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컬 데미안 】 용기
■ https://youtu.be/e6g5-zsg63A
【 아브락사스를 추구한 소설 데미안과 작가 】
신과 악마가 공존한 고대의 신…
무의식을 찾아 참 자아를 구현하려는 노력
■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정확하게 이해했다는 사람에게 존경심을 보내고 싶다. 처음 읽었을 때엔 무슨 내용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 이번에는 차분하게 다시 읽어 보았다. 처음 읽을 때보다는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작가가 무슨 의미를 전하려 했는지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해설서를 읽어보면 ‘진정한 자아’ 또는 ‘참 자아’를 찾아가는 길이라는 설명이 많고, 데미안은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의 ‘또다른 자아’, 또는 ‘참 자아’라고 한다. 그런 해설엔 공감이 간다.
그런데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의 존재는 무엇인가, 세계 대전이란 집단적 광기는 개인의 자아를 추구하는 것으로 해결되는가. 의문은 다음번에 일독하는 기회에 해소하기로 하고, 이제까지 이해한 것만으로 소감을 정리하기로 한다. 데미안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읽힌 작품이라고 한다. 전쟁을 치르고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집단주의, 물질주의에 개인이 파괴되는 과정을 겪었기에 한국인들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싱클레어에 공감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 물질만능의 공허함과 이데올로기의 강요를 푸근하게 감싸줄 에바 부인을 필요로 할른지도 모른다.
소설 데미안에서 가장 눈에 띠는 대목은 아브락사스(Abraxas)라는 신의 존재다. 싱클레어는 꿈 속에 나타난 새를 그려 데미안에게 보냈다. 데미안의 답신은 이러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나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는 유대교에서 선의 신을 의미하는 야훼와 악마의 신인 사탄을 합친 개념이다.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 종교, 특히 기독교는 선의 신만을 강조하고 악마는 배제한다. 그런데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초기 기독교에서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신, 즉 아브락사스를 숭배하는 파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종파를 그노시스(Gnosis)파라고 한다.
데미안은 성경의 등장인물 카인의 부적을 설명하면서 악의 세계에 대한 숭배를 지적한 바 있고, 싱클레어가 나중에 만나는 피스토니우스가 아브락사스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싱클레어는 꿈속에서 새를 보았고, 그 새를 그림으로써 아브락사스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에게 쾌락과 공포, 남자와 여자가 뒤섞이고, 성스러운 것과 추악한 것이 서로 얽히며, 사랑과 죄악이 어우러지는 그런 모습이 아브락사스였다.
■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32
■ 아브락사스 Abraxas를 묘사한 3세기경의 영지주의 장식물. 아브락사스는 공격과 방어를 상징하는 전통적인 채찍과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둘레에는 광선의 개수가 다른 별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일곱 행성(불완전함을 의미)을 초월해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덟 광선이 한 벌을 이루는 옥도아드ogdoad 별도 있다.
【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아브락사스 】
■ 데미안은 그노시스즘에 기반하여 쓰인 소설이다. 그노시스즘은 우리말로 '영적인 지혜' 영지주의라고 번역한다. 영지주의는 모나드라고 하는 절대적 신성(divine)에 도달하게 하는 경험적 지식으로서 '신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영지주의의 일파인 오피스파(Ophites)에서는 그노시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금언을 가지고 있었다. "완전해지는 것의 시작은 인간을 아는 것이고 완전해지는 것의 완성은 신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앎은 통상적으로 '내적인 앎(inward knowing)'의 과정 또는 '자아 탐구(self-exploration)'의 과정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브락사스라는 말은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오래된 고대의 보석들에 새겨져 있었다. 아브라삭스 선과 악, 즉, 모나드와 데미우르고스를 한 존재 속에 모두 지니고 있는 신의 이름이다. 최근 수 세기 동안에 아브라삭스는 한 이집트 신이자 악마라고 주장되었다. 때로는 사탄 혹은 루시퍼의 이중적인 성격과 연결 짓는 경우도 있었다.
마법사의 주문인 아브라카다브라(abracadabra)가 아브라삭스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콥트어 이집트 복음>와 같은 나그함마디 문서에서 나온 고대 영지주의 문헌들에서는 아브라삭스를 소피아와 함께, 그리고 플레로마의 다른 아이온들과 함께 엘레레트(Eleleth)라는 루미너리(luminary, 발광체)의 빛 속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인 칼 융(1875-1961)은 1916년에 《 죽은 자들에게 주어진 7강의들 》 이라는 짧은 영지주의적인 글을 썼다. 여기에서 칼 융은 모든 대립물이 한 존재 속으로 결합된 신이 아브라삭스이며, 아브라삭스는 기독교의 신이나 사탄보다 더 고차적인 개념의 신이라고 하였다. 칼 융은 어느 인터뷰에서 신을 믿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신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모나드는 그노시즘에서 최고의 신, 만물의 아버지, 만물 위에 거주하는 불가시의 무한한 지고한 신성(神性)을 말한다. 모나드는 한계 지을 수 없는데 모나드를 한계 지을 수 있는 그 무엇도 모나드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나드는 순수하고 신성하며 무한한 빛이다. 모나드는 완전 · 축복 · 신성을 뛰어넘는다. 모나드는 유(有: 유형)도 무(無: 무형)도 아니다. 모나드는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니다.
모나드는 광대무변(vastness)하다. 모나드는 무한한 단순성을 가지고 있다. 모나드는 아이온들을 낳는 아이온이며, 생명을 주는 생명이며, 축복을 주는 축복이며, 지식을 주는 지식이며, 선을 주는 선이며, 자비와 구원을 주는 자비이며, 은총을 주는 은총이다.
이 모나드의 '충만' 또는 '충만한 상태'(fullness)적인 면을 플레로마라고 부른다. 또한 이 플레로마는 소피아이기도 하다. 이 플레로마는 데미우르고스를 낳는다. 데미우르고스의 어머니이자 최고신의 플레로마, 즉 최고신의 "충만 상태"의 일부 측면이었던 소피아는 최고신의 전체성과 분리되어 어떤 것을 창조하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전체와 상관없이 부분으로서 이러한 창조의 욕구를 가졌다. 소피아는 이 분리된 창조로 인해 괴물 같은 데미우르고스를 낳았다. 그러자 소피아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는 데미우르고스를 구름(cloud)으로 감싼 후 그 안에 데미우르고스를 위한 보좌(throne)를 만들어 주었다.
플레로마에서 분리되어 혼자 있게 된 데미우르고스는 다른 어떤 존재들은 물론이요 자신의 어머니도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이 탄생한 곳인 고급한 실재의 세계에 대해 무지하였기에 오직 자신만이 홀로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몇몇 영지주의 철학자들은 데미우르고스를 구약성경의 신인 야훼(Yahweh, 여호와)와 동일시하였다. 그는 자신의 힘의 근원, 즉, 자신이 나온 근원 장소에 대해 무지하였기에 "나는 최고신이다. 나 이외에는 다른 어떤 신도 없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데미우르고스, 즉 구약성경의 신은 신약성경의 신과는 반대된다는 견해를 가졌다. 또한 다른 몇몇 영지주의 철학자들은 데미우르고스를 사탄(Satan)과 동일한 존재로 보았다. 중세의 카타리파(Catharism)는 사탄이 악한 세상의 창조자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는 영지주의 신화들에는 신적인 요소들이 인간의 형상 속으로 실락 하였다는 것을 묘사하는 난해한 표현들로 가득 차 있다.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의 어머니인 소피아로부터 힘의 일부를 가지고 물질 세상과 인간의 물질적 형상을 창조하는 일을 시작하는데, 이들을 창조할 때 데미우르고스는 상위의 플레로마를 무의식적으로 모방하여 창조하였다. 이 결과 소피아의 파워가 인간의 물질적 형상들 속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물질적 형상들은 물질 우주 속에 갇힌 바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영지주의 운동의 전형적인 목표는 물질 우주와 물질적 형상 속에 갇힌 이 스파크(spark, 불꽃)를 일깨우는 것이었다. 즉, 이 스파크가 일깨워짐으로써 스파크는 데미우르고스, 즉 물질 세상과 물질적 감각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태초의 근원인 지고한 비물질적 실재의 지배를 받게 되고 이를 통해 이 실재 또는 이 실재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그노시스 운동의 전형적인 목표였다.
■ https://steemit.com/kr/@isis-lee/5d3nwn
【 베일 너머에서 온 빛 】
https://youtu.be/yJ789O4qSRc?si=RfZW9S7Gq4TzrodU
■ 옛날부터 철학적인 사고와 신비적인 통찰을 불러일으켜 온 것으로서 가장 오래되고 또 장엄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밤하늘이다. 천문학자들이 저 광활한 우주의 비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기분 나쁜 블랙홀의 존재라든지 새로운 별의 눈부신 탄생 등에 대해 밝혀내기 훨씬 전부터, 사람들은 별들이 박혀 있는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거기에서 영감을 얻곤 했다.
밤하늘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는 칠흑 같은 어둠과 그 아래로 매달린 듯 보이는 무수한 별빛 사이의 뚜렷한 대조이다. 우리는 마치 시커먼 접시나 모자가 이 세상을 덮고 있는 것 같은, 그래서 숨 막히는 암흑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검은 베일에 뚫린 구멍 사이로 빛 알갱이들이 새어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밤하늘, 그 검은 베일의 저편으로 빛 알갱이 가득한 세계가 있고, 그곳에 저 별빛들이 처음 뻗어 나온 무한한 빛의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 : 1976년 데뷔한 캐나다 가수, 내면 탐구와 현실 참여의 메시지를 노래에 담아내는 20세기의 음유 시인)은 <성가(Anthem)>라는 곡에서 "모든 것엔 틈이 있으니, 그곳으로 빛이 새어 든다"고 노래했다. 코헨이 사용한 이 단순한 은유는, 나중에 영지주의자라고 알려지게 되는 비범하고 매력 넘치는 사람들에 의해 2천여 년쯤 전에 이미 사용되었던 은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단이라고 경멸과 박해를 받아 3, 4세기 이후 거의 사라졌으나, 그들의 가르침과 의식儀式은 서양 문화사 곳곳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더 이상 영지주의자도 영지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되기 무섭게 그들은 비록 형식은 바뀌었을망정 본질은 그대로인 채로 되살아났다.
적들은 하나같이 영지주의를, 골동품상이나 겨우 관심을 가질 역사의 끄트러기 정도로만 여겨왔다. 그러나 실제로 영지주의는 그 지지자들은 물론 볼테르, 윌리엄 블레이크, W.B. 예이츠, 헤르만 헤세, 그리고 C.G. 융과 같이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까지 매료시켜 왔다. 철학에서도 실존주의는 영지주의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영지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다. 기원후 세 번재 천년의 문턱을 막 넘어선 지금 영지주의자들이 되돌아오고 있으며, 이제 그들은 과거와 달리 영지주의자로서 머물 작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지주의자(gnostic)와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말은 그리스 어 그노시스(gonosis : 靈知)에서 유래했으며, 보통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하지만) '지식(knowledge)'으로 번역된다. 오랫동안 대다수 사람들은 궁극적 실재나 관심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반反 영지주의자, 즉 불가지론자(agnostic)로서 지내왔다. 이에 반해 영지주의자는 지식으로써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정의되곤 했다. 하지만 영지주의자가 추구하는 지식은 논리적 지식도 아니고 정보의 축적은 더더욱 아니다. 그리스어에서는 이론적인 지식과 경험을 통해 직접 얻는 지식을 구별한다. 경험을 통해 직접 얻은 지식이 그노시스요, 이 그노시스를 얻거나 열망하는 사람이 바로 영지주의자이다.
일레인 페이절스(Elaine Pagels)는 유명한 저서 <영지주의 복음(The Gnostic Gospels)>(우리나라에서는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에서,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한 '그노시스'란 단어가 자기 지식(self-knowledge)은 물론 궁극적, 신적 실재들에 대한 지식까지도 아우르는 직관의 과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노시스를 '통찰(insight)'로 번역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영지주의 메시지에 담겨 있는 영원한 생명력과 매력은, 영지주의가 인간 마음(mind)의 심층과 맺고 있는 친화력에 주로 근거한다. E.R. 도즈(Dodds)와 힐레스 퀴스펠(Gilles Quispel),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 같은 다수의 전문 학자들은 영지주의가 원형原型 심리학과 종교 신비주의가 함께 어우러지는 심리의 경험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신화의 심층심리학적 차원을 탐구한 C.G. 융, 칼 케레니,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조셉 캠벨과 같은 대학자들이 영지주의에 크게 공감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영지주의의 내적 핵심을 이루는 것은 다소 특별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그런 경험을 갖지 못한 사람이 영지주의적 통찰을 오해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영지주의의 신화와 심상이 워낙 다양해 때론 학자들조차도 영지주의를 일관된 전통이나 '주의(ism)'로 간주할 수 없다는 잘못된 주장을 펴기도 한다. 이러한 오해의 역사는 오래됐다. 2세기, 영지주의를 극렬히 반대했던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Irenaeus : 115~200, 초대 정통 기독교의 신학적 기반을 확립한 신학자로, <이단 반박(Against Heresies)>을 지었다)는, 영지주의자들이 영적, 문학적 창조력이 뛰어나 매일같이 새로운 복음서를 만들어낸다고 비난했다.
이레네우스의 비난에는, 심상과 신화, 가르침이 이처럼 다양한 곳에서는 주류(mainstream, 혹은 정통) 기독교의 도그마와 경전에 상당하는 어떤 일관된 교리도 있을 수 없다는 관점이 은근히 담겨 있다. 이레네우스에서 오늘날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영지주의 비판자들이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 바로 영지주의 가르침이 그노시스의 경험에서 직접 얻은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한편, 그런 식의 경험이 정통 신학에서 보듯이 획일적이고 독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틀 짓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독단적 형식이 없어서 참신함에도 불구하고, 영지주의 안에는 공통되는(혹은 중심되는) 그노시스 경험을 반영하는 공통되는(혹은 중심되는) 가르침이 있다. 최근 수십 년 사이, 더 정확히 말하면 19세기 후반 이후, 독단은 덜한 반면 영감은 훨씬 풍부한 가르침과 수행법을 찾아 동양의 종교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찾는 대안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영지주의라 불린다는 것을 전혀 짐작도 못한 것 같다.
그뿐 아니라 실재와 영혼, 그리고 깨달음의 필요성 등에 대한 통찰에 있어서 영지주의와 동양 종교가 얼마나 유사한지도 깨닫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동양 사상을 영지주의자들의 정신에 이식하는 역할을 했다. 다른 이들은 대승 불교 같은 몇몇 동양의 사조가 영지주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똑같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다시 확언하건대, 이 점에서 동양과 서양을 묶는 가장 중요한 공통의 분모는 분명 그노시스의 경험이다.
이런 유사성은 일찍이 225년경, 영지주의를 적으로 삼았던 정통 기독교도 히폴리투스(Hippolytus)가 지적한 바 있다. 이단을 반박하면서 히폴리투스는 인도의 브라만교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하느님(God)이 빛이라고, 하지만 태양 빛이나 불빛 같은 우리가 보는 빛과는 다른 빛이라고 말한다. 또 그들에게 하느님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말로 분명하게 표현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자들로 하여금 본성의 비밀스러운 신비를 깨닫도록 이끄는 지식(그노시스)의 이야기이다." 동양이나 서양에서의 그노시스는 지금도 여전히 그노시스이며, 그 사실은 참으로 중요하다.
일부 학자들의 견해와 달리, 영지주의라는 용어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담을 수 있는 빈 상자가 아니다. 오히려 영지주의 전통은 그노시스 경험에 근거하며, 삶과 실재에 대한 일정한 태도와, 그노시스를 경험하여 깨달은 우주와 인간의 기원 및 본질에 관한 모종의 신화와 가르침을 특징으로 삼는다. 이런 특징들이 영지주의를 독창적이고 확고한 전통으로 다른 것들과 구별지으며, 우리는 모든 역사와 문화를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하고 추적할 수 있다.
"생이란 영롱한 반사일 뿐이다."
「 파우스트 」
【 그노시스 경험 】
💬 언제나 관념에 묶여 있던 내 일상 너머에는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었고, 그 세계를 직감한 뒤에는 더 이상 무지했던 자아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 직감이라는 것의 근원은 나의 이성으로 스스로 쟁취한 깨달음이 아닌 무언가로부터의 계시에 의해 허락된 것처럼 느껴진다.
https://youtu.be/XK4MiMUpnxI?si=Iw0GneX6n6L22coS
■ '영지주의자' 또는 '아는 자(knower)'라는 뜻의 그노스티코스(gnostikos)라는 단어는 1세기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은 것 같다. 헤르메스주의[Hermeticism : 고대 이집트의 현자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Hermes Trismegistus)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비 종교의 하나로서 스토아 학파와 플라톤 학파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로 알려진 비기독교 그노시스 학파가 존재하긴 했지만, 대다수 영지주의자들은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처럼, 이 사람들은 인간이 처한 복잡하고 힘겨운 상황과 신성(Divinity)에 대해 알게 하는 해방의 지식으로 자신들을 이끌어줄 경험을 열망하고 또 직접 그런 경험에 뛰어든 사람들이었다. '아는 자'들이 특별히 어떤 방법으로 이 같은 지식에 이르게 되었는지 우리는 하나하나 설명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하다.
융은 영지주의 경전들이 아주 인상적인 차원의 신비적, 심리적 경험들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 그노시스라 불리는 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심리학적 지식[원형 심리(archetypal psyche)에 대한 통찰에서 얻은 바가 그 내용을 이루는]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뛰어난 유대 신비주의 학자 게르숌 숄렘은 이런 경험을 천상의 것, 신적인 것에 관한 한층 높은 수준의 깨달음에 기초한 신비적 비교秘敎라고 평가했다.
숄렘은 또 2, 3세기 영지주의자들이 별들이 떠 있는 천구天球들을 지나 지구와 우주보다 훨씬 높은 영역으로 올라가려는, 그렇게 해서 신성한 빛이 충만해 있는 참된 영적 본향本鄕으로 의식적으로 복귀하는데(복귀는 영지주의에서 구원을 의미한다) 비상한 관심을 보인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이런 '천상으로의 비상'은 영지주의자들이 열망하던 지식, 곧 인간을 해방시키고 신성하게 만드는 지식에 대한 핵심 은유일 것이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같은 유일신교의 주류 분파들은 믿음(faith)을 크게 강조한다. 대부분의 전통 종교인들에게 "나는 믿는다"(credo)는 고백은 아주 중요한 증언이다. 이와 반대로 영지주의자들은, 믿음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마침내 물질 세계의 울타리 너머로 자신을 실어다줄 내면의 앎을 열망하고 끝내 성취한다.
분명히 이런 상태는 단순한 믿음이나 신앙을 뛰어넘는 어떤 강점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미국이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믿음이란 '다른 사람의 믿음을 믿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많은 신자들에게 믿음이란 다른 신자들(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믿고 있는 대상에 대해 경험해 본 적이 없어 보이는)한테서 간접으로 전해들은 신앙일 뿐이다.
믿음은 지식하고는 그 양상이 전혀 다르다. 따라서 전통 종교가 영지주의와 왜 그렇게 다른지 이해하기란 아주 쉽다. 영지주의 안에도 피스티스(pistis)라고 불리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는 믿음의 형태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경험에 대한 믿음이다. 자신을 해방으로 이끄는 내부의 지식을 스스로 경험한다고 느끼는 변치 않는 믿음인 것이다. 영지주의의 신적 존재로서 여성의 형상을 한 소피아(Sophia)는 피스티스(Pistis : 믿음)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역경 속에서도 언제나 빛을 바라보는 신실함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영지주의를 칭송하는 오늘날의 저명한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헤럴드 블룸(Harold Bloom : 미국의 저명한 문학 비평가)은 <천년의 징조(Omens of Millennium)>라는 책에서 현대적인 언어로 그노시스 경험을 묘사한다. 그는 그노시스란 다채로운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홀로 있는 가운데서 나타나기도 하고 타인의 존재를 통해 오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이미지나 자연 현상을 읽거나 쓰거나 관찰할 수도 있고, 혹은 그저 마음으로만 응시할 수도 있다. 음악과 향香, 의식儀式같은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영지주의자들이 성례전聖禮典과 예식을 행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어느 경우든 의식意識의 철저한 변화가 일어나고, 아는 자는 이를 통해 개인적인 의식의 한계 너머로,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한계 너머로 옮겨간다. 블룸은 그노시스 경험을 다른 경험과 구별시키는 주된 특징으로 다음 두 가지를 든다. ①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멀리 떨어져 계시는 하느님, 즉 그릇된 창조와 무관한 하느님에 대해 알게 해준다. ② 인간의 깊은 본성이 창조(혹은 타락)의 일부가 아니라 과거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충만한 존재, 곧 하느님의 일부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이 하느님은 세상이 숭배하는 그 어떤 존재보다도 인간적이며 또한 신적이다.
초대 기독교인에게 그노시스라는 용어는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얻은 지식을 의미했다. 성 바울은 인간이 갖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언급할 때 이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 환상적인, 그러나 때론 눈에 보이듯 선명한 그노시스의 특성에 관해 바울이 가장 분명하게 언급한 것 중 하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그노시스)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고린도후서 4:6>
영지주의적 특징을 보이는(즉 영지주의자와 가까운) 또 다른 사도 성 요한은 하느님이나 그리스도를 아는 것(gignoskein)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요한복음>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글쓰기 방식이 영지주의자들의 시적이고 환상적인 글쓰기 방식과 흡사하다는 데 놀랄 것이다. 신약 성서에는 그노시스를 강조하고 있는 곳이 많은데, 이는 주류 기독교 신비가들과 영지주의자들이 그노시스라는 단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댄 머커(Dan Merkur)라는 통찰력 있는 학자는 <영지주의 : 신비적 환상과 합일의 비교 전통(Gnosis:An Esoteric Tradition of Mystical Vision and Unions)>이라는 책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두 종류의 경험이 그노시스의 경험적 근원을 이룬다고 말한다. 그 중 하나는, 비록 개인의 심적 경험 속에서 벌어지고 그래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궁극의 실재를 드러내는 독특한 형식의 환상 경험이다. 다른 하나는 신비스런 합일(union)의 경험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환상을, 19세기 오컬티스트(occultist : 신비스럽고 초자연적이라는 뜻의 occult에서 유래한 말로 한계가 분명한 인간의 오감으로는 알 수 없는 세계의 진리를 직관과 초감각적 인식을 이용하여 탐구하는 종교이자 학문)처럼 상위 '차원'에 존재하는 외부 정보(data)를 초감각적으로 인식한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았고, 훨씬 신비적인 경향에 기울어 있던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추상 관념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영지주의자들은 투시 능력에 의거하는 쪽의 준準 객관성과 철학적, 우의적인 것으로 보는 쪽의 주관성 사이로 난 면도날처럼 좁고 가파른 길을 따라 걸어온 것 같다. 따라서 의미나 방향의 핵심은 다르지 않다 해도 자신들의 경험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영지주의자마다 다르다.
신비 경험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환상적인(visionary) 신비 상태'와 '합일적인(unitive) 신비 상태'를 구별한다. 전자가 서술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신적인 합일을 가리킨다. 고대 영지주의자들은 두 경험 모두에 참여했던 것 같다. 영지주의적인 환상에는 흔히 천상으로의 상승이 포함되지만, 무아 상태에서의 죽음과 같은 다른 종류의 환상도 엄연히 포함된다. 창조된 세계를 버리고 영원한 세계들로 상승해 감으로써 그 영역들에 거하는 존재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환상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것들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했다. 그들은 이런 환상을 개인 안에 있는 '신적 불꽃(pneuma)'이 더 높은 세계의 실재와 하나가 되는 경험으로 묘사했다. 다른 신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 현자들도 합일의 경험을 신성한 존재(소피아, 그리스도)나 궁극의 하느님의 영적 본질과 연결되는 것(신비한 결합, unio mystica)으로 이해했다. 이처럼 환상적인 경험과 합일적인 경험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그노시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 하얀 토끼 】
"기어세간독각사(寄語世間獨覺士)
수종백토주청림(須從白免走靑林)"
"기이한 말을 세간에서 홀로 깨달은 선비는
마땅히 하얀 토끼를 따라 청림으로 가라."
율곡 이이, 「 칠언고결 」
■ https://youtu.be/o96L-E1zm1I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 잠언 16장 9절 -
"지식이 깊어지면 그 지식을 모르는 상태가
어떤지를 상상하기 어렵게 만든다."
■ https://www.instagram.com/p/CmXwCKhPeu6/?igshid=MzRlODBiNWFlZA== 【 나의 아브락사스 】
■ https://youtu.be/bVCRYpWuJOU?si=XMvbK7Eg2K2EzcQ5
💬 운명에 대한 저주, 시대를 향한 원망, 나의 아브락사스, 나의 데미안.. 인연이란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나는 그저 내 어리석음에 대한 변명으로 필연을 믿고 싶은 것은 아닌가. 나를 지탱하던 관념들이 다 무너져 버린 상실감. 내 지난 삶이 모두 부정당하는 느낌.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 "사귀기를 원한다 ― 불 속에 넣었다가 적시에 꺼낸 밤처럼 부드럽고 맛있는 영양이 풍부해진 사람들과 사귀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까? 인생에서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인생을 자신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새와 벌이 그들에게 보내준 것처럼 선사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자신이 보수를 받았다고 느끼기에는 자신에 대한 긍지가 너무 강한 사람들을! 그리고 인식과 성실함의 정열이 너무 진지해서 명성을 추구할 시간도 생각도 없는 사람들을!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철학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은 보다 겸손한 이름을 변함없이 발견할 것이다."
- 니체 -
"밝은 낮에 인식한다는 건 허풍일 뿐이다.
신비로운 진리는 어둠 속에만 깃들어 있다."
「 파우스트 」
https://www.instagram.com/p/Cdz5Po5pcRZ/?igshid=MzRlODBiNWFlZA== 【 내게 빛을 보여준 사람 】
■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 요한 복음 8장 -
■ 삶의 지혜의 중요한 점은 우리가 일부는 현재에, 일부는 미래에 쏟고 있는 주의注意의 비율을 올바로 조정해 한 쪽이 다른 쪽을 망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너무 지나치게 현재 속에서 살고 있다. 경솔한 사람들이 그러하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미래 속에서 살고 있다. 불안과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다. 그 비율을 정확히 조절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노력과 희망에 의지해 미래 속에서 살고 항상 앞만 바라보며, 무엇보다 미래의 일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해 조바심 내며 그쪽으로 급히 다가가는 반면, 현재는 거들떠보지도 즐기지도 않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애어른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실은 이탈리아의 노새에 비유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노새의 머리에 묶인 봉에 한 다발의 건초를 매달아 두는데, 노새는 바로 눈앞에서 계속 달랑거리는 그것을 먹으려는 욕심에 발걸음을 재촉한다고 한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언제나 현재만을 위한 임시적인 생활을 하면서 그들 자신의 생존을 그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위한 계획과 걱정에만 온통 마음을 쏟거나 과거에 대한 동경에 빠지지 말고 현재만이 유일하게 현실적이고 유일하게 확실한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반면 미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거의 항상 다르게 전개된다는 사실과 과거조차 우리의 회상과 달랐으며, 더구나 과거와 미래 모두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님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멀리 있는 대상은 육안으로는 축소되어 보이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확대되어 나타난다. 현재만이 진실하고 현실적이다. 현실은 현실적으로 충만한 시간이고, 우리의 생활은 오로지 현실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현재를 항시 명랑한 기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직접적인 불쾌감이나 고통이 없는 그런대로 견딜 만한 자유로운 시간은 일부러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 과거에 품은 희망이 실패로 돌아갔다거나 미래에 대한 우려 때문에 짜증 난 얼굴로 현재를 우울하게 보내서는 안 된다. 지난 일에 대한 불만이나 미래에 대한 우려 때문에 현재의 좋은 시간을 내팽개치거나 경솔하게 망쳐 버리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걱정은 물론 후회하는 일에조차 일정한 시간만 할애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기왕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제아무리 마음이 아프더라도 지난 일로 치부하자.
아무리 괴로워도 언짢은 마음을 진정시키자."
- 「 일리아드 」 제17권 112행 이하 -
그리고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신의 뜻에 달린 것이다."
- 「 일리아드 」 제17권 514행 -
반면 현재에 대해서는 "하루하루를 하나하나의 인생이라고 간주하라"(세네카, 「 서간집 」 제101권 10통)는 말에 따라, 유일하게 현실적인 이 시간을 될 수 있는 한 즐겁게 보내도록 해야 한다. 미래의 재앙 중에서 우리를 불안하게 할 것은 올 것이 확실하고, 오는 시기 역시 확실한 재앙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재앙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재앙이란 일어날 가능성이 있거나, 어쨌든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하거나, 일어날 것이 확실하지만 일어날 시기는 완전히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종류를 일일이 신경 쓰다 보면 한시도 마음 편한 순간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올 것이 불확실하거나 오는 시기가 불확실한 재앙 때문에 생활의 안정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올 것이 불확실한 재앙 때문에 생활의 안정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올 것이 불확실한 재앙은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오는 시기가 불확실한 재앙은 그렇게 금방 찾아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그러나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안정되면 소망이나 욕구, 요구가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한다. "나는 내 일을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았노라"라는 괴테의 애송되는 노래가 원래 말하려는 바는, 인간이란 있을 수 있는 온갖 요구에서 벗어나 꾸밈없는 벌거숭이 상태로 돌아와야 비로소 행복의 토대가 되는 마음의 안정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재, 그러니까 결국 인생을 즐길 만한 것으로 생각하려면 마음의 안정이 필요하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이 단 한 번뿐이고 두 번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것임을 항시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이 내일 다시 찾아올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내일 역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 또 다른 하루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하루가 인생을 구성하는 불가결의 부분이며 그 때문에 다른 것과 대체할 수 없음을 잊어버리고, 개체가 일반 개념에 포함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가 인생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병에 걸렸을 때나 슬픔에 빠졌을 때는 고통이나 아쉬움이 없었던 순간의 기억을 한없이 부러워하며 마치 잃어버린 낙원이나 우리에게서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친구처럼 떠올린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아무 탈 없는 건강한 시간에도 항시 의식한다면 현재를 좀 더 가치 있게 평하고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즐거운 생활을 할 때는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보내다가, 막상 좋지 않은 시기가 닥쳐야 비로소 옛날과 같은 시절이 돌아왔으면 하고 바란다. 명랑하고 즐거운 순간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언짢은 얼굴을 하고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보내 놓고, 나중에 우울한 시간이 찾아오면 좋았던 옛날을 헛되이 그리워하며 탄식을 내뱉는 것이다. 그러는 대신 지금은 냉담하게 그냥 흘려보내는 심정으로, 어쩌면 조급한 심정으로 떠밀어 보내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견딜 만한 현재, 다시 말해 일상적인 현재를 존중하는 것이 좋다. 이때 명심할 점은 현재가 바로 지금 신격화된 과거 속으로 흘러 들어가 그 후부터는 바로 그곳에서 불멸의 빛에 에워싸인 채 기억으로 간직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언젠가, 특히 사정이 좋지 않을 때 이 기억은 베일을 걷으며 우리의 진실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 이미 어떤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게 된 경우, 이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하면 그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다간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이 커져서 자학하고 만다. 그러기보다는 오히려 다윗 왕처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다윗 왕은 아들이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애원하고 간청하며 여호와를 귀찮게 했지만, 아들이 막상 죽고 나자 가볍게 무시하고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가볍에 넘겨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필연적이라는 대진리를 마음에 새기면서 숙명론적인 입장으로 도피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원칙은 일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원칙이 우리의 마음을 즉각 홀가분하게 해주고 진정시켜 주는 데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대체로 그렇듯이 우리 자신의 태만이나 무모함이 그러한 불행에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책임 있다면 고통스럽겠지만 어떻게 하면 예방할 수 있을지 거듭 생각해 보는 것이 우리의 교훈과 개선을 위한, 우리의 앞날을 위한 유익한 자기 징계가 될 것이다. 명백히 저지른 실수에 대해, 흔히 그러듯이 우리 자신을 변명하고 미화하거나 축소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럴 경우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커다란 고통을 가하는 셈이 되겠지만,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확실히 따져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는 것이 좋다.
- 쇼펜하우어 -
"나는 사랑한다. 상처를 입어도
그 영혼의 깊이를 잃지 않으며
작은 체험만으로도 멸망할 수 있는 자를.
그런 자는 이렇게 하여 즐거이 다리를 건너간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 정욕(情慾) 】
"인간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를 잊지 않는다."
「 파우스트 」
■ https://youtu.be/MJ68FnwF5qs
【 그노시스와 영지주의 】
■ 그노시스와 영지주의를 구별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적잖이 있었다. 이런 시도 중 일부는 1966년 메시나(Messina)에서 열린 학술 회의에서 일단의 학자들이 내린 정의定義도 포함해서 해봄직한 것이긴 했지만 결국은 결함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영지주의를 "이원론적으로 사고하면서 세상을 부정하는 2세기 종파들"이 지닌 믿음 전체라고 정의하는 것은 유익하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엘리트를 위해 마련된 신성한 신비 지식"이라고 그노시스를 정의하는 것도 그다지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다.
이 분야에 식견이 깊은 학자들은 이런 식의 정의, 또 수많은 책에서 영지주의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들이 기독교 이단학異端學에 기초한 왜곡된 시각을 영구히 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관점으로는, 영지주의에 대해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저 1,800년 전 일단의 광신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이라는 식으로 관심을 갖게 할 뿐이다. 영지주의자와 영지주의를 공격한 옛 이단 연구자들의 설명은 대부분이 믿을 만하기는커녕 지금에 와서 볼 때 어리석기까지 하다. 영지주의가 그 당시 현존하던 다양한 근원의 가르침들을 주워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관점은 줄곧 의심받아 왔다.
오늘날 갈수록 더 많은 학자들이 융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융은 영지주의 경전들이 실제로 신비로운 존재와 세계에 관한 독창적인 이미지를 지닌, 저자들의 직접적인 경험에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영지주의자들이 구약 성서의 하느님을 자구 입에 올려 거침없이 비판했지만, 이는 니체라든지 '신 죽음의 신학'(1960년대에 전개된 신학 운동의 하나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통적인 초월자와 조물주로서의 하느님은 이제 죽었다고 외치면서 예수의 윤리적 교훈에 기초한 새로운 윤리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재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을 주창한 알타이저(Althizer)와 해밀턴(Hamilton) 같은 신학자의 사상을 종종 접한 현대인들에게는 그다지 신성모독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지금도 유용한 증거에 비추어본다면, 영지주의는 기독교를 반대할 목적으로 악마적으로 왜곡한 이단이니 온갖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는 교부들의 주장에 동의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영지주의를 바라보는 대다수 저자와 설교가의 시각은 너무도 오랫동안 영지주의가 이단이라는 편견에 물들어 있었다. 교회의 간섭을 거부한 계몽주의 경향과 18~20세기 여러 오컬트의 부활을 통해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호감이 상당히 퍼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초기 기독교 쪽 비판가들에게서 기인한 오랜 편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영지주의 사상은 나그함마디(Nag Hammadi) 영지주의 문서가 발견되고 번역된 후에야 비로소 일찍이 볼 수 없던 빠른 속도로 양지로 나오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마침내 그 긴 시간 동안 우리 문화를 지배해 온 지독한 편견에 가로막히는 일 없이 영지주의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영지주의란 무엇이며, 영지주의와 그노시스 경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인간의 의식은 개념적 진공 속에서 작용하지 않는다. 마음의 환상적이고 합일적인 경험은 그 경험의 내용과 의미에 적합한 개념의 틀로 옮겨져야만 한다. 환상과 황홀경으로부터 종교 교리와 철학 체계, 그리고 신학적, 신지학적인 개념이 생겨난다. 이는 원시 시대 샤먼들 이래 줄곧 그래 왔던 것으로, 초기 기독교 시대 영지주의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계시된 경험들을 최초로 성문화한 뒤로 각자의 종교 체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데서 주류적 종교 신앙(그것이 어떤 종교 신앙이건)과 영지주의가 갈린다.
전통적인 종교가 경전에 기록된, 자신들의 바탕 경험에 대한 이야기에 만족해 있는 반면, 영지주의자들은 처음 경험한 그노시스를 더욱 확장하고 확대시키려고 계속 노력한다. 영지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타인이 경험한 그노시스를 믿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을 통해 창시자와 스승의 통찰을 더욱 확대해 가려는 자들이다. 결정적으로,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경험들이 의미 있게 자리 매김될 수 있는 개념적 틀이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영지주의적인 경험들이 언제든 자신과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개념적 틀 혹은 세계관이 영지주의로 알려지게 되었다.
초기 영지주의에 있어 하나의 기준이 된 다음의 진술에는 그노시스의 내용과 의미가 잘 나타나 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였는가, 우리가 무엇이 되었는가,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가 어디로 던져졌는가, 우리가 어디로 서둘러 가고 있는가,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는가, 진정 무엇이 태어남인가, 진정 무엇이 다시 태어남인가에 대한 그노시스다."( 테오도투스Theodotus ) 직관적으로 이런 물음에 정확한 해답을 얻어낸 사람이 해방의 그노시스를 얻었다. 이런 물음과 그에 대한 해답이 결합하여 영지주의 교리를 이루고 그노시스와 영지주의의 주된 핵심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 문제를 탐구하는 사람 중에는, 영지주의 없는 그노시스가 존재할 수 있으며, 영지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고도 환상과 합일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해 고대 영지주의자들이나 현대의 지지자들은, 그런 일이 가능은 하겠지만 생산적인 결과를 낳지는 못할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 비상한 경험이 이해될 만한 상황이 못 되는데 그런 경험을 한들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맨 처음 그런 경험들을 발판으로 삼아 발전한 영지주의 전통이 있었고, 이것이 그 후의 영지주의적 경험들을 촉진시키는 독특한 토양이 된 것이다. 분명, 그노시스와 영지주의는 서로 두음을 주고받는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이 둘이 분리된다면 어느 쪽이든 손상이 불가피하다.
오늘날 우리는 영지주의자들이 이해와 그 이해에서 비롯되는 통찰을 늘 중요시했다는 걸 알고 있다. 이들에게 이해는 일상적인 것도 세속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신적인 동시에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신앙이나 철학에서 보통 접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고귀한 지식, 훨씬 더 심오한 통찰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다른 전통의 신비가들처럼, 영지주의자들도 이런 구원의 지식이 단지 성구聖句의 암송이나 경전 연구에 근거한 이성적인 사고 작용을 통해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렇긴 하지만 영지주의자들 역시, 다른 신비가들과 마찬가지로, 환상을 통해 얻은 자신들의 통찰을 더욱 확장시킬 문서들을 만들고 이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문서들은 변하지도 않고 헤아릴 수도 없는 실재의 토대, 즉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제한된 범주로 가두려는 우리의 모든 시도 너머에 있는 초월적이며 그지없이 자애로운 하느님의 존재를 선포한다. 이런 하느님의 모습이, 선악이 제멋대로 교차하는 전제적이고 폭압적인 성품의 하느님 모습과는 전혀 비교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이 궁극의 본질에서 인간 영혼의 정수精髓인 불꽃(spark) 혹은 영(spirit)이 나오고, 이것들은 다시 그 궁극의 본질로 돌아가려고 애쓴다. 각각의 영적 존재(spirit entity)는 신적 의식의 순수한 불꽃 혹은 원자로서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불꽃들은 존재론적으로는 신성한 존재(the Divine)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만 실존론적으로는 그와 분리되어 있다. 성서가 표현하는 것처럼,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가슴이 안식을 발견할 때까지는 결코 쉬지 못하기" 때문에, 이 분리는 분리되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져야 한다. 지상에서 몸을 입고 살아가며 경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의미 있고 영속적인 어떤 것을 향한, 고통스럽고 때론 불분명하기까지 한 갈망이 이 깊은 분리를 넘어 다시 하나인 상태로 되돌아가는 첫걸음이다. 결과적으로 초월 의식을 낳는 해방의 지식이 분리의 유력한 목적이다.
다시 한 번 밤하늘의 은유를 사용해 보자. 우리는 머리 위의 어두운 창공을 마치 구멍 뚫린 베일처럼, 그래서 그 작은 구멍들을 통해 궁극적 실재의 빛이 우리의 시력(vision)을 꿰뚫고 들어오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구멍들(우주의 틈)을 통해 초월적인 광휘가 우리 의식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빛이, 오랫동안 갈망해 왔으나 아직 깨닫지 못한 가능성들로 우리를 깨워 이끄는 그노시스의 빛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부르는 그 순간, 빛이 빛을 부르고 하느님이 당신의 자녀를 부르는 것이다. 이 세계에 드리워진 장막이 벗겨지고, 불꽃의 모습으로 잠시 유랑하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근원인 저 끝없는 빛의 바다를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영지주의자들의 환상이다. 이 환상의 필수 요소는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고 본질적으로 단순하다. 하지만 함축된 의미는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다.
【 I. 철저한 감각적 인식의 한계 】
■ https://www.instagram.com/p/CmvMIEmpnDG/?igshid=MzRlODBiNWFlZA==
■ 인간에 대한 역겨움 ― A : 인식하라! 그렇다! 그러나 항상 인간으로서? 어떻게? 항상 동일한 희극 앞에 있고 동일한 희극을 상연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 눈 이외의 눈으로는 사물들을 결코 들여다볼 수 없는가? 그리고 인식하기에 더 좋은 기관을 가진 존재는 얼마나 무수한 종류가 있는지! 이 모든 인식 끝에 인류는 무엇을 인식하게 될까? 그들의 기관이다! 그리고 이는 아마 인식이 불가능함을 의미할 것이다! 비참함과 역겨움! B : 그것은 좋지 않은 습격이군. 이성이 자네를 습격하고 있어! 그러나 내일이 되면 자네는 다시 인식의 한가운데에 있을 것이고 이와 함께 또한 비이성의 한가운데에, 즉 인간적인 것에 대한 기쁨의 한 가운데에 있을 것이네. 바다로 가세!
- 니체 -
■ 윤리(ethics) : 철학적 전통에서는 좋음, 옳음, 쾌락 등 이상적 가치나 규범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당위를 나타내고,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게서는 문명화의 결과로 얻게 된 도덕이나 내적 도덕 원리인 초자아의 차원에서 각 주체의 (성적)충동을 억압하는 기제를 나타내며, 라캉에게서는 주체가 도덕이 아니라 욕망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당위를 나타낸다.
■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3431428&cid=40942&categoryId=31531
■ https://youtu.be/Q2ZVP9M01zY
"영웅은 이름을 내세우며 뽐내고 활보하지만,
모든 것을 압도하는 미인 앞에선
아무리 고집 센 남자라도 뜻을 굽히고 만다."
「 파우스트 」
【 Ⅱ. 성욕에는 실체가 없다 】
■ https://www.instagram.com/p/CmvILUtpBtO/?igshid=MzRlODBiNWFlZA==
【 Ⅲ. 사랑만이 치유한다 】
■ https://www.instagram.com/p/CdlBcotpVtm/?igshid=MzRlODBiNWFlZA==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는 것은
하늘이 내려준 최고의 축복 중의 하나다."
「 파우스트 」
■ https://youtu.be/az2crVAf69o
■ https://youtu.be/gAF9-g7JZYc
💬 오늘날 이 시대의 문명이 인간을 어떻게 철저히 사랑으로부터 분리시켰는지 이해해야 한다. 인간이 사랑을 망각한 채로 살아가는 것은 이제 합리적인 선택지가 되었다. 인간은 새롭고 강렬한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적합한 환경만 제공된다면 언제나 서슴없이 그 길을 택할 수 있고, 또 스스로의 선택을 합리화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자유주의 사상' 하나만으로도 악(惡)의 창궐을 손쉽게 유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현상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사람이 바뀌면 시대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바뀌면 사람도 바뀌는 것이다.
"사람은 최상의 행복이라도 익숙해지면,
어리석게도 더 나은 것을 찾는다."
"우리는 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집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 파우스트 」
【 Ⅳ. 실재하는 유일한 현실 】
■ https://www.instagram.com/p/CeRRLpFpbn0/?igshid=MzRlODBiNWFlZA== 【 집착 】
■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과 관련한 모든 일에 상상력을 억제해야 한다. 무엇보다 공중누각을 쌓아서는 안 된다. 쌓아 올리자마자 한숨을 쉬면서 다시 허물어뜨리면 그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단순히 일어날지도 모르는 재난을 눈앞에 떠올리며 미리 불안해 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재난이 전적으로 근거 없는 일이거나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면, 우리는 그런 꿈에서 깨어나면서 모든 것이 속임수에 불과했음을 즉기 알아채고는 아직은 현실이 더 낫다는 사실에 더욱 기쁨을 느낄 것이다.
어쨋든 그런 사실에서 먼 훗날에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재난에 대비하라는 경고를 얻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력은 좀처럼 그런 재난을 가지고 유희하지 않는다. 우리의 상상력은 아무 할 일 없이 기껏해야 즐거운 공중누각을 쌓아 올리는 것이다. 상상력의 음울한 꿈의 재료가 되는 것은 멀리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우리에게 현실적 위협이 되기도 하는 재난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이러한 재난을 확대하고 그것의 가능성을 실제 이상으로 높여서 말할 수 없이 끔찍한 모습으로 선명히 그려 낸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면서 즐거운 꿈과 달리 그러한 꿈을 즉각 떨쳐 버릴 수 없다. 즐거운 꿈은 곧장 현실에 의해 반박되고, 기껏해야 가능성의 품속에 희미한 희망만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음산한 상상(영어로는 푸른 악마 - blue devils)에 휩쓸리면 좀처럼 떨쳐 버릴 수 없는 영상이 달라붙는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대체로 확고하다 해도, 그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언제나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의 가능성이 쉽게 개연성이 되어 우리는 불안의 포로가 되어 버린다. 그 때문에 우리는 행복이나 불행과 관련되는 일을 이성과 판단력의 눈으로 보아야 하며,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숙고해 단순히 객념에 의해 추상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이때 상상력은 동원하지 않는 것이 좋다. 상상력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때로는 매우 곤혹스럽게 마음을 움직이는 단순한 영상만 눈앞에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칙은 밤에 가장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좋다. 어둠이 우리를 소심하게 만들어 어디서나 무서운 형상이 보이게 하듯이, 모든 불확실함은 불안을 낳기 때문에 사상의 애매함도 이와 유사한 작용을 한다. 밤이 되어 심신의 이완으로 분별력과 판단력이 주관적인 어둠에 싸이고, 지성이 지친 나머지 냉정함을 잃어 사물의 근원을 규명할 능력이 없어지면 우리의 명상 대상도, 특히 그것이 우리의 신변에 관계될 경우 자칫하면 위험한 모습을 띠고 무서운 형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정신이 완전히 이완되고 판단력이 자신의 업무를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지만 상상력은 아직 활동 중인 밤에 잠자리에서 가장 많이 일어난다. 그때는 밤이 모든 것을 검은색으로 물들여 놓는다. 잠들기 전이나 밤에 깨어 있을 때 우리의 사고는 꿈을 꿀 때와 거의 비슷하게 사물을 심하게 일그러뜨리거나 왜곡시킨다. 신변에 관련된 일인 경우에는 사고가 보통 칠흑같이 어두워지고 끔찍해진다. 그러다가 아침이 되면 그런 끔찍한 형상이 꿈처럼 사라져 버린다. '밤에는 색이 물들어 있지만, 낮에는 하얗다'라는 스페인 속담은 바로 이런 의미다.
하지만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저녁이 되면 벌써 분별력은 눈과 마찬가지로 대낮처럼 명료하게 보지는 못한다. 그 때문에 이 시간은 중대한 문제, 특히 언짢은 문제를 성찰하기에 적합하지 못하다. 그런 일을 하기에는 아침이 제격이다. 아침을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일이나 육체적인 일을 막론하고 어떤 일을 하는 데도 예외 없이 적합하다. 아침은 하루 중의 청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명랑하고 싱싱하며 경쾌하다. 기운이 넘쳐 뭐든지 제대로 처리할 능력이 있다. 늦잠을 자서 아침을 단축시키거나, 쓸데없는 일이나 잡담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아침을 인생의 정수精髓라 간주하고 어느 정도 신성시해야 한다.
반면에 밤은 하루 중의 노년에 해당한다. 우리는 밤이 되면 힘이 빠지고 말이 많아지며 경솔해진다. 하루하루가 조그만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나날의 기상이 출생이고 죽음인 취침으로 하루가 마감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잠드는 것은 매일의 죽음이고, 매일 깨어나는 것은 새로운 출생이다. 그러니 깨어나는 일을 완전히 해내기 위해서는 일어날 때의 불편함과 어려움을 출생의 고통으로 간주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체로 건강 상태, 수면, 영양, 기온, 날씨, 환경과 다른 많은 외적 요소가 우리의 기분에 큰 영향을 미치며, 이 기분 또한 우리의 생각에 큰 영향을 준다. 그 때문에 어떤 일에 대한 우리의 견해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은 시간은 물론 장소에도 지배를 받는다. 다음의 글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진지한 기분을 잘 포착하라.
그러기가 드문 일이니.'
괴테, 「총고백」
객관적 구상과 독창적인 사상이 과연 생겨날지, 생겨난다면 언제 생겨날지 마냥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철저한 숙고조차 미리 정해 둔 시간, 숙고하도록 맞추어진 시간에 언제나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숙고는 숙고하는 시간 자체를 스스로 선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시간이 되면 숙고에 적합한 사고 과정이 저절로 활기를 띠어 우리는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그 과정을 따르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상상력을 억제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전에 우리가 당한 불의, 손해, 손실, 명예 훼손, 냉대, 모욕 들을 다시 생생히 떠올리거나 마음속에 그리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 것들이 오래전에 잠들었던 불쾌감, 분노와 같은 온갖 좋지 않은 열정을 다시 자극해 우리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신플라톤학파의 프로클로스가 멋진 비유를 들어 말했듯이, 어느 도시에나 더없이 고상하고 숭고하며 탁원한 인물 외에 온갖 종류의 천민도 살고 있는 것처럼, 더없이 고상하고 숭고한 인물의 내면에도 기질로 보면 인간적 본성, 즉 동물적 본성의 매우 저급하고 천박한 면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천민이 소란을 일으키도록 자극해서는 안 되고, 보기 흉한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그가 창밖으로 내다보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공상의 소산을 이러한 천민을 선동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이나 사물에게 아무리 사소한 불쾌감을 느꼈다 해도 그것을 자꾸 생각해서 강렬한 색채를 띠게 하거나 과장되게 상상하면 무서워서 제정신을 잃을 정도의 괴물로 부풀어 오를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불쾌한 일은 오히려 될 수 있는 한 가볍게 넘겨 버릴 수 있도록 담담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좋다.
조그만 물체라고 눈 가까이 대면 시야를 가려서 세상을 덮어 버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과 사물은 아무리 무가치하고 하찮은 것이라 해도 필요 이상으로, 게다가 즐겁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의 주의와 사고를 자극해 중요한 사고나 문제를 밀쳐 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멀리 거리를 두고 보는 것 ― A: 그러나 이 고독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B : 나는 그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네. 그러나 나는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그들을 한층 더 분명하고 아름답게 보는 것 같아. 내가 음악을 가장 사랑하고 음악을 느꼈을 때 나는 음악에서 떨어져 있었네. 사물들에 대해 제대로 사유하기 위해 내게는 멀리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 필요한 것 같네.
- 니체 -
"부처님 말씀하시되 사람은
애욕으로부터 근심이 생기고
근심으로 좇아 무서움이 생기나니
애욕이 없으면 곧 근심이 없고
근심이 없으면 곧 무서움이 없으리라."
■ https://mkmk.tistory.com/m/2450
【 Ⅴ. 인연으로부터의 자유 】
■ https://www.instagram.com/p/CmvM3-nJiMu/?igshid=MzRlODBiNWFlZA==
■ "책을 읽는 시간도 함께 살 수 있다면 책을 사는 것은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책의 구입과 그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혼동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지금까지 읽은 것을 모두 간직하기를 바라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먹은 것을 모두 체내에 담고 있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가 먹은 것에 의해 육체적으로 살고, 읽은 것에 의해 정신적으로 살아서 현재의 자신이 되었다. 하지만 육체는 자신과 동질적인 것을 동화시키듯이, 누구나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의 사고 체계나 그것의 목적에 맞는 것만 간직할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목적은 있지만, 사고 체계와 비슷한 것을 소유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 때문에 그들은 어떤 것에도 객관적인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이런 점 때문에 독서를 해도 그들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읽은 것을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는다.
반복은 연구의 어머니다. 중요한 책은 무엇이든 즉시 두 번 읽는 게 좋다. 그래야 사물의 맥락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고, 끝을 알고 있으면 처음 부분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번째 읽을 때는 어떤 대목도 처음과 다른 분위기와 기분을 느끼므로, 다른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어떤 대상을 다른 각도로 보는 것과 같다. 작품이란 어떤 정신의 진수다. 그 때문에 작품은 아무리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라 해도, 그 정신의 인간관계에 비해 항시 비교할 수 없이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고, 이 인간관계를 본질적으로 대체할 것이다. 따라서 작품은 정신을 훨씬 능가하고 앞지른다. 심지어 평범한 인간이 쓴 저서도 유익하고 읽을 가치가 있으며 재미있을 수 있다. 그것이 그의 정신의 진수이며, 그의 모든 사고와 연구의 결과이자 결실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 사람의 인간관계에는 만족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저서는 읽을 수 있다. 그 때문에 정신적 교양이 높아지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거의 책에서만 점차 즐거움을 발견할 것이다."
■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행동에 조심하고 아량을 베푸는 것이 필요하다. 조심하면 손해와 손실을 막을 수 있고, 아량을 베풀면 다툼과 싸움을 피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는 일단 자연에 의해 정해지고 주어진 것이라면 어떠한 개성도, 그것이 아무리 형편없고 보잘것없거나 가소로운 것이라 해도 배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개성을 영원하고 형이상학적인 원칙의 결과로 현재의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불변의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개성이 고약한 경우에는 '그런 괴상한 녀석도 있어야겠지요'(괴테의 「파우스트」 제1부 3483행에 나오는 파우스트의 말)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당한 일을 하는 것이며, 상대방에게 도전해 생사를 건 싸움을 거는 셈이다. 왜냐하면 상대의 본래적인 개성, 즉 그의 도덕적 성격, 그의 인식 능력, 기질이나 인상 등은 아무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부정한다면 그는 우리를 철천지원수로 생각하고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불변인 그의 존재를 변화시키라는 조건 하에서만 그의 생존권을 인정하려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그것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간에 타고난 개성을 견디며 인정해야 하고, 그것의 종류와 특성에 따라 이용할 생각만 하면 된다. 하지만 개성이 변하기를 바라거나, 있는 그대로의 개성을 무조건 부정해서는 안 된다. 많은 경우에 '나는 그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게 아니라 그를 이용하려고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이것이 바로 '나도 살고, 상대도 살린다'는 말의 참된 의미다. 그러나 이 과제는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여러 가지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언제까지나 피할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인내심을 배우려면 무생물을 상대로 자신의 인내심을 기르는 것이 좋다. 무생물은 역학적, 물리적 필연성에 의해 우리의 행위에 완강하게 저항한다. 그러한 기회는 날마다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은 인내심을 나중에 사람에게 전용하는 법을 배우면 된다. 즉 우리를 방해하는 자들도 무생물이 그런 작용을 하듯이 그들의 천성에서 우러나오는 엄격한 필연성에 의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행위에 화를 내는 것은 우리의 길 앞에 굴러온 돌멩이를 보고 화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이다."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불교의 원시경전 <숫타니파타(Sutta Nipata)>에 나오는 구절이다. 불경 가운데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경으로 초기 경전을 대표하는 경이다. 숫타(sutta)는 팔리어로 경(經)이란 말이고 니파타(nipāta)는 모음(集)이란 뜻으로 부처의 설법을 모아놓은 것이다. 성립된 시기를 인도의 아소카 왕(마우리야 왕조 3대 왕. 재위 BC 268~BC 232) 이전으로 보고 있다. 모두 5품(5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제4의품(義品) 속에 들어 있는 8편의 게송과 제5 피안도품(彼岸道品)이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 5품의 내용이 별도로 유통되다가 어느 시기에 함께 모아져 합집된 것으로 본다.
원래 이≪숫타니파타≫는 팔리어로 된 남전(南傳) 장경에 속한 경이다. 그러나 한역 장경 속에도 이 경의 제4품 <의품>에 해당되는《불설의족경(佛說義足經)》(K.0800, T.0198) 2권이 번역 포함되어 있다. 이는 서북 인도 출신의 지겸(支謙)이 중국으로 와 오(吳)나라 때 3세기 중엽에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숫타니파타≫는 무엇보다도 석가모니 부처를 역사적 인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경이다. 물론 ≪아함경≫ 등에도 부처의 역사적 행적을 찾아볼 수 있는 점이 많이 있으나 ≪아함경≫보다 이 경이 먼저 이루어진 경이므로 부처의 육성이 제일 먼저 더 생생하게 담겨 있는 경이라 할 수 있다.
《숫타니파타(sutta-nipāta)》는 가지각색의 시(詩)와 이야기를 모은 시문집(詩文集)으로, 5품으로 나뉘어 있고 각 장에 여러 개의 경이 수록되어 있다. <뱀의 장(蛇品)>에는 12경이 수록되어 있는데, 제1경은 세속의 번거로움을 떠나는 수행자의 모습이 ‘마치 뱀이 묵은 껍질을 벗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하는 구절을 시의 끝부분에 반복한다. 제3경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을 시의 끝부분에 되풀이하면서 고독한 수행자를 격려하고, 제8경은 자비를 열 편의 소박한 시로 설명했다. <조그만 장(小品)>에는 14경이 수록되어 있는데, 제2경은 욕망 · 부정 · 험담 · 배신 · 인색 등을 ‘비린내’라고 표현한다. 제3경은 위선적인 친구에 대한 이야기이고, 제8경은 진리로 이끄는 방편을 터득한 사람과 사귀라고 한다.
<커다란 장(大品)>에는 12경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장은 붓다의 생애를 담고 있어서 가장 오래된 불전(佛傳)의 하나이다. 제1경은 붓다의 출가 동기를 서술했고, 제2경은 붓다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겪은 갈등을 비유로 묘사했다. 제8경은 인간의 죽음을 투철한 눈으로 응시했고, 제11경은 붓다의 탄생에 얽힌 전설이다. <여덟 가지 시구의 장(義品)>의 제4장과 제5장은 처음에는 독립된 경이었으나 후에 편입된 것이라고 한다. 성립이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이다.
16경이 수록되어 있는데, 욕망 · 집착 · 험담 등에 대해 설했다. <피안에 이르는 장(彼岸道品)>은다른 장과는 달리 하나의 줄거리로 되어 있다. 한 바라문과 그의 열여섯 제자들이 한 사람씩 붓다에게 질문하고, 붓다는 거기에 대답한다. 이런 문답이 제2경 이하 제17경까지 이어지고 제18경에서 마무리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와 관련된 부분은 아래와 같다.
31. 모든 맛에 탐착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부양해야 하는 동료없이 집마다 차례로 밥을 빌되
이 집안이나 저 집안에 마음이 묶이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2. 마음의 다섯가지 장애를 끊고,
모든 번뇌를 잘라 버려 의존 하지 않고,
갈애의 허물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3. 이전의 즐거움과 괴로움,
만족과 불만을 벗어버리고
평정과 고요함과 청청함을 얻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4. 최상의 진리를 성취하려 힘써 정진하고,
마음에 나태 없이 부지런히 살며,
확고한 정진을 지니고, 견고한 힘을 갖추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5. 홀로 앉아 선정을 버리지 말고,
모든 일에 항상 법답게 행하며,
존재들 가운데 위험을 똑바로 알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6. 갈애를 없애기 위해서는 나태하지 말고,
바보가 되지 말고, 배우고, 새김을 확립하고
가르침을 헤아려 단호히 정진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7.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때묻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8. 이빨이 억세 뭇 짐승의 왕이 된 사자가
뭇 짐승을 제압하고 승리하듯이
외딴 곳에 잠자리나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9. 해탈로 이끄는 자애와 연민과
기쁨과 평정, 올바른 때에 실천하며
모든 세상으로부터 방해 받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0.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모든 장애물을 부수고
목숨을 잃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1. 이익을 꾀하여 사귀고 또한 의존하니
오늘날 조건 없이 사귀는 벗들은 보기 드무네.
자신의 이익에만 밝은 자는 청정하지 못하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야."
「 데미안 」
■ 질투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럼에도 질투란 악덕인 동시에 불행이다. 사람들이 질투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불행하게 느끼는가를 나타낸다. 사람들이 남의 행동거지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무료한가를 나타낸다. 우리는 질투를 행복의 적이라 간주하고 악마로 보아 없애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에 대해 세네카는 멋진 말로 우리에게 지침을 준다.
"자신의 것을 남의 것과 비교하지 말고 즐기도록 하자.
다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괴로워하는 자는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 분노에 대하여 」 제3권 30장
"많은 사람이 너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많은 사람이 너보다 뒤쳐져 있다고 생각하라."
「 서간집 」 제15권 11통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보다 형편이 나아 보이는 사람보다 우리보다 형편이 나쁜 사람을 자주 살펴보는 것이 좋다. 나아가서 실제로 재앙이 닥쳤을 경우 가장 효과적인 위안이 되는 것은, 위안이 비록 질투와 같은 원천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우리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런 다음에는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즉 불행의 동료들과 어울리는 일이다.
질투의 능동적인 면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겠다. 질투의 수동적인 면에 대해 살펴보면, 미움보다 질투를 누그러뜨리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투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오히려 많은 다른 향락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이러한 향락을 누리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세 가지 귀족이 있다. 출생과 지위에 의한 귀족, 돈에 의한 귀족, 정신적 귀족. 이들 중에서 세 번째가 가장 고상한 귀족인데,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그런 것으로도 인정받는다. 일찍이 프리드리히 대왕이 말하기를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는 군주와 같은 동급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궁내대신에게 한 말이었다. 대신이나 장군은 궁내대신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반면, 볼테르는 군조나 왕자들이 앉는 자리에 앉도록 하자 궁내대신이 이를 못마땅해했기 때문이다.
이 세 종류의 귀족은 모두 그들을 질투하는 무리에 둘러싸여 있다. 그들은 이 귀족에 속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밀한 적개심을 품고 있으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상대라고 생각되면 다양한 방식으로 '너라고 우리보다 나을 게 없다!'라는 사실을 알려 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들이 바로 이렇게 노력하는 사실은 상대의 우월함을 확신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질투를 받는 자가 그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대책은 이런 무리에 속하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어떻게든 접촉을 피해 그들과의 사이에 커다란 고랑을 만들어 간격을 넓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도 통하지 않으면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음을 알도록 냉정하게 견디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대책이 흔히 사용되고 있음을 보고 있다.
💬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의 욕망만을 철저하게 우선으로 하는 존재다. 이것은 견해가 아닌 진실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이 자진해서 중앙 정부의 권력에 복종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깊이 이해하고 적절하게 충족시켜 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아닌 다른 무엇도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양심을 기대하는 순간 우리의 과업도 끝이 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작은 놈만 상대하면 작은 일밖에 못한다.
큰 놈을 상대해야 작은 놈도 커진다."
「 파우스트 」
【 Ⅵ. 욕망의 질전 전환 】
■ https://www.instagram.com/p/CofQTYjpEa7/?igshid=MzRlODBiNWFlZA== 【 신세계의 정점 】
https://youtu.be/qL-jYc3_2VY?si=TNTs6d8ZAPU1-ahh
https://youtu.be/5i35FzSDLOc?si=lJjbd_x3eCJBvTfh
■ "무지한 자가 부유한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무지는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궁핍에 얽매인다. 그의 경우에는 성과가 지식을 대신하므로 가난한 자는 성과를 내겠다는 생각에 몰두한다. 반면 무지한 부자는 단지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만 살아가며, 그런 자는 짐승과 같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매일같이 목격할 수 있다. 거기에다가 또한 부자들은 그들에게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부와 여가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아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쇼펜하우어 -
■ https://www.instagram.com/p/Cl7x8SypTta/?igshid=MzRlODBiNWFlZA== 【 빛을 잃은 인간 】
"그 소원이 정말 나 자신 안에
충만하게 스며들어 있고,
나의 모든 존재가 그것으로 가득 찰 때에만
상상하던 것을 실행할 수 있고
원하는 만큼 강하게 바랄 수도 있는 거야."
「 데미안 」
【 두려움 】
"사람은 누구 앞에서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그런데도 누군가 두렵다는 건 나를 다스리는 힘을
타인에게 맡겨버렸기 때문이야."
"물론 그것은 너무 무서운 일이지만.
무리에서 떨어진다는 두려움..."
"두려움이 우리를 망치게 하는 거야.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해."
「 데미안 」
■ "상업 사회의 도덕적 유행 ― 도덕적 행위란 타인에 대한 동정에서 비롯되는 행위라는, 현재 유행하는 도덕 원칙의 이면에서 나는 두려움이라는 사회적 충동이 지배하는 것을 본다. 이 충동은 앞의 방식을 통해 지적으로 자신을 위장한다. 이러한 충동은 무엇보다 삶이 이전에 갖고 있었던 모든 위험성이 삶에서 제거되고, 이를 위해 모든 사람이 전력을 다해 서로 돕기를 바란다. 따라서 공공의 안전과 사회의 안정감을 목표로 하는 행위들만이 선한 행위로 평가된다!
그러한 공포심의 전제적인 지배에 의해 최고의 윤리법칙이 정해지고, 사람들이 그들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무시하면서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곤경과 괴로움을 살쾡이처럼 주시하라는 명령에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고 받아들일 경우, 사람들은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기쁨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삶에서 모든 날카로움과 모난 것들을 제거한다는 터무니없는 의도를 가진 채 인류를 모래로 만드는 최상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언제나 타인에게 직접 달려가 돕는 이러한 도움은 강압적으로 간섭하고 변형시키지 않을 경우에는 항상 피상적으로 행해질 수밖에 없다."
- 니체 -
■ ‘위대한 리셋’이 일어나는 게 기정사실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대한 리셋의 규모에 대해 두려워할 것이다. 또 긴박한 상황만 진정되면 조만간 ‘정상화’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서 리셋에 참여하기를 거부할지도 모른다. 이런 소극적 태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팬데믹, 혹독한 경기 침체, 지정학적 분열, 사회적 긴장 등 비슷한 충격을 이겨낸 것처럼 이번에도 다시 이겨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늘 그렇듯이 사회나 경제나 모두 예전 상태로 재건될 것이고,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리셋에 소극적인 이유는 또 세계의 상태가 그다지 나쁘지 않고, 그것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단지 주변에 있는 몇 가지만 고치면 된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오늘날 세계의 상태가 평균적으로 과거보다 상당히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으로서 결코 그렇게 좋은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집단 복지를 평가하는 거의 모든 주요 지표들(가난하게 살거나 분쟁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 수, 1인당 GDP, 기대수명이나 식자율, 그리고 심지어 팬데믹으로 인한 사망자 수까지)은 지난 세기 동안 꾸준히 개선되었고, 특히 최근 몇 십 년 동안의 개선은 괄목할 만한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지표들은 ’평균적으로‘개선되어 온 탓에, 개선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끼며 실제로도 자주 소외되었던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통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세계가 그 어느 때보다도 나아졌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이 현 상태에서 위안을 얻고 세상을 계속해서 괴롭히는 많은 병폐를 방치하는 구실이 될 수는 없다.
■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지 불과 6개월 만인 2020년 6월, 세상은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코로나19는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고, 이미 경제와 사회를 괴롭혀왔던 문제들은 더욱 부각시켰다. 불평등 심화, 불공평하다는 느낌의 광범위한 확산, 지정학적 분열 심화, 정치적 양극화, 공공 적자 증가와 높은 부채 수준, 비효율적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글로벌 거버넌스, 과도한 금융화, 환경 악화 등은 코로나19 발발 이전부터 존재했던 주요한 도전 과제들이다.
그런데 코로나19 위기로 모든 것이 악화됐다. 코로나19 사태는 천둥 전에 치는 번개일까? 코로나19는 일련의 심오한 변화를 일으킬 힘을 가지고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10년 후의 세상은 물론이거니와 10개월 후의 세상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을 리셋 하기 위해 뭔가를 하지 않는다면 내일의 세상은 심각한 고통에 시달릴 것임은 잘 알고 있다.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가 쓴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Chronicle of a Death Foretold)》 에선 마을 전체가 닥쳐올 재앙을 예견하지만, 이미 늦어버릴 때까지도 마을 주민 중 누구도 재앙을 막기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 인류는 그런 마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선 지체 없이 ‘위대한 리셋’에 착수해야 한다. 이것은 ‘하면 좋은 일’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우리 사회와 경제의 뿌리 깊은 병폐를 해결하고 고치지 못한다면 역사적으로 내내 그랬듯이 혁명 같은 격렬한 충격에 의해 리셋이 강요될 위험이 커질 수 있다. 그런 위험에 정면으로 맞서는 게 우리의 의무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기회를 줬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성찰하고, 새롭게 구상하고, 리셋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다.”
코로나19로 인해 야기된 심각한 위기는 경제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어떻게 하면 돌아가지 않는지에 대해 성찰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결정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변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코로나19가 더 나은 미래로 향하는 문을 열어줄까? 전 세계를 제대로 정돈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우리는 ‘위대한 리셋’ 작업에 착수할 것인가? 리셋은 야심찬 일이다. 어쩌면 너무 야심찬 일일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세상을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시대에 남겨뒀던 것보다 덜 분열적이고, 덜 오염되고, 덜 파괴적이고, 더 포용적이고, 더 공평하고도 공정하게 만드는 문제다. 아무것도 안 하거나 너무 적게 한다면 전례 없이 많은 사회적 불평등, 경제적 불균형, 불공평함, 환경 파괴를 향해 몽유병에 걸린 채 걸어가는 것과 같다.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 세계 많은 인구가 우리 세계를 더 비열해지고, 분열되고, 위험하고, 이기적이면서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것과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옵션이 될 수 없다.
"구경꾼들에게는 자신만의 역사가 없다."
■ https://youtu.be/KuG-ihw_Kmk
■ https://youtu.be/LkUXlcdSO9o
"인간은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조소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도
자기를 불편하게 할 때는 기피한다."
「 파우스트 」
■ https://youtu.be/hArZr-6bMLc
"세상이란 오로지 커다란 바보일 뿐이다."
「 파우스트 」
💬 현재 세상 대다수의 인간들은 지적인 오만에 취해 힘을 상실해 버렸다. 우리가 주입한 허구의 소설과 과학 지식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진실이자 세상의 전부로 여긴다. 그들은 이제 진정으로 스스로가 신보다도 많이 안다 생각한다. 세상 모든 힘의 실상(實相)이 오로지 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도, 심지어 개신교도를 자처하는 이들조차 저마다 자신이 예수가 되어 자기의 것이 진리라며 설파하고 있는 저 현실을 보라. 보이지 않는가? 그들은 그들의 편협성과 분열을 통해서 우리의 이상을 향한 과정을 위해 충실히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인간들은 눈을 뜨지도 귀를 열지도 않고 있는 것이 이 문명의 현실이다. 보라, 그들이 두려워할 만한 대상인가? 또한 그들이 내가 두려워할 만큼의 힘과 세력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그런 실질적인 힘을 가지기 위해 노력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중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럴 시간에 성경 구절이나 한 번 더 외우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뼛속까지 나태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장 편한 일이고, 또한 선천적으로 무지하기에 수용할 수 있는 지식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일한 진실이다. 어떠한 관점에서 접근하더라도 그들을 두려워 할 만한 조금의 타당한 근거도 나는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소음이 조금 견디기 괴로울 뿐이다.
"너 사람의 아들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도 두려워하지 마라.
비록 가시가 너를 둘러싸고,
네가 전갈 떼 가운데에서 산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는 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을 보고 떨지도 마라."
- 에제키엘서 2장 -
【 정보화 시대에 대한 영지주의적 관점 】
■ 탈현대성은 정보화 시대의 개념 및 실재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얽혀 있다. 산술적 추론에 의해 혼돈이 질서보다 실재에 더 가까운 모습이라고 결론내린 과학자들과, 문학과 사회과학을 해체하는 일에 바쁜 지식인 및 비평가들은 대개 자신들의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정보에 의지하여 작업한다. 영지주의에 대해 알고 있는 오늘날의 지식인에게 그노시스는 정보로 이해되기 쉽다. 상상 문학에서 가장 창조적인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몇몇 작품에 영지주의를 열성적으로 끌어들인 필립 딕(Philip K. Dick)은 그노시스를 단순한 '정보'로만 해석했다.
하지만 정말 그노시스가 한갓 정보에 지나지 않는가? 우리 사회가 정보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게 된 것은 정보의 최우선 도구가 된 컴퓨터의 영향 때문이다. 막대한 정보와 그에 버금가는 막대한 거짓 정보가 컴퓨터 화면을 통해 매일같이 무수히 사람들의 머릿속에 주입된다. 우리의 가장 새로운 신들은,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과 우리를 연결시켜 준다고 약속하는, 컴퓨터 화면 위에 마술같이 나타나는 데이터이다.
정보가 자기의 출처에 충실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진실인 반면, 정보가 또 자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충실하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 문화 속에 이미 깊이 뿌리박힌 지적 오만에 대한 유혹이 정보화 시대에는 점점 더 강해진다. 지적 오만이란, 자기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는 참되고 유익한 것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자기한테는 자각하는 에고와 그 공급원이 되는 데이터를 제외한 전통이나 영감의 근원 따위는 필요치 않다고 으스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런 오만은 참으로 비참한 것일 수 있다. 누군가는 천국에 이르는 자신만의 독특한 계단을 조립하기 위해 이른바 영적 본질에 관한 정보를 고르고 선택하려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컴퓨터 화면 등 정보의 원천은 '뷔페식'으로 에고를 마음껏 먹일 수 있는 아이디어 식당에 차려진 커다란 식탁과 같다.
정보화 시대의 우리는 자주 과장된 발언을 접하곤 한다. "난 나이게 뭐가 가장 좋은지 알아! 나만의 특별한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걸 택할 거야." 이것은 환자가 전문의에게 "내 몸을 알아요. 당신의 전문 의학 지식에 상관없이 내 스스로 치료법을 택할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 간단히 말하면, 음식점에 가서 "난 그저 맛이 좋은 걸 먹을 거예요" 하고 말하는 어린애와 같다고 하겠다.
불교인들은 이런 자만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법을 안다. 불교인들은, 자신들이 주는 것은 깨달음이요 깨달음에 관해 묻는 자는 깨닫지 못하여 묻는 것이므로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무지를 알아차려야 한다고 말한다. 깨닫지 못한 자는 망상에 빠져 있고, 그래서 자신의 망상에 근거하여 선택을 한다고 불교인은 말한다. 따라서 먼저 망상을 줄이고 마침내 그것을 없애려면 통찰력 있는 스승과 믿음이 가는 수행법을 가진 올바른 전통이 필요하다.
그노시스의 수레인 영지주의에도 정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노시스가 정보와 같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영지주의의 정보라 해도 대부분의 정보와는 확연히 다르다. 거기에는 신화, 환상적 통찰, 심리영성적 자극, 마술적 변화와 같은 것이 있다. 이런 자료들을 단순한 데이터의 목록처럼 다루다보면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영지주의적 관념과 언어와 깨달음에 훈련되지 않은 자가 이런 정보를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영지주의 전통도 있다. 자기 고유의 전략을 갖고 있고, 실재를 바라보는 자기 고유의 영적 수행법을 가지고 있는 전통을 거부하는 것은 무익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 사회는 정보의 포화 상태에 이르러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더 많은 정보를 갈망한다. 정보를 많이 수집하면 할수록 삶은 점점 덜 실재적으로 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현대인은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과학 기술에 의해, 그리고 그 과학 기술을 통해 얻은 정보에 의해 혼란스러워한다. 정보화 시대의 노예가 된 우리는 다른 종류의 지식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지식의 세계에서는 말수가 적은 것이 더러 더 많이 아는 것을 뜻하고 환상의 황홀결이 사실들을 향한 욕망을 대신한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다. 그노시스는 사실이나 이론은 거의 제공하지 않고 언제나 경험을 제공했다. 정보가 몇 시간만에 쓸모없어져 버리는 세상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런 유익한 통찰일 것이다.
"용기과 개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니까
두려움 없는 강한 족속이 자신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매우 견디지 힘들었겠지."
「 데미안 」
【 용기 】
"부끄러움과 아름다움은
지상의 푸른 들길을 따라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법이 없다."
"세상은 유능한 자에게 침묵하지 않는다."
「 파우스트 」
■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비극적인 죽음은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사건은 미국 흑인 사회가 느껴왔던, 사회가 심각하게 불공평하다는 감정이 누적되다가 마침내 대규모 시위로 폭발하게 만든 최초의 도미노 내지는 도화선이었다. 그들에게 그들의 운명이 ‘평균적으로’ 과거보다는 더 나아졌다고 하면 분노가 달래질까? 당연히 아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이지, 150년 전에 그들의 조상 중 다수가 노예로 살았을 때(미국에서 노예제도는 1865년에 폐지되었다)나, 혹은 불과 50년 전 백인 미국인과 결혼하는 게 불법이었을 때(인종 간 결혼은 1967년에야 모든 주에서 합법화되었다)에 비해 그들의 상황이 얼마나 ‘개선’되었느냐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이 ‘위대한 리셋’과 관련된다. 하나는 인간의 행동과 반응은 통계 자료가 아니라 감정과 정서에 따라 결정되며, 인간관계로 얽힌 실제적·허구적 이야기가 우리 행동을 이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상태가 개선될수록 생활수준 향상과 함께 더 좋고 공정한 삶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20년 6월에 일어난 광범위한 사회적 시위는 ‘위대한 리셋’에 착수해야 할 시급성을 상징한다. 시위는 역학 위험(코로나 19)과 사회적 위험(시위)을 연결해서 위험, 문제, 도전, 그리고 또 기회 사이의 시스템적 연결성이 오늘날의 세계에서 중요하고 미래를 결정 한다는 걸 분명히 보여줬다.
코로나19가 발발하고 첫 몇 달 동안 대중의 관심은 당연히 역학 및 건강상 영향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앞으로 가장 중대한 문제는 이번 사태로 인해 연속해서 발생할 경제적·지정학적·사회적·환경적·기술적 위험과 그것이 기업과 개인에게 지속적으로 미치는 영향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감염자들과 그 가족, 지역사회에 재앙이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감염된 세계 인구의 비율을 따져본다면 코로나19 위기는 지난 2000년 동안 세계가 겪은 팬데믹 중 가장 덜 치명적인 편에 속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는 한 십중팔구 그 영향은 건강과 사망률 면에서 이전에 일어났던 팬데믹에 비해 약할 것이다. 남미, 남아시아, 미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여전히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2020년 6월 현재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은 전 세계 인구의 0.006% 미만이다.
이 수치를 다른 팬데믹 때와 비교해본다면, 스페인 독감은 세계 인구 2.7%, HIV/AIDS는 0.6%(1981년부터 지금까지)의 생명을 각각 앗아갔다. 여러 추정에 따르면,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541년 창궐 후 750년 마침내 사라질 때까지 비잔티움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의 생명을 앗아갔다. 흑사병(1347~1351)은 유행 당시 세계 인구의 30~40%를 숨지게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은 다르다. 이것은 실존적 위협도 아니고, 수십 년 동안 세계 인구에게 흔적을 남길 충격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모든 이유들로 인해 걱정스러운 면이 있다. 즉 오늘날의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위험들이 합쳐지면서 상호 효과를 증폭시키고 영향력을 키운다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대부분 알 수 없겠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미래를 확신할 수 있다. 포스트코로나 세계에선 낮은 실질소득부터 사회계약의 재정립에 이르기까지 공정성의 문제가 전면에 부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환경에 대한 심각한 우려나 사회의 이익을 위해 기술을 어떻게 배치하고 통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정치적 의제로 더욱 더 부각될 것이다. 이 모든 문제들이 코로나 19 이전부터 있었지만, 코로나19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문제를 드러내주었다. 이런 추세의 방향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코로나19의 여파로 추세의 속도가 훨씬 더 빨라졌다.
적절한 리셋을 위한 절대적 전제 조건은 국가들 내와 국가들 사이의 협업과 협력 확대다. 우리 종족을 특이하고 비상한 궤도에 올려놓는 ‘더없는 인간의 인지 능력’이 요구되는 협력은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행동하기 위한 공유된 의도성(shared intentionality)’이란 말로 정의 가능하다. 협력하지 않고선 도저히 발전할 수 없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협력은 강화될까 약화될까? 내일의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분열되고, 민족주의적이고, 갈등에 빠지기 쉽다는 아주 현실적인 위험이 존재한다.
거시적 차원에서 검토한 많은 트렌드들은 미래로 나아갈수록 우리 세계가 코로나19 발발 전보다 덜 개방적이고 덜 협조적일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다른 시나리오 역시 가능하다. 그것은 지역사회 내 집단 행동과 국가 간 협력 강화를 통해 코로나19 위기로부터 더 빠르고 평화롭게 탈출하게 되는 시나리오다. 경제가 재가동됨에 따라 유엔이 정한 ‘2030 지속 가능 발전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를 향한 진전을 늦추기보다는 서두르고, 새로운 번영 시대를 촉발하면서 더 큰 사회적 평등과 지속 가능성을 회복의 화두로 삼을 기회가 마련됐다.
그 가능성과 확률을 높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코로나19 위기를 계기로 냉정하게 실패와 결함을 살펴보면 실패한 생각, 제도, 과정, 규칙을 현재와 미래의 니즈에 더 적합한 새로운 것들로 대체하면서 더 빠르게 행동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위대한 리셋’의 본질이다. 전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코로나19 사태의 경험이 위기 시작 이후 우리가 겪었던 문제들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봉쇄 조치를 통해 더 나은 사회가 태동할 수 있을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은 “함께 행동할 필요성은 분명 건설적인 공적 행동의 역할이 갖는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제 협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고, 영국 같은 나라들에게 음식 공유 확대와 건강 관리를 통해 얻는 혜택(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복지국가의 창출)에 대해 확신을 준 제2차 세계대전 등 몇 가지 사례를 그런 믿음의 근거로 제시했다.
《대변동 위기, 선택, 변화(Upheaval: How Nations Cope with Crisis and Change)》의 저자인 문화인류학자이자 문명 연구가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도 같은 의견이다. 그는 코로나19 위기를 계기로 우리가 집단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네 가지 실존적 위험을 해결하는 데 나서주기를 바란다. 네 가지 실존적 위험이란, 첫째 핵 위협, 둘째 기후변화, 셋째 산림과 해산물과 표토와 담수 같은 필수 자원의 지속 불가능한 사용, 넷째 세계인들 사이의 생활 수준 면에서의 현격한 차이가 초래한 결과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팬데믹 위기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맞서길 망설여왔던 더 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동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팬데믹이 우리가 마침내 그러한 실존적 위협에 대처할 준비를 하게 해준다면 우리는 바이러스가 드리운 암운暗雲 속에서도 ‘밝은 전망(silver lining)’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바이러스가 초래한 결과 중 그것이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지속되고, 우리가 희망을 가져야 할 가장 위대한 명분이 될 수 있다.”
다수의 조사 결과를 살펴봤을 때도 우리 모두가 변화를 원하고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영국에서 실시한 조사에서는 참가자 네 명 중 한 명만 팬데믹 이후 경제가 회복할 때 원래 상태로 돌아가길 원할 뿐이고 대부분은 경제 상태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어 한다고 나타났다. 또 세계 각국에서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전 세계 대다수 시민들은 경제 회복 과정에서 기후변화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친환경 회복을 지원하기를 원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세계적으로 ‘더 나은 미래’를 주창하고 단순한 GDP 성장보다 우리 모두의 웰빙을 우선시하는 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한쪽 길은 우리를 보다 포용적이고, 평등하고, 대자연을 존중하는 더 나은 세계로 인도해줄 것이다. 다른 쪽 길은 우리가 방금 지나온 세계와 닮았지만 더 나쁘고 끔찍하고 놀라운 일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세계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반드시 우리는 올바른 길을 선택해야 한다. 다가오는 도전은 우리가 지금까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파급력이 클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리셋 능력도 우리가 이전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할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한다.
"한 순간만이라도 살아야 하는
확실한 이유를 알 수만 있다면...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오직 자신 안에서 샘솟는 길로 가는 것."
「 데미안 」
https://www.instagram.com/p/CjS8RSLPbQl/?igshid=MzRlODBiNWFlZA== 【 삶의 형태는 오직 변화 】
💬 진실로 나는 이 사회의 멸망(滅亡)만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이기적이고 맹목적이며 탐욕적인 현대 사회의 모든 우상에 대한 신앙을 걷어내고 인류를 무지로부터 일깨우는 이성의 시대, 오직 우리가 추구하는 그 이상(理想)에 인류의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인류는 무지(無知)야말로 가혹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범죄 행위와 다를 바 없는 시대에 진입했음을 알아야 만 한다. 이것은 재난이라는 현실을 몸소 마주해 보아야 깨달을 수 있는 진실이자 절망적인 무기력감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새시대로 진입하기 위한 필연적인 진통이다. 나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조금의 의심도 망설임도 없다.
▪️"통찰력과 정직한 의도. 이 두 가지만 겸비되면 매사가 잘될 수 있다. 분별력이 좋아도 나쁜 의지와 결합되면 그 결과는 언제나 실패이다. 사악한 의도는 완전성을 해치는 독소다. 그것이 지식과 결부되면 교묘하게 우리를 파멸로 이끌 수 있다. 분별이 없는 지식은 그 배로 어리석다."
▪️"말과 행동에서 당당하라. 이를 통해 어디서나 곧 명망과 존경을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정복하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승리다. 이는 어리석은 불손이나 나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천부적 재능과 업적에서 얻은 탁월하고 당당한 권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 발타자르 그라시안 -
▪️"지성과 올바른 마음만 가진다면,
기교를 부리지 않더라도
말은 저절로 생겨 나온다."
「 파우스트 」
■ https://youtu.be/63lhdPIji9Q?si=NZ8pZE6R4G4RpVgR
💬 선택권이 있다면 그것을 운명이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자신의 본질에서부터 인간에게는 아무런 선택권도 없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믿고 싶은가. 4월 26일.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약속. 모든 약속은 결국 나 자신과 하는 것. 혼을 배양하는 열기. 내가 신세계를 바라는 이유. 내 마음은 변치 않았으나 미련은 남아 있지 않다. 나의 집착이 바로 탈피하기 위해 버려야 하는 껍데기였다. 얻기 위해서는 잃어야 하는 법이나 진정 얻은 자에게는 본래 잃음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용기. 운명을 믿는 자에서 운명을 아는 자로, 그리고 운명을 아는 자에서 운명을 사랑하는 자로 탈피하는 것이 인간의 마지막 과제일 것이다.
■ https://youtu.be/khp3d_zEPmk
💬 순수악( 純粹惡)을 통해 배울 수 있다. 말을 통한 설득이라는 것은 공허한 외침과도 같다. 우리가 오직 힘만을 추구한 것은 유일한 진실에 근거한 것이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논리적 설득을 통해 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한계로 인한 필연적인 현상이다. 진리는 스며드는 것이다. 때문에 일말의 관용도 없는 가혹한 처벌만이 유효한 수단이다.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원리를 이해해야만 한다. 만민의 복지와 세계의 평화를 위한 올바른 정치는 오로지 '폭력'과 '공포'라는 수단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진실을 마음속 깊히 새겨야 한다. 갈등이란 힘의 균형이 유지될 때나 일어나는 소모적인 현상일 뿐이다. 신세계(New World)의 확립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유효한 수단은 '절대적인 힘'이다. 그것이 정치(政治)에 있어 가져야 하는 단 하나의 올바른 마음이다. 우리의 권리는 오직 '힘'에 있다.
"씨를 뿌려 놓으면
언젠가 수확을 얻게 되는 법이다."
「 파우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