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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thingness 】 실존

나스티시즘 2023. 9. 19. 21:06

【 無, Be Nothingness 】

( Bae Hyung Kyung )

갤러리시몬 전경
2023년, 3월 16일 ~ 5월 20일
관람 비용 무료
1층
無, Be nothingness
2층
3층
작품 해설


"인간은 언제나 서로 다른 벽 앞에 서 있다.
언젠가 사라질 수많은 것들.
끝없이 헤매고 떠도는 것들.
같음, 평등함.
작은 것을 향한 애틋한 마음.
불가능하지만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



 【 이중구속(Double Bind) 】
 

 모든 것이 언젠가는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 없어질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며 곧 아무것도 없는 상태다. 인간은 그것을 거부하며 팽팽하게 마주서 있다. "그저 '없어짐'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아니면 끝까지 저항해서 영원히 남고 싶은가?" 이 두 가지 질문이 인간의 내면에서 충돌하며 발끝까지 긴장하게 만든다. "없어지든 영원히 남든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선택할 수는 있는 것인가?"
 
어쩌면 "영원성에 대한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다. 인간은 자기 잘못과 죄가 남지 않는 무無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며 영원을 갈구한다. 스스로 삶과 죽음을 선택하고 결정해보겠다고 의지를 굳건히 한다. 영원히 살아남는 존재가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우리 앞의 죽음과도 같은 검은 벽, 실은 각자의 앞에 놓인 무거운 삶이다. '자기 앞의 생'은 우리에게 여생餘生을 말한다. 죽음과 없어짐까지 우리의 여생의 일부이다.
 
여기 건장한 사람들이 서 있다. 맨 머리통과 넓은 어깨, 비록 힘없이 떨구고 있지만 노동으로 다져진 팔과 큼직한 손, 홀쭉한 배와 군더더기 없는 몸통, 마지막으로 커다랗고 굳건한 발과 다리. 피부와 맞닿아 있는 골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커다란 관절은 수없이 조각가의 손을 탔다. 조각가는 강인한 뼈대를 드러내기 위해 손바닥으로 흙을 문지르고 또 문질러댔을 것이다. 그리고 살과 근육 섬세한 곳은 한 점 한 점, 검지에 흙을 찍어 붙였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조각의 몸은 절대 가볍지도 작지도 않다. 조각을 만들고 표현하는 과정은 조각을 이루는 물질과 맞아떨어진다. 시멘트로 만든 조각은 조금 방향을 틀기에도 버겁고, 철 구조물 역시 두껍고 무거워서 견고하게 땅에 박혀 있는 것 같다. 조각가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 같은 시멘트와 철을 가지고 지금 '없어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모두 무無로 돌아갈 것을 잊지 않는다면 인간들 사이의 다툼을 일으키는 '다름'은 정말 미미한 것이다. 조각가가 바라는 세상에서 저마다의 키가 다른 사람들은 높낮이를 달리하여 디디고 선 땅 덕분에 모두 동등한 눈높이를 가진다. 평등은 좀 더 자세한 관찰과 섬세한 대접을 요구한다. 목숨값이 같은 모두에게 주어져야 하는 평등은 그렇게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 인간은 사라지고 물질도 우주를 떠도는 먼지가 될 것이다. 조각가는 사라지는 인간들을 기억하며 하나하나 견고한 비석을 세운다. 예술은 유한으로부터 무한으로의 이행에 있기 때문이다.

 

- 이수영 / 백남준미술관 학예사 -

 

■ "길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두 개의 길이 이곳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 길들을 끝까지 가본 사람은 아직 없다. 뒤로 나 있는 이 골목길, 그 길은 영원으로 통한다. 그리고 저쪽 밖으로 나 있는 골목길, 거기에 또 다른 영원이 있다. 이 두 길이 여기서 마주치고 있다. 그렇게 여기 이 성문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 니체 -


【 방황 】

 
"인간은 추구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다."

「 파우스트 」

https://m.blog.naver.com/hillitoot/220508506899

[책]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다 - 「파우스트」를 읽고 by 힐리

  [책]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다 - 「파우스트」를 읽고 by 힐리 이 시대에서 영원한 위인...

blog.naver.com

 
우선순위의 변화(A Shift in Our Priorities) 】
 
■ "시간의 여유는 항상 큰 멈춤과 고독을 선사한다. 이 팬데믹 역시 개인적·사회적으로 우리가 누구고,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하고,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강제적인 집단 성찰의 시기는 우리의 믿음과 신념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재고해보는 행동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어떻게 교제하고, 가족과 친구를 돌보고, 운동하고, 건강을 관리하고, 쇼핑하고,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심지어 세계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지 등 우리 일상의 많은 측면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우선순위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점점 더 전면적으로 부각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뭐가 중요한지 알고 있는가? 우리가 너무 이기적이라서 우리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걸까? 우리는 좋은 커리어를 쌓는 데만 너무 우선순위를 두고 여기에 과도하게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소비자주의의 노예인가? 팬데믹이 가져온 멈춰서 생각해볼 시간 덕분에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대답은 이전에 내놓았을 대답보다 더 진화할 것이다."
 
■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실존적 위기는,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나 근심과 대면해 성찰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우리가 정말로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게 만들고, 더 창의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준다. 역사를 보면 경제적·사회적 침체 후에 종종 새로운 형태의 개인적·집단적 조직이 등장한다.
 
이미 역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꾼 과거의 팬데믹 사례들을 제시한 바 있는데, 역경이 닥칠 때 종종 혁신이 번창한다. 오랫동안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로 인식되어 왔다. ‘정상적인’ 세계의 속도와 광란에서 벗어나 더 많은 성찰의 시간을 선사한 코로나19 팬데믹의 경우 이 말이 특히 더 사실로 입증될지 모른다. (물론 병원과 식료품점과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수천만 명의 영웅적인 노동자들과 어린 자식을 돌봐야 하는 부모나 부단한 관심이 필요한 노인이나 장애인 친척을 보살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상황이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가 어떻게 변화될지,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에 대해 이미 많은 글이 등장했다. 그러나 자료와 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 우리의 미래 모습에 대한 온갖 추측들은 말 그대로 단지 추측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문제들과 관련된 몇 가지 가능한 변화들을 예측하고 검토해 볼 수는 있다. 팬데믹은 이전에 생각해보지 않았던 방법으로 우리의 내적 문제들을 해결하게 만들지 모른다. 위기와 봉쇄가 없었더라면 절대로 떠올리지 않았을 몇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우리의 심상 지도(mental map)를 리셋할 수도 있을 것이다."
 
https://youtu.be/NmAYfhGBP-I

 "자기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검토하는 것.
그것이 궁극의 메타-인지다."
 
💬 실존에 대한 질문은 분명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감각적인 차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육체라는 감옥의 한계를 비로소 직감한 인간의 영혼은 고개를 떨구며 실존을 질문했던 자신의 과거에 후회한다. 그것은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천진난만한 자아와의 작별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든, 무엇을 소유하고 성취해내든, 실존이라는 질문 앞에서 모든 현상의 가치는 소멸하고 만다. 예수가 인간을 대신해 짊어졌다는 십자가의 무게마저도 한없이 가벼워진다.
 
어느날 문득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지향점을 상실해버린 자신을 발견한 시점부터 인간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종교인가? 그러나 오늘날 종교라는 것에 남아 있는 것은 기복신앙이라는 껍데기뿐이다. 그들에게 실존에 대한 고뇌란 전혀 엄중하지도 않으며 단지 순간의 무게만을 상실할 뿐인 한없이 가벼운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을 굳이 개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류 역사는 정신 세계를 가진 이들의 방황이 자연적으로 고독한 길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https://www.instagram.com/p/Cd5ABwiJIRU/?igshid=MzRlODBiNWFlZA==묘신귀문관 】
 
"부를 가진 자는 한가롭게 살 수 있지만,
문학을 좇는 자는 언제나 할 일이 많다."

「 파우스트 」

 ■ "정신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은 신경 기능이 무척 활발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고통을 느끼는 감성이 극도로 예민하다. 나아가 그런 사람은 당연히 열정적인 기질을 갖추고 동시에 온갖 상상력이 넘치고 완벽하며, 그로 인해 유쾌한 감정보다 곤혹스러운 감정이 훨씬 많긴 하지만 감정의 변화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격렬하다. 또한 원래 지니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남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적으므로, 정신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은 자신의 소유물로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를 소원하게 만든다.
 
그들은 일반인이 커다란 만족을 느끼는 수백 가지 일을 진부하게 여기고 참지 못한다. 그래서 어디서나 통용되는 보상의 법칙이 어쩌면 이 경우에도 효력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가장 떨어지는 사람이 실은 가장 행복하다는 주장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는데 실제로도 그럴지 모른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런 사람의 행복을 부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 쇼펜하우어 -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가장 유쾌한 삶이다."
 
「아이아스」 550행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다."
 
「전도서」 제1장 18절
 


【 절망 】

"어리석은 생각이든, 똑똑한 생각이든,
옛사람들이 벌써 생각하지 않은 것은 없다."

- 메피스토, 「 파우스트 」 -
 
💬 내가 이 세상에서 조언을 구할 수 있는 통로는 고전이 유일했다. 고전만이 나를 연명하게 해주는 호흡기와 같았다. 삶의 보람을 찾지 못하고 세 번의 자살을 기도했다는 신지학자 엘리스 베일리는 내게 큰 위안이다. 삶을 일종의 '길잃음'이라 비유한 쇼펜하우어는 나의 진실된 스승이었다. 그를 일찍이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더 오랜 시간을 천박한 세류 속에 스스로를 죽이며 살았을 것이다. 끝내 자살을 택하지 않은 에밀 시오랑에게는 마치 전우애와도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는 내가 더 이상 철학이라는 것을 지속해야할 동기를 제거해주었다.
 
"정신을 위한 청량제로는 옛 고전을 읽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고작 반시간이라 해도 고전 작가의 어떤 작품을 읽으면 곧 생기가 나고 홀가분해지고 정화되고 고양되고 힘이 생기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신선한 물을 마시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과 같다."
 
■ "지층이 지나간 세기의 생물을 차례로 보존하고 있는 것처럼 도서관의 서가도 과거의 오류와 그것이 서술된 글을 차례로 보존하고 있다. 이런 글도 지나간 세기의 생물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는 크게 활약하고 큰 소동을 일으켰지만, 지금은 굳어서 화석으로 변해 문헌을 연구하는 고생물학자만 살펴볼 뿐이다."
 
■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신의 대군을 바라보며 100년 후에는 이 모든 사람 중에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두꺼운 도서 목록을 보면서 이 모든 책 중에 10년 후에는 읽힐 책이 단 한 권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면 누군들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겠는가."
 
■ "어느 시대에나 상당히 낯설게 서로 나란히 존립하는 두 가지 형태의 저작물이 있다. 하나는 참된 저작물이고, 다른 하나는 겉보기만 그럴듯한 저작물이다. 참된 저작물은 영원한 저작물이 된다. 학문이나 시문학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쓰인 참된 저작물은 진지하고 조용하지만 매우 더딘 발걸음을 한다. 그래서 이런 작품은 한 세기 동안 유럽에서 거의 한 다스도 나오지 않지만 영원히 존속한다. 학문이나 시문학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에 의해 쓰인 겉보기만 그럴듯한 저작물은 당사자들이 큰 소리로 야단법석을 떠는 가운데 빠른 속도로 내달린다. 그런 작품은 매년 수천 개씩 시장에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것들이 어디로 갔느냐고, 그렇게 일찍부터 떠들썩하던 그 명성은 어디로 갔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런 저작물은 일시적인 저작물이라고, 참된 저작물은 영원한 저작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
 
■ "문학의 세계도 인생과 다르지 않다. 어디로 눈을 돌리든 즉각 교정불능의 천민 무리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어디서든 무리 지어 살면서 여름의 파리 떼처럼 온갖 것을 가득 채우고 온갖 것을 더럽힌다. 그 때문에 무수히 많은 악서惡書, 문학에 무성한 이 잡초는 밀의 양분을 빼앗아 질식시킨다. 다시 말해 이러한 악서는 단순히 돈이나 지위를 얻으려는 의도에서 쓰인 것인데도 당연히 양서와 그것의 고상한 목적에 쓰여야 할 독자의 시간과 돈, 주의력을 빼앗아 간다. 그러므로 악서는 무익할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해롭다. 현재 우리나라의 저작물 중 10분의 9는 독자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빼내려는 목적밖에 없다. 이런 목적을 위해 저자와 출판인, 비평가는 똘똘 뭉쳐 있다.
 
현대의 문필가, 매문업자賣文業者, 다작가 들이 시대의 좋은 취향과 참된 교양을 외면하고, 전체 상류 세계를 고삐로 끌어내 즉각 자신들의 글을 읽도록 길들이는 데 성공한 것은 교활하고 고약한 짓이긴 하지만 눈부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교 모임에서 대화의 재료로 삼기 위해 모두 언제나 같은 책, 즉 최신 저작을 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 도움이 되는 것은 예전의 슈핀들러, 불버, 오이겐주에 등과 같이 한때 문명을 날렸던 작가들이 쓴 질 낮은 소설이나 이와 비슷한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런 통속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운명만큼 비참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독자들은 단순히 돈 때문에 글을 쓰고 그 때문에 늘 떼로 존재하는 극히 평범한 작가의 최신 졸작을 읽는 것을 언제나 의무로 생각한다. 그 대신 동서고금에 걸쳐 희귀하고 훌륭한 작가가 쓴 작품은 이름만 들어 알고 있을 뿐이다! 특히 미학적 감각이 있는 독자는 참된 예술 작품을 읽어서 자신의 교양을 높이는 데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시간을 평범한 작가들의 진부한 졸작을 읽는 데 허비하도록 교활하게 생각해 낸 수단이 바로 통속 소설을 싣는 일간신문이다.
 
사람들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작품 대신 항상 최신 작품만 읽기 때문에 저술가는 유통되는 이념의 좁은 범위에 갇혀 있고, 시대는 언제나 그 자신의 오물 속에 점점 깊이 파묻힌다. 그 때문에 우리의 독서법에서 보면 읽지 않는 기술이 극히 중요하다. 그 기술이란 늘 곧장 좀 더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끄는 작품을 그 때문에라도 손에 쥐지 않는 데 있다. 가령 곧바로 독서계에 물의를 일으키고 출판되는 해에 몇 판을 찍고 그것으로 끝나는 정치적 팸플릿, 문학 팸플릿, 소설, 시 따위를 사보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항시 얼마 안 되더라도 일정 시간을 독서에 할애해 모든 시대와 민족을 막론하고 나머지 인류보다 위대하고 탁월한 정신의 소유자이기에 그 자체로 명성이 자자한 작가가 쓴 작품만 읽도록 하라. 이런 작품만이 정말로 우리에게 교양과 가르침을 준다. 악서는 많이 읽게 되지만, 양서는 자주 읽지 못하는 법이다. 악서는 정신의 독약이라서 정신을 파멸시킨다. 양서를 읽기 위한 조건은 악서를 읽지 않는 것이다. 인생은 짧고 시간과 힘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 "옛날의 이런저런 위대한 작가를 논평한 책이 나오면 독자는 그런 책을 읽지, 그 작가의 저술 자체는 읽지 않는다. 독자는 단지 새로 나온 책만 읽으려 한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날의 멍청이가 지껄이는 진부하고 김빠진 잡담이 위대한 정신의 생각보다 독자의 수준과 구미에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젊은 시절 슐레겔의 멋진 경구를 접하고, 그때부터 그것을 나의 좌우명으로 삼은 운명에 감사한다."
 
"열심히 고전을 읽어라, 진정을 참된 고전을!
최근에 나온 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
 
고전을 읽어라! 참으로 가장 오래된 고전을!
현대인이 칭찬하는 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
 
「 고대 연구 」
 
"오, 어떤 평범한 인간은 다른 평범한 인간을 어쩌면 그다지도 닮았단 말인가! 그들은 어쩌면 모두가 하나의 틀에서 만들어진단 말인가! 누구나 같은 기회에 다른 생각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같은 생각만 떠오른단 말인가! 더욱이 그들은 저급한 개인적 의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멍청한 독자는 새로 나온 신간이라며 그런 가련한 자의 보잘것없는 잡담을 읽으면서도,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쓴 책은 책꽂이에 고이 모셔둔다. 모든 시대와 모든 나라에서 배출된 온갖 종류의 더없이 고위하고 극히 드문 정신의 소유자가 쓴 작품을 읽지 않고 방치하는 독자의 어리석음과 불합리함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그 대신 일반 독자는 단순히 갓 인쇄되고 잉크가 채 마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일같이 나오는 평범한 졸작, 매년 파리 떼처럼 무수히 생겨나는 졸작을 읽으려고 한다. 오히려 이런 작품은 몇 해만 지나면,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영원히 지나간 시대와 그 시대의 허튼 생각을 비웃은 단순한 재료가 될 뿐이므로, 이미 나온 날부터 내버리고 무시하는 것이 좋겠다."
 
- 쇼펜하우어, 「 여록과 보유」
제10장 독서와 책에 대하여 -
 


💬 하지만 수많은 방황 뒤에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국 같은 맥락의 저주스런 현실일 뿐이었다. 기존 사회의 어떠한 길이라도 나는 이미 예상한 실존적 결핍만을 마주하게 될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과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구조적 결함에 대한 이해(理解) 때문일 것이다. 그 외면할 수 없는 이해. 이 세계에는 아무것도 없다(無, nothingness). 물질 세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 어떠한 종류의 대상도 내게는 전혀 실존적 의미나 충만한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아무런 참된 가치도, 보람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도저히 몰입할 수가 없다. 시지프 신화는 인간 삶의 본질을 아주 적절히 비유한 것이다. 등이 굽은 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조각상들이 마치 오랜 방황 끝에 절망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기존의 사회에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 "그리스도교에서도 신은 모든 생명과 진리와 선의 유일원인(唯一原因)으로 파악되므로 ‘무(無)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하면서도 정면으로 무(無)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없었다. 또한 신에게는 긍정적 술어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중세의 이른바 부정신학(否定神學)에서도 신을 무(無)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없었다. 그러나 옛 가치관이 뒤집힌 현대에서는 서양철학에서도 무(無)는 중요한 근본개념(특히 하이데거를 비롯한 사르트르 등 실존철학에 있어서)이다."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94506&cid=40942&categoryId=31465

유와 대립하는 상대적 의미에서의 무 또는 부정으로서의 무가 아니라 유무의 대립을 넘어 근원적 ·절대적인 것을 성립시키는 것. 중국철학, 특히 도가(道家) 사상에서는 도(道)의 별명이라고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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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힌두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좌절케 한다. 본래 의도부터가 그런 것 같다. 우리가 살면서 중요시하는 그 어떤 것도 실은 아무 것도 아니고 찰나의 일도 아닌 그저 허망한 찰나 안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생멸의 일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우리에겐 나름 길고 긴 인생, 그래서 인생길이라 우리들이 부르는 삶 전체가 창조신인 브라흐마에겐 1찰나의 시간도 되지 않는다니 말이다. 기껏 100년도 살지 못하는 네가 잘 살든 못 살든 내겐 아무런 의미도 없단다, 라고 브라흐마가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지상의 일이란 무엇이든 간에
항상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 파우스트 」
 

우로보로스(Ouroborus)

 
■ 우로보로스(Ouroboru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수이자 중세 연금술에 등장하는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용 혹은 뱀의 형상을 한 생물. 북유럽 신화의 요르문간드가 위그드라실을 한 바퀴 감고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모습이라고도 한다. 고대의 환수로서 불사조나 맨티코어같은 여느 환상종과는 달리 기호와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무한한 순환, 그리고 원초적 통일 자기충족, 남녀추니, 영생불사를 의미하여 원형이기 때문에 '완전함'을 상징한다.
 
또한 처음(머리)과 끝(꼬리) 사이에는 과정이 있는데, 과정은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므로 '변화'를 뜻하며, 그렇기에 우로보로스는 변화를 상징한다. 이러한 두 상징 때문에 우로보로스는 연금술에서 하찮은 금속을 완전한 금으로 변화시키는 현자의 돌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윤회, 지식, 세계, 우주의 창조자 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우로보로스나 우로보로스와 유사한 문양은 여러 문명권에서 나타나며, 오랫동안 전래되면서 그 의미가 점차 심오해진 것으로 보인다. 카를 융도 이 상징에 대해 연구한 바 있다.
 
우로보로스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려 고대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발견 및 등장하고 있으며, 둥근 모양의 형상을 하고 있기에 '시작이 곧 끝'이라는 의미를 지녔기에 영원성 혹은 윤회를 상징했으며, 그 자체로 무한히 회전하기에 '불사와 무한'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은 물론, 그 속에서 탄생과 죽음을 끝없이 반복하는 시간은 물론, 방금 전에 서술한 탄생과 죽음의 결합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작이 곧 끝(혹은 원시반종, 천부경의 첫구절과 마지막구절인 일종무종일)이라는 점 때문에 창조주의 섭리를 표현하는 문양으로 해석되곤 하며, 그 자체로 동시에 끝없이 반복이 되는 우주와 그 전체성과 창조자들은 물론, 삶의 연속성을 상징하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
 
거기에, '자신의 꼬리를 물고 삼킨다'라는 점 때문에 심층심리학적인 관점에서는 자아 혹은 자기,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의 전체성 관계를 설명하는 모습으로 빗대어 말해지곤 하며, '자기기가 자기의 꼬리를 먹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그 어떠한 것도 남지 않는다'라는 상상으로 인해 '우로보로스 = 무(無)'라고 여기는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원'으로써의 의미가 강하며, 자웅동체에 자가생식, 자기부양을 하는 완전한 불사의 존재인 것은 물론,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있는 둥근 것이자 근원적 모태나 자궁으로 여긴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이 우로보로스를 가리켜 인간정신 프쉬케의 원형을 상징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자체로 순환성(악순환,영겁회귀), 영속성(영원, 원운동, 죽음과 재생, 파괴와 창조), 시원성(始原性. 우주의 근원), 무한성(=불로불사), 완전성(=전지전능)과 같이 의미하는 바가 매우 넓으며, 그렇기에 다양한 문화에서 종교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고대 후기 알렉산드리아 등의 헬레니즘 문화권에서는 '세계는 세계를 이루는 모든 존재로 창조되었다'라는 사상은 물론, 완전성, 세계령은 물론, 안과 밖, 있음과 없음, 삶과 죽음, 전체와 부분, 시작과 끝, 그리고 더 나아가 선악과 미추와 호오를 상징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우로보로스는 이집트 신화에서 나오고는 하는 시간 개념 중 하나이자 영원한 시간의 상징인 네흐흐(neheh)이자 생의 연속성이며 곧 태초의 시간인 젭테피(zep tepy)(다리 우르제이트라고 부름) 그 자체이자, 영원한 반복이자 이중성의 단일성, 그리고 만물의 순환적 본질을 나타내는 것은 물론, 모든 것 그 자체라고 한다.

【 영지주의와 탈현대 사상 】

 
■ 영지주의는 아주 먼 고대의 것이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현재의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부분적으로 이런 느낌은 고대 영지주의와 오늘날의 탈현대 사상이 처한 역사적 배경이 유사한 데서 기인할 것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와, 20세기 및 21세기의 환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다르지 않다. 두 시대는 모두 극도의 물질적 진보를 자랑한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처럼,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는 안정과 안전, 번영을 그 결과로서 제공한다.(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시장은 우리 시대의 쇼핑 센터와 유사한 목적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동시에 두 시대는 잔혹과 불안, 슬픔으로 가득하기도 하다. 로마는 노예 노동과 전쟁 포로의 피 위에 세워졌고, 현대와 탈현대 시대는 학살 수용소와 전체주의 폭군, 그리고 테러리스트의 공격이 극성을 부린다.
 
고대와 현대의 영지주의자들 및 영적인 면에서 그들의 친족쯤 되는 이들은 삶의 위대한 비밀은 이 세상에서 발견될 수 없으며, 따라서 한층 깊고 덜 세속적인 근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로마 공화국 당시의 소박하면서도 고상한 문화적 분위기는 로마제국에 이르러서 다문화적이며 거대한 허무주의적인 길로 빠지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근대 서구 사회의 낙천적, 현세적, 이성적, 진보적 토대 또한 지금 흔들리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누구나 이성을 통해 '자연 법칙'을 발견할 것이며 이러한 법칙의 적용을 통해 모든 것이 점점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날 이런 가정은 심하게 도전받고 있다. 이성을 통한 진보라는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지주의자들의 시대에, 올림피아 신전의 나이든 고전적인 신들은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는 현대의 신들 - 정치적 이데올로기, 과학, 사회학, 의학을 바탕으로 한 심리학, 그리고 가장 최근의 환경 보호주의(environmentalism) - 의 황혼을 보고 있다. 여전히 우리 문화는 18세기 계몽주의의 이성주의적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철하게 대한 확신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새록새록 불거지는 의심들이 지난 300년 동안 지속되어 온 세속의 신념을 잠식시키고 있다. 한때 본래부터 질서정연한 것으로 이해되던 자연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질서한 것이라는 사실이 일부 과학자들에 의해 관찰되고 있다. 인간의 역사 또한 더 이상 합리적인 인간이 자신의 기호에 맞게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역사의 과정은 인간의 이성과 목적에 따라 조작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힘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 또한 점점 더 밝혀지고 있다. 혼돈 이론의 등장으로, 만물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universe)는 예전의 조화로운 우주(cosmos : 질서와 조화를 갖춘 우주를 일컫는다)가 아니라, 놀라운 사태들이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끝없는 유출과 유동의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새로운 이론들에 대한 전문 분석가이자 국제적으로 유명한 환경사학자인 도널드 위스터(Donald Worster)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단단해 보이는 모든 것(너무나 자명해 보이는 진리들)이 대기 중으로 사라지는, 탈현대적,탈구조주의적 시대"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을 좀더 실감나게 설명하기 위해, 영화 속에서 이와 같은 문화적 특징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나타나는지 살펴보자. 몇몇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1950년대 대부분의 영화는 과학의 노력을 통해 이 세계가 행복한 방향으로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40년 후 영화 <쥬라기 공원>은, 무책임하고 이해타산적인 과학을 등에 업은, 아무런 거칠 것이 없어진 사람들에 의해 유린당한 자연의 끔찍한 모습을 소개한다.
 
이러한 차이가 우연히 생긴 것일까? 예리한 관찰자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차이점의 발생이 인간 행위와 도덕 가치에 대해 염려스런 질문이 점점 느는 것과 관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아챈다. 순탄한 진보를 오랫동안 믿어 의심치 않아온 사람들에게는 아주 파괴적으로 보이는 이런 탈현대적 경향이 처음 싹튼 곳은 다름 아닌 과학이었다.
 
혼돈 이론은 오랜 기간 우주와 자연의 예측 불가능성 - 1920년대 발표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원자와 같이 지극히 작은 물체들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법칙)가 그 시작을 알렸다 - 을 연구해 온 학자들의 통찰을 더욱 확장시켰다. 간단히 말해, 이 이론에 따르면 (날씨 또는 우주 자체와 같은) 체계의 장기적인 움직임은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다. 정확하게 예측하려면 그 체계의 최초 조건은 완벽하게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함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래서 임의 사건의 원리(the principle of random events)가 예측 가능성의 원리보다 널리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의 이런 극적인 전환은 궁극적으로 그보다 외연이 큰 문화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과학의 요새만이 아니라 문학, 연극, 시각 예술, 사회과학의 요새 또한 해체주의의 구심력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다. 문학은 정치적, 사회적 궤도를 따라 해체되고 있으며, 그 결과 전통적으로 중시되어 왔던 문학적 유산이 붕괴되고 있다.
 
혼돈 이론이 실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영지주의적 세계관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고대 영지주의자는 아마도 혼돈 이론을 흥미로운 소식으로 접할 듯하다. 데미우르고스의 작품인 우주는 의심스러운 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 그 중에서도 우주가 대부분 모조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예컨대 영지주의 경전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는 무시간적인 영원을 잘못 모방하여 시간의 주기를 만들어냈다. 우주의 질서와 법칙과 장엄함은 대부분 위조된 것이다.
 
불변하는 질서와 인과율이라는 덮개 아래 있는 우주는 무질서하고 임의적임에 틀림없다. "하느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진술에 대해, 영지주의자는 "오, 지금도 하지 않는가?"라며 반어적으로 대답할지도 모른다. 데미우르고스의 가장 일반적인 이름 중 하나인 얄다바오트(IALDABAOTH)는 '유치한 신'이라는 뜻이다. 자신이 조립한 우주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존재의 특징에 딱 들어맞는다.
 
물론 영지주의자들은 우주를 만든 - 주사위 놀이를 아주 잘할 것 같은 - 하느님과, 만물과 체계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근본 하느님을 구별한다. 초월적인 하느님은 주사위 놀이를 할 것 같지 않다. 게다가 영지주의 사고방식에서 단언적 진술은 그다지 적절하지가 못하다. 몇몇 영지주의 경전은 지고의 근본 하느님의 모습들(aspects)이 데미우르고스의 영역을 은밀히 관통하고 있다고 분명히 암시한다. 내재적, 초월적인 요소가 우주의 거짓 질서 아래 놓여 있다. - 그래서 또한 혼돈 아래 놓여 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은 의식意識, 더 정확히는 그노시스와 관련이 있다. 우주는 해체될 때 자신을 혼돈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그노시스라고 알려진 달라진 의식에 의해 관통되면 혼돈은 본래의 질서를 지닌 내재적 실재를 드러낸다. 이 질서는 데미우르고스의 세계를 지배하는 거짓 질서와 확연히 다르다. 따라서 우주의 거죽 밑에 있는 혼돈을 인식하는 것이 그노시스로 가는 첫걸음이다.
 
물론 더 내딛어야 할 걸음이 남아 있다. 혼돈 이론이 합리적, 과학적 방법으로 발견된다면, 초월적 질서는 오직 그노시스에 의해서만 발견된다. 질서 너머에 있는 이 질서는 오직 비일상적인 고양된 의식의 상태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이 실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수학적 계산과 문학적 해체가 아니라 그노시스이다.
 
영지주의자는 어떤 점에서 허무주의자와 다른가 】
 
최근 영지주의를 도덕적 허무주의라고 비판하는 자들은 영지주의자를 실존주의와 니체 철학, 심지어는 나치즘과 관련짓는다. 그런 비판 뒤에는, 모세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 자는 온갖 그릇된 행위를 용인하기 쉽다는 생각, 더욱이 이 세계를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자는 반드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와 유사한 주장은 대부분의 탈현대 사상에 대해서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유사함이 동일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실존주의와, 혼돈 이론을 포함한 현대 및 탈현대의 다른 사상들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영지주의와 유사하다. 현대와 탈현대의 사상은 어느 정도 영지주의적인 방법으로 소외, 절망, 영혼의 세상에로의 추락 - 영혼의 구속, 불안, 실족적 공포 - 따위의 주제를 역설한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실재에 대한 영지주의 개념의 절반 정도만 투박하게 보여줄 뿐이다.
 
실존주의와 그와 유사한 사상 어디에서도 우리는 소외되어 불안해하는 절망한 영혼이 찾아갈, 이 세계 너머의 절대적 실재에 대한 확실한 보증을 찾을 수 없다. 현대와 탈현대의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 채 절망 속에 내버려져 있는 데 반해 영지주의자는 구원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영지주의는 일반적으로 전통을 이루는 데 필요한 특징(가르침과 경전, 영적 예식)을 모두 갖추고 있는 하나의 전통이다.
 
대체로 전통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 시대는 자연스레 영지주의의  비전통적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와 탈현대 사상과는 달리, 영지주의의 전통적인 측면은 사람들에게 삶의 목표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 준다. 영지주의자는 인간이 영원에서 기원했다는 것, 그리고 또한 영원이 인간의 목표라는 사실을 안다. 이것이 현대와 탈현대 사상과 영지주의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든다!
 
영지주의를 도덕적 허무주의라고 비난하는 인간적 측면은 무엇인가? 고대 영지주의자들이 주류 기독교인에 비해 법을 잘 지키지 않았다는 기록은 없다. 영지주의자들이 과도한 성행위를 했다는,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비난과 비방을 우리가 신뢰하지 않는다면, 영지주의자를 범죄자나 심지어 부도덕주의자와 관련시킬 근거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마니교 영지주의자가 지독하리만치 금욕적 순결을 지켰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며, 중세의 카타르 파도 그런 순결을 유지했다. 신학적으로 카타르 파를 적대시했던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는 "그들의 도덕성은 순결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확실히 신비주의적인 삶은, 그것이 영지주의적인 것이든 혹은 다른 종교의 것이든 간에, 그것이 보증하는 것만큼이나 위험이 따르고, 그 위험의 일부는 신비가의 행위와 관계가 있다.
 
신비주의는 때때로, 기독교 십자군과 종교 재판, 그리고 이란의 이슬람 혁명 조치 같은 현상이 증명해 보이듯이, 광신주의로 귀결되기도 한다. 수많은 십자군 수도사들이나 종교 재판관들은 나름의 신비가로 불류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오늘날의 다소 잔인한 율법학자로 분류되기도 한다. 영지주의 전통을 따르면 자들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문화에 대한 틀에 박힌 관념을 부정하는 것이 허무주의를 뜻한다면 영지주의자는 떳떳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할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정직성을 늘 유지해 왔다. 그들은 어떤 사회 - 로마나 페르시아 제국, 또는 자신들이 '짐승'이라고 말한 중세 가톨릭 교회라 하더라도 - 를 향해서도, 제도를 숭배하는 자들이 즐겨 바치곤 하는 무조건적인 찬양을 바치지 않았다.
 
그러나 순교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교부들의 비난 중 하나가, 영지주의자들이 기독교인에 대한 로마의 박해를 피해 달아났다는 것이다. 그 용기를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카타르 파 사람들조차도 종교 재판관들의 손에서 죽기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시간이 되자 그들은 운명을 당당히 받아들이고 찬양을 부르며 화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빌립복음>은,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과 똑같이 인간도 자신이 찬양할 자신의 신들을 창조하는 방법으로 화답했다고 반어적으로 말한다. 그런 신들은 인간을 예배함이 마땅하다(!)고, <빌립복음>은 기록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대부분의 인간이 만들어 내는 생각, 투사, 집착 따위가 틀에 박힌 죽은 관념들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을 찬양하는 것은 전혀 무가치한 행위이다.
 
모든 시대는 저마다 선호하는 우상을 가진다. 중세 시대에는 교황과 주교가 해석한 기독교의 이상理想이 신성불가침의 것이었으며, 그것에 대해서는 황제마저도 복종해야 했다. 과학과 인본주의 시대에는 인간의 진보라는 복음이 그 문화의 신성한 우상이 되었다. 오늘날 진보라는 우상 또한 자신의 토대 위에서 비틀거리고 있는데, 이는 주로 역사의 서글픈 교훈과 탈현대 사상들 때문이다.
 
만일 인간 역사가 진보하고 있다면 왜 우리는 피로 얼룩진 가장 참혹한 역사를 20세기에 경험해야 했는가? 히틀러와 스탈린, 마오쩌둥은 정말 진보의 산물인가? 히로시마의 희생자들은 원자폭탄의 모습으로 자신들에게 찾아온 진보의 축복 앞에 감사해야 하는가?
 
생물학자 데이비드 에렌펠드David Ehrenfeld는 《인본주의의 오만The Arrogance of Humanism》이라는 책에서 진보주의와 인본주의의 지나친 오만으르 이렇게 고발한다. "진보 사상은 우리 시대의 질병이다. 진실로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결과를 예상할 수 없을 뿐더러 비참하게 끝을 맺는 경우도 많은 그런 변화들의 조종간을 붙잡고 있는 한갓 엔지니어일 뿐이다." 영지주의자는 틀림없이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만일 진보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더 나은가? 만일 제도들이 변화를 거부하면 그 제도들을 변화시키는 데 우리의 지성과 열성과 삶을 바쳐야 하는가? 이 세상의 바스티유 감옥들을 끊임없이 습격하며 매번 각각의 전투와 혁명, 전쟁이 마지막이 되기를 희망해야 하는가? 영지주의자들이 자진해서 전쟁이나 혁명을 일으켰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랑그독에서 카타프 파에 동정적인 자들이 칼을 쥔 것도 자기 방어를 위해 마지못해 그렇게 한 것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을 초월하는 데에 관심했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에 관심하지 않았다. 현대 문화의 이상들과 우상들 대부분을 해체하기 위해 탈현대 시대가 혼돈 이론 등을 통해 이 세계에 허무주의를 확산시키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허무주의라는 말은 '무無'를 뜻하는 라틴 어에서 왔다. 모든 것이 해체될 때 남아 있을 법한 것이 바로 무이다. 그렇지 않은가?
 
만일 그런 변화의 한가운데서 영지주의의 희망이 생겨난다고 한다면, 세속의 구조물이 소멸하고 난 뒤에는 영이 충만으로 복귀하는 일이 이어질 것이다. 일시적인 것이 손상을 입을 때 영원한 것이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 종종 있다. 인간이 망상에서 깨어날 때 - 망상이 떨어져나갈 때 - 인간은 참 진실을 발견한다. 이런 점에서 사실 영지주의자는 낙관주의자다. 그노시스가 세상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이들에게 찾아오리라고 영지주의자는 확신한다.
 


【 희망 】


"삶은 절망의 다른 면에서 시작한다."

- 사르트르 -
 
https://youtu.be/bNsR_socuZs?si=Ziy8vBn09TojHA51

■ "과학과 예술 분야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창의적인 인물들이 봉쇄 속에서 성과를 이뤄낸 역사적 에피소드가 많다. 아이작 뉴턴은 페스트 기간 동안 빛을 발휘했다. 페스트 발발 이후인 1665년 여름 케임브리지대학교가 문을 닫아야 했을 때 뉴턴은 영국 동부 링컨셔(Lincolnshire)에 있는 본가로 돌아가 1년 넘게 머물렀다. 다음 해인 1966년 뉴턴은 강제 격리 기간 동안 자신의 중력과 광학 이론, 특히 중력을 지닌 물체들 사이의 거리가 두 배로 되면 중력의 끌어당김은 4분의 1이 된다는 ‘중력의 역제곱 법칙(inverse-square law of gravitation)’의 발전(뉴턴이 살던 집 옆에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낙하하는 사과와 달리 달은 낙하하지 않고 공전하는지 이유를 고민하다가 이 법칙을 찾아냈다)의 토대를 마련하는 등 창조적 에너지를 쏟아냈다. 과학계에서는 이때를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라고 부른다.

문학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억압된 창의성이 서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작품 여러 편의 탄생에 기여했다. 학자들은 1593년 페스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런던 극장들이 폐쇄된 사건이 영국 극작가인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시詩로 관심을 돌리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이때 그는 비너스가 ‘위험한 해로부터 감염을 추방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소년의 키스를 애원하는 내용의 대중적인 설화시 〈비너스와 아도니스(Venus and Adonis)〉를 출간했다.
 
몇 년 뒤인 17세기 초에 런던 극장들은 페스트 때문에 문을 열 때보다 닫을 때가 더 많았다. 페스트로 인한 사망자가 주당 30명을 넘을 경우 극장 공연을 취소해야 한다는 공식 규정도 마련됐다. 1606년에 극장이 페스트로 폐쇄되고 극단이 공연을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매우 많은 작품을 쓸 수 있었다. 불과 1년 만에 그는 《리어왕(King Lear)》, 《맥베스(Macbeth)》,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Antony and Cleopatra)》를 썼다.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Pushkin)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1830년 러시아 니즈니노브고로드(Nizhni Novgorod)에 콜레라가 유행하면서 그는 한 지방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됐다. 몇 년간 개인적으로 혼란스러운 일을 겪던 그는 갑자기 안도감과 자유와 행복감을 느꼈다. 검역소에서 보낸 석 달이 그의 삶에서 가장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시기였다. 이때 푸시킨은 걸작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Evgeny Onegin)》을 완성하고 일련의 촌극을 썼는데, 그 촌극 중 하나를 〈페스트 중의 잔치(A Feast during the Plague)〉라고 불렀다.

코로나19 위기가 문화와 엔터테인먼트 세계에 끼치고 있는 재앙적인 재정적 충격을 축소하거나 외면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희미하게라도 희망과 영감의 빛을 발견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페스트나 팬데믹이 창궐하는 동안 우리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인적 창의성을 발휘한 역사적 사례를 인용해보았다.
 
창의성은 우리 사회의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가장 풍부하게 발휘되며, 바로 이 창의성이 인류 회복력의 원천임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다수 존재한다. 이는 특이한 형태의 리셋이지만 그렇다고 놀랄 일은 아니다. 실로 충격적인 사태가 일어났을 때 풍부한 창의성과 독창성이 발휘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제자들은 결국은
스승에게 배운 적도 없는 것처럼
자기 방식대로 발전해간다."

「 파우스트 」
 
■ "책을 읽을 때는 생각하는 일이 거의 없다. 우리가 스스로 사색하지 않고 독서로 옮겨 갈 때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처럼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머리는 독서를 하고 있는 한, 실은 타인의 사상의 운동장에 불과하다. 종이 위에 씌어진 사상은 일반적으로 모래 위에 남은 보행자의 발자국과 같은 것으로서, 물론 그 사람이 걸어간 길은 알 수 있지만, 그 사람이 그 길을 걸으며 무엇을 보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눈을 사용해야 한다."

- 쇼펜하우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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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애 책한권] 쇼펜하우어 수상록 / 쇼펜하우어

"소설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재미있는 것과 재미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소설 '설국(雪國)'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와 시대를 같이한 소설가 다니자키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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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란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 생각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학생이 글쓰기를 배울 때 선생이 연필로 그어놓은 선을 따라 펜을 움직이는 것과 같다. 그것에 따라 책을 읽으면 우리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독자적 사고를 하다가 독서를 하면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는 책을 읽는 동안에는 타인의 생각이 뛰어노는 놀이터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물러가면 남는 게 뭐란 말인가? 그 때문에 거의 종일 책을 읽지만 그 사이에 멍하니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취하는 자는 독자적 사고를 할 능력을 점차 상실한다. 그것은 마치 늘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결국 걷는 법을 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매우 많은 학자의 실상이 그러하다. 그들은 책을 많이 읽어 바보가 된 것이다. 틈날 때마다 독서하는 생활을 계속하면 손작업을 계속하는 생활보다 더욱 정신이 마비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손작업을 할 때는 자신의 생각에 몰두할 수 있다. 하지만 용수철이 다른 물체로부터 계속 압력을 받으면 탄력을 잃듯이, 다른 사람의 생각이 끊임없이 떠오르면 정신도 탄력을 잃고 만다. 음식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위를 망치고 그 때문에 몸 전체를 해치는 것처럼, 정신도 자양분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영양 과잉으로 질식해 버린다. 다시 말해 정신은 글씨를 지우지 않고 겹쳐서 써놓은 흑판처럼 되고 말아 읽은 것을 되새기지 못한다. 음식이란 먹는다고 우리 몸에 양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화를 해야 하는 것처럼, 되새겨야만 읽은 것이 자기 것으로 된다. 반면에 끊임없이 책만 읽고 나중에 그것을 계속 생각하지 않으면 읽은 것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대부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신의 양식도 육체의 양식과 마찬가지로, 섭취한 양의 50분의 1 정도만 흡수되고 나머지는 증발이나 호흡, 또는 그 밖의 일로 없어진다. 이러한 모든 사실 이외에도 종이 위에 적힌 생각은 모래 속에 남은 보행자의 발자국과 진배없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이 걸어간 길은 알 수 있지만, 그가 길을 걸으며 무엇을 보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눈을 사용해야 한다."
 
- 쇼펜하우어, 「 여록과 보유」
제10장 독서와 책에 대하여 2-1 -

 "너희들이 시대정신이라 부르는 것은,
실은 시대를 반영하는 너희 자신의 정신이다."

「 파우스트 」

【 그노시스와 허무주의 】

 
■ 혼돈 이론과 그것이 함축한 의미는 많은 관찰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도널드 워스터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물었다. "혼돈의 우주 안에 사랑하거나 보호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런 우주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그런 곳이라면, 뭔가 누구에게 해를 입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의 모든 개인적인 야망을 품고 앞으로 전진하는 게 어떠한가?" 거의 2천 년 전에도 비판가들은 영지주의자들에게 이와 유사한 질문을 던졌다.
 
그 당시 분쟁의 원인은 영지주의자들이 모세의 율법과 여타의 종교적 규범을 구원에, 더 정확히는 그노시스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데 있었다. 물론 영지주의자들은 종교적으로 또는 세속적으로 인정된 규율이 사회에 무익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바르게 행동함'으로써 구원과 천복天福의 권리를 살 수 있다는 개념에 반대했다. 하지만 도덕률 폐기론(법을 반대하는 것)의 책임이 계속해서 영지주의자들에게 돌려졌다. 그 뒤에는 영지주의자를 향한 비난이 허무주의, 주로 도덕적 허무주의에 대한 고발로 바뀌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구 문화는 모세의 율법보다는 우주의 질서와 법칙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모세의 계명을 비판하는 것이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며, 그 대신 질서정연한 우주에서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는 생각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을 법하다. 문화에 대한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신념이 붕괴될 위기에 놓이면, 도덕적 허무주의의 두려움이 명분을 얻게 마련이다. 한 문화 속에서 철학적 공허함이 입을 벌리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채우려고 한다.
 
이기주의자와 탐욕가, 호색가 - 영지주의의 가르침에서 보자면 물질적인 자 - 는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기회를 이용할 것이다. 어떤 이들 - 영지주의자들이 심적인자(psychics)라고 부를 법한 - 은 근본주의라는 '낡은 종교'에서 피난처를 찾고 종교적 규율의 요새 안에 숨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의 극소수 - 영적인 자, 곧 영의 사람 - 만이 내면을 향해, 곧 해방의 그노시스를 향해 돌아설 것이다. 로마 시대에도 그러했듯이 오늘날에도 이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에게 쏟아진 허무주의에 대한 비난은 어떤 것인가? 이 비난은, 그 허무주의를 비난한 것 말고는 영지주주의 사상에 공감하고 1950년대 이후의 영지주의 연구에 대변화를 불러일으킨 한스 요나스에 의해 다시 강한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유대교의 핵심 가르침인 -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기독교에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 윤리적 유일신론에서는 늘 사회적 규범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데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법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따라야 하며, 그렇게 않으면 하느님이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벌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고대는 물론 현대의 영지주의자들도 윤리적 유일신론에 동의할 수 없으며 동의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유는 다양하다. 신화적으로 말하면 법의 근원은 데미우르고스이다. - 줄잡아 말해도, 이 사실이 법의 권위를 떨어뜨린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최후의 가장 위대한 사자使者인 예수는 모세의 옛 율법을 폐기하고 그 자리에 영지주의자들이 사라으이 법이라고 부르는 자신의 율법을 세웠다.("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왔다는 예수의 말씀을, 영지주의자들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 또는 '마무리 짓는 것'으로 해석한다.) 마지막으로 영지주의자들은 사회의 법을 이차적인 실재, 곧 영적 실재의 위조품 정도로 여긴다.
 
영적 통찰을 갖춘 수준에 오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사회의 법을 신성시하여 '신의 법'이라는 권위를 부여하면서 자신들의 규율과 제도가 초월적 실재인 양 투사한다. 법이 종교의 최우선 목표가 되게 함으로써 인간은 그노시스의 가능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킨다. 한편 영지주의자는 영을 추구하려고 애쓴다. 영에 대해서는 "그것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요한복음> 3장 8절, '그것'을 가르키는 단어 '프뉴마'는 영 또는 바람을 뜻한다)라고 씌어 있다. 가장 위대한 카발라주의자와 기독교 신비가, 그리고 수피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비가들도 종교적 규율을 경시한 영지주의자들의 태도를 따르고 있다.
 



"전율이란 인간이 지닌 최상의 감정이다."

「 파우스트 」

■ https://www.instagram.com/p/CgxxwR9Pevq/?igshid=MzRlODBiNWFlZA== 【 신세계 질서 】
 
■ https://www.instagram.com/p/Cd0MNC2Jsva/?igshid=MzRlODBiNWFlZA== 【 올바른 길 】
 
💬 '환경'이란 삶의 행로에 있어 절대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절망적인 삶에 한줄기의 빛과 같이 다가온 그 '이상(理想)'이 과연 나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가. 하지만 이것이 일종의 현실적인 강제나 더 깊은 고통의 원천이 되어 나를 구속하지는 않게 될까. 그러나 애초에 그 이상(理想)이라는 것이 단지 허구에 지나지 않았고 스스로의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허황된 망상일 뿐이었다면 나는 쇼펜하우어형 인간으로서 남은 생을 죽은 채로 보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러한 이상(理想)을 구현할 지력도, 현실적인 여건도, 절박한 동기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어떠한 행로에도 나의 실존이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이 드는 것은 젊은 날의 성급한 판단인가. 내게는 심지어 제때 잠에 드는 것도, 끼니를 챙겨 먹는 것도, 건강하고 명랑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아주 기본적인 일들을 지속하는 일조차 버거울 것이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저주받은 나의 본질이 원인이다. 삶의 유일한 구원은 천진난만함이라는 에밀 시오랑의 말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쇼펜하우어형 인간으로서 남은 생을 지속할 수 있다는 가능성부터가 애초에 나에게는 오류였다.

"찬란하게 빛나는 것은 순간을 위해 생겨난 것이지만,
참된 것은 후세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 파우스트 」

https://youtu.be/0E8lqKNozn0

1 : 46 : 37 , 길을 묻다, 길을 찾다.

"언제나 갈망하며 노력하는 자는
구원될 수 있다."

「 파우스트 」
 
https://youtu.be/dbfwtHzVE7w

1 : 21 : 30

"신께 도대체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지 물었던 자신이 한심해졌다.

종교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으로서,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했다."
 

인생은 비교를 넘어 진짜 내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


https://www.instagram.com/p/Cgy0K2EpbAL/?igshid=MzRlODBiNWFlZA==본질에 대한 순응 】

https://www.instagram.com/p/ChctIDRv0bO/?igshid=MzRlODBiNWFlZA==희망 】
 
https://youtu.be/P33-7vi0UL0?si=TlrZ5uh_9VbU_Ovk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 파우스트 」
 


【 실존 】

 
"존재한다는 것은 의무다.
비록 순간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 파우스트 」
 
■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했던 “우리를 죽이지 않는 것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말은 약간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핵심을 짚고 있다. 팬데믹에서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이 더 강해진다는 말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누군가는, 팬데믹 당시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훗날 뒤돌아보면 실로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 행동과 성취를 통해 더 강해질 것이다."
 


■ "회의(懷儗)에서 구제되어 - A : 다른 사람들은 불쾌해지고 약해지고 으깨어지고 벌레 먹었을 뿐만 아니라 반쯤 물어뜯긴 채 일반적인 도덕적인 회의에서 벗어나지. 그러나 나는 이전보다 더 용감해지고 더 건강해져서 다시 획득된 본능과 함께 그것에서 벗어나네. 매서운 바람이 부는 곳, 폭풍이 부는 바다, 견뎌야 할 위험이 적지 않은 곳에서 나는 유쾌해진다네. 나는 자주 벌레처럼 일하고 파고들어야 했지만 벌레가 되지는 않았어. B : 자네는 정말 더 이상 회의가가 아니군! 왜냐하면 자네는 부정하기 때문이야. A : 그리고 부정하는 것과 함께 다시 긍정하는 것을 배웠네."

- 니체 -
 
https://youtu.be/PCmn2M7RxGc

【 환생과 소멸 】

 
■ 개인의 종말론과 관련하여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혼이 저마다 자기 나름의 운명을 가지며, 구원이 모든 이에게 해당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이는 여러 본문을 통해 확인된다. 「부활에 관한 논고」에서도 인간의 운명은 예정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구원과 속량을 받도록 선택받았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의 지혜에 들어가도록 미리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저마다 운명이 정해져 있어서 선택된 자만이 지식을 얻을 수도, 구원을 받을 수도 있으며, 선택되지 못한 자는 지식의 획득 가능성 자체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선택된 자라 하더라도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다른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나마 윤회의 가능성이 모두에게 주어지지도 않는다. 자기 안에 영을 간직한 사람만 다시 태어날 수 있으며,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물질적(육체적) 인간, 곧 처음부터 자기 안에 영을 간직한 적이 없는 사람은 원천적으로 지식과 구원에서 배제된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소멸뿐이다.(「요한의 비전」 27)
 
영지주의 종말온은 아직 구원되지 않은 영혼들의 총제적 운명까지 포괄하며, 인류 전체의 운명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러나 이를 논하는 자리에서도 영지주의 본문은 극소수의 '뽑힌 이들'의 구원에만 초점을 맞춘다. 인간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안에 영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인데 극소수의 영적 인간만이 이에 해당한다고 믿기에 그렇다. 그들은 오히려 인류의 대부분이 영을 지니지 못했다고 본다.
 
그들에 따르면, 영이 없는 자들(육적 인간)에게는 그노시스의 가능성도, 구원의 가능성도 없다. 영을 간직했으나 육신과 세상에 얽매여 아직 그노시스를 얻지 못한 자들(혼적 인간)도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다른 몸을 빌려 계속 환생해야 한다. 따라서 영지주의자들은 인류의 집합적 운명을 거론할 때조차 극소수의 뽑힌 이들과 대다수의 그렇지 못한 자들의 운명을 나누어 설명한다. 뽑힌 이들(영적 인간)에게는 구원이, 그렇지 못한 이들(육적 인간)에게는 소멸이 기다린다는 것이다.

■ 영지주의 종말론은 단순히 '실현된 종말론' 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 종말론 또한 '이미와 아직' '현재와 미래' 사이의 긴장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정통 그리스도교 종말론과 영지주의 종말문을 비슷하 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오다.
 
가장 큰 차이점은 정통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세상의 종말은 세상의 쇄신과 구원을 뜻하지만,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세상의 종말은 말 그대로 종말이며 끝 이라는 점이다. 영지주의의 이원론적 세계관에서는 세상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소멸의 대상이며,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리라는 기대도 의미가 없다. 이 세상은 이 세상, 저 세상은 저 세상일 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정통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모든 이의 구원을 지향한다. 구원자 예수님은 '모든' 인간,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지주의 종말론에서는 구원이 극소수의 뽑힌 자들에게만 향한다. 인류 전체의 운명을 논하는 대목에서도 모든 인간의 구원을 말하지는 않는다. 모든 인간이 신적 섬광을 지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영이 아닌 창조주가 만든 아류 영이 담겨 있 다고 한다. (발렌티누스파도 인간을 영적• 혼적 • 물질적 인간으로 분류한다. 그 가운데 물질적 인간은 애초에 영이 없기에 영적 세계와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물질과 세상에만 빠져서 살아가는 물질적 인간이 인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영을 간직한 사람, 영적 인간은 극소수다.)
 
영이 없는 자들은 그노시스를 획득할 가능성도, 하늘로 올라갈 가능성도 없다. 그들에게는 구원이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지주의 본문에서는 극소수인 영적 인간의 운명만 중요하게 다뤄진다. 다른 피조물의 운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세상에 속하는 모든 것, 물질로 된 모든 것이 소멸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에게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는 말씀이 통하지 않는다. 허무의 지배 아래 든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로마 8,20~21)도 그들에게는 허언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영지주의 종말론은 '극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종말론이지 '온 인류' 혹은 '모든 피 조물'을 위한 종말론은 아니다.
 
그리고 영지주의 본문에서는 하느님 나라, 혹은 새로운 세상이 이 땅에 도래하리라는 기대나 희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언급이 별 의미가 없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뚫고 들어오게 만들 책임보다는, 영이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올라가는 것만이 진정으로 중요하다. 영지주의 종말론이 그리스도교 종말론과 대척점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행복의 첫째 조건은 분별력이 있는 것이다."
 
「안티고네」 1328행
 
"바보의 삶은 죽음보다 고약하다."
 
예수스 시락, 「위경僞經」 
 
겨우 평범한 수준의 지력을 지녀서 정신적인 욕구가 없는 인간은 '필리스터(속물)'라고 불린다. 그 단어는 원래 대학 생활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다가 좀 더 고상한 의미에서 뮤즈의 아들과 반대되는 인간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원래 의미와 유사하게 사용된다. 다시 말해 속물이란 예술적 감각이 없는 인간을 말한다.
 
그런데 나 같으면 좀 더 고상한 입장에서 속물의 정의를 줄곧 현실이 아닌 현실에 매우 진지하게 관여하는 사람이라고 내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선험적인 정의를 내리면 내가 이 책에서 취하는 대중적 입장에 맞지 않을 것이고, 또한 그 때문에 어떤 독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기술한 정의는 특수한 해설을 덧붙이기에 한결 수월하고 문제의 요점, 즉 속물을 특징짓는 모든 특성의 근원을 충분히 나타낸다. 따라서 속물은 정신적 욕구가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에서 여러 가지 결론이 나온다. 첫 번째 결론은 속물 그 자체와 관련해, "진정한 욕구가 없으면 진정한 향유도 없다"라는 이미 언급한 원칙에 따라 그는 정신적 향락을 누리지 못한다. 인식과 통찰을 위한 아무런 충동이 없고, 인식과 통찰에 대한 충동과 매우 유사한 미적 향유에 대한 충동도 없으므로 그의 생활은 활기를 띠지 않는다.
 
그러한 종류의 향유가 가령 유행되고 권위를 지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강요받는 경우에도 일종의 강제 노역으로 여기고 되도록 빨리 끝내 버리려 할 것이다. 속물이 즐길 수 있는 현실적 향유란 감각적 향락뿐이다. 즉 그는 감각적 향유로 대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굴과 샴페인을 즐기는 것이 그들 생활의 정점이며, 육체적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손에 넣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며 살아가면 그야말로 행복하다! 재산이 그에게 미리 주어져 있으면 그는 반드시 무료함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무료함을 이기려고 무도회, 연극, 사교, 카드놀이, 도박, 승마, 여자, 음주, 여행 등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것을 시도한다. 그렇지만 정신적 욕구가 부족해 정신적 향락을 맛볼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 무료함을 달랠 수 없다. 그 때문에 동물적인 진지함과 유사한 아둔하고 무미건조한 진지함이 속물의 고유한 특성이 된다.
 
그런 자는 무슨 일에도 기뻐하지 않고 자극을 느끼지 못하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감각적 향락이 금방 고갈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속물로 이루어진 사교계는 곧 따분해지고, 카드놀이는 결국 지루해진다. 어쨌든 그에게 나름대로 허영심에 대한 향유는 아직 남아 있다. 그러한 허영심은 부나 지위, 세력이나 권력으로 타인을 능가해 존경받으려는 마음이거나, 같은 속물 중에서 걸출한 사람과 교제해 그런 자의 후광을 즐기려는 마음이다(영어의 '스놉snob'이 그런 자를 일컫는다).
 
앞에서 내세운 속물의 근본 특성에서 타인과 관련해 두 번째 결론이 나온다. 즉 속물은 신체적 욕구밖에 없으므로 정신적 욕구가 아닌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정신적 능력을 요구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정신적 능력을 대하면 그는 혐오감, 심지어 증오감마저 느낄 것이다.
 
그럴 경우 그는 단지 불쾌한 열등감을 느낄뿐더러, 막연하고 은밀한 질투를 느낀다. 그는 질투심을 주도면밀하게 은폐하려고 하는데, 그로 인해 질투심이 더욱 커져 때때로 무언의 원망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러한 특성에 따라 가치 평가를 하거나 누구를 존경하고 싶은 마음은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로지 지위나 부, 권력과 영향력만 존경할 것이다. 그는 그런 점에서 남보다 뛰어나기를 바라므로 그의 눈에는 그런 것만이 참된 장점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빚어지는 이유는 그가 정신적 욕구가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속물의 커다란 고민은, 이상적인 것에서는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무료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항시 현실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현실적인 것은 한편으로 곧 고갈되어 즐거움을 주는 대신 피곤을 안겨 주고, 다른 한편 온갖 종류의 재난을 초래한다. 반면 이상적인 것은 고갈되지 않고 그 자체로 무구無垢하고 무해하다.
 
- 쇼펜하우어 -

공허(無), 의미, 실존, 치유.

https://youtu.be/4M-T3VW9PJc?si=WfN4QDOFUz8wdD0q

💬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현상은 단지 예정된 수순일 뿐인가. 순서와 자아가 완벽하게 맞물려 전개되는 필연의 연속. 이제부터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확립해야 할 것이다. 변하는 것은 없다.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절망인 동시에 희망임을 깨달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참된 자아(眞我)와 마주할 수 있다. 그때야 비로소 천진난만함이 아닌 깨달음에서 오는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다. 집착이 아닌 초월을 통한 몰입을 경험할 수 있다. 영혼과 물질 사이 조화로운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질 수 있다. 천진난만함은 인간의 구원이 아니며, 진정한 구원을 향한 길이 분명 존재한다는 그 '앎(Gnosis)'에서 영지주의자(gnosticism)의 실존은 이미 시작된 것이며, 동시에 완성된 것이다.
 
■ https://www.instagram.com/p/Cm-_EoIynYZ/?igshid=MzRlODBiNWFlZA== 【 네 운명은 너의 선택 】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 이사야 49 - 4 」
 


부활

 
"사용하지 않는 재산은
무거운 짐일 뿐이니,
우리는 오로지 순간이
만들어 내는 것만 이용할 수 있다."

「 파우스트 」
 

 
■ 영지주의 종말론은 '부활'과 관련된 대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영지주의 본문에서는 '부활'이 '육신의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육신은 영을 가두는 감옥에 불과하며, 영이 육신을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다. 따라서 육신의 부활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이는 오히려 영을 다시 육신에 가두는 일이 될 따름이다. 육신의 옷을 벗을 때 참으로 복된 이라 할 수 있으며 그때라야 살아 계신 분의 아들을 뵐 것이다.
 
육신은 부활의 대상이 아니라 소멸의 대상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육신의 부활을 믿는 이들이 어리석게만 보인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신의 부활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부활은, 영적인 부활이며 깨달음(그노시스)의 상징일 뿐이다. 다시 말해 부활이란, 무지와 망각에 사로잡힌 인간이 깨달음을 얻어 잠과 죽음에서 깨어나는 것, 곧 영적인 각성인 것이다.
 
따라서 영지주의자들에게 부활은, '지금 여기서' 곧 지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 일어나야 하는 일로 이해된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고통을 받았으며 그분과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 우리는 그분에 의해 하늘로 끌어당겨졌습니다. 태양에 의해 광선이 당겨지듯, 그 어떤 것에도 가두어지지 않은 채 말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부활입니다."(「부활에 관한 논고」45~46)
 
죽기 전에 깨달음을 얻어 영적으로 부활했으며, 또 그렇게 해서 물질의 구속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에게 부활은 현재 사건이지 죽은 뒤 혹은 종말에 일어날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다. "'주님께서 먼저 돌아가셨다가 일어나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먼저 일어나셨고 그 다음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필립보복음」56) 따라서 우리도 주님처럼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부활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부활을 획득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육신의 옷을 벗었을 때 안식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중간 지대(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머무는 장소)에 있습니다. 그곳들에서 발견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습니다. 세상의 선은 선이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의 악은 악이 아닙니다. 이 세상 뒤에도 악이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악하며 '중간'이라 불립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필립보 복음」66) "
 
"먼저 죽고 그 다음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부활을 미리 얻지 않는다면 그들이 죽었을 때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필립보 복음」73)라는 말씀도 마찬가지 의미다. 이 구절들은 모두 부활이란 죽은 다음에 일어날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현재의 일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대를 감싸고 있는 육신의 끈을 내버리는 그때에는 존재하시는 분께 다다를 수 있을 테요. 그리고 그때에 그대는 더 이상 야고보가 아닐 테요. 대신 그대는 '존재하는 자'가 될 것이요."(「야고보의 첫째 묵시록」27) 영지주의자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 '지식'을 획득함으로써 육체와 세상을 벗어나 천계로 올라갈 수 있다고 여겼음을 이 작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식을 얻는 순간 영혼은 육체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자유로이 비상하여 세상을 떠나 본향인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혼의 진보 정도에 따라 오를 수 있는 하늘 높이가 다르다고 본다. 영적으로 가장 진보한 영혼만이 가장 높은 하늘까지 올라가 최고 신을 뵙고 그부과 합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지주의자들이 추구한 하느님 직관이며 합일이다.
 
https://www.instagram.com/p/CjtsziwPvIZ/?igshid=MzRlODBiNWFlZA== 【 명확한 단순화 】
 
https://www.instagram.com/p/CofNAzYp_RL/?igshid=MzRlODBiNWFlZA==오직 신세계 】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

「 파우스트 」
 
💬 이제부터 나에게 필요한 것은 강한 믿음을 통한 욕망의 응집이지 더 이상 논리나 근거로써 현상을 밝히는 일 따위가 아니다. 세상은 언제나 극복할 수 없는 무지와 천박함, 끝이 없는 폭력과 분쟁이 자연적인 우세를 지닌다. 때문에 이 세상에는 전체 인류의 행복과 질서를 위해서 청소부로 태어난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물질 세계 자체의 결함과 인간의 본성, 그리고 사회 구조의 비합리성을 이해하고 전체 세계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본질적인 숙명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들의 실존은 자신의 직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증오하고 혐오하는 데 뿌리를 둔다. 시대의 종식을 이끄는 일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의 사명이라면, 진실로 그것만이 내게 허락된 단 하나의 실존이자 진정한 치유일 것이다. 그것이 망상이라 하여도 이제부터 나는 차라리 그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 믿음 밖이 내게는 지옥이니까.

https://youtu.be/_lHAj9dXrZM?si=95jchvl-RL2w0TX8

https://youtu.be/L6bCuftdRL4?si=__H1jOjRBNUSIIa7

https://youtu.be/hEVIaCOkBAY?si=YbfT2jQFibRPSBzN

▪️https://youtu.be/uJI5IUaZEYs?si=Bd4UxcL-prlKvT4p

https://youtu.be/WekRKIxDarA?si=FHQ7DiaNtHNx98eS

https://youtu.be/nw_PXfNvJKU?si=jMyNz6ANARgR80eF

■ https://youtu.be/J8y6cWfPgOo?si=-TtGyY3Qqg71lbxT

■ https://youtu.be/i1d9NXQdDJI?si=r0Z-St_ov-8_yGHW

■ https://youtu.be/uf-yMhd2OR0?si=4_tETt3UV9FNlEZC

■ https://youtu.be/5gUtXBi8HBY?si=oAFDJkGqbEvZV14V

https://youtu.be/QDIFyOvYwrs?si=dNp9m6yvNqoxXQpj

https://youtu.be/JQfZm552QoI?si=95-SrTXdJ1rEHk5-

■ https://youtu.be/w4ZtUu9O7uI?si=77stwkbDroVek2Yb

■ https://www.instagram.com/p/Cd_LS5dpghN/?igshid=MzRlODBiNWFlZA== 【 지식의 저주 】
 


https://youtu.be/1uEwXcULQyc

"상처를 입히고 떳떳할 용기가 없다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마라."

https://youtu.be/pCmu-OHYEEE

"의심하지 말지어다.
선한 것이 선하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고
악한 것이 악하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함에 의심하지 말라.
삶이란 투쟁이며 너 자신이 전사임을 알라.
내가 나로서 내린 결정을 의심하지 말라."

빨리 죽고 끝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