의 도우미이자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 영지주의의 그리스도 :
구원자인가 해방자인가? 】

■ 21세기의 문턱을 갓 넘어선 지금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예수의 모습과 마주친다. 대중 연예계의 유산 가운데 1960년대에 공연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Jesus Christ Superstar)>(예수의 마지막 7일을 록 뮤지컬로 만든 작품)가 있는데, 이 작품에서 예수는 보통과는 좀 다른 사회 비판가로 그려진다. 정치학이라는 위험스런 영역에서는 예수를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곧 1세기의 체 게바라 같은 인물로 묘사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해방 신학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 보다는 차분한 학문의 장에서는 예수 세미나(1985년에 로버트 펑크가 중심이 되어 신약학자 200여 명이 조직한 공동 연구 모임)와 'Q 문서' (마태와 누가가 자신들의 복음서를 기록하기 위해 <마가복음> 이외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문서. 독일어로 자료라는 뜻의 'Quelle' 에서 온 말)를 통해 얻은 더욱 흐릿한 예수의 모습이 제시된다. 여기에 사해 문서 (1947년에서 수년간에 걸쳐 사해死海의 서북 연안과 서안에 펼쳐져 있는 '유다의 황야'의 동굴이나 폐허에서 발견된 성서의 고사본들) 연구가로 좀 유별난 학자인 존 알레그로(John Allegro)가 제시한 남근 숭배적인 특징을 연상시키는 예수 모습과, 알레그로의 동료 휴 숀필드 (Hugh Schonfield)가 주장한 교활한 예수 모습(예수가 치밀하고 의도적으로 자신을 메시아로 세울 계획을 했다는 이론)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혁명가 예수, 감각적인 예수 - 수많은 예수들, 그러나 빈약한 확실성! 20세기 마지막 25년 사이 이 모든 예수 모습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들은 신약 성서에 기초하고 있다. 신약 성서에 근거해 누구든 이 기독교의 핵심 인물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지적된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고등 성서 비평(성서를 역사 • 사회 • 문화 • 정치 • 경제적인 배경 속에서 연구하는 방법론으로, 본문 비평이라고 불리는 저등 비평과 대조를 이룬다)과 이와 유사한 접근법을 통한 합리적인 성서 해석 방법론이 소개된 이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는 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연구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수, 곧 영지주의 예수는 무시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는 역사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신령한 존재였다. 예를 들어 증언자 바울 사도는 예수를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에온)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에베소서> 1: 21)  존재라고 묘사한다. 이런 진술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영지주의 관점으로 예수를 이 열등한 세계의 권능자들과 그들의 동족(데미우르고스와 아르콘)을 능가하는 존재라고 보았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만큼 그 어조가 매우 영지주의적이다.
 
오랫동안 4복음서만이 예수가 전한 가르침의 유일한 근원이었다. 전 역사를 통해 <요한복음>은 늘 영지주의자와 영지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비교주의자들의 사랑을 받은 복음서였다. 기적 설화와 수난, 죽음, 부활 기사와 더불어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한 말로 여겨지는, 영지주의 문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상당량의 대화가 포함되어 있다.
 
<요한복음>이 예수의 가르침의 영지주의적 특징을 보여주는 유일한 정경正經은 아니다. 예수의 말씀 상당 부분 중 적어도 일부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심지어는 <마가복음>에도 약간이나마 포함 되어 있다. 그 중에는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해석될 때 탁월한 의미를 드러내는 가르침이 많다. <마태복음>의 밀과 가라지 비유(13: 24~30)가 좋은 예이다. 한 사람이 밭에다가 좋은 밀을 뿌렸다. 그런데 원수가 밀 가운데다 가라지를 뿌리고 갔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 일꾼들이 가라지를 뽑아버릴까요, 하고 묻자 농부는 밀과 가라지가 쉽게 구별되는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라고 말한다. 영지주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에는 빛과 어둠의 씨가 섞여 있다. 비록 지금은 이 둘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지만 때가 되면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이 둘이 자연스럽게 갈라진다.


【 영지주의 교사 예수 】

 
https://youtu.be/vrjO4wUQjsQ


■ 정경으로 인정된 복음서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나 영지주의 경전에는 들어 있는, 예수의 말씀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많이 있다. 이런 말씀을 가장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은 나그함마디 문서 중 하나인 <도마복음>이다. 영지주의 저자들은 비밀스런 예수의 가르침 - 즉 부활한 후 선별된 제자들에게 전한 영지주의적 특징이 또렷한 가르침 - 을 기록하는 데 주된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보았을까? 그들이 예수를 지극히 경외했고, 예수 안에서 지극히 높은 근본 하느님의 현현을 보았으며, 인간이 갇혀 있는 물질적 • 정신적 무의식의 감옥을 활짝 열어젖힌 해방자요 계몽자로 예수를 바라보았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지주의 전통에 따르면 예수는 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사역을 실천했다. 첫 번째는 가르침의 사역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입교적인 성격을 땐 해방의 신비 제의 같은 성례전 사역이다. 예수가 세습 사제 계급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대개 그를 랍비나 비성직자 출신의 종교 교사쯤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그는 잘 드러나지 않는 차원에서는 영적 사제로서 역할을 하면서도 겉으 로 드러난 모습은 교사로서의 역할이었다.

<도마복음>에 실린 예수의 말씀 대부분은 네 가지 주제, 곧 ① 인간의 조건에 관한 것 ② 인간의 행위에 관한 것 ③ 구원자나 해방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암시하는 것 ④ 신성한 존재를 알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자기 앎'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말씀을 읽는 사람은 예수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아주 실용적이면서 실존적인 태도에 놀라게 된다. 예수는 영과 육의 관계라든지 지상 재림의 정확한 시간, 모세가 제정한 십계명에 순종할 필요성, 심지어는 자신의 메시아로서의 역할이 정확히 어떤 성격인지에 관한 이론적 논란에 말려들기를 거듭해서 거절한다. 그 대신 그는 듣는 이들에게 그들이 안고 있는 근심거리, 교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 또 심리적인 취향이나 세상적인 것에 대한 애착 따위에서 비롯하는 해악들을 부지런히 일깨워준다. 많은 예를 보지 않아도 예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질적인 안녕 혹은 심지어 도덕적 성품에 대해서도 강박적으로 집착함으로써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말라. 한계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그대를 기다리는 더욱 위대한 생명을 향한 여행에 나서라. 그대가 할례를 받았는지 아닌지, 음식에 대한 규정을 지키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가 나를 돌아온 엘리아로 생각하든 철학자로 여기든 아니면 한갓 목수의 아들로 보든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대가 자신을 알기 위해 참으로 노력하는지, 그리하여 해방의 그노시스를 준비하는지 하는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도마복음>의 "나그네가 되어라"(말씀 42)라는 아주 짧은 구절에 특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예수의 남다른 가르침 방법을 해명해 주는 것도 그의 영지주의 말씀이다. 다른 교사들과 달리 예수의 가르침은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그의 행함은 틀에 박힌 도덕적 • 종교적 체계를 따르라고 권고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감정이나 마음의 생각보다는 그들의 깨어나기 시작하는 직관적 그노시스를 향해 가르침을 펼쳤다. 잠재되어 있는 창조성과 상상력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자극하는 것이 예수의 말씀에 담긴 의도였다. 이런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는 연약하게 고난당하는 전통적인 예수와는 전혀 다르다. 이 예수는 제자들 안에 있는 비범한 의식 상태를 자극하기 위해 은유와 신화, 비밀스럽고 신비스런 금언과 분명한 영지주의적 비유를 사용한다. <도마복음>에는 제자들 속의 그노시스를 자극하는 데 열중하는 교사 예수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 예수는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을 과거의 예언 속에서 찾으려 애쓰는 제자들을 꾸짖는다.
 
그의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이스라엘에서 스물네 명의 예언자가 말씀하였고
그들은 모두 당신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너희 앞에 살아있는 자는 내버리고
죽은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구나." (말씀 52)
 
예수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과거의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지 말아라. 나를 예언과 성서, 그리고 기대하는 바와 관련시키지 말아라. 너희의 그노시스로 나를 보아라. 그러면 이해하게 되리라." <도마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도 있다.
 
"너희가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는 분을 보도록 하라.
너희가 죽어서 살아있는 분을 보려고 해도
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말씀 59)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저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당신이 누구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표는 이해하면서
너희 앞에 있는 자는 알지 못하니, 너희는
이 순간을 이해하는 법을 모르는구나."(말씀 91)
 
이 모든 언급들은 실존적 본성을
즉각적 • 직관적으로 인식하라고 호소하며
개념적이고 지적인 설명은 버린다.
 
영지주의 경전들은 적어도 몇 가지 사건을 통해 예수가 제자들로 하여금 그노시스를 경험하도록 실제로 자극한 사실을 보여준다. <도마복음> 말씀 13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와 비슷한지 묻는다. 베드로는 선생을 의로운 천사에, 마태는 지혜로운 철학자에 비교한다. 오직 도마만이 비교하기를 거절하고 선생이 누구와 같은지 자신의 입으로는 어떤 식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가 도마에게 말한다.
 
"나는 (더 이상) 너의 스승이 아니다.
너는 취했고, 내가 준 솟아나는 샘물에
도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는 도마를 따로 불러
귓속말로 세 가지 말씀을 속삭인다. 곧바로
다른 제자들이 그 세 가지 말씀이 무엇인지 캐묻지만
도마는 대답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신 것 중
하나라도 내가 그대들에게 말한다면,
그대들이 돌을 들어 나에게 던질 것이요,
그러면 그 돌들에서 불이 나와
그대들을 불살라버릴 것이오."
 
위 사건에서 도마의 역할을 뺀, 세상에 통상적으로 알려진 기사가 <마태복음>(16:13)에 있다. 도마는 '취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보통과는 다른 의식 상태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그노시스를 통해 예수를 알게 되었다. 이런 그노시스의 깊이를 경험하지 못한 자에게 자신의 그노시스를 드러낸다면 치명적인 과오가 될 것이다. 역사를 통해 수많은 영지 주의자들이 가슴 아픈 운명을 맞이한 것은 알지 못하는 자(nonknower)가 아는 자(knower)에게 터뜨린 눈먼 분노 때문이었다.


【 대속인가 해방인가? 】

현대 기독교인의 지배적인 믿음에 따르면,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왔고, 그리하여 인류는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믿음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대략 이렇다. 즉 하느님이 선한 세계를 창조했으나 첫 번째 인간들(아담과 이브)이 하느님께 불복종함으로써 하느님이 진노하여 세상이 타락한 곳이 되었다. 그때까지 천국과 같던 창조 세계에 죽음과 고통이 생겨났다. 머지않아 진노가 누그러들자 하느님은 인간과 화해를 원했다, 이 화해의 대리자가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였다. 아버지는 인류의 조상들이 저지른 원죄를 포함한 모든 죄를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고 죽게 했다.
 
이런 '대속 신학' 이론은 지난 2세기 동안의 과학적인 발견의 결과 수많은 질문 공세를 받게 되었다. 만일 죽음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다면 인간이 지구 위에 출현하기 한참 전에 사라진 수많은 생명들은 어떻게 되는가? 인간이 싸움에 끼어들기 오래 전부터 생명은 생명을 잡아먹고 있었다. 최초의 창조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아름다운 곳도 천국 같은 곳도 아니었다. 세상은 늘 서로 먹고 먹히는 거대한 식당과도 같은 곳이었으며, 인간은 비교적 늦게 그 먹이사슬의 일부가 되었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영지주의 제자들은 기독교 역사의 아주 초기부터 대속 신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생물학이나 고생물학의 증거 따윈 없었으나, 선한 세상이 악한 인간에 의해 타락되었고, 그래서 진노한 하느님과의 화해를 위해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요구되었다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이는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를 자신들의 구원자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앞서 보았듯이 영지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이 지구 위의, 정확히는 이 우주 속의 이방인이라고 느꼈다. 영지주의 교사 중 한 사람인 마르시온(Marcion)은 이 세상을 핵 셀룰라 크레아토리스(haec cellula creatoris)라 불렀는데, 이는 "조물주에 의해 만들어진 이 감옥"이란 뜻이다. 만다교(Mandaism, 세례 요한을 진정한 메시아로 믿는 종교) 영지주의 경전인 《긴자(Ginza)》는 인간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그대는 이곳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그대의 뿌리는 이 세상에 있지 않다." 구원자는 불명예스럽게 죽어 진노한 아버지를 진정시키려고 온 것이 아니라, (영지주의 성구에 표현된 대로) "갇힌 자들을 사로잡아" 감옥에서 이들 버림받은 이방인들을 해방시키려고 왔다.

영지주의를 표면적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영지주의에 있어 구원이나 해방이 구원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비중재적인 경험이라고 결론짓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인간의 영은 바깥 세계에서 이 세상으로 왔으므로 해방을 위한 자극도 마땅히 바깥 세계에서 와야 한다고 영지주의자들은 말한다. 해방의 영적 잠재력이 인간 영혼의 깊은 곳(혹은 높은 곳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에 깃들어 있음은 사실이지만, 이 잠재력이 실현되려면 강력한 간섭이 필요하다. 이런 도움의 손길은 일부 영지주의 학파가 빛의 사자 - 지극히 높은 근본 하느님이 보낸 사자로서, 구원을 베푸는 메시아적 인물 - 라고 부르는 존재로부터 나온다. 위대한 영지주의 예언자인 페르시아의 마니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증언한다. 알 비루니(Al Biruni, 중세 아랍의 위대한 과학자요 역사가이며 수학자)가 <고대 국가들의 역사>에서 인용한 바에 따르면,
 
"지혜와 선행은 언제나 하느님의 사자에 의해 그때그때 인간에게 전해졌다. 한번은 붓다라 불리는 사자에 의해 인도에, 한번은 조로아스터라 불리는 사자에 의해 이란에, 한번은 예수라 불리는 사자에 의해 서방에 전해졌다. 그 후 이 계시와 예언은 바빌로니아에 있는 참 하느님의 사도인 마니, 곧 나를 통해 이 세대에게 전해졌다."

《긴자》는 사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왔던 자의 이름으로,
오는 자의 이름으로,
올 자의 이름으로 와서
하늘을 가르고 자신을 드러낸 뒤,
싸움으로 세상들을 헤치며
자신의 길을 개척한
위대한 이방인의 이름으로."(35장)
 
기독교 영지주의에서 이 위대한 이방인은 예수다. 영지주의 전통에 속하는 많은 경전에서 예수는 로고스(Logos)로, 크리스토스(Christos, 기름부음 받은 자, 그리스도)로, 그리고 소테르(Soter, 치료자, 구원자)로 불린다. 이 이름들 사이의 정확한 관계가 늘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인간 예수가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영적 그리스도가 그의 인격 속으로 임재했다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다. 물론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거룩하고 숭고한 존재로 여겨졌다.
 
요약하면, 영지주의자에게 구원은 아들의 죽음을 통한 진노한 아버지와의 화해가 아니라, 지상의 삶으로 인해 야기된 무감각으로부터의 해방이요 그노시스를 동한 깨어남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아담과 이브의 죄를 포함한 어떤 죄도 전체 현실 세계의 타락을 야기할 만큼 강력하다고 믿지 않는다. 세상이 결함을 지니게 된 것은 세상의 본성 때문이요, 인간은 결함을 지닌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그리고 이 속박을 불러오는 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예수는 사자使者와 해방자로 왔다. 따라서 그의 메시지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신비 제의에 참여하는 자는 제자 도마처럼 그노시스에 의해 구원받는다.


【 부활인가 깨어남인가? 】

■ 정통 기독교가 영지주의자를 향해 던지는 가장 큰 비난 중 하나는 영지주의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사실, 영지주의 자들이 부활을 부인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신약 성서에 기록된 대부분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부활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부활의 날 아침 예수의 몸은 어떤 식으로든 되살아났을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영지주의 경전은 부활 이후의 예수를 '살아있는 자(living one)'라고 부르는데, 이는 곧 '생명이 돌아온 자' 라는 뜻을 지닌 라틴 어 레디비부스(redivivus)에 상응한다. 하지만 이는 예수가 우리와 같은 물질적인 몸을 입고 되살아났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그가 우리와 같은 물질적인 몸을 가졌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질적인 몸은 물 위를 걷거나 벽을 통과하거나 태양처럼 빛나지 못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몸의 정확한 본질은 신비라고 말했고, 이 신비는 부활하기 전의 몸과 부활한 후의 몸 둘 다에 적용된다고 믿었다.

정경의 복음서들은 예수가 입고 있던 '부활한 몸'의 정확한 본성 에 대해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 일부 복음서의 본문들에는 부할한 예수의 몸이 분명한 형체를 가진 육체로 이루어졌다고 확실하게 언급되지만, 다른 본문들은 의심의 여지를 남긴다. <누가복음>과 <마가복 음>에 기록된,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 관한 기사는 예수가 "다른 모습으로" (<마가복음> 16: 12, <누가복음> 24: 13~32) 나타났으며, 식탁에서 빵을 들어 축복한 뒤 한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고 이야기한다. <요한복 음>(20: 11~17)에서는 스승의 모습을 아주 잘 알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옆에서 부활한 예수를 보고서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착각한다. 마리아가 알아보자, 예수는 자신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한다. 수많은 종교적 예술 작품의 근원이 된 놀리 메 탄게레(noli me tangere, 내게 손을 대지 말라)라는 유명한 명령은, 예수의 몸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분명히 해석될 수 있다. 일레인 페이절스는 《영지주의 복음》(6쪽)에서 "신약 성서의 일부 기사는 문자 그대로의 부활을 주장하지만, 다른 기사들은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고 적고 있다.

예수에 관해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의 육체적인 몸인가, 아니면 영인가? 아무리 심한 정통주의 기독교인이라 해도 예수의 영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이 예수와 부활의 영적인 성격을 강조한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다. 부활하기 전이나 후에나 예수가 육체의 몸을 입고 나타났다는 데에는 정통 기독교와 영지주의 모두 동의한다. 많은 영지주의자들은 이 몸은 단지 겉모습(doketos)일 뿐이라고 믿었으며, 그 때문에 가현론자(docetist, 예수의 성육신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주류 기득교가 붙인 이름), 곧 예수의 몸이 단지 환영이라고 믿는 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외형의 몸' 이라는 개념은 널리 알려져 있는 개념으로, 인도의 전통에서도 발견된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예수의 몸의 본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노시스를 열망하는 모든 이에게 부활이 깊은 개인적, 영적 의미를 지닌다는 영지주의적인 가르침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죽어 물질의 어둠이라는 무덤에 묻힌 채 무의식의 두루마리로 둘러싸여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시력은 어둠과 어리석음의 돌로 막혀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간절한 소망과 영광스런 운명은 이 돌이 제거되고 에온의 혼수 상태로부터 영적 본성이 깨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리스도가 했던 것처럼 행하여 영의 새 생명으로 부활하지 않는가? 정통주의자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면서도, 그런 일은 우리가 죽은 후, 오래 전에 썩어 사라져버린 육체가 다시 일어날 심판의 날에 벌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영지주의자는 정통주의자와 확실하게 갈라선다. 영지주의자는 <빌립복음(Gospel of Philip)>의 "그리스도는 먼저 부활하고 그 다음에 죽었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한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바라고 덧붙일 것이다. 같은 복음 의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증언한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
먼저 부활을 경험하지 않으면
그들은 죽어서 어떤 것도
받지 못할 것이다."(말씀 79)

영지주의자들은 부할이라는 용어를 그노시스, 곧 참된 영적 깨달음을 상징하는 말로 간주한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아는 의식 상태로 깨어날 때 우리는 참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영지주의 전통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과 깨달음을 촉진시키는 신비로운 자극이다. 이런 깨달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할과 승천은 허사가 된다. 17세기 기독교 신비가로 영지주의적 특징을 적잖게 보여준 안젤루스 실레시우스(Angelus Silesius)는 이렇게 적었다.
 
"그리스도께서 천 번 베들레헴에 태어나셔도
당신 안에서 살아계시지 않으면,
당신 영혼은 온통 절망입니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헛된 것이 됩니다.
그것이 당신 안에 다시 곧게 세워지지 않으면."
《천사 같은 방랑자(The Cherubic Wanderer)》
 
이미타티오 크리스티(imitatio Christi, 그리스도를 본받음)라는 말은 종종 우리가 겪는 불행과 고통을 십자가 수난의 그것과 동일시하는 말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이 본받음은 반드시 부활을 포함해야 한다. 영지주의의 입장은 훨씬 분명하다. 그노시스가 충만해지는 순간 우리 안에 깃들어 있던 신적 불꽃이 완전히 풀려나고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이뤄진 이중의 무덤에서 일어나 영원한 영과 하나가 된다. 망각은 사라지고, 영의 진정한 모습들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 그리스도, 시간을 넘어선 해방자 】

 
■ 이슬람교인들이 예수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 반대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슬람교인들이 볼 때 하느님이 아들을 가졌다는 말은 가당치가 않다. 출산은 육체의 기능이요. 따라서 높으신 신에게는 갖다 붙일 수 없는 저급한 일이다. 영지주의 경전은 아버지, 아들, 성령에 대해 자유롭게 표현하지만, 예수를 눈에 보이는 몸을 입고 나타난 삼위의 두 번째 위격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아들됨이라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도, 이슬람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 뒷걸음질 쳤을지 모른다. 영지주의자들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 예수는 신비로운 에온의 존재요, 사자의 모습으로 인류에게 내려온 위대한 영적 권능자였다. 만다교의 <긴자>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와 같은 권능자의 자기 고백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빛의 세계를 떠나, 빚나는 보금자리인 당신을 떠나, 나는 왔습니다. 나는 와서 가슴들을 느껴보고 모든 마음들을 재어보고 시험합니다. 어느 가슴에 내가 머물고 있는지, 어느 마음에 내가 쉬고 있는지 알기 위해. 나를 생각하는 자를 나는 생각하고 나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이름을 나는 부릅니다. 아래로부터 나의 기도를 드리는 자의 기도를 나는 빛의 세계로부터 드립니다. 나는 와서 진실하고 신실한 가슴들을 찾았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머물지 않았을 때도, 나의 이름은 이미 그들의 입술 위에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이끌어 빛의 나라로 인도하였습니다."

교부 히폴리투스는 페라태(Peratae)라는 영지주의 학파(예수가 우주의 뱀의 아들이라고 가르치며 그 뱀이 이브를 물질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었다고 가르치는 학파)에서 전하는, '나는 영원한 밤의 에온 속에 있는 깨달음의 소리다"라는 영지주의 구원자의 말을 들려준다. 나아세네 (Naasene) 학파(여신을 숭배했으며 뱀과 그노시스를 깊게 관련시킨 사상을 발전시킨 학파)의 <영혼의 찬미>에서는, 구원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보내달라고 아버지께 간절히 애원하는 천상의 영적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인류를 위해 나를 보내소서,
아버지! 봉인封印을 손에 쥐고
모든 에온을 뚫고 내려간 후,
모든 신비를 열어젖히고
신적 존재들의 모습으로 드러내며
그노시스라고 알려진
거룩한 길의 비밀들을 알리렵니다."
 
예수는 <도마복음>에서 자신의
고귀하고 비밀스런 지위를 수차례 증언한다.
몇 가지만 보자.
 
"나는 세상에 불을 던졌다.
보라, 그것이 타오를 때까지
나는 지키고 있다."(말씀 10)
 
"나는, 눈이 보지 못했고,
귀가 듣지 못했고,
손이 만지지 못했으며,
사람의 마음에 나타난 일이 없는 것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말씀 17)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을 마시는 자는
나와 같아질 것이다.
나는 그가 될 것이고,
그러면 숨겨진 것들이
그에게 드러날 것이다."(말씀 108)
 
"내게 가까이 있는 자는
불에 가까이 있는 것이요.
내게서 멀리 있는 자는
그 왕국에서 멀리 있는 자다." (말씀 82)
 
"나는 그 모든 것들 위의 빛이요,
나는 만물이니,
만물이 나에게서 나와서 나에게 이르렀다.
저 나무를 쪼개보아라.
나는 저기에 있다.
저 돌을 들어보아라.
거기서 나를 볼 것이다."(말씀 77)

진실로 영지주의의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의 목수 아들 이상이다. 또 신학자들이 세세하게 정의하고 묘사한 하느님의 아들 이상이기도 하다. 만일 영지주의의 예수가 무언가에 대한 역설처럼, 수수께끼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영지주의의 예수 개념이 그노시스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환상을 통해 예수를 보았다. 그들에게 예수는 초월적 존재, 곧 지상에 잠시 자신을 드러낸 다른 세계, 다른 차원의 거주자였다. 예수를 알려면 그노시스를 받아야 했다. 그때에 그의 말씀, 행위, 존재 자체가 온전히 드러나고 이해될 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가 2천 년을 넘어선 오늘날까지도 위대하고 불가해한 메시아적 존재는 우리를 부르고 있으며, 그노시스의 마음과 지각을 가지고 자신을 이해하라고 요청한다. 진부한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그는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방인처럼 보이리니
나는 다른 혈통에서 오기 때문이다."
( <솔로몬 찬가> 41 )
 
하지만 영지주의자에게 그는 영원히,
우리 또한 다른 세계에서 왔음을 상기시키며
우리가 그 세계로 되돌아가도록 돕는,
빛나는 이방인이다.


【 죄악의 비밀 : 악에 대한 영지주의 관점 】

■ 1991년 6월 10일자 《타임》지에 악을 주제로 한 표지 특집 기사가 실렸다. 글쓴이는 랜스 마로우(Lance Morrow)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특정한 견해를 지지하지도, 어떤 결론에 이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는 훨씬 더 중요한 일을 했다. 그는 세 가지 명제를 제시하며 글을 시작했다.
 
• 하느님은 전능하다.
• 하느님은 선하다.
•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여러 자료를 인용하며 마로우는 우리가 이 세 명제 중 두 가지에는 동의할 수 있어도 세 가지 모두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신은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도록 허락하는 전능한 하느님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 하느님이 선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반면 끔찍한 사건들을 멈추게 할 능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내버려두는 선한 하느님이 있다면 그 하느님은 전능하지가 않다.
 
이런 분석은 3세기나 4세기 이전의 영지주의자라면, 또는 이 글쓴이처럼 우리 시대에 활동하는 영지주의자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분석이다. 유일신론이 안고 있는 이 특유의 곤경을 인식한 사람은 비단 영지주의자만이 아니다. 중세의 탁월한 가톨릭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에서 악의 존재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가장 큰 반론임을 인정했다. 유일신론의 하느님 개념이 받아들여진다면 악에 대한 실질적인 해명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악이 존재한다면 서구의 주류 종교 전통에서 이야기하는 유일신으로서의 하느님은 존재할 수 없다.


【 악은 어디에서 왔는가? 】

■ 역사 속에서 여러 종교 전통은 다양한 방법으로 악의 존재를 설명해 왔다. 첫째는 일원론으로, 둘째는 철저한 이원론으로, 셋째는 악을 무지와 관련시키는 것으로, 넷째는 악을 원죄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 악의 존재를 설명했다. 의식이 아직 분화되지 않았던 원시 시대 사람들은 선과 악이 모두 신성한 존재에게서 온다고 여겼다. 고대의 샤먼은 주신主神이 인간에게 선과 악을 가져다준다고 말하는 데 아무 어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보다 복잡해진 수메르-바빌로니아 전통 에서는 신들이 끔찍한 것들(기괴한 존재, 악마, 그리고 잔혹한 인간 삶의 조건들)을 만들어내길 즐긴다고 믿었다.
 
역사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분화된 의식(또는 의식하는 예고)이 발달하기 전 인간은 당연히 자신들과 같은 모습의 하느님 혹은 신들을 상상했고, 따라서 선과 악이 함께 있는 것이 자신들의 본성일 뿐 아니라 신들의 보성이기도 하다고 믿었다. 좀더 진보한 종교 전통들에서도 이러한 일원론적 태도를 부분적으로 이어받았는데, 유대 신비 신학에서는 하느님이 선과 악의 성향을 모두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의식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존재의 선한 면과 약한 면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선과 악을 한꺼번에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개념을 유지하는 데 따른 긴장이 극에 달하면서 급기야 사람들은 이 둘을 분리시키게 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철저한 이원론의 개념인데,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조로아스터교다. 참되고 선한 하느님인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오르마즈드(Ormazd)라고도 불린다]에게는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 아리만(Ahriman)이라고도 불린다]라고 알려진 신적 적수가 있다. 두 존재는 우주의 패권을 놓고 영원한 우주적 투쟁을 벌인다. 아후라 마즈다가 최고의 신이요 그가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확실하기는 하지만, 창조물이 인내하는 한 앙그라 마이뉴는 쉬지 않고 그 와 싸우며 세상에 고통을 안겨준다.
 
악과 악의 기원에 관한 정교하되 비인격적인 관점은 인도에서 유래한 위대한 종교들에서 발견된다. 이 전통들에 따르면 악은 깨닫지 못한 존재 상태요, 무지(avidya, 無明) 바로 악의 근원이다. 깨달은 의식 상태에 도달해 모든 분별(이원론)을 넘어섬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카르마로부터 또 악이 작용하는 모든 조건으로부터 해방된다. 해방(해탈)이 필연적으로 윤회를 그치게 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삶은 확실히 그치고 그와 함께 악도 그친다.

네 번째 범주에는 주류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발견되는 고전적인 유일신론이 포함된다. 앞 세 범주의 전통들이 악의 존재를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사악한 적수, 또는 인간의 무지 탓으로 돌리는 반면, 유대-기독교 사상은 악의 기원을 인간의 죄로 돌린다. 앞서 3장에서 보았듯이, 에덴 동산과 그곳에서 벌어졌다고 전해지는 기이한 사건들을 포함한 주류 유대-기독교의 창조 신화가 이런 관점의 기초가 된다. 즉 처음 한 쌍의 인간이 저지른 범죄가 오늘까지도 이어지는 창조 세계의 '타락' 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화된 시대에서조차 이런 신념의 짙은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 장막을 드리우고 있다. 만일 유대-기독교 문화에 사는 사람들의 영혼을 억누르고 있는 이 타락의 죄책이 없었더라면, 역사는 얼마나 다르게 전개되었을까!


【 영지주의 관점 】

고대와 현대의 영지주의자들은 고통이 세상에 있는 악의 실존적인 드러남이라고 보는 불교의 관점에 동의한다. 비록 인간의 고통이 생리학적 • 심리학적으로도 복잡한 특성을 보이는데다 다른 창조물에서 볼 수 없는 섬세한 면모를 지니고는 있지만, 다른 창조물들도 공포와 아픔, 불행을 경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성 바울이 지적했듯이 모든 창조물은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 (<로마서> 8:22)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의 불완전한 상태를 원죄의 결과가 아니라 본래적인 결함 때문인 것으로 여긴다. 좀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라는 구조물의 일부다. 이 같은 현실 세제를 만든 조물주가 있다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악은 분명 그의 책임이다. 이러한 영지주의의 입장은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성모독적인 것이다. 스스로 신자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당혹해하는 경우들이 많다.

영지주의의입장은 그 역사적인 뿌리를 들여다볼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고 오늘날의 대부분 학자들도 인정하듯이, 영지주의는 유대교적 환경에서 (아마도 유대교의 비정통적인 분파들에서) 기원하였으며, 그런 뒤 유대교의 이교 곧 기독교와 결합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변덕 부리고 분노하고 복수심에 불타며 정의롭지 못한 유일신적인 하느님의 상 - 그리고 신약 성서에 달라진 모습으로 나오는 하느님의 상 - 때문에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렇게 분명한 결함을 지닌 하느님이 결함을 지닌 자신의 모습대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기에서 영지주의자들은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진실로 이 결함을 지닌 조물주가 선하고 참된 궁극의 하느님인가, 아니면 자기보다 위에 있는 권능자를 알지 못하거나 자신보다 우월한 신적 권능자를 알기는 하지만 그 지고한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결심한 열등한 신인가?' 이에 대해 영지주의자들은 이 조물주는 확실히 참된 궁극의 하느님이 아니라 열등한 신, 데미우르고스라고 대답하게 된다. 데미우르고스가 세상에 악과 불완전함을 가져온 장본인인 것이다.

세상의 악을 조물주의 탓으로 돌리는 이 명백한 신성모독은 이처럼 유일신론적인 하느님으로 인한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영지주의와 유사한 운동이었던 헤르메스주의는 이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헤르메스주의자들은 구약 성서 하느님의 모순적인 모습을 물려받지도 않았고. 그것에 반응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영지주의자들보다는 좀 편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악을 특별히 데미우르고스에 연계시키지 않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지주의보다 헤르메스주의에 더 기우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창조 세계 안에 결함이 있고, 따라서 창조 세계를 만든 조물주에게도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자 많은 사람이 시도했으나 영지주의자를 설득시킬 만한 논리는 나오지 않았다. 우주의 조화에 관심이 컸던 고대 그리스인들, 특히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우주의 웅장함에 대한 경외심 속에서 일상의 어려움이나 슬픔, 고통까지도 잊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아름다운 세계를 보라. 우주가 스스로 운행하고 영속하는 이 놀라운 질서를 보라. 어찌 이토록 아름답고 조화로운 것을 악한 것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영지주의 자들은 한결같이 결함과 버림받음, 그리고 존재의 소외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우주는 오직 부분적으로만 조화롭고 질서 잡혀 있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동양의 종교에 영향을 받아 카르마業의 법칙 - 이 법칙에 의해 그룻된 행실이 나중에, 혹은 다음 생에서까지도 불행을 야기한다 - 이 현실 세계의 불완전함을 해명해 준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영지주의자들은 카르마란 기껏해야 고통과 불완전함의 사슬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해 줄 따름이라고 반론할 것이다.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질서가 애당초에 존재해야 하는지 카르마의 법칙은 말해주지 않는다.


【 제한적인 이원론 】

■ 앞서 언급했듯이 악의 존재를 해명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서 조로아스터교 같은 철저한 이원론이 있었다. 이에 반해 영지주의의 입장은 제한적인 이원론이라 부를 수 있다. 제한적인 이원론에는 철저한 이원론이 가정하는 선한 신과 악한 신 사이의 투쟁이 없다. 간단히 말해, 현실 세계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며, 이 세계는 완전히 악하지도 완전히 선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 세계의 악이 선이 존재하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가리지도 않거니와 선 또한 악이 현존하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가리지 않는다.
 
영지주의자들은 심오한 통찰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신화를 선호했다. 창조 세계 안에 선과 악이 흔재되어 있다고 말하는 신화들은 영지주의 이전에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화다. 타이탄들이 디오니소스를 잡아 찢을 때 제우스가 도움의 손길을 펼쳐 천둥번개로 타이탄들을 내리쳤다. 그러자 타이탄들과 디오니소스의 몸이 재로 변해 섞여버렸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피조물이 이 재로부터 생겨났으므로, 모든 피조물 속에서 디오니소스의 신적인 본성과 타이탄의 악한 본성이 혼합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본성 안에서도 자연계 안에서도 빛과 어둠이 서로 싸우게 된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선과 악의 근원에 관한 자신들만의 신화가 있 다. 그것은 모든 현실적인 존재 너머에 있는, 지복이 흘러넘치는 끝없는 충만 - 플레로마 - 에서 시작된다. 플레로마는 궁극적인 참 하느님(알레테스 테오스, alethes theos)의 본성이자 거주지이다. 시간과 기억 이전, 이 형용할 수 없는 충만은 존재의 낮은 영역으로 자신을 확장시켰다. 이 방출 과정에서 충만은, 위대한 천사와 비슷하면서 창조와 조직에 엄청난 재능을 지닌 수많은 중간 신들, 곧 데미우르고스들로 자신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런 존재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고귀한 근원에서 멀어지면서 악한 성향을 취하게 되었다. 그들은 인간을 만들기 훨씬 전 자신들의 불완전한 본성을 따라 물질 세계를 창조했다.
 
이 세계를 창조하려는 의지는 억지와 오만, 그리고 권력의 갈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렇게 근원에서 멀어진 존재들이 수행한 작업을 통해 악이 창조물 속에 스며들게 되었다. 영지주의 교사 바실리데스(Basilides)가 여러 차례 말했던 것처럼, 그 이후로 "악은 녹이 쇠에 달라붙듯 창조된 존재들에 달라붙는다." 창조물의 일부인 인간 또한 조물주들이 지닌 결함을 본성으로 지닌다. 인간의 몸은 질병, 죽음 등과 같은 악들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흔(psyche) 또한 불완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직 인간의 본질 안에 깊이 숨겨진 영(pneuma)만이 악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참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


【 현대적인 결론 】

■ 《타임》지 기사가 말했듯이, 그리고 지난 20세기 및 21세기 초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끔찍한 일들은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세계에는 악과 공포가 있으며, 고통은 보편적인 것이다. 권좌에 있는 일부 사람들은 매일처럼 누군가를 고문하고 죽인다. 유대-기독교의 유일신을 믿는 자들과 카르마의 법을 따르는 자들은 "종국에는 악조차도 선으로 인도되기 때문에 이는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악은 결코 진짜 악이 아니라 불유쾌한 모습으로 가장된 선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눈앞에서 악을 목격했던 자들 - 유대인 학살이나 옛 소련의 굴락(Gulag, 강제 노동 수용소)이나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에서 살아남은 자들 - 에게 이런 식의 애매한 주장은 모욕적일 것이다. 그들에게 악은 악이며, 그 밖의 설명은 모두 한갓 핑계일 뿐이다.
 
더구나 지진이나 화재, 홍수, 전염병과 같은 끔찍한 사건들은 인간이 일으킨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 때문에 생겨나는 고통도 있지만, 인간의 잘못과 상관없이 생기는 고통도 많다. 그런 경우에도 흔히 우리는 그 고통이 인간 때문이라고 여기고는 한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의 신화에 따른 것이든, 인간을 유일한 환경 파괴자로 몰아붙이는 선전에 따른 것이든, 죄책감을 키우는 방식으로는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죄책감은 결과적으로 더 많은 불행을 낳는다. 자신에 대한 채찍질을 멈추자. 그리고 불행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너머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악이라도 줄이도록 하자.

인간은 창조물과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악을 완전히 몰아내는 일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서 악을 제거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인간의 계획과 기술로 우리 본성에서 악을 제거할 수 있었다면 오래 전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악의 신화, 곧 죄의 신비는 한편으로는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해답을 주기도 한다. 현대 사회는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에 뿌리를 둔 세속적인 관점에 점점 더 지배를 받고 있다. 이 관점의 근간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나왔으나, 그 가지들은 대부분 소비주의와 쾌락주의 - 돈과 건강, 젊음을 숭배하는 - 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속적인 관점은 오직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 세계만 존재하고 초자연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을 둘러싼 한갓 상징에 불과하다는 가정 - 때론 암묵적이고 때론 공공연한 - 위에 서 있다. 이런 환경에서 영지주의에 강력히 반발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영지주의는 세속적인 구원을 얻으려는 우리 시대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회적 역학에 기초한 이론을 해방의 그노시스로 대치한다. 영지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 사회는 물론 자연계도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 그것은 인간 사회나 자연계나 모두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와 꽤 가까운 거리에 있는 러시아의 현대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자예프(Nikolay Berdyaev)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했다. "자연계, 사회, 국가, 민족 등은 완전하지가 않다. 그것들이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혹적인 거짓말이다. 인간의 맹목적인 숭배가 그런 주장을 낳았다."
 
인간을 지력은 뛰어나지만 사악한 동물로 깎아내리는 반면 사회적, 생태학적 공학 기술은 신격화하는 현대 및 탈현대의 근시안적인 사고는 영지주의 관점에 적대적이다. 이런 근시안적인 사고가 우세해지면 삶은 수평적인 것이 되고 만다. 중요한 모든 것은 바로 지금이요 여기이며, 더군다나 물질적인 것이다. 오존층 감소와 인구 과잉이 유일한 악으로 여겨질 때 악에 대해 또 악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영지주의자들이 숙고한 것들은 한낱 가물거리는 신기루가 될 뿐이다. 악에 관한 영지주의 신화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든 간에, 그 신화의 바탕은 자연주의적 • 사회적 • 경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이며 영적이다. 성 바울의 말로 표현하자면, 악의 근원은 "높은 곳에 있는 영적인 사악함"이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수단은 악 앞에서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물질적 수단을 포함한 이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악한 물질적 조건과 싸울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물질적 수단으로 모든 악과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이란 사실상 이 물질 세계의 육체 안에 일시 적으로 거하는 영이라고 여겨왔다. 우리의 물질적, 심리적 자기 안에 깊이 숨어 있는 영(puema)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거주하는 이 불완전한 우주 너머에서 다가오는 신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초월적 그노시스를 얻을 기회를 베푼다. 오늘날 같은 환경 속에서 우리는 '초월적(transcendental)' 이란 단어를 종종 사용하지만 이 단어가 자연계, 실제로는 우주 자체를 초월함을 의미한다는 점을 깨닫지는 못한다. 초월은 우리에게 운명 지워진 것이다. 이 세계를 초월할 때 우리는 악을 초월한다. 그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악에서 선을, 어둠에서 빛을 구별하는 통찰력을 훈련시키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이 세상에서의 예비 구원을 이해함으로써 그노시스를 통한 궁극의 구원을 준비하는 것이다.

현대 영지주의자들은 고대 영지주의자들의 근본적인 통찰에 대부분 동의한다. 현대 영지주의자들은 데미우르고스의 존재를 믿는가? 그들은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세상에 악이 들어왔다고 믿는가? 그들은 이런 개념들을 좀더 미묘하고 신비로운 실재들을 암시하는 신화소나 형이상학적인 진리로 여기는가? 어떤 이들은 이런 것들을 문자 그대로 믿고, 어떤 이들은 상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또 어떤 이들은 두 관점을 조화시켜 이해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가르침의 정확한 형식이 아니라 그 실질적인 내용이다. 그것이면 족하다. 영지주의의 가르침은 악의 실재와 능력에 관해, 그리고 현실 세계 전체에 악이 근본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에 관해 말한다. 세상이나 우리 자신 속에서 악을 제거하기는 힘들지라도, 우리는 그노시스를 통해 악을 초월할 수 있다고, 아니 초월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런 해방이 성취될 때 진정으로 우리는 한낮의 사탄이나 밤의 공포를 더 이상 두려워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영지주의에 대한 정의 】
 

■ 영지주의의 정의를 내리기란 쉽지 않다. 특히나 사회과학에서는 더 그렇다. 사회과학에서는 믿음과 행위가 펼쳐진 역사의 맥락에 훨씬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상황의 미묘함, 어감, 어투 속에 담긴 결정적인 차이 혹은 유사성이 융통성 없는 정의보다 중요하다. 영지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이런 섬세한 특징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며, 정의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영지주의의 정의를 둘러싼 혼란이 심한 만큼 그 시도는 해볼 만하다.
 
한스 요나스는 영지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컨대 일종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귀와 같은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쓴 바 있다. 사실 이러한 내적인 감수성이 그 어떤 정의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에고에 얽힌 우리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정의를 필요로 하며 정의가 없는 상태를 잘 견뎌내지 못한다. 물론 참된 그노시스는 정의와 관계가 없다. 오직 영지주의적 경험의 충격이 시들어버릴 때만 이런 작업을 고려하는 것이다. G.R.S. 미드는 이 점을, "깨달은 영혼, 그러니까 무한한 빛 속에 몸을 담그기 위해 자신의 감옥을 버린 영혼이 지상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바로 그 순간에 찬란한 환상의 섬광들을 회상할 수 있는 것"(《시몬 마구스》, 49쪽)이라고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항목별로 정리된 영지주의 개념들은, 틀에 박힌 종교적 교리에 대한 진술이라기보다는 바로 "찬란한 환상의 섬광들"에 대한 개요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1.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하나의 영적 통일체가 있고 그로부터
수많은 발현물이 방출되어 나왔다.
 
2. 물질과 마음(mind)으로 구성된 지금의 우주는
근원적인 영적 통일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열등한 권능자들을 거느린
영적 존재들에 의해 창조되었다.
 
3. 이 조물주의 목적 중 하나는
통일체(하느님)로부터 인간을
영원히 분리시키는 것이다.
 
4. 인간은 복합체이므로
내면은 궁극의 신적 통일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불꽃이지만
외면은 열등한 조물주들의 작품이다.
 
5. 물질과 마음의 힘에 의해
자기 인식(self-awareness)이 무감각해진 까닭에
초월적인 신성을 지닌 불꽃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심적 감옥 속에 잠들어 있다.
 
6. 잠들어 있는 불꽃들은
궁극의 통일체에 의해 버려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깨달음과 해방을 향한 한결같은 노력은
이 통일체로부터 나온다.
 
7.인간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신적 본질에 대한 자각은
'그노시스(gnosis)'라고 불리는
구원의 지식을 통해 얻어진다.
 
8. 그노시스는 믿음이나 고결한 행위나
계명에 대한 순종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기껏해야 해방의 지식을 위해
인간이 준비되도록 도와줄 뿐이다.
 
9. 잠들어 있는 불꽃들을 돕는 존재들 가운데
특히 영예롭고 중요한 자리는
통일체의 여성적 방출물인 소피아(지혜)가 차지한다.
소피아는 세계의 창조에 관여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고아 신세가 된
인간 자녀들의 안내자로 남아 있다.
 
10.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영혼 속에서
그노시스를 촉진시키기 위해 빛의 사자들이
궁극적 통일체로부터 보내지고 있다.
 
11. 인간의 역사적, 지리적 환경에서 볼 때
이 사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강한,
하느님의 로고스(말씀)였다.
 
12. 예수는 이중의 사역을 담당했다.
교사로서 그노시스를 얻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사제로서 신비 의식을 전해주었다.
 
13. 예수가 전해준 신비 의식(성례전으로 알려진)은
그노시스로 가는 강력한 수단이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과 계승자들에게 그것을 위임했다.
 
14. 신비 의식의 영적 수행과
그노시스를 향한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노력을 통해
인간은 물질이나 그 밖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점점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해방으로 나아가는 이 과정의 최종 목표는
구원의 지식을 성취하는 것이고,
그 지식을 통해 물질적인 상태로부터 자유로워져
궁극의 통일체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저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에서 "완벽한 개념적 정의는 처음부터 제시될 수 없다. 연구의 마지막까지 남겨두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연구의 마지막쯤에서 영지주의의 정의를 숙고해 보는 것이 바람직할 법하다. 앞에 제시된 특징들이 베버가 말한 '완벽한 개념적 정의'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지만, 그렇다 해도 역사적 정확성과 용어상의 명확성을 지니는 것은 물론이고 오늘날의 문헌들(학문적이건 대중적이건)이 제공하는 정보의 수준 또한 훨씬 넘어선다. '정통 그노시스'와 '사도적(apostolic) 그노시스' 같은 구분이나 '거짓 영지주의자'와 '참 영지주의자' 같은 분류는 여기서 하지 않는다. 그런 판단은 영지주의 혹은 영지주의자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정통파들의 입장을 근거로 나온 것이다.
 
분명, 여기에 제시된 열네 가지 특징은 모두 영지주의 전통의 일부이며 시대를 달리하며 영지주의자들이 믿었던 것들이다. 이 중 앞의 열 가지 특징은, 심지어 비기독교적 영지주의자들한테까지도, 온전하게 믿어졌던 것들이다. 만일 이 열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지주의자가 되기에 부적합한 사람일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영지주의자라고 밝히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교의敎義 대부분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해석을 문자적으로 하느냐, 심리학적으로 하느냐, 철학적으로 하느냐, 혹은 다른 어떤 식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순전히 개개인에게 달려 있다. 아무튼,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영지주의의 정의 관련해 《이상한 나라 앨리스》를 인용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내가 어떤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단어는 단지 내가 그걸로 의미하고 싶은
딱 그것만을 의미할 뿐이야.
더도 덜도 아니지."
달걀 인형 험프티 덤프티가 말했다.
 
"문제는, 네가 단어들을 가지고
수없이 많은 다른 의미를
갖게 할 수 있다는 데 있지."
앨리스가 대답했다.
 

【 옛 동굴에서 비친
새로운 빛, 나그함마디 경전 】

 

■ 나그함마디 문서에서 '복음서(Gospel)' 라는 제목을 단 경전은 오직 네 개 <도마복음>, <빌립복음>, <진리복음>, <이집트인 복음> 뿐이다. 이 중 가장 접하기 쉽고 대중적인 것은 <도마복음>이다. 성서의 4복음서와 달리 <도마복음>은 예수의 생애를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의 말씀을 모아놓고 있다. 말씀의 일부는 4복음서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지만, 다른 많은 부분은 분명하게 영지주의적 특징을 띤다. 그러한 특징은 첫머리에 실린 말씀에서부터 분명히 나타난다.
 
"이것들은 살아계신 예수가 전한
비밀스러운 말씀들이다.
누구든지 이 말씀의 참뜻을 발견한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말씀하셨다.
'찾는 자는 발견할 때까지 찾기를 멈추지 말라.
발견하면 그는 근심케 될 것이요,
근심케 되면 놀랄 것이요,
놀라게 되면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서언과 말씀 1)
 
믿음을 권고하는 내용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진술도 없다는 사실에 유념하라. 그 대신 읽는 이는 참뜻을 발견하고, 찾고, 모든 것을 다스리는 주인이 되도록 초대한다. 이것은 정통주의적 구원이라기보다는 영지주의적 구원을 위한 처방전이다. 자기 앎으로서의 그노시스가 분명하게 강조된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게 될 때
너희는 알려지고
'너희가 살아계신 아버지의 자녀'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하면
너희는 빈곤케 되고
너희 자신이 곧 빈곤이 될 것이다."
(말씀 3)
 
현대의 어떤 심층심리학자가
아래의 말씀에 반대할 수 있겠는가?
 
"만일 너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낳으면
너희가 낳은 것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낳지 못하면
너희가 낳지 못한 것이 너희를 죽일 것이다."
(말씀 70)
 
나그함마디 문서 중 일부는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는 영지주의자들의 '엘리트주의'를 명백히 암시하고 있다. <베드로묵시(Apocalypse of Peter)>라는 제목의 문서는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받을 때 웃으며 기뻐했다(<요한행전>의 이야기에서처럼)는 흥미로운 본문을 담고 있다. 베드로는 군중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참된 본질을 알지 못하는 데 낙담하여 예수에게 말한다. "주님, 아무도 당신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에 예수가 대답한다. "내가 전에 너에게 '눈먼 자들은 그냥 내버려 두어라' 하지 않았느냐?" 대부분의 군중은 항상 눈이 멀어 있다는 것이다. 눈먼 자들에게 그들이 애당초 볼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시간과 노력의 낭비이다. 드러난 일과 가르침, 그리고 삶의 숨겨진 의미는 오직 소수에게만 알려진다. 이런 말씀들은 예수가 모든 것을 드러냈다고 말하는 정통 기독교의 주장과 뚜렷하게 대조된다. 헨드릭 입센(Hendrik Ibsen)의 《민중의 적(The Enemy of the people)》이라는 멋진 희곡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외친다. "대다수? 대대수는 결코 옳을 수 없어!" 영지주의자라면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1970년대 한 종교학 교수가 자신의 권유로 <도마복음>을 읽은 학생이 수업 시간에 "예수는 선불교의 붓다예요"라고 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실제로 영지주의 경전에서 발견되는 예수의 말씀 중 상당 부분은 그 의도가 선禪의 공안公案과 비슷해 보인다. 그것들은 지식을 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제자들의 영적 변화를 자극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영지주의 복음서에는 성서의 4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사랑에 대한 강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가끔씩 제기된다. 비판가들은, 영지주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껴 죽은 자를 일으키고 아픈 자를 치료하며 눈먼 자를 뜨게 하는, 그와 같은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도마복음>이나 이와 비슷한 경전에 나오는 예수는 자격 있는 자에게 그노시스를 전수하는 영적 교사이자 영혼의 안내자이다. 자신보다 앞선 고타마 붓다처럼, 예수도 고통의 근본 뿌리는 마음과 가슴에 있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의 완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4복음서에서처럼 영지주의 복음서에서도 예수는 제자들에게 서로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너희 형제를 너희 영혼처럼 사랑하고
너희 눈동자같이 그를 지켜라."(말씀 25)
 
모든 영지주의자에게 있어, 그리고 예수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위는 모든 육체적, 심적 고통을 멈추게 하는 영적인 해방이다. 그런 까닭에 영지주의 복음서의 예수는 해방 신학자들에게 결코 적절한 인물이 될 수 없다. 예수가 가져다주는 해방은 정치적, 경제적인 해방이 아니라 영적인 해방이다. 왜냐하면 해방은 세상 안에서의 해방이라기보다는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이요 그것이 또한 궁극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그함마디 경전 어디에서나 우리는 자기(self)와 초월적 비자기(transcendental nonself), 곧 내재하는 영과 에온들 너머에 있는 근본 하느님 사이의 전형적인 영지주의적 결합을 발견한다. 신성한 존재에게 가는 길은 자신을 통해야 한다. 나그함마디 문서의 하나인 <실바누스의 가르침(Teachings of Silvanus)>은 이 사실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네 마음을 비추어라. ... 네 안의 등불을 밝혀라. 문을 두드리듯이 네 자신을 두드리고, 곧은 길 위를 걷듯이 네 자신 위를 걸어라. 만일 네가 그 길을 걸으면 길 잃을 일이 없다. ... 네 자신을 위해 그 문을 열어라, 그리하여 네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나그함마디 문서는 영지주의 지혜의 어마어마한 보고寶庫이다. 그것은 지금껏 발견된 영지주의 사본 중 가장 방대한 사본집일 뿐만 아니라, 이 문서의 발견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영지주의 지혜의 양이 아주 풍부해지게 되었다. "영지주의에 대한 기독교 시대의 판단을 재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이 시대의 지혜로운 사람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한 영지주의 자료가 2천 년 만에 처음으로 갖추어진 것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해 온 초기 기독교 시대에 관한 그림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일한 어떤 '위대한 교회'도 없었고, 이른바 '영지주의적 이단'이 일부러 또 고집스럽게 분리해 나온, 그 원뿌리 되는 정통 기독교 제도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는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초기 기독교는 다양한 종류의 신앙과 해석,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그노시스의 집합체였다. 비非영지주의 기독교가 비난과 외면을 당하는 '이단자', 곧 영지주의자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그림은 변하고 있고, 변화의 힘은 사막의 모래에서, 조그만 노란 먼지 구름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를 뿜어낸 오래된 붉은 점토 항아리에서 우리에게로 왔다.
 
수많은 학자들의 성실하고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로, 1977년부터 나그함마디 문서 전체를 쉬운 산문체 영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영지주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 역사 이래 이렇게 자원이 풍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일찍이 영지주의 경전을 연구한 가장 위대한 학자 중 한 사람인 미드는 거의 100년 전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영원의 감수성을 가지고 이렇게 적었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영지주의자들이 상징과 신화로 포장해 놓은 수많은 것을 드러내놓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주제들에 대해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은, 다들 상상하겠지만, 위대한 그노시스 교사들에 비해 그다지 진보하지 못했다. 그 옛날처럼 지금도 영지주의 교사들이 기록한 것을 진실로 아는 자는 소수에 불과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모방하고 비교하고 개조하고 숙고할 뿐이다. ...
 
어느 누가 자신의 지성으로, 자신의 동료들을 위해, 이 모든 고상한 주제들에 대답을 해줄 만큼 충분히 알고 있는가? 각자 자신이 보는 그대로의 빛을 따르자. -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빛은 충분하다 - 그리하여 마침내 '만물의 빛(감미롭고 기쁨에 찬 빛)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잃어버린 믿음의 단편들》, 592쪽 및 606~607쪽)

 https://youtu.be/mzNli-PmRxs?si=bVXcIv--w9KJF5bE

https://youtu.be/EGtUnQnwrdY?si=sFGkvyk4-fuK0mYL

 
 영국의 성서 학자 제임스 던에 의하면 도마복음은 영지주의 사상이 담긴 복음서이다. 그러나 그가 결정적으로 4복음서와 도마복음의 차이를 언급하는 부분은 기록 연대나 사상사의 발전 등에 있지 않았다. 4복음서와 도마복음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복음의 유무'에 있었다. 제임스 던은 바울이 생각했던 복음은 단순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초점이 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하나나님 나라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더욱 구체화되고 현실화되었다는 것이다. 또 제임스 던에 의하면 4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복음서의 절정'에 위치하거나 적어도 그 의미가 '중심 주제'로 제시되지만 도마복음에는 전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등장하지 않는다. 제임스 던이 이해한 바울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등장하지 않는 도마복음은 아이러니하게도 복음서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전혀 복음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복음서가 될 수 없었다. 
 
https://youtu.be/jSTMdnYiFZY?si=TbWPfGLlXQ_bhSAb

■ 20세기 들어 영지주의는 그쪽 세계에 심취한 사람들만의 관심 대상에서 사회 모든 분야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주제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영지주의에 친밀감을 느끼고 영지주의자의 사고방식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기원후 2, 3세기경 위대한 영지주의 스승들이 자신들이 통찰한 바를 설파한 이후로는 없던 일이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최근의 영지주의 연구에서 보이는 대다수 주제들이 진지하게 다뤄지지 못했다. 영지주의 연구를 반대한 주된 이유는 이랬다. 첫째, 영지주의는 오직 역사적 연구로만 접근할 수 있는 소멸된 종교 전통이다. 둘째, 영지주의는 우주적 염세주의에 너무 깊게 빠져 있으므로 진보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셋째, 영지주의는 이성이나 경험과는 무관한 사변적 공상 꾸러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이 같은 반대 주장을 하나씩 간략하게 살펴보자.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전통은 결코 소멸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영혼이라는 바다에 퍼지는 통찰은, 연못에 던져진 돌멩이가 만들어내는, 점점 커져가는 동심원과 같다. 우리가 더 이상 지각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바깥으로 확대되어 간다. 영지주의자들의 지혜는 이런 동심원과 같아서, 그 근원으로서 인정을 받든 못 받든 간에 인류의 생각과 직관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 서양의 다른 영성 전통들 대부분은 어느 정도 영지주의와 관계가 있거나 영지주의에서 연유했다. (특히 요한 바오로 2세는 <희망의 문턱을 지나(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라는 책에서 "이른바 뉴 에이지(New Age)로 가장한 고대 영지주의적 사상으로의 회귀"를 인정한다.) 이렇게 영지주의 사상이 우리 가운데 되살아나고 부활하고 있다. 강물의 비유를 영지주의 사상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원水源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물은 더 맑아진다. 본래 모습 그대로 영지주의의 지혜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시원始原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른바 염세적이라는 영지주의 세계관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영지주의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한 세기, 아니 반 세기 전만 해도 서양 문화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보를 향한 인류의 욕망에 발맞춰 비대해진 과학은 승리감에 도취해 환호작약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세계 전쟁과 그에 따른 심리적 파탄은 우리의 생각을 다시 돌려놓았다. 최근 벌어진 사건들은 이 같은 낙관적 사고 방식의 허점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새 천년의 문턱을 갓 넘어서면서 우리는 심각한 상황에 맞딱뜨리게 되었다. 한때 '지구촌'의 전령자로 인정받던 비행기가 느닷없이 파괴의 미사일로 돌변하고, 우편으로 배달된 편지가 죽음의 도구로 표변했다. 이블린 워(Evelyn Waugh)는 일기장에 "사람은 누구나 사춘기 때는 미국인이요, 죽을 때는 프랑스인이다" - 소박한 낙관주의가 경험을 통해 어떻게 우울한 사실주의로 변화되는지를 보여준다 - 라고 썼다. 이 정도밖에 성숙하지 못한 문화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영지주의를 다시 한 번 평가해 보게끔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영지주의를 폄하하려고 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가장 일찍 영지주의를 비판했고 그 영향력도 가장 컸던 사람들은, 영지주의가 불필요한 철학과 지나친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고 깎아내렸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19, 20세기의 몇몇 선도적인 사상가들에 의해 심각하게 도전받았다. 성서학계가 영지주의 문서의 가치를 깨달았는가 하면, 실존주의자와 현상학자는 영지주의와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토대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가지 면에서 영지주의의 복권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위대한 심리학자 C.G. 융이었다. 융은 영지주의 경전 속에서 집단 무의식의 원형을 인식하고 영지주의 계시들의 환상적 기원과 내용이 믿을 만한 것임을 입증해 냈다. 융은 영지주의자를 자신들의 통찰을 주로 신화의 형태로 표현한 환상가로 여겼다. 다른 신화들을 되살리고자 한 것과 마찬가지로 융은 영지주의 신화에도 새 생명을 불어넣기 원했다. 심리학자로서 융은 종교 신화를 형이상학적인 방법보다는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그는 당시 일반적이던 성서의 종교적 해석을 구체주의(concretism)요 환원주의(reductionism)라며 반대했다. 이처럼 융이 신화의 의미를 캐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이 크게 작용했다. 영지주의 신화는 문자 그대로 다룰 때보다는 상징으로 다룰 때 훨씬 접근하기가 쉽다.

여기에서 약간의 어려움이 발생한다. 융은 신화에 대한 자신의 상징적 해석이 곧 형이상학적 진리는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오히려 영지주의는 종교와 현대 심리학의 중간쯤 되는 특별한 지점 - 혼(soul)과 영(spirit)이 만나고 꿈과 환상(vision)이 해방의 경험으로 변화되는 곳 - 에 놓여 있다. 풍부한 상징과 은유를 지닌 영지주의 신화는 언제나 심리학적 의미와 형이상학적 의미 모두에 발을 담그고 있다.종종 신화들은 끝없이 연결된 고리와 같아서, 심리학적 의미가 형이상학적 의미로 나아가고 그 형이상학적 의미를 통해 우리는 다시 개인의 심리(psyche)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우주론과 심리학, 신적 존재들과 원형들이 - 때론 서로를 지시하기도 하고 때론 단지 다시 분리되기 위해 서로 하나가 되기도 하면서 - 변형된다.
 
독자들은 영지주의 신화와 그 신화의 주인공들이 심층심리학과 종교의 영역에 동시 관계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당혹스런 상황과 몇 번이고 마주치게 될 것이다. 융과 달리 영지주의자들은, 비록 자신들의 신화에 오늘날의 심층 심리학적 해석 방법을 암시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신화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그 안에 형이상학적 진리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난제를 해결하는 가장 그럴듯한 방법은, 영지주의 신화가 심리 내적인 의미와 외적인 의미로 모두 해석될 수 있고, 두 해석 모두 옳을 뿐 아니라 서로 공존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쩌면 형이상학적 방법과 심리학적 방법 모두, 융이 분명히 인정했던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을 체계화하고 구체화하며 표현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영지주의는 식자識者나 신자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영지주의도 다른 비교秘敎적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넓은 바다에 견줄 수 있다. 이 바다에는 어린아이도 놀 수 있는 얕은 곳이 있는가 하면, 전문 잠수부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심해도 있다. 그러나 '바보를 위한 영지주의'란 제목의 책을 쓸 수는 없다. 영지주의는 아무나 쉽게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사고의 섬세함과 직관적 인식 능력이 요구되는 주제다. 영지주의는 진실로 하나의 전통이었다. 일시적인 기분이나 생각에 따라 해석될 수 있는 사상과 신화, 상징의 단순한 집적이 아니다. 영지주의는 자기만의 분명한 세계관과 경전, 신비 의식儀式, 성직 제도, 영성의 계보를 가진 온전한 전통이다. 영지주의가 전통에 의해 체계가 잡히지 않은, 단지 일시적 자극으로 형성된 영성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는 가정은 사실이 아니다.

 


옮긴이의 말 】

■ 일반적으로 영지주의는 극단적 이원론을 바탕으로 한 교리를 갖고 있으며, 물질적인 요소를 부정하고 오직 영적인 요소만을 강조한 초대 기독교의 이단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런 편견에 의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악한 장소로 여기고 물질적인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삶의 목표로 한 자들이다.
 
옮긴이도 직접 일차적인 자료인(하지만 오랫동안 무시되고 감추어져 왔던) 영지주의 경전을 탐독하고 거대한 영지주의 세계를 탐구하기 전까지는 주류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영지주의를 이해했다. 하지만 영지주의를 넓고 깊게 공부하면서, 이와 같은 통념은 이단 연구가(때론 이단 사냥꾼)라고 불리는 초대 주류 기독교 교부들의 저술에 의지하여 영지주의를 그저 피상적으로 이해한 데서 기인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영지주의는 육을 부정하고 영을 중시한다. 영지주의자는 물질 세계 너머에 있는(또는/그리고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영의 세계를 열망한다. 영지주의자는 모든 인간이 궁극적 하느님의 불꽃 또는 파편이 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신비주의 전통을 따르는 가르침치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가?

영지주의는 초대 기독교의 신비주의 영성 전통에 속한다. 1945년 북부 이집트 나그함마디 부근에서 발견된 영지주의 경전들(그래서 나그함마디 문서라고 이름 붙여진)이 최초의 기독교 수도 공동체인 파코미우스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땅에 묻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나그함마디 경전들은 파코미우스 수도원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그곳 수도사들에게 애독되다가, 4세기 후반 이단적인 문서를 파기하라는 알렉산드리아의 한 감독의 명령을 받고 차마 그것들을 소각하지 못한 수도사들에 의해 잘 봉인되어 땅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수도사들뿐 아니라 그 당시 점점 제도화 • 형식화되어 가는 주류 기독교 운동에 싫증을 느낀 초대 기독교인들도 영지주의 운동에서 영성의 목마름을 달랬을 것이다. 이는, 최근 연구 결과, 상당수의 초대 기독교인들이 영지주의 경전을 즐겨 읽은 것으로 밝혀지는 데서도 드러난다.
 
이런 연구 결과는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사실 2~3세기까지만 해도 영지주의는 기독교 운동의 한 흐름이었지 공식적인(?) 이단이 아니었다. 이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로마 주교직의 후보까지 올랐으나 근소한 차이로 떨어진 영지주의자 발렌티누스는 교회에서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그는 기독교 지도자로 활동하는 동안 영지주의자라는 이유로 정죄 받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 내에서 활동하는, 인정 받는 기독교인이요 동시에 영지주의자였다.

잠시 곁길로 가자면, 영지주의와 같은 소수의 기독교 종파들이 기독교에서 공식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정죄를 받아 추방당하게 된 것은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후의 일이다. 로마 황제의 후원으로 점점 더 제도화 • 조직화 • 거대화되어 간 주류 기독교는 국가에 봉사하는 기관으로 방향을 바꾸고, 박해 받는 종교에서 박해하는 종교로 자리를 옮겼다. 사랑과 화해를 외치는 기독교가 이단과 이교(자신들의 입장 에서 볼 때)를 박해하고 박멸하는 데서는 잔인한 폭력성과 파괴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고 전하기 위해, 기독교만큼 많은 피를 흘린 종교는 없으리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선불교라 할 만하다. 경전을 읽고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독교의 깨달음이라 여길 만한 자기만의 그노시스를 얻기까지 정진하는 영지주의자는 선불교의 구도자와 비슷한 데가 많다.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선불교의 화두처럼, 진정한 영지주의자들은 남들의 예수, 타인의 신앙 고백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단 연구가 이레네우스가 "그들은 매일같이 창조에 관한 새로운 것(깨달음)을 만 들어낸다"고 비판했듯이, 영지주의자들은 자신의 통찰을 얻고 그것을 자기 방식대로 풀어내려고 애쓴 구도자들이었다. 따라서 기독교의 대표적인 신비주의자인 영지주의자들은, 다수의 주류 기독교인들에 의해 그들이 알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그노시스를 소유했다는 이유로 정죄 받은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옮긴이가 보기에, 주류 기독교와 영지주의 기독교의 관계는 성격상 불교의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의 관계와 비슷한 듯하다. 교종은 부처의 말씀에, 선종은 부처의 마음에 중심을 두었듯이, 주류 기독교는 교회가 정한 정경에, 영지주의는 예수의 숨겨진 비밀 가르침에 무게를 두었다. 선禪과 교敎를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편의상 시도해 보자면, 선이란 중생에게 전한 부처의 설법에 비해 직접적이고 직선적인 깨달음 혹은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성서에 포함된 정경과 영지주의 경전도 이와 비슷한 특징을 지닌다. 정경이 예수가 평범한 민중들에게 전한 보통의 말씀이라면, 영지주의 경전은 즉각적인 깨달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던진 화두와 같다. 자신의 본성, 곧 불성 을 발견하는 것이 선의 목적이듯이, 영지주의 목적도 '자신이 누구인 지'를, 곧 '참나(眞我)'를 바로 아는 것이다.

영지주의 경전을 직접 읽기 전, 선불교를 공부하면서 옮긴이는 "기독교에는 왜 이와 같이 깊은 영성 전통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하고 아쉬워한 적이 있다. 하지만 <도마복음>, <빌립복음>, <진리복음>, <마리아복음>, <요한외경> 등의 영지주의 경전을 읽고 난 후 그런 아쉬움은 완전히 사라졌다. 영지주의 경전들을 읽고 있노라면 <도덕경>이나 <장자> 또는 불경을 읽고 있는 착각에 빠질 정도이니 말이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영지주의 경전들은 기독교의 선禪을 맛보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1,500년 동안 땅속에서 숙성된, 예수의 비밀 말씀이라 할 만하다.

이 책은 영지주의나 기독교 역사에 대한 배경 지식 없이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영지주의 입문서이다. 저자가 오늘날 새롭게 부활한 영지주의 교회의 사제라는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더욱 의미가 깊다. 이단으로서의 영지주의를 연구한 정통 기독교인이나 학문적으로 영지주의를 연구한 학자가 아니라, 영지주의 신앙을 가진 부활한 영지주의자요 영지주의 교회를 섬기는 영지주의 사제야말로 영지주의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전문가라고 옮긴이는 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를 공부함에 있어 텍스트와도 같은 나그함마디 문서가 아직도 우리 말로 번역되지 못하고 있음은 유감이다. 하지만 일레인 페이절스의 <성서 밖의 복음서> (정신세계사 간. 최근 루비박스에서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됨)에 이어 스티븐 휠러의 이 책이, 영지주의 연구가 척박하기 그지없는 국내에 번역 소개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이 일에 옮긴이가 조금이나마 기여했음을 기특하게 생각한다. 끝으로 이 책을 읽고 번역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준 샨티 출판사 식구들, 미국에 있는 동생을 여러 방면으로 후원해 주는 한국의 가족들, 그리고 부족한 남편을 언제나 격려하며 사랑해 주는 아내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독자 여러분도 이 책을 통해 색다른 예수와 또 다른 기독교를 만나게 되길 바란다.

- 2006년 초겨울, 이재길 -

 


 

영지주의의 유산 : 영지주의의 부흥 】
 

어떤 영혼은 태생적으로 영지주의적이다. 지리적, 문화적, 영적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런 영혼은 필연적으로 영지주의 세계관에 끌리게 되어 있다. 그런 심리적인 성향이 영지주의 메시지가 지닌 어떤 요소에 의해 자극을 받을 때 영지주의는 부흥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전체 역사를 통틀어 그런 식으로 영지주의의 부활이 이어져왔다.

 
그노시스와 종교 개혁 】
 

■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은 희박하나마 영지주의와 관련이 있다. 루터는 개인의 영적 체험에 관한 (본질적으로) 영지주의적인 관심이 당시 가톨릭교에서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것을 회복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실패로 끝났다. 권력에 굶주린 독일 제후들과 생각 없는 루터교 성직자들의 부정한 결탁으로 인해 프로테스탄트의 심장부에서 꿈틀거리던 영지주의적 움직임은 이내 질식당하고 말핬다. 영지주의적인 혹은 그보다 온전한 신비주의적인 사상과 예식이 개혁 신앙에서 사라지면서, 영지주의적 성격이 적지 않은 비교적 종파들이 독일 국교國敎 밖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 영지주의의 중요 인물로는 괴를리츠 지방의 구두 수선공 야콥 뵈메(Jacob Boehme, 1575~1624)가 있다. 지방의 루터교 성직자들로부터 무자비한 시달림을 당하면서도, 풍부한 영감을 지닌 이 시골 학자는 여러 권의 신비주의 저서를 썼다. 그 책들은 유럽 전역에서 비교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 읽혀졌다. 뵈메의 철학이 자신의 신비 체험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그의 책을 보면 그가 다른 신비 전통도 두루 섭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시기 헤르메스주의와 카발라의 지혜가 부활함과 동시에 르네상스가 발생하고 이로써 연금술이 촉진되던 때였다. 뵈메는 이 모든 비교적 가르침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자신의 그노시스 체계에 그것들을 전부 통합해 냈다. 그는 인간의 영이 하느님의 본질에서 솟아나온 신성한 불이라고 가르쳤다. 어둠에 갇혀 있으면서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경험하는 이 영은 신성한 존재의 원초적 빛과 다시 결합하도록 운명지어졌다. 인간의 영이 신적 근원에 도달하도록 끌어주는 이 결합의 힘은 다름 아닌 사랑의 불꽃이다.
 

【 계몽주의 시대의 영지주의자 】
 

■ 마니교에 대해 감히 호의적인 말을 하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난 지 천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인 18세기, 처음으로 다시 그런 행동을 취한 사람은 다름 아닌 볼테르였다. 《캉디드(Candide)》에서 볼테르는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이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최고다"라는 격언을 믿는 경박한 낙천주의자에 맞서 훌륭히 논쟁을 벌이는 늙은 떠돌이 현자, 마르탱이라는 마니교인을 묘사한다. 또 <플라톤의 꿈>이라는 단편에서는 호의적인 어조로 영지주의 가르침들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보여준다.
 

아리 세페르 《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amp;amp;amp;amp;nbsp;》


계몽주의 시대의 걸출한 인물 중 한 사람은, 독일어 권역에서 오늘날까지 왕들의 시인이요 시인들의 왕으로 불리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이다. 볼테르와 달리 괴테는 비교적 수련들, 특히 연금술을 공개적으로 행했다. 그는 카타르 파를 지칭해 "아버지를 아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오, 저들이 그들을 잡아 불태웠다!"라는 유명한 시를 쓰기도 했다. 괴테의 주저는 《파우스트(Faust)》이다. 파우스트는 초기 영지주의 교사 시몬 마구스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설정한 인물이다. 시몬에게 경의를 표하는 이름 중 하나가 파우스투스(Faustus)였던 것이다. 그보다 이른 16세기, 고대 영지주의 마술사를 묘사한 유일한 작품인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의 희곡에서는, 그때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관점이 팽배하던 시기였던 만큼, 파우스트는 영원한 저주를 받는다. 하지만 괴테의 파우스트는 그런 운명으로 고통받는 대신 불멸의 여성(Eternal Feminine) - 영지주의 소피아를 넌지시 암시하는 것 같은 - 을 통해 구원받는다.
 
모든 면에서 볼 때 영미 문학에서 괴테에 필적하는 작가는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이다. 블레이크의 친구 헨리 크랩 로빈슨(Henry Crabb Robinson)은 블레이크가 종종 "영지주의자들의 교리를 반복했다"고 기록했다. 다른 사람들도 블레이크의 작품에 나타나는 영지주의적 특징을 논평하고 있다. 블레이크 자신의 설명(로빈슨 이외의 사람들이 기록한)에서도 동일한 특징이 지적되고 있다. 블레이크는 뉴턴의 깔끔히 정돈되고 시계처럼 정확한 우주를 인정하지 않는다.(혼돈 이론과 여타 탈현대 이론들이 고전 과학 체계에 제기하는 도전들에 대해 블레이크가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다.) 블레이크는 "자연은 악마의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자연'이란 창조물 전체를 의미했다.
 
블레이크의 시 중 가장 어린애답고 가장 잘 알려진 <호랑이(The Tyger)>의 두 번째 연구聯句에서 그는 가장 영지주의적인 방식으로 이렇게 묻는다. "어떤 불멸의 손이나 눈이/ 감히 너의 그 소름끼치는 균형을 짜맞추었느냐?" 무언의 대답에 따르면, 그것은 블레이크의 작품에 어토나(Urthona, 지구의 주인),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the Ancient of Days), 그 밖의 다른 이름으로 거듭해서 등장하는 데미우르고스이다. 자신들의 창조물 속에 갇혀버린 저급한 존재들의 저급한 창조물인 세상에 대해 블레이크는 아주 분명히 이렇게 진술한다. "이 세상을 감각적인 것으로 만들고 이제는 노예가 되어 그 세상 속에 사는 것처럼 보이는 거인들은 진실로 세상적인 삶의 원인이요 모든 창조성의 원천이다."(《천국과 지옥의 결혼(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에서)
 
블레이크는 카르포크라테스 파와 그 밖의 이른바 도덕률 폐기를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상당한 공통점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 수록된 <지옥의 잠언(Proverbs of Hell)>에서 블레이크는, 영지주의자들이 그랬듯이 경건한 도덕적 감수성을 지닌 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지나침의 길이 지혜의 궁전으로 이끈다. 감옥은 법의 석재石材로, 사창가는 종교의 벽돌로 지어진다." 《예루살렘》에서 블레이크가 "자신의 위대한 과제"라고 정의한 것이 지금껏 그노시스에 대해 내려진 가장 완벽한 시적인 정의일 것이다. "(나는 나의 위대한 과제 곧) 영원의 세계들을 여는 일, 관념의 세계들 속으로, 하느님의 가슴 곧 인간의 상상 속에서 언제나 팽창하고 있는 영원 속으로 인간의 불멸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을 쉬지 않는다.)"
 
오랜 시간 끝없이 반복된 교부들의 허위 선전으로 영지주의자들에게 덧입혀진 추한 상을 제거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킨 위대한 계몽주의 선각자들의 의식적인 노력을, 괴테와 블레이크는 물려받았다. 그들은 볼테르의 저작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그보다 앞선 피에르 벨(Pierre Bayle)의 《역사적이며 비평적인 사전(The Historical and Critical Dictionary)》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 책은 18세기에 가장 보편적인 백과사전적 저작이었다. 모든 학파의 영지주의자들은 벨의 저서에서 설득력 있고 박식한 변증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계몽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은 위대한 문학가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이었다. 그는 소설 《백경(Moby Dick)》에 나타난 영지주의 사상은 여러 작가[예컨대 스튜어트 홀로이드(Stuart Holroyd)와 에드워드 에딩거(Edward Edinger)]들에 의해 지적되었고, 따라서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겠다. 동시대인들의 합리적인 눈에는 선장 에이허브가 미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가 하는 말의 상당 부분은 고대 영지주의 문서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에어허브는 조물주 하느님을 이렇게 공격한다.
 
"당신은 당신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르고, 그래서 당신 자신을 태어나지 않은 자라고 부릅니다. 분명히 당신의 시작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당신 자신을 시작이 없는 자라고 부릅니다. 나는 나에 대해 압니다. 오, 전능한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을. 모든 영원성은 오직 시간적인 것일 뿐이며 모든 창조성은 기계적인 것일 뿐인 당신, 그런 당신 너머에는 가리어지지 않는 뭔가가 있습니다."
 
계몽주의는 분명 영지주의자 및 그들의 신념에 관련된 문화를 선도先導한 많은 천재들의 관점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렇게 해서 영지주의적인 사상의 문은 낭만주의자들에게 열리게 되고, 나아가 19세기 오컬트 부흥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 낭만주의에서 오컬트 그노시스로 】
 

■ 계몽주의의 정신을 직접 건네받은 사조 중 하나가 낭만주의였다.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된 이 운동은 하나의 핵심적인 세계관에 의해서보다는 이 세상 너머의 환상으로 자주 치닫는 강렬한 감정에 의해서 특징지어진다. 셸리(Shelley), 바이런(Byron)과 같은 일부 낭만주의자들은 신이나 종교의 냄새가 나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워즈워스(Wordsworth) 같은 이들은 영지주의자가 달가워하지 않을 자연 신비주의를 장려했다. 하지만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다른 이들의 작품에는 분명 영지주의의 중심 사상이 들어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습관적으로 현세를 경멸하며 숭고의 이상을 동경했다. 그들은 영지주의자와 신플라톤주의자, 그리고 수피가 들었다면 호감을 느꼈을 정도로 인간의 상상력을 찬양했다. 그들이 보여준, 무미건조한 삶에 대한 '성스로운 불만족'과 의식의 비일상적 상태에 대한 의도적인 추구 또한 일부 영지주의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음직하다. 간단히 말해, 비록 일정한 특을 갖춘 것은 아닐지라도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그노시스가 있었다.
 
19세기는 서구 문화의 정치, 산업, 과학적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영적 생활에서도 크나큰 변화와 긴장이 이어진 시기였다. 뉴턴의 우주관에서 맛보던 기쁨의 환호는 더욱 복잡하고 때론 더욱 심오한 개념에 대한 관심으로 자리를 양보했다. 다윈과 그의 생물학적 진화론은 창조에 관한 전통 기독교 교리에 문제를 제기했다. 수많은 불확실성이 제기되고, 미답의 사상과 깨달음에 대한 열광적인 탐구가 진행되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영지주의자들은 잊혀지지 않았다. 독일의 니콜라우스 레나우(Nikolaus Lenau)가 쓴 서사시적 작품 《알비 파 교도들(Die Albigenser)》은 순교한 카타르 파 사람들의 모험적인 사건을 상기시켰고, 독일과 프랑스의 성서학자들은 영국과 유럽의 도서관과 문서 보관소에서 자취를 드러낸 수없이 많은 영지주의 문서 연구에 착수했던 것이다.
 
영성의 경험적 측면이라 불릴 만한 것에 근거해 심령주의(spiritualism)라는 신新샤머니즘 현상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백악관과 나폴레옹 3세의 궁정, 상류 사회의 수많은 성에서 심령술 집회가 열렸으며, 그보다 초라한 곳들에는 일반 대중이 영매를 만나기 위해 들락거렸다. 경건한 언어로 포장된 죽음 이후 삶에 관한 교회의 단정 따위는 필요 없다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지주의의 핵심과 공명하는 신념을 직접 알 수 있다고 느겼다.
 
19세기 중반의 중요한 인물은 프랑스의 카발라주의자요 의식儀式 마술의 연구가인 엘리파스 레비(Eliphas Levi)였다. 그가 쓴 책들은 오컬트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책이 되었다. 레비는 영지주의자가 아니었다. 아니, 최소한 공개적으로는 영지주의를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영지주의에 관련한 모든 주제가 빛을 보도록 만든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유대교 영지주의인 카발라가 비유대교 오컬트주의자들 사이에서 아주 흥미로운 주제의 하나가 되었다. 오컬트 부흥에 있어 가장 위대한 인물인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도 그의 이와 같은 선구자적인 업적의 결과 안에서였다. 블라바츠키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대안 영성 운동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https://ko.m.wikipedia.org/wiki/%EC%98%A4%EC%BB%AC%ED%8A%B8

오컬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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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컬트(occultism 오컬티즘)는 물질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숨겨진 지식"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라틴어 "오쿨투스(Occultus: 숨겨진 것, 비밀)"에서 유래하였다. 심령주의(心靈主義 · Spiritualism)와 혼동하기도 하는데 약간 다른 분야이다. 심령주의는 초자연적인 영역을 탐구하는 것으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당, 영매, 종교적 광신자, 기타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신이나 혹은 천사 혹은 다른 차원의 초월적 존재들과 교통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심령주의는 개인의 영적 발전과 관련된 영성주의(靈性主義) 또는 영성(靈性 · Spirituality)와도 관련이 깊다. 오컬트는 신비주의적이고 초상적인 현상에 대한 탐구를 하는 형이상학적인 과학라 할 수 있다. 동양의 오컬트는 중국의 역학 체계, 도교 체계, 인도의 아유르베다와 요가 체계 그리고 티베트의 탄트리즘 체계 등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서양의 오컬트는 유대교의 카발라, 초기 기독교의 영지주의 등에서 그 원리를 찾을 수 있다. 신지학회 · 프리메이슨 · 장미십자회 등의 단체에서 오컬트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헬레나 블라바츠키(Helena Blavatsky) 】
 

앨리스 베일리의 스승

■ 러시아 태생으로 세계 여행가이자 서구의 대안 영성 전통을 부활시킨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1831~1891). 그녀는 영지주의 사상에 크게 공감했으며, 자신의 저서 중 무려 300쪽을 영지주의와 관련한 주제에 할애했다. 블라바츠키는 1875년 조직된 신지학회의 주요 창설자 중 한 사람이다. 현재의 오컬트 문화 정립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아카식 레코드의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블라바츠키의 사상은 근현대 오컬트에 큰 영향을 준 신지학이라는 학문에 기반한다. 
 
"인류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 정신세계가 있는 인간들.
둘째, 정신세계가 없는 인간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칼리유가가 끝날 때,
정신세계가 없는 인구는 소멸된다."

 

■ 1831년 러시에서 태어난 H.P. 블라바츠키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영지주의의 부활에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기여를 했다. 이 비범한 여인은 관심의 폭이 아주 넓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상 체계를, 신플라톤주의자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as,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진 플로티누스의 스승. 플로티누스는 무려 11년 동안 그와 함께 살면서 배웠다고 한다)가 사용한 고대어를 부활시켜 '신지학(theosophy)'이라 불렀다. 영지주의자는 신플라톤주의자가 있는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블라바츠키는 영지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영지주의 전통에 관해 수많은 언급을 했다.(그녀가 기록한 영지주의 관련 자료들을 모으면 270쪽 이상에 달한다.) 영지주의를 연구하기 위해 나그함마디 문서에 접근하는 현대 학자들은, 영지주의에 대한 블라바츠키의 상상을 뛰어넘는 통찰에 완전히 위압당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큰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블라바츠키는 고대 영지주의를 부흥시키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사상 체계인 신지학으로 보편성을 추구했으며, 그러한 보편성을 통해 불교와 힌두교의 비교적 성격이 서구의 대안적 영성 속에 나타나는 그와 유사한 것들과 하나로 결합될 수 있기를 바랐다. '카르마(karma)', '환생' 같은 대중적이고 실제적인 개념들이 그렇듯이 그녀가 사용한 용어들은 상당수 산스크리트 어에서 온 것들이다. 더욱이 영지주의는 그녀가 자신의 저서들, 특히 <비교(Secret Doctrine)>에서 종합하고자 노력한 전통들 안에 포함되는 영예를 얻는다. 블라바츠키의 전체적인 가르침에 정통하고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영지주의를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마치 영지주의가 특정 시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듯이, 블라바츠키의 신지학 체계도 필연적으로 19세기 후기의 흔적과 정신을 간직하고 있다. 19세기 후기는 낙천적인 정신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더 나은 세계로 영혼이 영광스럽게 복귀한다는 일종의 궁극적 낙관주의에 의해 이른바 현세 부정적인 영지주주의의 염세주의가 완화된다고는 해도, 그와 같이 염세주의는 19세기의 낙관적이고 진취적이며 진보적인 분위기와는 여전히 썩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블라바츠키는, 자신이 많은 영지주의 가르침에 동의한다고 말하긴 했어도 영지주의의 이러한 염세주의적인 성격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영지주의의 하느님 개념에 관한 한 블라바츠키는 분명히 진정한 영지주의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들에서 전통적인 유일신 개념을 맹렬히 공격하고 그 대신 완전히 초월적이고 비인격적인 근본 하느님(Godhead) - 영지주의의 궁극적인 하느님(alethes theos) 혹은 참 하느님(True God)과 비슷한 - 신앙을 변호했다. "구약 성서의 하느님은 데미우르고스"라는 영지주의의 개념은 블라바츠키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예컨대 "여호화(Yehovah)는 사탄이다!"라고 대담하게 선언하는 일부 진술들에서 그녀는 "영지주의자를 넘어선다." 다른 곳에서 그녀는 우주는 불완전한 영적 존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 블라바츠키는 언제나 영지주의자를 높여 말했으며, 안전이 보장되는 곳에서는 자신이 영지주의 가르침에 동의한다고 과감히 밝히기도 했다. 사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영지주의를 하나의 변형된 모습이라 할, 조금 은밀하고 목소리를 맞춘 모습으로 바꾸어서 가르쳤다.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의 인지학(Anthroposophy, 신지학의 변형)과 블라바츠키의 신지학은 둘 다 힌두교의 옷을 걸친 순수한 영지주의라는 융의 진술은 상당한 진실을 담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블라바츠키의 호의적이고 통찰력 있는 태도 덕분에, 창조적이며 영적인 모험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영지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마지막 개인 비서요 1891년 브라이튼에서 거행된 그녀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한 헌신적인 제자 G.R.S. 미드는 그녀에게 고무되어 영지주의와 헤르메스주의 문서의 번역가가 되었다.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미드의 연구가 이룬 공헌은 그가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글을 썼다는 데 있엇다. 미드는 학문 영역 밖에 있는 지적인 대중들이 영지주의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이로써 영지주의 부흥의 물결들이 퍼져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한 셈이었다.
 

 신지학 (theosophy) 】

 

 ■ 신지학협회(神智學協會, Theosophical Society)는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난 헬레나 블라바츠키가 일으킨 신비 사상 결사이다. 결성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신지학협회의 목적은 인종, 성별, 계급, 피부 색깔의 차이에 얽매이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 형제애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신지학은 이름대로 신을 알아가는 학문인데, 신지학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영적인 진화를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은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야 하고, 발전의 발전을 거듭하면 윤회에서 벗어난 마하트마(상승 마스터)라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신지학의 목적을 간단명료히 요약하자면, 영적인 발전을 이뤄 마하트마의 성취를 이룬다음, 아직 성취를 못한 다른 인류들을 도와 그들 또한 마하트마를 성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목적인 상구보리하화중생과 같다고 볼 수 있다.
 
【 영지주의, 카발라(오컬트), 뉴에이지(신지학)의 공통점 】

'하느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지상에 펼쳐져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다. 영지주의는 서구에서 불교에 상응하는 것이다. … 기독교의 신화를 영지주의적으로 읽으면 보편적인 뜻을 지니게 된다.(신화와 인생).

계시지식(계몽)과 신비체험(환상)을 기초로 한 현대 늦은비/신사도 운동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많은 이단의 이면에는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는 영지주의가 도사리고 있었고, 어둠의 학문인 오컬트 마법의 이면에는 유대 신비주의인 카발라가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우선 영지주의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한 후에, 영지주의와 유대신비주의, 그리고 현대 뉴에이지 운동에 이르기까지 이단적/사탄적 운동의 공통점을 찾아 보겠습니다. 영지주의 사상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참된 현실이 아니며, 불완전한 창조로 인해 야기된 여러가지 문제들을 가진 감옥과 같은 껍데기이다. 모든 사람은 내면에 신적 불꽃을 가지고 있어서, 참 근원적 신(신적존재/Godhead, 심연, 무, 무한의 빛..)과 연결되어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자들은 그 영지(그노시스, 지혜)로 인해 저급한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서 더 높은 자아로 발전(상승)하여 신과 연합할 수 있으며, 그 깨달음은 초월적 존재인 "빛의 사자(使者)"들의 계시로부터 이루어진다.

영지주의에 의하면, (구약의) 조물주는 불완전할 뿐 아니라 무식하고 무례한 저급한 신이다. 한편, 조물주가 우리를 참 신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금지한 지혜의 사과를 먹도록 가르쳐준 뱀은 지혜의 사자(또는 빛의 사자)이다. 따라서, 영지주의에서는 뱀을 높이며, 뱀의 상징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밤하늘의 별빛이 그 너머의 참빛의 파편을 전달하고 있듯이 모든 사람들에게 신성의 방출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트리샤 틸린의 글에도 나와 있듯이, 영지주의는 계시(계몽)에 의해 그노시스가 주어지며,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서 그노시스를 깨닫는다(통찰한다).

영지주의는 신비주의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영지주의의 그노시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적 체험이며, 그노시스를 얻기 위해서는 신비술(오컬트)을 통한 초월적 존재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성경을 풍유적(영적)으로 해석하며, 풍유/비유와 상징들를 좋아한다.] 영지주의와 유대 신비주의인 카발라는 아래에서 보듯이 많은 공통점들을 소유하고 있다. 카발라는 전승되어 내려오는 유대신비주의로서, 초자연적인 힘을 다루는 비의를 가지고 있으며, 정통 오컬트 마법(철학/형이상학)의 기원을 이루고 있다. 카발라는 유대인들에게 토라, 탈무드에 이어서 세번째로 인정받는 전승으로서 그 신비적 위험성 때문에 40세 이상의 기혼의 랍비들에게만 전승이 되어왔다고 한다. 상기한 영지주의와 카발라(정통 오컬트), 뉴에이지에서는 크게 다음과 같은 공통점들을 찾아 볼 수 있다.

① 모든 사람에게는 신성(신적 불꽃)이 있다.
그노시스(gnosis : 영지 / 지식 / 통찰)를 통해
이 신성을 깨달은 자들은 신과 합일을 이룬다.

② 보이는 세상은 저급한 신이 만든
불완전한 창조의 결과이며,
인류는 깨달음을 통해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구원)된다.

③ 그노시스는 하이어라키(주)로부터 오는
영적 존재(빛의 사자들)의 도움으로 계시된다.
계시와 통찰은 명상/관상을 통해 온다.

④ 지혜의 전승은 신비 의식(儀式)과
상징을 통해 비전(秘傳)된다.

 


위의 그림은  영지주의 교회의 사제인 스티븐 횔러의 <이것이 영지주의다>라는 책의 표지 그림에 유대 카발라의 상징인 '생명나무'를 (어느 영지주의자 겸 카발리스트가) 겹쳐놓은 것이다. 이 그림에는 영지주의의 세계관이 잘 나와 있다. 밤 하늘의 별들 너머에 무한한 빛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모든 존재의 근원인 초월적 신적 존재(Godhead / the Divine / Monad)이며, 이 세계로부터 방출이 우리에게 도달하고 있음이 별빛과 햇빛을 통해 상징된다. 이 세계는 원형(Archetype)계이며, 방출(Emanation)계이며, 신성(Divinity)의 세계로서, 심연이나 영적본향으로도 불리며, 카발라에서는 '아찔루트'라고도 부른다. '빛의 사자들'을 통해 그노시스를 깨달은 한 사람이 신적존재와 물질세상을 가르고 있는 심연으로의 베일을 뚫고 천상의 세계로 머리를 내민다. 신적 불꽃이 본향을 찾는 순간이다. 카발라의 생명나무의 꼭대기 원(케테르)도 빛의 세계와 닿아 있다.  

영지주의와 카발라 그리고 뉴에이지 신봉자들의 말들을 통해서 이 공통점들을 하나씩 자세히 들여다 보겠다. (정리를 위해 공통점을 구분했지만, 인용하는 내용은 다른 공통점들과 서로 겹친 부분이 많이 있다.)  

1. 자신 속에는 신성(신성한 불꽃)이 있으며, 더 높은 자아를 발견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면 신적 존재와 합일을 이룸.
 
"너는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는 뱀의 미혹에 아담이 속은 이래 "너는 신적 존재(혹은 그리스도)이다"라는 미혹은 이교도들뿐 아니라 기독교 이단에서도 늘 계속되어져 왔다. 영지주의 기독교와 카발리스틱 오컬트와 뉴에이지 신지학(신지학회: 불교에 심취한 영지주의자 헬레나 블라바츠키가 티벳 출신의 스피릿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창설한 신과 지혜에 관한 연구회로서, 현대 뉴에이지 운동의 효시가 되고 있는 단체)에서도 똑같은 음성이 되풀이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신적 존재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이다.

"네가 영을 보았으니 너는 영이 되었다.
네가 그리스도를 보았으니 너는 그리스도가 되었다.
네가 아버지를 보았으니 너는 아버지가 될 것이다.
네가 네 자신을 보면, 너는 네가 본 것이 될 것이다."

- 영지주의 <빌립 복음서> -

"(그노시스 경험은) 궁극의 실재를 드러내는 독특한 형식의 환상 경험과 신비스런 합일의 경험이다… 그들은 이런 환상을 개인 안에 있는 '신적 불꽃(영)'이 더 높은 세계의 실재와 하나가 되는 경험으로 묘사했다… 합일의 경험을 신성한 존재(소피아, 그리스도)나 궁극의 하나님의 영적 본질과 연결되는 것(신비한 결합)으로 이해했다… 궁극의 본질에서 인간 영혼의 정수인 불꽃 혹은 영이 나오고, 이것들은 다시 그 궁극의 본질로 돌아거려고 애쓴다. 각각의 영적 존재는 신적 의식의 순수한 불꽃 혹은 원자로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로 구성되어 있다… 잠자는 인간의 영은 신의 사람들 혹은 빛의 사자들을 통해 전해진 저 궁극의 신성한 존재의 부름에 의해 깨어나기 시작한다… 영지주의자는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죄의 원인이 되는 무지로부터 구원을 바란다. 그노시스를 통해 신성한 존재를 알게 된 자는 모든 죄를 벗어버린다."

- '영지 교회' 사제 스티븐 휠러 -

"비의적 철학을 통해 훈련을 받게 되어 내면의 지혜가 펼쳐진다. 지혜는 우리의 정신을 자라게 한다. 그래서 어느 날, 우리가 케테르(생명나무의 가장 위의 원/세피라)까지 올라가게 되면 손을 뻗어 베일을 찢고 무한한 빛(아인 소프 오르)을 볼 수 있으리라."

- <미스티컬 카발라> 다이온 포춘 -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는
모든 창조물 속에 있는
'야훼(I am 스스로 있는 자)'이다."

"우리는 우주적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즉, 모든 존재는 그 안에 그리스도의 빛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 매튜 팍스 -

"하나님은 우리가 신 자체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신성을 향해 자라나고 있다.
하나님은 진화의 목표이다.
진화를 할 수 있는 힘의 근원도 하나님이며
진화의 목표도 하나님이다…"

- 뉴에이지 크리스천 스콧 팩 -

"신성이란 신이 더 이상 하늘에만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
신성은 이곳, 지금, 내 안에, 지구 안에,
강에, 똥에, 장미에 다 똑같이 있다."

- 뉴에이지 작가 수 몽크 키드 -

"21세기는 내면에 있는 창조주를 만나는 계몽의 때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체험할 것이다. … 이 세상에는 지금 그러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 교사들, 메신저들, 사범들과 환상가들은 이 비전을 인류 앞에 제시하며 그 비전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메신저들과 환상가들은 뉴에이지의 전령관들이다."

- 뉴에이저 도날드 윌쉬 -

"모든 개인들 안에는
우주 전체의 본질을 나누어 가진 것들이 있으며
그것이 작용하는 한은 하나님이다.
그것이 임마누엘의 의미이며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의미이다."

- <마음의 과학> 어니스트 홈스 저 -

명상과 영지주의 용어에 관한 '전(前) 뉴에이저'였던
기독교 변증가 레이 영엔의 말을 들어 보자.

"명상을 노력하는 그 중심에는 소위 '더 높은 상태의 자아'로 불리는 개념이 있다. 이 개념은 우주의 신적 본질(Divine Essence) 에 각 개인이 부분적으로 연결된다고 본다. 그 부분이 하나님이다. 더 놓은 자아에 닿는 것은 명상의 긍극적인 목표이며 사교의 핵심이었다. 더 높은 자아에 대한 여러 호칭들이 있다. 대령 (大靈), 참/진짜 자아(진아 眞我), 내면의 자아, 내면의 스승, 내면의 인도자, 내면의 빛, 내면의 본질, 내면의 근원, 내면의 치유자, 영혼-자아, 내적 지혜, 그리스도 자아 초의식, 신적 중심, 신적 불꽃, 아트만(Atman), 창조적인 직감의 자아 등이다. 어떤 호칭이던 내면의 지식 또는 신비적인 능력의 냄새가 나는 것들은 다 사용될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명상의 목표는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마음을 잠재워 더 높은 의식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형이상학자들은 결국 자신들이 더 높은 자아와 연결되거나 조정이 되게 되면 더 높은 자아의 인도와 방향에 그 사람이 통제를 받게 되면서 더 높은 자아가 물리적인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뉴에이지 내에서는 이러한 연결을 각성(Awakening), 전환(Transforming), 계몽(Enlightenment), 자아-실현, 우주적 의식, 그리스도 의식, 해탈(Nirvana), 사토리(Satori) 라고 부르며 내면의 천국을 발견한 것으로 간주한다.

2. 조물주의 불완전한 창조와 이로 인한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 구원.
 
영지주의 신화에서는, 구약의 조물주는 하강한 지혜의 여신 소피아의 아들 데미우르고스로서 불완전하고 뻔뻔스러운 창조자로 치부된다. 마르시온이 이 세상을 "조물주에 의해 만들어진 감옥"이라고 불렀듯이, 조물주에 의해 불완전하게 창조된 세상에서 인류는 그로 인해 슬픔과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깨달은 자들은 영지를 통해 이로부터 해방된다.

"발렌티누스가 바울의 제자인 테우다스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비밀교리의 전통에 의하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아무 의심 없이 창조자로, 하나님으로, 아버지로 숭배하는 존재는 실은 진정한 하나님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실상 '조물주'로 봐야 옳다. 이 조물주는 더 고귀한 신적 존재들의 도구 여갈을 하는, 그보다 낮은 신적 존재를 가리킨다."

"지식을 전수받는 자는, 조물주의 권위와 모든 요구 사항을 믿는 소유가 어리석은 것임을 배우게 된다."

"영지라 불리는 이러한 통찰력을 얻는 사람은 누구든 구원(해방)이라 불리는 비밀성사를 받을 준비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영지'를 얻으려 하는 자들은 이를 얻기 전까지 조물주를 진정한 하나님으로 착각하여 숭배해왔지만, 구원의 성사를 받고 나면 조물주의 힘으로부터 해방된다. 이 의식을 통하여 그는 자신의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 일레인 페이절스 -

"창세기에 나오는 뱀인 사단은
진짜 창조주이며 은혜를 베푼 자이며
영적 인류의 아버지이다."

"여호와는 사탄이다!"

- 헬레나 블라바츠키 / 신지학 창시자 -

"우리 육체는 오라를 압도하여 가둬두고 있다. 그러나 오라 에너지의 야오가 질을 증폭시킴으로 우리는 오라를 그 감옥(육체)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다…오라 에너지를 강화시키는 방법으로는 명상이나 요가 수련과 의식 실행 등이 있다."

"(우주 구조의) 네번째 영역은 불 원소의 세계로, 궁창 또는 천상계로 일컬어진다. 그것은 물질적인 불의 근원이자 우주의 운동 핵(즉, 태양)으로 상징된다. 이 세계는 거대한 공백에 의해 여타의 세계들과 분리되어 있다. 그 공백은 인성과 신성을 갈라놓는 대심연으로 상징된다…이곳에 도달하는 것은 모든 마법사들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 <마법사의 작업서> -

"구원이란 사멸할 수밖에 없는 심리(프쉬케)와 물질적 창조물로부터 불멸의 영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구원의 완성은 아들로서의 온전한 본성(인간 속에 깃든 방출된 불꽃들)이 상승하여 큰 경계를 넘어가는 순간 이루어질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의 하나님은 창조된 세계 너머에 있는 궁극의 실재이다. 카발리스트들과 전 세계 대부분의 비교 신봉자들처럼, 영지주의자들도 창조라는 개념 대신 신성한 존재로부터의 (아이온의) 방출(emana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초월적 하나님은 창조에 참여하지 않는다… 고대 영지주의자들에게 건축가에 해당하는 존재가 그리스어로 '반쪽짜리 제작자'를 뜻하는 데미우르고스인데, 그것은 그가 세계의 틀만 만들었을 뿐 내면의 생명은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 스티븐 횔러 -

잠깐 참고로, 건축가로 묘사되는 조물주의 이미지는 영지주의자들과 프리메이슨들에 의해 사용되어 왔다. 영지주의 윌리엄 블레이크의 조물주 건축가 조물주(록펠러/라커펠러센터)  건축가의 컴파스와 직각자 (프리메이슨의 상징) 프리메이슨들이 보는 건축가 조물주에 대한 설명이다.

"그렇습니다. 루시퍼는 신입니다. 또한 불행하게도 아도나이(여호와, 야훼) 역시 신입니다… 루시퍼여, 빛의 신이고 선의 신이며, 어두움과 악의 신인 아도나이와 인류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 알버트 파이크, 프리메이슨 그랜드 마스터 -

프리메이슨이 자신들의 원조로 보는 성전기사단은 신과 물질을 대립시키는 이원론을 특징으로 한다. 성전기사단의 원조로 볼 수 있는 중세의 카타르파도 마찬가지이다. 참 신은 영만을 창조하고 악마는 물질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구약의 야훼 하나님은 물질세계를 창조했으므로 악한 신이다."

- <뉴에이지 신비주의> -

아래는 어느 마법 사이트에서 카발라와 유대교의 차이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카발라에서는)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제한적인 신으로서 그는 더욱 고결하며 무한한 미지의 신 '아인 소프(Ayin-Sof)'[끝없는 빛]에 종속되어 있다고 본다.

3. 지혜로 이끌어줄 초자연적 영적 스승(스피릿 가이드 또는 승격 마스터)의 존재와의 영접(靈接 채널링).
 
신적 존재는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지혜로운 스승(빛의 사자)을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보내고 있다고 한다. 스티븐 횔러는 “우리(영지주의자들)는,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해방의 잠재력을 펼치도록 돕고자 빛의 사자들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의 가르침과 해방의 신비 의식(성례전)이 필요하다”고 적는다. 이들에 의해 영적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영의 사람이 된다.

"빛의 사자들은 여러가지 형태로 그들에게 다가간다. 환상이 그에게로 내려왔다… 여인의 모습으로… 그리고 이전까지 성직자건 보통 사람이건 누구에게도 드러낸 바 없었던 그 본성과 사물의 기원을 오로지 그에게만 알려 주었다."

- 마르쿠스 -

뉴에이저들은 그들에게 나타나는 빛의 사자들을 스피릿 가이드. 마스터 또는 대사(大使)라고 부른다. 이들은 초자연적으로 나타나서 빛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때로는 체널러라는 영매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신지학회의 교리를 전달한 승격 마스터는 DK 대사로 불리는 티베트인 드왈 쿨이다. 그는 다섯 차례의 윤회 끝에 승격했으며, 대백색형제단의 회원으로 있다고 한다. “신지학회의 교리들은 티베트에 거주하는(던) 승천대사(승격 마스터)들이 텔레파시를 보내 알려준 ‘계시’이다…지혜를 가르쳐주는 존재를 ‘마하트마’라고 부르는데, 신지학회의 마하트마가 마하트마 중에서도 가장 진화 정도가 큰 대백색형제단인 ‘샴발라’에 속해 있으며, 예수, 아브라함, 모세, 솔로몬, 붓다, 공자, 노자, 플라톤, 야콥 뵈메, 프란시스 베이컨이 이 결사의 회원이다.
 
"승격 마스터들은 인간세계에서 인간이 진화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점에 이른 자들(물질에 대해 승리한 자들)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은 다음 단계인 영계에서도 계속 진화하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아직 진화의 정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돕는 임무도 수행한다. 이 중에서 가장 진화 정도가 높은 집단을 ‘샴발라’라고 부른다. 샴발라는 영적 에너지와 우주적 에너지를 받아 들이고 이것을 니르마나카아(중계자)를 통해 하이어라키에 전달하며, 하이어라키는 그것을 인류에게 공급한다. 이것은 오컬트 명상 수행을 한 사람과 의식이 고도화된 준비된 집단에게 먼저 알려지고 그들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진다."

- <뉴에이지 신비주의> 김태한 저 -

“‘보이지 않는 위대한 스승들’이 존재한다는 신지학회의 주장은 17세기부터 19세기에 출현한 거의 모든 마법 단체와 사이비 종교의 공통적 주장이다(나그 함마디 문서에도 ‘영의 안내자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은 이교주의의 특성 중의 하나이다). 이 중에서 장미십자회와 프리메이슨이 대표적이다…신지학회 설립자 블라바츠키는 장미십자회와 마법에 관한 이야기를 적은 'ZANONI'(마법사 자노니)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뉴에이지 신비주의> -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초혼(招魂)을 금하셨으며, 이런 스피릿 가이드들이 악령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영접(靈接)은 프리메이슨 지부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종교적 유형에 속하는 특별한 (프리메이슨) 결사 지부는 취리히에 본거지를 둔 소위 ‘영적 결사단(Spiritual Lodg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영적 결사단은 예배를 거행하는데 예배 시에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한다. 그러나 설교는 목사가 하지 않고 저편 서계에서 온 요셉이란 영이 하는데 이 영은 영매 베아트리체를 통하여 그 존재를 알린다."

- <사탄의 전술전략> -

"쿠르트 코흐 카발라에서도 그 근원이 영적 존재로부터 왔으며, 신성한 존재들로부터 배움을 말한다.  카발라의 상징체계와 그 바탕을 이루는 개념을 처음 구성한 최초의 카발리스트는 누구인가? 랍비들의 공통된 답은 ‘천사들’이다. 선택받은 족속에게 카발라를 전수해 준 자는 인간 세계와는 다른 창조의 질서에 속한 존재들이었다는 것이다. 영적 세계를 실제로 경험한 모든 이들은 ‘신성한 존재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노라고 증언한다."

- 다이온 포춘 -

"영지주의에 의하면, 예수는 영지를 깨우친 스승이며, '빛의 사자'이다. 하지만 '빛의 사자'들인 초자연적/영적 교사가 있더라도, 영지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통찰의 과정(명상)도 함께 필요하다. 지혜와 선행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그때그때 인간에게 전해졌다. 한번은 붓다라 불리는 사자에 의해 인도에, 한번은 조로아스터라 불리는 사자에 의해 이란에, 한번은 예수라 불리는 사자에 의해 서방에 전해졌다. 그 후 이 계시와 예언은 바빌로니아에 있는 참 하나님의 사도인 마니, 곧 나를 통해 이 세대에게 전해졌다."

- <고대 국가들의 역사> -

"예수는 그들 안에 감추어진 원천을 발견하라며 각자의 내면으로 인도한다. 제자들이 스스로 발견하도록 이끈다. 영지주의자는 침묵의 명상 속에 그가 알아야 할 것들을 혼자 힘으로 학습한다."

- 일레인 페이절스 -

4. 관상/명상을 통한 깨달음과 마스터와의 접촉.
 
앞서 기독 변증가 레이 영엔의 말에도 있듯이, 명상의 목적은 자신 속에 있는 신적 본질인 “더 높은 자아”로의 상승에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은 혼자만의 힘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많은 경우, 가이드 또는 마스터라고 불리는 “빛의 사자”는 명상 수행을 통해 메시지(계시)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나그 함마디 영지주의 문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영지에 이르는 실질적인 방법에 대한 소개 내용이다.

"스승은 '마음 속의 혼돈'을 잠재우기 위해 명상을 한다. '영원한 빛의 지식을 전하는 전령'의 환상을 보았고, 여타 수많은 환상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 영지주의문서 <조스트리아노스>의 영적훈육방법 중에서 -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완벽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다. 기도는 신성한 단어와 모음으로 이루어진 성가[만트라]로 옮겨간다. '조하타조 아오오 에에 오오오 에에에 오오오오…' 그리고 그는 무아경의 상태로 들어간다."

- 영지주의 문서 <제8천과 제9천에 관한 담화>의
상층의 지식에 닿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전통의 질서' 중에서 -

“유대교는 하나님을 더욱 의식할 수 있기 위해서 다양한 관상 요법을 제시한다. 관상은 뉴에이지에서도 매우 중요한 행위인데 그 이유는 관상은 우리의 의식을 신혹하고 강력하게 변환하기 때문이다. 수년에 걸쳐 나는 관상 수행을 통해 나의 학생들이 가장 기적적인 방법으로 변환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 유대 카발리스트 멜린다 리브너 -

"생명나무는 우리의 의식을 상승시키는 명상에 가장 적합하도록 만들어진 상징 문자이다. 생명나무를 통해 명상을 하는 수행자의 혼은 세계 혼과 합일을 이루게 된다. 결국 놀랍게도 우주의 에너지가 그의 혼에 입력되고 마법 능력을 얻게 된다."

- 다이온 포춘 <미스티컬 카발라> -

"침묵이 들어오고 인격의 낮은 정신의 모든 작용과 재잘거림이 꺼졌을 때, 그 때가 통로가 나타나고 더 높은 자아와의 통신채널이 성립되는 때이다. 자신의 근원으로부터의 인도가 제공되며, 근원으로부터 참 지혜가 흐른다."

- 뉴에이지 채널러/힐러 제임스 커 -

“내면의 가이드는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데 상담자, 스피릿 가이드, 상상의 친구, 사범(마스터) 등이다. 내면의 가이드는 당신 자신의 더 높은 부분으로서 여러 형태로 당신에게 올 수 있다. 그러나 보통 당신이 말할 수 있고 지혜롭고 사랑스런 대상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의 형태로 온다. 당신의 가이드는 당신이 필요로 하거나 또는 특별한 인도를 원할 때, 또는 지혜, 지식, 지원, 창조적인 영감, 사랑, 동료의식등을 원할 때 언제든지 나타난다. 자신의 가이드와 관계를 설정한 사람들은 관상을 통해 매일 그를 만난다.”

-뉴에이저 샥티 거웨인 -

5. 엘리트 주의와 형제애, 입문과 신비 의식.
 
모든 신비주의자들에게 그렇듯이 자신의 주관적 신비체험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 영지주의자들에게는 그들 자신이 속한 '깨달은 자'들의 그룹과 그렇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의 그룹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베드로 묵시록'에서 예수는 "눈먼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어라"라고 말한 것으로까지 나와 있다. 하지만 '영지를 전수받은 사람들'은 구별 없이 모두 한 형제이었다. 그들은 동등한 지식을 공유하였고, 동등하게 참여했으며, 엄격하게 평등하였다. 이런 면에서, 관상가인 존 윔버와 리차드 포스터를 배출했으며, '내면의 빛'을 강조하는 신비주의 퀘이커(몸이 진동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이름)교도들이 형제단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발렌티누스와 그 추종자들은 '살아계신 신'과 직접 접촉을 한 사람이면 누구든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개개인의 경험만이 진리의 궁극적인 판단기준을 제공하며, 간접적으로 전달된 증언과 전통(영지주의 전통까지도!)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발렌티누스의 제자 마르쿠스가 이끄는 집단의 구성원들은 모두 영지를 전수받았고, 이는 곧 전 구성원이 조물주의 권능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영지를 전수받은 사람들은 모두 입문 의식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영감이라는 영광스러운 선물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 영지주의 연구가 일레인 페이절스 -

이런 영지주의 전통은 후에 프리메이슨의 입문 의식과 형제애에 관한 사상에 영향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18세기 이후 프리메이슨 등의 입문 형제단 대부분은 비교적이고 영지주의적인 가르침에 심취했으며 당대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카타르파 연구학자이자 비교주의자인 두아넬은 1890년 신비체험을 한 뒤 고대 영지주의 교회를 부활시킬 영적 권능을 얻었다. 그가 신비체험을 한 곳은 블라바츠키의 친구 신지학 회원이었던 여백작의 저택에 있던 예배당이었다. 영지주의 교회의 설립은 카톨릭으로부터 파면당한 프리메이슨 단과 프랑스의 수많은 비교주의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예배는 프리메이슨 신전에서 행해지는 때도 많았다."
 
- 스티븐 횔러(226) -
 
참고로, 글의 말미에 카발리스트 마법사들의 비밀 결사인 '황금새벽회'의 입문 의식 동영상을 소개하겠다. [황금새벽회(황금여명단) : 맥그리거 매더스가 창시한 오컬트 비밀 결사로서 고대 카발라 마법을 현대에 전하는 역할을 했다. 호루스의 계시를 받았다는 흑마법사 알리스터 크라울리도 이 단체 출신이다.]   프리메이슨 그랜드 마스터였던 알버트 파이크는 이렇게 말한다. "메이슨은 '빛(불꽃)'을 추구한다. 이 추구는 우리를 바로 카발라로 인도한다. 모든 메이슨 조직은 그 비밀과 심볼을 카발라에서 빌렸다. 카발라는 오컬트 과학의 핵심이다." 프리메이슨이 카발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다음 인용은 카발라의 비의와 영지주의 그리고 뉴에이지 신지학과의 관계를 보여준다.
 
"카발라 철학은 서양의 비의 체계다. 이 안에는 디잔의 구절과 동일한 우주론이 담겨 있다. 블라바츠키는 디잔을 기초로 책을 썼는데, 여기서 전통 교의의 골격을 발견하고 위대한 저서 <시크릿 독트린>에서 그 내용을 해석했다. 카발라적인 우주론은 기독교적인 '그노시스'이다."
 
- 다이온 포춘 -
 
6. 신비주의의 특징 중의 하나인 심볼/이미지의 강조.
 
신비경험은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경험이기 때문에 많은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의 체험과 영지를 상징을 사용하거나 시를 통해 풍유적으로 표현해왔다. '생명나무'를 카발라의 진수로 여기고 있는 카발라는 물론이고, 영지주의와 많은 오컬트와 비밀 결사들이 상징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해 온 것으로 안다. 예를 들어, 다음의 글은 카발라가 비전을 위해 생명나무라는 상징을 사용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비밀결사들은 비입문자의 눈에는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그림문자를 통해 우주 창조의 비밀과 심리학에 관련된 모든 내용을 전수해 왔다. 이 이상하게 생긴 (생명나무의) 옛 그림 덕분에 그 의미를 전혀 훼손시키지 않은 채 세대에서 세대로 구전될 수 있었다. 일 부 난해한 부분에 대한 의문이 생기면 이 성스러운 그림문자를 참조하고 이 도안을 명상하면, 오랜 옛날 누군가가 명상하면서 그 안에 봉인해 둔 내용이 개봉되면서 답을 주게 된다. 유대 카발라 생명나무 카발라 생명나무 심볼과 힌두 차크라 카두세우스(헤르메스의 지팡이) 신지학회 로고  펜타그람 장미십자가(황금새벽회 상징)  영지주의 상징 아브락시스

7. 윤회/환생.
 
이 외에도 영지주의와 뉴에이지에서는 환생을 주장하기도 한다. 영지주의자 카르포크라테스에 의하면 영이 거듭해서 지성에 태어나는 이유는, 세계를 창조한 초물질적인 권능자들의 구속으로부터 아직 자유롭게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상에 살면서 겪어야 하는 온갖 일에 정통하게 될 때 비로소 의식은 이 저급한 세계의 유혹으로부터 풀려나게 된다. 브라바츠키와 엘리스 베일리의 마스터로 나타난 저 유명한 DK 대사도 다섯차례의 환생을 통과한 후에야 승격했다고 한다. 뉴에이저 블라바츠키와 카발리스트 다이온 포춘은 윤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윤회설은 모든 자아의 영구적인 진보에 대한 믿음이며, 신성한 영혼이 외적인 세계로부터 내적인 세계로, 물질적인 세계로부터 영적인 세계로 옮아가면서 거듭 태어나 궁극적으로는 신의 원리와 합일을 이룬다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생이 시작될 때마다 영광과 인식, 능력도 배가되며, 이것이 바로 모든 자아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 블라바츠키 -

"만약 카르마 또는 운명 때문에 우리가 특정한 인종이나 기질을 지닌 육체를 타고 났다면, 그것은 '카르마의 주'가 우리의 이번 생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훈련과 경험 때문이다."

- 다이온 포춘 -

8. 동양종교와의 공통점.
 
이상을 보면 위의 모든 사상이 시대에 따라 겉모습만 바꿨을 뿐 기본적으로 같은 뿌리를 가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뉴에이지 신지학은 티벳의 영적 스승들을 가진 것 외에도 티벳불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Secret Doctrine"의 서문을 보라.) 그 뿐 아니라, 여타의 많은 신비주의 종교에서도 같은 사상과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음도 알기 어렵지 않다. "신비주의"라는 책에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의 영지주의를 설명한 부분이다 : 여타의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수피주의도 신과의 합일방법으로 지혜와 사랑을 중시한다… 수피주의에서도 순수직관의 통찰, 영지는 핵심요소이다. 피조물이 모두 신성의 하느님임을 기억해내고, 깨닫게 되는 것은 순수의식의 영지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힌두 요가의 우파니샤드에서는 궁극적 존재인 브라만(梵)과 진아(眞我 아트만)와의 합일을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으로 발전시키고 이를 성취하기 위한 명상의 방법으로 요가를 제시하고 있으며, 불교에서는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인 공(空)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참선을 권장하고 있다. '사다나'(깨달음을 얻음)에 대해 힌두어 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 싯디(Siddhis, 영적 파워)들은 계몽 또는 지식 탐구의 직접 또는 간접인 결과다. 그러한 지식을 취득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것을 사다나 (sadhana, 취득)라고 부른다. 사다나를 시행하는 사람을 샤다카(sadhaka)라 하며 계몽을 이룬 샤다카를 사두(sadhu)라고 한다. 싯디들은 그 속성상 마술적이기 때문에 ‘사다나’ 또는 ‘사두’ 라는 용어는 흔히 마술 또는 마술사로 불리기도 한다. 불교와 힌두교 외에도 다른 유사 동양종교도 영지주의적 성격을 가진 것은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단(丹)학과 레이키(靈氣)의 주장이다.

"단학의 목적은 천지기운과 천지마음을 아는 것,
그럴 때 혼이 살아나고 하늘의 마음을 알수 있고
신인이 합일돼 영생을 얻을 수 있다."

- 단학선원 이승헌 -

"레이키는 에너지 균형, 자연 치유,
전인 치유, 평화, 기쁨, 사랑,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더 높은 의식과 계몽을
획득하기 위한 변형 수단으로 등장하였다."

- 레이키 사범 바바라 레이 -

종합해 보면 그렇다. 기독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종교는 ① 명상과 요가 등의 수행과 초자연적 스승들의 계시와 입문/의식(ritual)을 통해서 신비체험을 추구하며 ② 불완전한 창조의 결과인 육체로부터 벗어나 ③ 깨달음(계몽)을 통해 더 높은 자아(참자아/진아)를 찾는 진리에 이르러(상승하여)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한다 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며,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와 오컬트와 뉴에이지와 동양종교들의 공통적인 특성인 것이다. 과연 모든 종교는 하나의 신을 믿는다는 에큐메니즘의 주장이 설만한 자리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런 영지주의 사상을 증진시키는 기독교 리더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답은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에 더 이상 부연하지 않겠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늘에 오르기를 원하시며, 그는 우리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기를 원하시며,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네 안에 거주하신다.
너는 이것을 여러번 가르쳤지만
이제는 이것을 살아야 한다.
왜냐 하면, 너는 생명나무를 먹었기 때문이다.”
 
"천사는 낙원의 동산에서 나가는 문으로 나를 되돌려 데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항의했다. 놀란듯이 쳐다보며 천사는 내 어깨를 잡고 눈을 바라 보았다. 이 때가 내가 그를 천사, 지혜로 알아본 순간이었다."

“너는 이 정원을 떠날 필요가 없다.
창조주 자신이 네 안에 있기 때문에
정원은 네 마음 속에 있다.”

“‘뉴에이지’란 말은 좋은 것인데 기독교가 빼앗겼다.
고로, 되찾아와야 한다.”

- 릭 조이너, 비밀결사 말타기사단 고위단원 -

“우주의 궁극적인 실제는 깨달음이며,
깨달음으로부터 에너지 물질(에너지=물질)이 발생한다.”

“신은 온세상(우주)의 영이며 우주의 깨달음,
즉 우주의 에너지, 우주의 정보, 우주의 사고이다.”

“포스트모던 문화는 신성한 에너지의 순환하는 힘인
‘내면의 불꽃’을 점화시키기를 원한다.”

- 레너드 스위트 -

“진짜의 계시지식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당신들은 신이다.”

“나는 땅위를 걷는 ‘작은 메시야’이다.”

- 베니 힌 -

“모든 크리스천은 신이다.
당신 안에 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신이다.”

- 케네스 코플랜드 -

“많은 경우, 사람들이 예수의 추종자가 되고도
그들의 불교, 힌두교, 유대교 배경에 남아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의 종교가 삶의 참뜻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다른 종교에도 진리를 두셨는가?”

“복음은 우리의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것을 기독교가 탈취할 수 없다.”

- 브라이언 맥클라렌 -

“뉴에이지 수행의 대부분을
기독교 심층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거룩한 이’가 모든 이의
영혼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 모튼 켈시 성공회 -

“관상(명상)의 강력한 분위기로 들어가라. 거룩한 고독, 평정, 침묵의 중심으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내라… 관상이라고 불리는 기도의 정원에서 당신이 살아있게 하라. … 그렇다. '뉴에이저'들은 관상을 붙들었다. …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여! 나를 들으라! 저 밖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영광스러운 관상의 선물을 포기하지 말자!”

- 로버트 슐러 -

“유일신은 다른 사람, 다른 이론을 배타하는
유일신이 아니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유일신이다.”

“명상이란 정신을 하나로 집중하여 모든 생각, 모든 관념을 비워 빈마음을 이루어내는 작업이다. 불교에서는 명상의 목표를 우주와 진리와의 합일을 목표로 삼는다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과의 합일을 목표로 삼는다. 글자 그대로 영적 체험이요, 신비체험이다.”

- 김진홍 [Appendix] 영지주의자가 적은 영지주의 개요 (Stephan Hoeller) -

http://bizmed.iwinv.net/archives/1206

영지주의, 카발라(오컬트), 뉴에이지(신지학)의 공통점 – Business Meditation

영지주의, 카발라(오컬트), 뉴에이지(신지학)의 공통점 by 대흠 • 2013/05/27 '하느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지상에 펼쳐져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라.' 이것

bizmed.iwinv.net

 


 
융과 영지주의적 심리학 】

 ■ 심층심리학의 주요 창설자 중 한 사람인 칼 구스타프 융(1875~1961). 그는 영지주의자들을 자기 학설의 영적 선조로 여겼다. 그의 모든 저서에는 그가 일생 동안 영지주의에 보인 지극히 호의적인 관심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영지주의 문서와 마주친 때를 회상하며 "마침내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들을 발견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H.P. 블라바츠키가 신지학회를 창설한 해인 1875년, 블라바츠키와는 다소 상이한 방식으로 영지주의 부흥을 촉진시킨 칼 구스타프 융이 태어났다. 융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와 더불어 위대한 정신분석학자 세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공헌은 심리학의 영역을 넘어 신화, 문화인류학, 문학, 종교학과 같은 분야에까지 미쳤다. 영지주의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촉진시킨 것이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업적임은 최근에 밝혀진 대로이다.
 
융은 어린 시절부터 종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를 통해 기독교를 전해 받았지만 융은 주류 기독교 전통에 깊이 만족하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영지주의 문헌들로 돌아섰다. 그 당시 영지주의 문헌이란 지독한 편견으로 얼룩진 교부들의 저서들이었다. 그들이 남긴 파편적이고 적대적이기까지 한 저서들을 통해 과거 영지주의의 그림을 아주 정확하게 복원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융의 탁원한 능력 덕분이었다. 거기에 그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친근하고 호의적인 정서를 발전시켰다. 제자인 바바라 한나(Barbara Hannah)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융은 영지주의자들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마치 오랜 친구들 사이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다고 한다.
 
융은 심리학자로서 심층심리학의 개척자인 프로이트의 동료가 되었다. 프로이트와 교제하던 초기부터 융은 영지주의자들에 관해 종종 언급하곤 했다. 예를 들어 1912년 8월 12일 프로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소피아라는 영지주의 개념이 정신분석학을 통해 곧 서구 사상에 재도입되리라고 느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영지주의 사상에 대한 그의 심취는 프로이트에게는 아무런 공명도 일으키지 못했다. 사실, 융으로 하여금 자신만의 길을 걸어 프로이트와는 다른 심리학파를 세우게 만든 것은 바로 영지주의적인 영감 때문이었다. 융은, 스스로를 영지주의자라고 밝힌 필레몬(Philemon)이라는 이름의 영적 인물과 관련된 일련의 환상을 경험했다. 융은 필레몬이 전해준, 상징의 의미에 관한 가르침을 책 속에 담아냈으며, 이 책 때문에 융에 대한 프로이트의 마지막 불만은 폭발하고 말았다.
 
프로이트와 결별한 직후, 그러니까 자신의 이력을 쌓기 시작한 이후 초기부터 융은 일종의 영지주의적 '복음서'를 저술했다. 발렌티누스 학파의 영지주의자들 - 하지만 자신들만의 복음서를 썼다는 이유로 이레네우스에게 맹렬하게 비난받은 - 처럼, 융은 영감을 받아 고대 영지주의 문서의 형식을 그대로 본떠서 한 권의 책을 저술했다.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설교》라고 제목을 단 이 책에 대해 융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바실리데스가 쓴,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설교"라는 설명을 붙였다. 융은 자신의 심리학적 이론과 통찰 대부분이 이 책에 수록된 '초기의 환각들' 속에 종자의 형태로 존재했다고 고백했다.[C.G. 융, 《회상, 꿈, 그리고 사상(Memories, Dreams, Reflections)》] 따라서 융의 과학적인 연구 너머에 영지주의적 영감이 있었음은 너무도 자명하다.
 
융은 확실히 영지주의 지혜의 상당 부분을 부활시키고 영지주의 개념과 신화, 이미지를 분석심리학에 훌륭하게 적용시켰다. 이탈리아 학자 G. 필로라모는 《영지주의 역사》에서 융과 영지주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요약한다.
 
"영지주의자들을 '심층심리학의 실질적인 발견자'라고 인정할 정도로 융의 생각은 오랫동안 고대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에 깊이 몰입해 있었다. ... 심층심리학은 존재론적 자기에 대한 연구를 필요로 하는바, '개성화'라는 현대적 방법에 선행하는 인지적 기술로서의 고대 그노시스는, 비록 보편 종교의 형식을 취하긴 하지만, 융의 영적 치료법의 특징을 앞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더욱 명확히 드러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융은 영지주의에 관심을 갖는다는 이유로 몇 차례 비난을 받았다. 《신의 일식(Eclipse of God)》에서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융을 영지주의자라고 고발했는데, 이는 융이 비난받아 마땅한 이단자란 뜻이었다. 그보다 최근에, 리차드 놀(Richard Noll)은 융이 비교적인, 특히 영지주의적인 관심을 보인 것이야말로 그가 좋은 학자도 선한 사람도 아니라는 증거라면서 극히 거친 비난을 퍼부었다. 또 종교학자 로버트 시걸(Robert Segal)은 융이 영지주의 운동의 방향을 바꿈으로써 부적당한 방법으로 영지주의를 전유專有했다고 비난했다. 시걸은 영지주의자들이 오로지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고, 따라서 대립자들의 화해라든지 그림자의 통합 같은 융의 심리학적 이론들은 영지주의 사상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비판들은 융 자신이 하는 말이나 영지주의 경전의 내용을 볼 때 대부분 그릇된 것임이 판명된다. 융은 영지주의를 심리학으로 바꾸기 위해 그것을 전유한 적이 없었다. 융의 저술을 보면, 영지주의 안에 어떤 다른 의미가 숨어 있든지 간에 그와는 별도로 자신은 심리학자로서 거기에서 심리학적 의미들을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더욱이 나그함마디 문서에는 자기 지식에 대한 언급, 온전함의 필요성에 대한 언급이 수없이 많다. 그러니만큼 융 심리학의 중심 개념인 '개성화'와 영지주의자들의 관심사가 무관하다는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반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융이야말로 고대 신화와 가르침을 현대적 관점에서 제시하고 영지주의에 주목할 만한 공헌을 남긴 현대의 영지주의 대가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특히 융의 책 《욥의 응답(Answer to Job)》에 수록된 신화는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데미우르고스에 관한 고대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확장시킨다.
 
융은 마지막 영지주의자라고 불린다. 이런 말은 영지주의 전통이 끝났다고 암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영지주의가 사라졌다고 선언된 것이 수차례지만 그런 선언은 늘 성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에게 그 이유를 가르쳐준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융이다.
 


 
앨리스 앤 베일리(Alice Ann Bailey) 】
 

앨리스 앤 베일리 (Alice Ann Bailey 또는 Alice A. Bailey)


■ 앨리스 앤 베일리(Alice Ann Bailey,
1880년 6월 16일 ~ 1949년 12월 15일)는
'영원한 지혜(Ageless Wisdom)'라는
용어를 남긴 작가이자 신지학자이다.
루시스 재단을 설립했다.
 

베일리와 그녀의 남편이 설립한 '루시스 신탁회사'


■ '루시아 신탁회사'는 국제연합의 매우 중요한 NGO기구이며, 산하에 ‘세계친선기구(World Goodwill Organization)’를 설립했으며, 이 기구는 "친선의 힘을 동원하는데 도움주기, 그리스도의 재출현을 준비하는 일에 협력하기, 세계의 주요한 문제들의 원인들에 대한 여론을 교육하기 그리고 그것의 사려 깊은 해결책을 마련하는데 도움주기"라는 것을 공식 목표로 했다.

■ 루시스는 라틴어 단어 lux의 한 형태이며, '빛'을 의미한다. 루시스 트러스트는 인류를 위한 신성한 계획의 성취를 바탕으로 전 세계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롭고 더 나은 삶의 방식을 확립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그것의 교육 활동은 안정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세계 사회가 기반이 될 수 있는 영적 원칙과 가치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촉진한다. 설립자인 앨리스 베일리의 난해한 철학은 전 세계에서 8개 언어로 자유롭게 제공되는 활동을 알려준다.
 
https://www.lucistrust.org/

Lucis Trust

The Lucis Trust is dedicated to the establishment of a new and better way of life for everyone in the world based on the fulfillment of the divine plan for humanity.

www.lucistrust.org

 
 "영혼이 없는 자들은
칼리유가가 막을 내리며 멸망한다.
칼리유가의 마지막 해인 2025년 전에
시험이 있을 것이며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음 시대에 살아남을 자격이 없다."
 
“티베트인은 나에게 ‘그리스도’를 이야기할 때, 계급교회의 지도자를 가리킨 것이라고 알려줬다. ‘그리스도’는 각기 다른 신앙을 갖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그분은 그리스도교 세계, 불교, 이슬람교, 기타 신앙에서 말하는 그 한 분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관심을 갖기 위해서, 그리스도 교회에 입회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네 이웃을 사랑, 자신에게 엄격한 삶을 살고, 모든 신앙과 중생들의 신성성(神聖性)을 인정하며,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아라.”

■ 베일리는 “나는 곧 오실 그분을 위해서 나를 내어드리며, 나는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준비시킬 것이다. 그 외에 나는 다른 삶의 목표가 없다.”라고 이야기했으며, 새 시대의 개시를 알리는 그리스도라 부르는 존재의 출현을 준비한다고 강조했다.

 

■ 베일리는 모든 종교와 신앙은 평등하고, 동일하며, 유일 완벽한 오직 믿음은 없다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앞 장에서 소개한 로버트 뮬러(Robert Muller)의 글로벌 핵심 교육과정(World Core Curriculum)의 사상이다. 베일리는 그들의 적그리스도가 올 때에 가장 먼저 지구는 이미 ‘하나의 세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모든 종교는 같은 영적 기원에서 유래하며, 궁극적으로 인류는 그러함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들이 그렇게 된다면, 그 결과는 전세계를 아우르는 종교와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 新世界秩序)'의 출현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녀의 신념대로 적그리스도의 도래를 예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계단일정부는 반드시 세워질 것이며, 이 일을 국제연합에서 주도한다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전세계의 모든 종교는 적그리스도를 중심으로한 권력 주변으로 응집할 것이다.
 
https://worldview-osint.tistory.com/m/80

[시리즈] 62. 뉴에이지 운동의 핵심 인물, 앨리스 베일리

뉴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이란 창조 대신에 영적인 진화를 주장하는데, 그 진화의 의미는 인간이 여러 가지 수행을 통해 진화하여 신이 된다는 세계관입니다. 그렇기에 '신'인 인간이 다른 신

worldview-osint.tistory.com

 


 

【 맨리 P. 홀 】
 

■ 사탄(Satan)은 '조심성(caution)'과 '신중함(prudence)'을 상징하는 힘이며, 이 힘이 왜곡되면 '부정(negation)'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사탄의 문 앞에는 '누락(omission)'의 죄악이 놓여 있다. 인간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도 자연의 법칙의 일부다. 옳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만큼이나 나쁜 것이다. 사탄은 인간의 행동하려는 의지를 억제하고 방해하는 차가운 힘이다. 사탄은 움직임을 방해하기 위해 뭐든지 단단하게 굳어버리게 만들고, 그가 세상을 완전히 지배하면 모든 것이 정지하게 된다. 사탄은 대우주로서의 인간을 상징하는 인간의 뼈와 행성들을 관장하기 때문에 해골 형상의 저승사자로 묘사된다. 사탄은 인간의 혈관을 통해 흐르는 영혼을 꽁꽁 얼려버리고, 이루어지지 않은 꿈의 묘지를 지키는 차가운 악마다. 자신의 신비스러운 띠로부터 탄생한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거두어들이는 힘이 바로 사탄이다.
 
사탄(Satan)이 냉기로 인간의 혼을 꽁꽁 얼려 버리는 힘인 반면, 루시퍼(Lucifer)는 인간의 혼에 불을 지피는 힘이다. 사탄에 해당되는 행성이 토성(새턴, Saturn)이었다면, 루시퍼에 해당되는 행성은 화성(마르스, Mars)이다. (그리스에서는 화성이 아니라 금성이라 설명했다.) 마르스 하면 대부분 '전쟁의 신'을 떠올리는데, 이것은 마르스의 힘이 한쪽의 극단으로 치우쳤을 때 나타나는 특성이다. 마르스의 기본적인 속성은 '행동', '의지', ‘용기’이다. 새턴과 반대인 셈이다. 하지만 생각 없이 행동하고 의지를 발휘했을 때는 이 힘이 파괴의 화신으로 변하며 결국에는 남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파멸로 이끄는 결과를 가져온다. 보다시피 어느 한쪽으로 치우쳤을 때, 즉 힘이 오용되었을 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탄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힘'이라면, 루시퍼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도록 부추기는 힘'이라 할 수 있다.
 
https://m.cafe.naver.com/ca-fe/web/cafes/ynl/articles/1351?useCafeId=false&or=m.blog.naver.com&buid=02d2034f-f470-4e19-a686-b8fe1155064a&art=ZXh0ZXJuYWwtc2VydmljZS1uYXZlci1ldGMtZm9yLWNvbW1lbnQ.eyJ0eXAiOiJKV1QiLCJhbGciOiJIUzI1NiJ9.eyJjYWZlVHlwZSI6IkNBRkVfSUQiLCJhcnRpY2xlSWQiOjEzNTEsImlzc3VlZEF0IjoxNjc3NDA2NDQ4Mjc5LCJjYWZlSWQiOjI3MzcyOTcwfQ.E5kNpjN5WtXhrNxrn4VMj-Pyz6dU__5hjiL9skHQA60

[돌아보고 발견하고 성장한다]의 저자, 맨리 P. 홀과 프리메이슨

안녕하세요, 윤민입니다. 연휴는 잘 쉬셨나요?^^ 내일부터 다시 직장으로? (ㅠㅠ). 얼마 전 뉴스에 보니, 명절 때 평소 때보다 많은 경찰들이 한강 다리에서 특근을 서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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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리 P. 홀은 어떤 사람인가요? 3탄! 맨리 P. 홀은 프리메이슨이었나?

<돌아보고 발견하고 성장한다>의 저자 맨리 P. 홀에 관한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인터넷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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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선량하고 흑마법사는 사악하기 때문에 그가 나에게 해악을 끼칠 수 없다는 순진한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한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힘을 기르지 못하도록 어둠의 세력이 퍼트리고 있는 프로파간다로서, 매우 어리석은 발상이다. 이는 마치 정상급 프로 파이터와 갓난아기가 격투기 시합을 했을 때, 아기는 마음이 순수하고 영혼이 맑으므로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힘을 기르려는 의지가 부족하다. 이들 대부분은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정직한 마음가짐으로 종교 활동도 열심히 하는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부정에 완전히 빠져 있어서 사악한 자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을 자초하고 있다. 이들 자체는 사악하지 않지만, 흑마법이 계속해서 세상을 지배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