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그리스도 】 정도령
【 탄허스님 예언 】
■ "스님은 한반도와 세계를 내다보시면서 추후 40 ~ 50년 후에는 계룡산이 이 땅의 중심이 된다고 보셨다. 큰스님은 늘상 한반도가 세계의 중심이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때가 되면 국제적인 권능의 지도자가 이 땅에서 출현해 남북 통일을 이끌 것이라 말씀하셨다. 한국은 그때 만주까지 우리 땅이 되어 영토가 늘어난다고 하셨다. 항상 말씀하시길 '엉뚱한 지도자가 나온다'라고 표현하셨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갈수록 예뻐지는데 이들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칠 때 국운이 상승하고 한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될 것이다."
【 송학스님 예언 】
■ "혼란의 아우성이 극도의 상황에 다달을 쯤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인물이 등장해서 새로운 국운을 열어갈 것인데, 기존의 사회제도와 경제시스템이 붕괴(2022~2025)되면서 자본주의적 사회가치관이 무너지고,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려는 새로운 의식혁명을 주도하는 아주 젊은 남자 지도자가 등장할 것이다. 도저히 이 상태로는 아니된다고 자각하게 되면서, 이 사회의 중간 계층에서 의식 혁명이 일어나고 실질적인 행동으로 돌입하는 때가 온다. 그들은 실질적인 사회의 의식구조와 세류를 이끌어 나가는 계층이기 때문에 그들이 움직이는 때가 온다. 그 와중에서 그 인물이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인물은 현재의 알려진 정치인이나 사회 유명 인사나 종교 지도자들 중에는 전혀 해당되는 인물이 없다. 그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인물로서 아주 영성적인 인물이 될 것이다. 만약, 이 인물이 종교계의 거물급 인물이거나 비결서에 등장하는, 마치 바람같이 등장한다는 정도령 스타일의 기인이기를 바란다면 정말 큰 오산이다. 지금은 아주 평범한 일반 시민이지만 때가 되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등장하게 되는 의외의 인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한 나라의 국운과 전 지구의 흐름이라는 것은 이미 오랜 시간동안 축적되어온 인류의 집단 무의식이 빚어낸 현실 창조의 결과물일 뿐이다.
부디 앞으로 5~6년 정도의 세월을 잘 참고 인내하라. 부디 양심에 어긋나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삼가 순정한 의로움을 항상 지켜나가라. 정녕 좋은 세상을 이룩하고자 바란다면, 개개인 스스로가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올바른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서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는 것이고, 때가 되면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다"
【 정도령 ( 鄭道靈 ) 】
■ 각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종교 안에서 한국과 한민족과 인류를 구원할 어떤 성인이 출현할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모든 종교와 모든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성인 출현 예언은 모두 동일 인물 정도령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든 종교, 철학, 사상, 가치관 등을 통일시킨다는 건 기존의 모든 것을 붕괴시켜버린다는 것이니 종교 내의 인물이 아니다. 종교나 도(道)에 갇힌 자들은 정도령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왜 모든 경전과 모든 예언서에서 정도령의 출현을 기록해놓았나. 말세의 시기에 악을 심판하고 한국과 한민족을 구하고 인류를 구원하며, 모든 종교와 사상은 물론 천하를 통일하여 천년간의 인신 시대를 열어 다스릴 분이기 때문이다. 정도령을 찾으면 살고 못찾으면 죽는다는 게 모든 예언들의 핵심내용이다. 찾는 것에 목숨이 좌지우지된다면 너무 불공평한 게 아닌가 하겠지만, 악하고 더럽고 거짓스럽고 돈에 눈이 먼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은 못 찾으며 바르고 의로운 자들만이 찾을 수 있다고 정감록에 반복 강조되어 있다. 걸러내어 극소수만을 선별한다는 것이다. 선각자들이 예언을 아무나 알아볼 수 없게끔 난해하게 남겨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섬에서 나타난다"라고 한 것은 비산비야(非山非野)라는 표현과 해도(海島)라는 표현을 섞은 것으로 보이는데, '비산비야' 즉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니라는 표현은 어떤 땅을 말하는 것으로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정감록에서 반복해서 표현한 뜻은 쓸데없이 땅(지역)을 찾지 말고 사람을 찾으라고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또, 해도라는 표현은 정도령이 어디 출신이라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도령이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며, 해인(海印 = 선별의 의미가 포함된 북두칠성 옥황상제 하느님)과 같이 성인을 상징하는 상징적 표현이지 섬을 그대로 섬이라 표현해놓을 리는 없는 것이다. 아래의 궁을도가의 동해(東海)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인데 동해는 성인 정도령을 뜻하는 것이지 바다를 말하는 게 아니다. 해(海)는 성인 정도령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공덕이란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헌신한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 공이고 기여한 정도가 덕이다. 대개 일반적인 선(善)을 궁극으로 여기나 선은 기본적인 것으로서 아이와 같은 유치한 작은 마음이다. 큰 마음이 없는 자는 기본도 되지 못하니 그러한 낮고 작은 선을 높게 보고 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선(善)보다 좀 더 큰 마음이 의(義)이다. 의(義)라 해서 다 같은 의가 아니며, 의를 갖추고 있다 해서 다 갖춘 것도 아니다. 의(義)는 깨어남의 기본이자 필수덕목이다. 의(義)는 악에 분노할 수 있는 마음이다.
【 격암유록 승운론 】
天縱之聖鄭道令은(천종지성정도령은)
'하늘이 낸 성인 정도령은'
孑孑單身無配偶라(혈혈단신무배우라)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홀몸이고 배우자가 없다.'
정도령은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분이고,
배우자도 없다 하고 있다.
【 격암유록 은비가 】
見不牛而牛聲出處(견불우이우성출처)
'소는 보이지 않고 소울음 소리만 나는 곳이다.'
정도령은 보이지 않고 정도령의
가르침(글과 말)만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얼굴을 보인 자들은 다 가짜 정도령이라는 것이다.
【 정감록 】
"가난한 자는 살고 부자는 죽는다."
【 격암유록 성산심로 】
貧者生富者死 是亦眞理矣(빈자생부자사 시역진리의)
"가난한 자는 살고 부자는 죽는다. 이 역시 진리이다."
■ 왜 가난한 자는 사는가. 탐욕을 부리지 않았거나 베풀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현 세상은 신도 모르고 신과 같은 마음은 커녕 탐욕만 좇는 비정상적인 세상이다. 비정상적인 세상에 잘 적응하는 자들이 비정상이며,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이 정상이다. 현재의 미친 세상에선 정직하고 소탈하고 남에게 베푸는 자는 반드시 가난하게 되어 있으며, 악하고 더럽고 거짓스럽고 탐욕스러운 자들은 부자가 되기 쉽게 되어 있다. 진실된 자일수록 당하거나 소외되어 사회의 바닥에 머물게 되어 있으며, 거짓스러운 자일수록 사회의 고위층에 오르게 되어 있다. 최소한 악하고 더럽고 탐욕스러운 대다수의 자들과 한패가 되어야만 부와 지위가 보장되는 기이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부(富)라는 것은 다른 이의 것을 빼앗거나 가져오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을 칼로 죽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다. 강도에게 살해되는 사람의 수보다 빈곤으로 죽는 사람의 수가 훨씬 더 많다. 우리나라는 세계 1위의 자살 왕국이다. 이것이 모두 기득권 적폐 세력의 이기심과 탐욕과 핍박에 의한 결과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탐욕스런 인간들은 자기 배 채우며 나누려 하지 않는 못된 심보가 탐욕과 이기심인 것을 모른다. 거의 모든 인간들이 그들을 우러러보며 쫓고 있다. 한심하고 어이없는 세상이다.
또한, 탐욕스러운 수준 낮은 조상들이나 후손을 부유하게끔 도와주지 수준 높은 조상들은 물질에 집착하지 않으니 물질에 집착치 않도록 이끌어주고 정신이 깨어날 수 있게 고난과 시련을 준다. 후손이 진짜 신을 찾을 수 있게끔, 신과 같은 마음을 찾을 수 있게끔, 신에 가까이 오를 수 있게끔 이끌어준다. 현재 돈에 눈이 먼 자들이 희희락락거리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지만, 땅을 치고 통곡하고 피눈물을 흘리고 후회하며 죽게 될 날이 몇 년 내에 곧 온다.
■ http://www.dtnews24.com/news/articleView.html?idxno=398915
【 율곡 이이 】
기어인간초도사(寄語人間超道士)
수종백토주청림(須從白免走靑林)
'도사를 초청하여 인간사를 물어 보건데
하얀 토끼(신묘 일주)를 따라
청림(靑林)으로 달아나라.'
■ https://sajujeong.tistory.com/93
■ https://youtu.be/VYTfidNxScM
卯 : 말로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
■ https://youtu.be/s-rx5eF2Bi8
辛 일간, 卯 일지, 철쇄개금.
■ https://www.instagram.com/p/CgCD3K5pTHr/?igshid=MzRlODBiNWFlZA== 【 천문성(天門星) 】
【 2023 年 】
■ 다니엘서에 언급된 '가증한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 서기 688년에 예루살렘 성전 터 위에 이슬람 사원이(오말 사원) 건축된 사건을 예언한 것으로 해석한 한에녹은 서기 688년을 基點으로 해서 종말의 시기를 예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서의 '1260일'(예언 속의 1일은 곧 1년이라는 성구를 의지하여) 뒤에 이스라엘이 독립할 것으로 확신했는데 688 + 1260 = 1948로서 이것은 적중을 했었지요. 더 나아가 그는 예언서의 '1290일'을 주목하고 아마겟돈 전쟁의 발발을 688 + 1290 = 1978로 계산하여 서기 1978년으로 봤었지요.
■ https://youtu.be/XJ8Xa5WUU5E?si=m657gugxAn4bxlnW
그리고 그는 예언서에 나오는 '1335일' 뒤에 예수의 강림이 있을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688 + 1335 = 2023, 즉 서기 2023년에 예수 강림이라는 해석이 나온 겁니다. 서기 1948년에 과연 이스라엘이 독립국으로 되자 한에녹의 책은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 제3판이 서기 1972년에 나올 때까지 팔리기도 많이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연로했던 그는 서기 1973년에 타계하여 서기 1978년의 아마겟돈 전쟁의 예언이 과연 적중하는지에 대해서는 지켜보지 못 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지금도 '서기 2023년 예수강림'의 예언을 확신하고 기다리는 추종자들이 우리 나라에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나고 싶은 분들이 계시면 그들의 연락처를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 더, 한에녹은 영락 교회의 장로였는데 그의 이러한 시한부 종말론은 영락 교회 제직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그를 끝까지 보호했던 이가 바로 한경직 목사였다고 합니다. 한에녹은 장로회 신학교에 거액을 헌금한 공로자였고, 한에녹의 재혼은 한경직 목사가 동향인을 추천하여 이루어졌다는 인연이 있었던 것이구요. 한에녹의 두 아들들은 현재 국내 명문 대학의 교수입니다. 이 두 아들 외에도 추종자들이 있어서, 그들이 낸 책들이 있답니다. 일언이폐지하여 한에녹은 한국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선구자였습니다.
■ https://m.cafe.daum.net/kkysn2/MMvT/50
■ https://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264
■ 다음은 현재 미국에서 남부권 일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내용이다. 그들은 2030년을 그리스도 탄신 후 정확히 2000번째가 되는 해로 본다. 따라서 그 7년 전인 2023년은 매우 의미가 크다. 그 이유는 많은 학자들이 2030년을 새로운 천년왕국의 시작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7년 환란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것을 계산하면 2023년인데, 오순절은 그 중에서도 의미가 깊다고 한다. 즉, AD 30년 오순절 이후로 교회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일부 성경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2023년의 오순절에 교회시대가 끝난다 보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이번 오순절에는 전세계 복음주의자들의 대규모 증발 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미국 등 복음주의 교세가 강한 나라들에서는 2023년 5월 28일 오순절(五旬節, Pentecoste, 펜타코스트)를 기준으로 미국과 한국같은 복음주의 교세가 큰 지역에 무슨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인데,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한국과 미국같은 복음주의 교세가 큰 나라들에 대혼란이 야기된다고 보는것이다. 만약 이번에 아무 일 없이 지나간다 해도, 2023년 하반기부터는 매우 혼란스러운 7년을 맞이하게 될 수 있다.
■ https://youtu.be/_CS33Fc78yY
【 추배도 예언 】
【 제47상(第四七象) 해석 】
匹夫有責 一言為君 필부유책 일언위군
천하를 지킬 사람, 임금(君)이다.
無王無帝定乾坤 무왕무제정간곤
왕도 아니고 황제도 아닌 사람이
하늘과 땅을 바로 잡는다.
來自田間第一人 래자전간제일인
밭 사이(田間)에서 한 사람이 나온다.
好把舊書多讀到 호바구서다독도
많은 옛 고서를 읽었다.
義言一出見英明 의언일출견영명
의로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영특함과 총명함이 보인다.
■ 밭 사이(田間)는 성인의 성씨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으로, 천부적인 재능과 총명함을 겸비했을 것이다. 고된 시간을 참고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고대 문화를 많이 배우고 익혀 고금(古今)을 통달하였다.
■ https://youtu.be/6qXwp-NcLg4
■ 어떤 사람의 예언에 따르면 2023년에 하늘에서 내려보낸 자미성에 해당하는 한 여자 아이가 출현할 것인데, 그 여자 아이는 사람들에게 권력과 부유함을 가져다줄 수 있으며, 세상의 고통과 어려움을 줄여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자미성은 권력을 상징하며 이는 여성적인 면이 없기 때문에, 자미 성인은 아름다운 남성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https://mithras11.tistory.com/entry/%EC%A4%91%EA%B5%AD-%EC%98%88%EC%96%B8-2023%EB%85%84-%EC%9E%90%EB%AF%B8%EC%84%B1%E7%B4%AB%E5%BE%AE%E6%98%9F-%EC%84%B1%EC%9D%B8-%EC%B6%9C%ED%98%84
【 노스트라다무스 】
■ "마부스(COVID 19)는 곧 죽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COVID 23).
그 후 사람들과 짐승들에 막대한 피해가 있을 것이다.
즉시 복수가 이어지고, 세기와 권력과 가뭄과 기근,
혜성이 지나갈 때에.."
💬 마부스(MABUS)는 '바이러스'를 뜻하는 것 같다.
요한 계시록의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바다 짐승과 같은 것이다.
■ https://sputnik.kr/news/view/6245
■ "유럽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으리라.
그것은 아시아에서 나타난다.
위대한 헤르메스에서 태어나..
두 나라가 연합하고
동방의 모든 왕들을 능가하리라."
■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태어난다."
■ "아시아의 동쪽 지방에서 자랄 것이다."
■ "1995년 전까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 "세 물줄기가 겹치는 곳에서 나타나
목요일에 그의 축제, 찬사, 그의 소문,
치세가 힘으로 강대해지리니
육지로 바다로 동방에 폭풍이 몰아치리라."
■ 나는 이 마부스를 칼 막스, 즉 마르크스를 시초로 하는 공산주의자라고 보고 그가 태어났다는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유대인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것이며 아시아의 동쪽 지방이라고 하는 것도 공산주의와 직접적인 대치 중인 한반도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 https://m.bobaedream.co.kr/board/bbs_view/strange/3622720
【 메시아 】
■ '메시아' מָשִׁיחַ 라는 말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종교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됩니다. 그 원래의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구약성서에서 이 기름부음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왕들이었습니다 (삼상 2:10,35; 26:16; 삼하 22:51; 시 2:2; 18:50).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대제사장들입니다 (레 4:3,5,16; 6:22). 이 말은 나중에는 '구원자' 또는 '해방시키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독특한 것은 구약성서에서는 이 메시아가 꼭 이스라엘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포로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유다 땅으로 돌려보내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데 협력한 페르시아의 고레스 역시 메시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 45:1). 이 '메시아'라는 히브리어가 칠십인역 LXX 그리스어로 번역이 될 때에 '크리스토스'(그리스도) Χριστός 라고 번역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 '구원자 예수'라고 이해되는 것입니다.
【 기독교의 메시아 】
■ 기독교의 메시아(그리스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이시지요. 기독교에서는 메시아적인 사명을 이 땅에서 감당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구원자이시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왕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 하나님이자 아들이신 삼위일체 성자 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메시아관은 이슬람과 유대교의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고보면, 한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통하지 않는 것같습니다.
【 이슬람의 메시아 】
■ 이슬람의 코란에서도 예수님을 예언자의 하나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 바로 옆 아랍인들의 마을의 이름은 '이사 위예'인데, '예수 동네'라는 뜻입니다. 아랍 사람들은 '이사 알 마시흐(عيسى المسيح)' 또는 '예수아 알 마시흐(يسوع المسيح )' 라고 해서 '메시아 예수'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식 표현으로 바꾼다면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을 '알라로 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으로 이해합니다. 알라로 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예언자'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수니파 이맘인 무하마드 알 부카리 (Muhammad al-Bukhari)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면서, 예수님의 모발은 항상 촉촉했고, 머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는데, 그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이지요. 이슬람에서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사실에 놀라실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면서도 왜 기독교인이 되지 않냐는 것인데요. 그 이유는 이슬람에서는 메시아를 신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주로 예언자와 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많은 메시아들 중의 하나가 되겠지요.
【 유대교의 메시아 】
■ 유대교의 메시아 역시 “기름부음”을 의미합니다. מש”ח라는 메시아의 어근은 사람에게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름 부음을 받은 성물—성막과 성전에서 사용되는 모든 물건들—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니 기름부음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된 모든 사람과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 되겠지요. 이스라엘의 왕 (왕상 1:39), 이스라엘의 제사장 (레 4:3), 그리고 예언자(사 61:1), 성막(성전)과 그 안의 기물들(출 40:9-11), 무교병 (민 6:15), 심지어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사 45:1)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사람과 물건들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특별히 유대교 종말론에 의하면 다윗의 자손중에 나올 유대인의 왕을 메시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메시아는 거룩한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왕국의 왕이 되어서 메시아의 시대를 열고 유대인들을 통치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종말론적인 유대교의 신학에서도 메시아는 하나님이거나 신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현대 유대교 신학의 기틀을 잡은 사람 중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12세기의 유대교 철학자 마이모니데스(משה בן מימון 또는 רמב”ם)인데요. 메시아는
① 다윗의 후손이며
② 다윗 처럼 율법을 잘 알고
그 계명을 잘 준수하고
③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따르고 지키게 하며
④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에서
나아가 싸우는 사람
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거룩한 성전을 세울 것”이라는 겁니다. 이 거룩한 성전이 세워지는 날에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습 3:9)이라고 합니다. 요즈음의 유대교에서는 잠재적 메시아는 매 세대마다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 잠재적인 메시아가 마치 영화처럼 자기의 능력을 깨닫는 순간 진정한 메시아가 된다는 판타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메시아가 누구인지 그리고 메시아가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 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말로 이해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유대교 가운데에서 신비주의 운동을 하는 카발리스트들의 메시아의 이해는 좀 더 흥미로운데요. 기본적으로 메시아가 '사람'이라는 전제는 유대교와 같으나, 자유와 평화로 이끌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오기전에 '요셉의 아들'이 온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메시아는 유다를 말하고, '요셉의 아들'은 북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 요셉의 아들은 자신을 제물로 드려서 모든 이스라엘을 하나로 연합시키고 '다윗의 아들' 메시아의 세상을 준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이야기가 뒤섞인듯한 이미지를 줍니다.
바로 이 모호한 이미지를 자신의 종교로 끌어들인 것이 이슬람입니다. 요셉의 아들이 자신을 제물로 드려서 모든 이스라엘을 하나로 연합시키고(예수님), 그 다음에 올 메시아 마흐디(مهدي)를 준비한다는 것이지요. 이슬람이 기독교의 예수님을 메시아적인 위상을 가진 위대한 인물로 인정한다고하나, 그 예수님을 종말론적인 심판자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 https://youtu.be/728NO8PBt1k?si=BiZjYvxsaEoLeQOl
■ 마모는 CBN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 의식을 행한 제사장이 성소를 볼 수 있는 곳이 정확히 그 장소 앞에 있어야 했다”며 “오늘부터 1년 반 후에 이 지역에서 실제로 성전으로 가는 첫 걸음이 될 붉은 암송아지 의식을 치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의식에는 죽은 것을 만져서 더럽혀지지 않은 사제들이 필요하다”며 “사원 연구소에는 실제로 아홉 명의 순결한 사제들이 있다. 그들은 병원에서 태어나지 않고 집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묘지에 가지 않는다. 그리고 부모는 아이들이 어떤 공동묘지나 문제가 있는 다른 어떤 장소에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한다”고 했다. 이어 “그들은 순결하여 기다리고 있다. 우리에게는 제사장이 있고, 붉은 암송아지가 있고, 땅이 있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1년 반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덧붙였다.
■ 일부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붉은 암송아지가 세 번째 유대 성전의 건축으로 이어지는 핵심이라고 믿고 있다. 민수기는 붉은 암송아지의 재가 성전 봉사를 위해 제사장을 정결하게 하는 데 사용됐음을 알려준다. CBN뉴스는 “이 붉은 암소의 나이는 이제 1.5년에서 2년 사이가 됐다. 성경에 언급된 의식을 재현하려면 최소 3년 이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그들은 흠이 있거나 예식에 결격이 되는 어떤 것, 심지어 흰 머리카락이나 검은 머리카락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54598
【 유대인들의 메시아관 】
■ 히브리어로 메시아 משיח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성서에 기름 부음을 받았다라는 말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이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가지는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미를 잠시 내려놓고 구약성서 상으로만 보았을 때에는 '기름으로 머리에 부음을 받은 사람', '성령으로 부음을 받은 사람(성령이 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에게 구별된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메시아의 의미는가장 대표적으로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적용이됩니다. 사울에게도 기름이 부어졌고, 다윗에게도 마찬가지이며, 시드기야 왕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편에서도 왕권과 기름부음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곳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도 기름부음을 받았고, 제사장들도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이스라엘 왕 뿐 아니라, 이방의 왕에게도 하나님의 기름이 부어졌습니다 (사 45:1).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라는 말은 하나님으로 특별함 위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모세, 멜기세덱, 다윗이 메시아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인간'이되,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초기 유대교 문서에서 그려지는 메시아상은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에 근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교도의 문화(헬레니즘)로부터 이스라엘 만의 고유한 하나님 신앙을 지켜내고, 외세 (바벨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시리아,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킬 하나님의 사람이 메시아 였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의 일부는 늦어지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추구하였습니다 (벤-시라). 이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메시아관은 단지 유다라는 나라의 영역이 아니라, 온 땅을 회복시킬 하나님의 사람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다윗의 왕권과 제사장적인 메시아의 자격을 모두 갖춘 메시아였습니다.
제2차 성전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다니엘에서 나타나는 메시아관이나, 쿰란에서 발견된 메시아관의 공통점은 (1) 공동체가 아닌 개인이며, (2) '메시아'라고 불려지고, (3) 메시아는 원래부터 있던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고, (4) 메시아의 역할은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모든 것들을 훼파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유대교적인 메시아관 때문에 초대 교회의 교인들이었던 유대인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때부터 신이었는가? 아니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나서 신이 되었는가? 또는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심으로 신이 되었는가? 라는 기독교신학의 교리적인 질문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유대교는 이러한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교의 역사에서 예수님 이후에 메시아라고 주장했고, 정말로 그 사람을 메시아로 추종하고 따랐던 메시아들도 80명이 넘습니다. 유대교의 메시아관은 메시아일지라도 그를 신적인 존재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신은 오직 '하나님' 한분 이시라는 것이 구약성서를 바탕으로한 유대교의 입장입니다.
【 성배의 민족 】
■ "인류문명의 대전환기에는 새 문명, 새 삶의 원형을 제시하는 성배의 민족이 반드시 나타나는 법이다. 그 민족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탁월한 영성을 지녔으나 외세의 침략과 내부의 폭정으로 끊임없이 억압당해온 과정에서 삶과 세계에 대한 생득적인 꿈과 이상을 내상처럼 안으로만 간직하고 있는 민족이다.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지중해 문명 시대의 전환기에는 그 성배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었으나 그때보다 더 근본적 전환기인 현대에는 그 민족이 극동에 와 있다.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이제 그 민족을 찾아 경배하고 힘을 다하여 그들을 도우라"
■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351
■ https://youtu.be/gZ98RvzjijE?si=Z7QzlZm1Srcd9UlK
【 유대인과 한국인 】
■ https://youtu.be/kHJGUccKB4A
■ https://m.blog.naver.com/realjoys/35732896
■ https://youtu.be/7Veo6MH1HEU?si=ePzs7JUfcYxd2ro9
【 한국의 독자들에게 】
■ 2020년 7월, 우리는 팬데믹 최악의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내다봤습니다. 슬프게도, 암울한 예측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백신 개발로 확산된 기대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감염 사례 증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특히 영국, 미국, 대다수의 유럽연합국, 브라질 등의 국가들은 최악의 코로나19 상황에 처해 있는 상황입니다.
반면, 처음부터 이 바이러스를 효과적으로 억제해 온 나라들도 존재합니다. 대한민국은 그 국가들 중 하나입니다. 다수의 동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바이러스의 전파를 효율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국제적 추세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코로나 19에 대한 한국의 대응은 다른 선진국에서 실시한 사업체 폐쇄령이나 민간이동금지령과 같은 엄격한 조치에 의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염병 곡선을 비교적 완만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특히 주목을 받았습니다.
처음부터 한국은 팬데믹 상황의 발견, 봉쇄, 치료라는 중요한 세 가지 단계를 성공적으로 실행하였습니다. 또한 한국은 다른 나라들은 실패한 정부와 과학기술 분야 사이의 건설적 협력을 처음부터 확립하는 것에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많은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비교했을 때 찾아보기 어려운 업적이라 할 만합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팬데믹 상황이 끝나지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잘 통제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사라지고 나면, 이 위기를 극복한 한국은 분명 더 강해질 것입니다. 과거로 돌아가거나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회복력 있는 사회와 경제를 구축 함으로써 ‘위대한 리셋’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거라 확신합니다. 이처럼 한국은 우리 모두에게 놀랍고 고무적인 본보기입니다. 정부의 결정적 조치와 적절한 정책, 자원의 대량 동원, 그리고 강력한 사회적 협력과 정보 공유 덕분에 다른 나라들보다 더 빠르고 더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회복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은 공동의 노력과 사회 화합을 통해서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팬데믹이 지난 후 세계는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경제를 보다 포괄적이고, 지속 가능하며, 회복력이 있는 미래로 이끄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더 위험하고, 불안정하며, 점점 더 살기 어려운 세상으로 인도할 길입니다. 한국은 이미 분명하게 첫 번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 클라우스 슈밥, 티에리 말르레 -
■ 현대 역사상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촉발된 전 세계적 위기만큼 심각한 상황은 없었다. 이 사태가 세계 전체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를 여러 세대 만에 직면해본 가장 어려운 시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결정적인 순간이다. 우리는 향후 수년간 코로나19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많은 것들이 영원히 변할 것이다.
코로나19는 엄청난 규모의 경제적 혼란을 초래하고, 정치·사회·지정학 등 다양한 차원에서 위험하고 변동성이 큰 시기를 만들고 있다. 이로 인해 환경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초래되고, 해로움과 유익함을 막론하고 우리 삶에서 기술의 영향력이 확장되고 있다. 어떤 산업이나 기업도 이러한 변화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수백만 개의 기업이 사라질 위험에 빠졌고, 다수의 산업이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하고 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유지해왔던 삶이 놀라운 속도로 흐트러지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심각한 실존적 위기는 자기 성찰을 도와주고, 변화의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사회적 격차, 공정성 결여, 협력 부재, 글로벌 거버넌스(global governance : 지구적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가 이외의 여러 행위자들이 서로 협동하는 일)와 리더십 실패 등의 약점들이 전 세계적으로 전에 없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재창조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느끼고 있다. 새로운 세계가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의 윤곽을 상상하고 그리는 건 우리 몫이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이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언제 상황이 다시 정상화될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만, 간단히 대답하자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우리의 궤도에 근본적인 변곡점이 된 이상 결코 그 어떤 것으로도 위기 전 팽배했던 ‘고장난(broken)’ 정상 감각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분석가들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주요한 분기점이라거나 엄청난 규모의 심각한 위기라거나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본질은 모두 같다. 바로 2020년 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은 팬데믹의 맥락 속에서 용해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가 빚어낸 급진적 변화들이 닥치자 일부 전문가들은 이제 ‘코로나바이러스 이전(before coronavirus, BC)’과 ‘코로나바이러스 이후(after coronavirus, AC)’로 시대를 분리해서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의 신속성과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계속해서 놀라게 될 것이고, 변화들은 융합되면서 2·3·4차적 결과, 연쇄 파급 효과(cascading effect),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결과를 야기할 것이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 되어버린 예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일상인 ‘뉴노멀(new normal)’이 눈앞에 와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이때까지 세상의 흐름에 대해 가져왔던 믿음이나 예측은 산산조각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는 등의 광범위하고 급진적인 선언과 모 아니면 도 같은 흑백논리식 분석은 매우 신중하게 전개할 필요가 있다. 당연히 현실은 훨씬 더 복잡미묘하다. 코로나19가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키지는 않더라도 코로나19 창궐 전부터 일어나고 있었던 많은 변화들을 가속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다른 변화들을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 단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런 변화들이 선형적이 아닌, 급격하면서도 단절적인 형태를 띨 것이란 점이다.
우선 몇 가지 것들을 살펴보면서 시작해보자. 인간은 약 20만 년, 가장 오래된 박테리아는 수십억 년, 그리고 바이러스는 최소한 3억년 동안 존재해왔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팬데믹은 항상 존재해왔고 인류 역사의 중요한 일부였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뜻이다. 지난 2,000년 동안 그것은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었다. 팬데믹이 본래부터 가진 파괴적인 성격 때문에 팬데믹은 역사적으로 줄곧 지속적이면서 종종 급진적인 변화를 일으킨 동력이었다. 팬데믹은 폭동의 도화선 노릇을 했고, 인구 충돌과 군사적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혁신을 촉발하고, 국경을 다시 설정했으며, 종종 혁명의 길을 닦아주기도 했다.
541년 경에 발생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Plague of Justinian) 당시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처럼 팬데믹 발병으로 제국은 전쟁의 진로를 바꿔야 하기도 했고, 아즈텍(Aztec)과 잉카(Inca) 황제와 대부분의 신하들이 유럽의 세균으로 사망했을 때처럼 일부 제국은 아예 사라지기도 했다. 또 팬데믹 확산을 억제하기 위해 취해진 권위 있는 조치들은 항상 정책적 무기로 활용됐다. 따라서 코로나19 확산 차단을 위해 전 세계의 많은 지역에 격리와 봉쇄 조치가 취해졌다는 사실이 전혀 새로울 것은 없다. 수 세기 동안 흔하게 취해진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초기의 격리(quarantine)는 1347년부터 1351년 사이 전체 유럽 인구의 3분의 1 정도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Black Death) 방역을 위해 시행됐다.
이탈리아어로 ‘40’을 뜻하는 단어 ‘quaranta’로부터 나온 40일 동안 사람들을 격리한다는 생각은 당국이 무엇을 억제하려고 하는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생겨났지만, 이 조치들은 현대 국가의 ‘권력 강화’를 정당화하는 데 도움을 준 최초의 ‘공중보건 제도’의 한 형태였다. 왜 40일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학적인 근거는 없다. 이 기간은 단지 상징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로 결정되었을 뿐이다. 구약과 신약 성서 모두에서 40은 종종 ‘정화淨化’의 의미를 내포한다. 사순절四旬節(Lent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주일 전 40일 동안의 기간으로 이 기간 동안 교인들은 광야에서 금식하고 시험받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되살리기 위하여 단식과 속죄를 행한다) 기간이 40일이며, 창세기에 나오는 타락한 인간을 심판하기 위한 대홍수도 40일간 이어졌다.
전염병은 확산하면서 공포와 불안, 집단 히스테리를 부채질한다. 그 과정에서 전염병은 위기 관리를 위한 사회적 응집력과 집단적 능력에 도전장을 내민다. 분열을 조장하고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게 전염병의 속성이다. 우리가 맞서 싸우고 있는 상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가족, 친구, 이웃 모두 감염원이 될 수 있다. 공공장소에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일상적인 의식들이 전파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봉쇄 조치를 시행함으로써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당국은 종종 억압자처럼 인식된다.
역사적으로 이런 시기에는 희생양을 찾고 책임을 외부인에게 강하게 전가하는 패턴이 반복되어 왔다. 이는 의미심장한 패턴이다.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전염병이 돌 때마다 끔찍한 집단 학살의 희생자가 되어왔다. 한가지 비극적인 사례를 들어보겠다. 흑사병이 유럽 대륙에 확산하기 시작한 지 2년 뒤인 1349년 밸런타인데이 때 프랑스 동북부 스트라스부르에서 유대인들은 도시의 우물을 오염시켜 전염병을 퍼뜨렸다는 비난을 받으며 개종을 강요당했다. 1,000여 명이 개종을 거절했고 그들은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같은 해 다른 유럽 도시들에 거주하던 유대인 공동체는 해체되어 유럽 동부 지역(폴란드와 러시아)으로 대규모 이주를 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유럽의 인구통계학적 구조는 영구히 바뀌었다. 유럽에서 퍼진 반유대주의는 절대주의 국가의 부상과 교회의 점진적인 쇠퇴뿐 아니라 상당 부분 팬데믹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역사적 사건을 초래했다. 변화는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퍼져 ‘복종 시대의 종말’로 이어졌고, 봉건주의와 농노의 시대가 종식되고, 계몽주의 시대가 시작됐다. 간단히 말해서 “흑사병은 현대 인류가 탄생한 비공식적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심오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변화가 중세 세계의 전염병에 의해 촉발되었다면, 코로나19 팬데믹 또한 오늘날 우리 세계에 장기간 지속될 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전환점의 시작을 의미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과거의 특정 전염병과는 달리 코로나19는 새로운 실존적 위협을 가하지는 않는다. 코로나19로 예상치 못한 대규모 기근이나 중대한 군사적 패배, 정권 교체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구 전체가 몰살당하거나 추방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적절하게 대처 하지 못해왔던 기존의 위험들을 극적으로 악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또한 장기간에 걸쳐 쌓여온 불안정한 추세를 가속화할 것이다.
의미 있는 대응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선 먼저 다가올 일에 대해 성찰하고 그것을 이해하도록 안내하는 개념적인 틀 내지는 간단한 인식도認識圖가 필요하다. 이때 역사가 제공하는 통찰은 특히 유용하다. 우리 자신에게 무엇이 어느 정도까지 바뀔지 까다로운 질문을 던져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준 역할을 한다. 우리를 안심시킬 수 있는 ‘정신적 닻’을 자주 역사에서 찾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통해 선례를 찾는다.
코로나19가 1918년 창궐한 스페인 독감(3차 유행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5,0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되는)과 유사한가?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 같은 것일 수 있을까? 9.11 테러 때 받은 심리적 충격과 비슷한 점이 있는가? 2003년 터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사스SARS와 2009년 일어난 신종플루와 유사한 면이 있는가? 2008년 대형 금융위기와 비슷한, 혹은 더 큰 충격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달갑지 않지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니다!”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인간이 받은 고통과 경제적 파괴의 파급력과 패턴에 맞먹는 것은 없다. 특히 경제적 여파는 현대사의 어떤 위기와도 비견될 수 없다. 팬데믹의 와중에 많은 국가와 정부의 수장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적과 전쟁 중이다. 은유적인 표현을 써서,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을 정말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전형적인 전쟁은 아니다. 현재의 적은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평가하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 가장 적절한 정신적 닻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질서와 경제에 근본적인 변화를 촉발했으며, 결국 근본적으로 새로운 정책과 사회계약 조항(여성이 유권자가 되기 전에 경제활동에 참여하게 된 것 등)을 마련하기 위한 길을 닦아준 사회적 태도와 신념의 급진적인 변화를 수반한 전형적인 변화 전쟁이었다. 팬데믹과 전쟁 사이에는 분명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지만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의 크기는 비견할 만하다. 둘 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의 변혁적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피상적인 유사성을 경계해야 한다. 최악의 끔찍한 시나리오에서도 코로나19는 흑사병을 포함한 대역병大疫病(Great Plagues : 1665년 영국 런던에서 발생한 선腺 페스트)이나 제2차 세계대전 때보다는 훨씬 적은 수의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경제는 육체노동과 농업이나 중공업에 의존했던 과거 세기의 경제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고도로 상호연결되고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코로나19가 미치는 실제 영향은 단순히 죽음, 실업, 파산 등과 관련된 (이미 충격적으로 나쁜) 통계치를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지금 우리 모두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다. 극도의 충격에 휩싸였을 때 혼란함을 느끼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이례적인 결과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을 갖는 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런 낯선 느낌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페스트The Plague》에 나오는, “그러나 이 모든 변화가 어떤 의미에서 너무 환상적이면서도 너무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에 어떤 영속성을 띨 것처럼 간주하기가 쉽지 않았다”라는 구절에 잘 묘사되어 있다. 상상할 수 없던 일이 닥친 이상, 이제 팬데믹 직후와 가까운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론 코로나19처럼 ‘중대한’ 변화가 앞으로 초래할 일에 대해 어떤 합리적 정확성을 갖고 말하는 건 상당히 시기상조지만, 팬데믹은 무엇보다도 세계화로부터의 일부 후퇴, 미국과 중국 간 탈동조화 심화, 자동화의 가속화, 감시 강화를 둘러싼 우려, 웰빙 정책에 대한 관심증가, 민족주의(nationalism) 부상과 그에 따른 이민의 두려움, 기술력 성장, 온라인상에서 기업의 존재감 강화 필요성 확대 등 코로나19 위기 이전부터 이미 가시화됐던 체제 변화를 가속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전에는 바꿀 수 없을 것 같았던 것들을 바꿔놓는 식으로, 단순히 변화에 가속도를 붙이는 수준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미 관례화된 헬리콥터 머니(helicopter money : 중앙은행이 소비 진작을 위하여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듯 대량으로 시중에 푸는 자금) 같은 새로운 형태의 통화정책, 몇몇 사회적 우선순위들에 대한 재고再考와 재설정 및 정책 목표로서의 공공재에 대한 검색 강화, 정치적 역량과 급진적 복지와 과세 조치 확보 시의 공정성에 대한 인식, 그리고 급격한 지정학적 재편처럼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더 광범위한 차원에서 이런 설명도 가능하다. 변화의 가능성과 그로 인한 새로운 질서는 이제 무제한이고, 좋든 싫든 우리의 상상력에 의해서만 제한된다는 것이다. 사회는 한층 평등주의적 내지는 권위주의적이 되거나 혹은 소수나 다수의 이익을 위해 집단주의나 개인주의 쪽으로 맞춰질 수 있다. 경제는 회복할 때 더욱 포용적인 길을 걸으면서 세계 공동체의 요구에 더 부합되거나 원래 기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전례 없는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새롭게 ‘리셋’해야 한다. 위기에서 벗어났을 때 더 바람직하고 유연한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클라우스 슈밥의 위대한 리셋" 중에서
【 영지주의 구원자 】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태반이
거의 무지에서 유래되는 것으로
양식(良識)이 없으면 착한 의지도
악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줄 수 있다."
- 알베르 카뮈 -
■ https://youtu.be/ZmG39IsNS4c
■ 발렌티누스는 세계와 인간이 모두 병들어 있다고 전제한다. 세계와 인간의 병듦은 동일한 근원을 가지고 있는 바, 그것은 '무지(無知)'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삶의 참된 가치에 무지하고, 그래서 그것을 거짓된 가치와 바꾸어버린다. 우리는 행복해지거나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것(이를테면 돈, 권력과 명성의 상징물, 육체적 쾌락 따위)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관념과 추상을 사랑하게 된다(우리의 엄격함은 추상적인 개념과 원칙에 지나치게 집착해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물질주의의 병을 영지주의자들은 '하일레티시즘(hyleticism : 물질의 숭배)'이라고 하고, 추상적인 지성주의와 도덕주의의 병은 '사이키즘(psychism : 마음과 감정적인 혼의 숭배)'이라고 했다. 이 세상이 온전해지도록 돕는 존재들(예수는 그 가운데서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의 참된 역할은 혼과 마음에 프뉴마 혹은 영의 지식을 전해줌으로써 이 병을 몰아내는 것이다. 물질적이고 심적인 것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영적인 자유로 대치가 되며, 거짓된 가치가 영와 하나된 참된 가치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발렌티누스가 말하는 예수의 치료 사역이다.
일부 학자들이 발렌티누스의 '영적인 평행(pneumatic equation)' 이라고 부르는 것의 첫 번째 명제는 세계의 체계와 인간의 체계가 둘 다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오로지 그노시스에 의해서만 의미 있게 변화될 수 있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수많은 신들조차도, 저마다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가공의 존재들일 뿐이다. 발렌티누스 학파의 경전인 <빌립복음>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이 매우 현대적인(혹인 탈현대적인) 구절을 발견하게 된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은 하느님을 창조했다. 그것은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여러 신을 만들어 자신이 창조한 그 존재들에게 예배를 드린다. (그런) 신들이 인간을 예배함이 마땅할 것이다."
(말씀 85)
인간의 마음은 대체로 자기가 창조한 환영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노시스와 같은 깨달음만이 인간의 마음을 그 세계에서 구원할 수 있다는 명제는 동양의 두 위대한 종교인 힌두교 및 불교와 상당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우파니샤드는 세계가 하느님의 마야, 곧 '환영'이며, 이 환영으로 인해 세계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발렌티누스나 다른 영지주의자도 분명 쉽게 쓸 수 있는 구절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세계는 무지와 덧없음, 그리고 참나(眞我)의 부재로 이루어져 있다. 체계 자체가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명제를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이제 발렌티누스가 말한 '평행'의 두 번째, 보완적인 부분도 인정해야 한다. 《이단 반박》에서 에레네우스는 이와 관련한 발렌티누스의 글을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완전한 구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함에 대한 인식 그 자체다. 무지를 통해 결함이 발생했기 때문에 ... 무지에서 생겨난 모든 체계는 그노시스 안에서 용해된다. 따라서 그노시스는 내적 인간(inner man)의 구원이다. 그노시스는 육체로부터 오지 않았으니 이는 육체가 썩어질 것이기 때문이요, 그것은 심적인 것도 아니니 혼조차도 결함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구원 그 자체는 영적인(pneumatic) 것임에 틀림없다. 그노시스를 통해서 내면의 영적 인간은 구원받는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보편 실재의 그노시스면 족하다. 이것이 참된 구원이다."(1.21.4)
따라서 잘못된 체계를 창조한 무지는 영적인 그노시스에 의해서 교정된다. 죄책감과, 이른바 죄에 대한 참회는 전혀 필요치 않다. 예수의 죽음에 의한 대속적인 구원이라는 맹목적인 신앙도 필요치 않다. 우리는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노시스에 의해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뒤틀리고 불리하게 작용하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도 존재의 충만함이라는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다. 따라서 영적인 자기 지식(self-knowledge)은 구원받지 못한 에고의 무지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 학자들은 대개 영지주의자들이 인류 전체의 운명이나 세상의 종말보다는 개인의 종말에 집중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전우주적 차원의 종말보다는 개인의 종말에 우선적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의 종말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보는 학자도 많다. 실제로 영지주의자들은 일차적으로 개인의 구원에 관심을 두며 세상의 구원에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 듯하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며,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도 아니고 누군가가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이룩하는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통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대속 신학이 영지주의자들에게는 무의미하다. 그들에 따르면, 세계는 본디부터 완전하게 창조되지 않았으며 현 상태의 불완전성이 죄와 타락의 결과가 아니다. 그리고 인류의 조상이 지은 원죄가 후대 사람들에게 이어져 내려오는 것도 아니다. 결국 하느님의 아들이 인류의 죄를 기워 갚기 위해 희생을 치를 필요는 없다. 구원자가 이 땅에 내려오는 것은 인간을 대신하여 희생을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무지를 일깨우기 위해서다.
주류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열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이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뜻하는 것이든 죄의 대속을 뜻하는 것이든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생명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죄책이 있는 한 용서의 수단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이 죄를 감면해 주어 죄인을 영원한 심판에서 구해 준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환전히 다르게 이해한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임무는 죄의 용서가 아니라 그노시스의 부여다. 구원자는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왜 이 세상과 고통과 죽음의 속박에 묶여 있는지 알려 주시려 오셨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앎으로써 감옥에 불과한 세상을 떠나 자신이 속하는 천상의 플레로마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리스도는 천상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그노시스를 주신 다음 영광스럽게 다시 천상으로 올라가셨다. 그리하여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천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다는 것이다.
구원자가 영적 나태에서 흔들어 깨운 사람은 참된 영지자(영적 인간, 깨달은 사람)가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지한 그대로 지상에 얽매여 지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을 가져다주는 깨달음은, 영이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획득해야 한다고 한다. 육신의 죽음으로 영이 저절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해방의 지식을 얻은 사람은 육체의 감옥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영적으로 자유를 누리며 이미 모든 종말론적 희망을 성취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학자들은 영지주의 종말론을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라 부른다.
한편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영은, 그것이 육체 안에 있건 육체를 떠났건 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처럼 무지에 머무는 영혼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다른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렇게 해서 개인의 종말론은 환생과 윤회 개념으로 연결된다. 그렇다고 모든 이에게 윤회의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 안에 영을 간직한 사람만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물질적(육체적) 인간, 곧 처음부터 자기 안에 영을 간직한 적이 없는 사람은 원천적으로 지식과 구원에서 배제된다. 이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육신과 세상에 빠져 영적인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다가 결국 소멸의 길을 걷는다.
이처럼 각 영혼은 저마다 자기 나름의 운명을 가진다. 자기 안에 깃든 영을 통해 지식을 얻고 구원될 사람, 영은 있으나 아직 지식을 얻지 못한 사람, 자기 안에 애초부터 영이 없어서 지식도 구원도 얻지 못할 사람, 이렇게 세 부류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각자의 운명이 달리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게다가 구원의 첫 요소인 지식과 깨달음이 개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도, 온 인류가 공동으로 체험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면, 종말론도 집단적 차원보다는 개인적 차원이 강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지식의 획득 : 구원과 종말의 현재성 】
■ 영지주의자들은 구원과 종말을 무엇보다 '지식(Gnosis)'의 획득과 연결시키며 그 현재성을 강조한다. 자기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비밀 지식을 획득한 사람은 이미 지상에서 구원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종말론적 희망이라 할 수 있는 구원이, 종말에나 이르러서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는 순간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진리의 복음」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이를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
"지식이 있는 이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압니다. 그는 인식합니다. 술에 취했다가 숙취에서 빠져나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 사람처럼 그리고 본디 제 것이던 것을 제자리에 세워 놓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누군가 지식을 얻었다면 위에서 온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이름이 불리면 듣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르신 분에게 돌아가며 그분을 향해 위로 올라갑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 불리는지 압니다. 그가 지식을 갖게 되면 자신을 부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 마음에 들고 싶어 하고, 안식을 얻습니다."(「진리의 복음」22)
「요한의 비전」도 구원 사건의 개별적 차원과 현재성을 부각시킨다.「요한의 비전」말미에 프로노이아(Pronoia)라는 이름의 구원자가 인간을 구원하러 물질계에 내려왔다가 플레로마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시로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도 구원과 종말의 개인적 차원과 현재성이 부각된다. 구원은 개별적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이며, 구원자가 인간을 봉인하는 순간, 곧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순결한 빛의 프로노이아다. 나는 동정이신 영의 '생각'이며 너를 영예로운 그곳으로 데려가는 자다. 일어나라! 그리고 들은 자가 바로 너임을 기억하여라! 그리고 너의 뿌리를 따라가라! 그것은 바로 나, '자비로운 이'다. 그리고 빈곤의 천사들과 혼란의 다이븐들과 너를 유혹하는 모든 자들에게서 너 자신을 지켜라! 그리고 깊은 잠과 저승 울타리를 조심하여라."(「요한의 비전」 31)
구원의 현재성은「구세주와의 대화」에서도 강조된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형제들이여, '이미' 그 시간, 곧 우리의 노고를 접고 안식 안에 머무를 시간이 도래했소. 사실 안식 안에 머무는 사람은 영원토록 쉴 것이오!"(「구세주와의 대화」120) 이 세상을 떠난 뒤 어디로 가게 되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주신 주님의 답은, "너희들이 도착하게 될 그곳에 지금 서 있어라!"(「구세주와의 대화」142)이다. 그 시간은 이미 도래했고, 그 장소에도 이미 도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을 얻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기다릴 필요도, 메시아의 도래나 세상의 종말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고 한다. 물론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천상의 플레로마에 완전히 합류하는 일, 곧 구원의 완성은 죽은 뒤라야 가능하다. 그러나 살아생전에 구원을 맛보지 못한 영혼은 죽어서도 이를 보장받지 못한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게 문제일 따름, 이미 종말은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토마 복음」 말씀에도 잘 나타난다.
"제자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죽은 이들의 안식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언제 새로운 세상이 옵니까?' 그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기다리는 것은 이미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토마 복음」51) 종말이 이미 다가왔음을 말씀하시는 내용은 더 있다. "제자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하늘나라가 언제 오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니다.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는 땅 위에 이미 펼쳐져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토마 복음」113)
【 루시퍼 ( 𝕷𝖚𝖈𝖎𝖋𝖊𝖗 ) 】
■ https://youtu.be/1AAfUBDffgk
■ https://youtu.be/4Nj4a38_rR8
■ https://youtu.be/AVfcWMuExtM?si=rojRzk96UIlbWJfE
■ https://www.instagram.com/p/Cc-R6wdpQ45/?igshid=MzRlODBiNWFlZA== 【 🌙 𝕷𝖚𝖈𝖎𝖋𝖊𝖗 】
■ "그러나 뱀이 자기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 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
- 고후 11장 3절 -
■ "웬일이냐, 너 새벽 여신의 아들 샛별아. 네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민족들을 짓밟던 네가 찍혀서 땅에 넘어지다니! 네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아니하였더냐? '내가 하늘에 오르리라. 나의 보좌를 저 높은 하느님의 별들 위에 두고 신들의 회의장이 있는 저 북극산에 자리잡으리라. 저 구름 꼭대기에 올라가 가장 높으신 분처럼 되리라.' 그런데 네가 저승으로 떨어지고 깊은 구렁의 바닥으로 떨어졌구나!"
- 이사야 14 장 12 ~ 15절 -
■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 루카 복음서 10장 -
■ https://www.youtube.com/live/gSXHlxiPKck?si=GCpeExURFsfaWpqc
■ https://youtu.be/9ghYt9M-tg8?si=eBgQDU5svzCxkq5h
■ https://youtu.be/2mXeFykzSsY?si=9nFbxQshJwdhM2Nl
■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을
너희가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 갈 1장 6절 -
【 권세를 받은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 】
■ https://youtu.be/F7MD-Lho4gs
■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서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 데살로니가후서 2장 -
■ "그들의 왕국의 마지막 때 곧 범죄자들이 가득할 즈음에 사나운 얼굴을 하고 숨겨진 글의 뜻을 깨닫는 한 왕이 일어나리라. 그의 권세가 강할 터이나 자기의 권세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그가 놀랍게 파괴하고 형통하여 마음대로 행하며 강한 자들과 거룩한 백성을 멸하리라. 그가 또 자기의 정책을 통하여 자기 손에서 속임수가 형통하게 하고 자기 마음속에서 자신을 높이며 평화를 빌미로 많은 사람을 멸할 것이요, 또 그가 일어서서 통치자들의 통치자를 대적할 터이나 그가 손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무너지리라. 이미 말한 저녁과 아침의 환상이 참된즉 너는 그 환상을 닫아 두라. 그것은 많은 날 뒤에 있을 일이니라, 하더라. 나 다니엘이 기절하여 며칠을 앓다가 그 뒤에 일어나서 왕의 일을 행하였느니라. 내가 그 환상으로 말미암아 놀랐으나 아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
- 다니엘서 8장 23 ~ 27절 -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
( 𝑴𝒂𝒊𝒕𝒓𝒆𝒚𝒂, 𝑨𝒏𝒕𝒊 𝑪𝒉𝒓𝒊𝒔𝒕 )
■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선포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선포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이나
너희가 수용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
너희가 그를 잘 용납하는도다."
- 고후 11장 4절 -
■ https://youtu.be/GgoqmpqbLfQ
■ https://youtu.be/NtNppEO_294?si=7SguA26iUF1zkfe5
■ https://youtu.be/1Oa_ZWccvcA?si=tiLh0AiF9wqkbmUw
■ https://youtu.be/84Y98-9giJw?si=JnCDluUrN5QMPUqN
■ https://youtu.be/9xSI0Jx3pJw?si=I9ZQlt7DhiGYZWI0
■ https://youtu.be/ZqgB99EAw-Q?si=QLxq6ym0ZTWNH7Ru
■ https://youtu.be/chlVJLMriuA?si=KJMei2JgdvKYnmUj
■ https://youtu.be/-cr4mfkSFBI?si=KoH6HDNHdBLpeOlv
■ https://youtu.be/V9saKMizhJc
■ https://youtu.be/gEDelO_DMJI?si=anfffESfoN8PbI-e
■ https://youtu.be/1K6cSNNSOIc
■ https://youtu.be/1YGvdWBIpaM
■ https://youtu.be/SrqoGD39Tn0?si=5JSWIlcwYeFdoKz-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이 남자는 7년 대환란의 전반 3년 반 동안은
자신이 적그리스도임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https://drfa.co.kr/biblestudy/24818
💬 인간 세상에는 예수가 대체 몇 명이나 있는 것인가? 이 세상의 신도들을 보라. 저마다 스스로 예수가 되어 자기 입맛에 맞는 진리를 택하며 설파하고 타종교의 진리는 악(惡)이라 규정해 탄압하며 배척한다. 또 누군가는 적그리스도의 후보를 추리는 한심한 일에나 몰두하고 있다. 그 자체가 계시를 의심하는 것임을 모르는 것인가? 그들은 그들 자신이 확고한 선(善)의 편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 세상의 시선이 저 신도들을 선(善)에 있다 여기고 있는가?
선(善)과 악(惡)의 구분이 사라진 전쟁을 상상해 보았는가? 인류는 그들의 역사에서 스스로 선(善)이라 주장하는 이들의 위선(僞善)과 배반, 그리고 몰락을 수도 없이 목격해왔다. 오늘날 대다수의 민중은 비합리적인 사회 질서에 대한 강한 환멸과 박탈감, 그리고 도덕성의 타락을 느끼면서도 누구 하나 선뜻 나서 변화를 시도하지 못하고 있을 뿐인 혁명 직전의 상황에 놓여있다. 일부는 우리를 악(惡)으로 규정하겠지만, 기존 사회 질서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리를 대적하는 세력이야말로 바로 위선적인 악(惡)이라 규정할 것이다.
선(善)과 악(惡)을가려낼 수 없다면 당신은 대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할까? 자신이 선(善)이라는 신념이 흔들렸을 때 과연 당신은 무엇일까?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목적은 오직 선(善)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 목적인 선(善)을 위해 우리는 악(惡)을 활용함에 있어 한치의 망설임이 없을 뿐이다. 우리의 태도에 있어 저들과 같은 비겁한 위선(僞善)과 중립(中立)은 없다.
■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어리석은 목자의 기구들을 빼앗을지니라.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화 있을진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내리리니 그의 팔이 아주 마르고 그의 오른쪽 눈이 아주 멀어 버릴 것이라 하시니라."
- 스가랴 11장 15 ~ 17절 -
【 모하메드(MOHAMMAD)에 대한 예언 】
■ https://youtu.be/AZ2A9afwerw?si=1huu7k6egCwEFUlg
■ 임마누엘[Jmmanuel]은 조용히 계셨다. 그들이 그 분의 머리를 또 다시 쳤을 때, 임마누엘은 고통 속에 신음하시며 말씀을 시작하셨다. “진실로 내 너희에게 이르노니, 지금 너희가 나를 핍박하고 조롱하는 것만큼, 너희 역시 핍박받고 조롱당하리라. 오늘의 잘못에 대해 너희가 대가를 치르게 될 날은 다섯 번의 백 년이 지난 후에 오리라. 이 땅에 새로운 자가 나타날 터인데, 그 자가 바로 너희들을 매질하고 박해하리라. 그리하여 너희는 너희들의 피로써 오늘의 죄값을 치르게 될 것이니라.”
■ “그 자는 새로운 종교[cult]를 만들 것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예언자라 부르게 할 것이며, 너희를 영원토록 박해하리라. 비록 그가 거짓 예언자이며, 또 거짓된 교리를 가지고 올 것이지만, 그는 대단한 권능을 지닐 것이며, 이후로 다가오는 모든 세월에 걸쳐 너희들을 박해하게 될 것이니라.”
■ “그의 이름은 모하메드[Mohammed]라 불릴 것이며, 그의 이름은 너희들에게 공포와 비참과 죽음을 안겨다 줄 것이니라. 허나 너희들은 그리될만 하기에 그리되는 것이니라. 진실로, 진실로, 내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의 이름은 피로써 기록될 것이며, 너희들에 대한 그의 증오는 끝이 없으리라. 그러나, 그는 거짓 예언자이자, 거짓된 교리를 전할 것이기에, 그가 만든 종교도 결국은 끝을 보게 되리라. 너희와 또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유혈이 낭자하게 될 이 세상의 종말을 위한 무대를 펼쳐 내게 될 때, 바로 그리 되리라.”
■ https://saveu.tistory.com/11
【 시온 의정서 】
■ https://m.blog.naver.com/gnosticism616/223130721891 【 적그리스도 616 】
■ "종속민들은 유일한 절대 권력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종속민들이 볼 때 우리 왕은 천사장(루시퍼)의 혼이며, 그의 모든 권력이 하나로 뭉쳐져 인간화한 형상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 왕은 지상의 왕이 되며, 도덕이 땅에 떨어진 사회에서 연명했던 통치자들을 모두 갈아치울 것이다. 고이들의 사회는 하나님의 권능을 부인하였고, 무정부주의의 불을 타오르게 타였으니 우리는 그 불부터 꺼야 할 형편이다.
우리는 많은 피를 흘리는 한이 있어도, 그런 사회의 존재를 모두 멸망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우리는 생각 없는 권세의 무리들을 인도적인 방법이든 악마적인 방법이든 가리지 않고 동원하여 모두 멸망시킬 것이다. 하나님의 가호를 받는 우리 왕만이 세상 권세의 무리와 악마의 무리를 모두 물리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이 우리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조아리게 될 것이다."
- 시온 의정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