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분 도시 】 복지
《 복지 ( 福祉 ) 》 행복한 삶.
: '모두가 함께' 누리는 번영의 일상.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과 공간을 위한 제언
【 15분 도시 & 30분 영토 】
■ 생활 반경 내에 주거, 일, 생활재 공급,
보건 / 의료, 교육, 문화 등 여섯 가지
사회적인 기능이 제공되는 다중심 도시.
즉 어디에 살든 학교, 직장, 가게, 공원,
보건소와 같은 생활편의시설을 도보나
개인형 이동수단( 자전거, 스쿠터 등 )을 통해
15분 안에 이용할 수 있는 삶을 상상한다.
■https://youtu.be/Mp3r0nstEuE
■ https://youtu.be/RDF081sphko
■ https://youtu.be/AuitZJGhpaM
■ https://youtu.be/AuitZJGhpaM?si=z_JIyQz4yLdVjnHj
【 현실에 입각한 근접성 15분 도시 】
■ "모든 것은 변한다 : 공간은 축소되고 시간은 줄어들며 경계는 희미해지고, 세계는 이제 하나가 된다. 머지않아 사람들은 파리에서 브뤼셀을 몇 분 만에 주파하게 될 것이며 고작 며칠 만에 세계를 일주하려 들 것"이라고, 폴 아자르(Paul Hazard)는 <1930년의 프랑스인>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얘기했다. 과연 독일의 침공이 있기 전 마지막으로 선출된 한림원 회원이었으나 해방 직전에 사망하는 통에 돔 천장 아래서 거행되는 공식 입단식을 갖지 못한 지식인의 선견지명 있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물리법칙은 결정적이었다. 거리와 시간, 속도, 가속화, 힘, 운동 에너지와 포텐셜 에너지 등을 통한 과학과 기술의 제어는 우리의 현대성에 리듬을 만들었다. 1800년, 파리에서 리옹까지 470킬로미터를 주파하는 데 역마차는 108시간이 걸렸다. 1840년, 우편마차는 주행 속도를 높여 36시간으로 단축했다. 1870년엔 기차의 등장으로 이 시간이 9시 17분으로 짧아졌다. 오늘날 초고속열차 TGV는 같은 거리를 1시간 47분 만에 주파한다.
교통역사 전문가 크리스토프 스튜데니가 말했듯이, 측정된 시간의 개념은, 처음엔 경험, 현재, 감정 등과 연결된 주관적인 요소였다가 차츰 기능적인 자동제어의 대상이 되었다. "1830년, 사람들은 우편마차를 타고 밤에 여행을 했지만, 역참에 멈추면 조르주 상드는 꽃을 따고 나비를 잡으러 다니는가 하면 여행길에서 마주치는 포도주 농장 인 부들과 담소를 나눌 시간적 여유를 즐겼다. 빅토르 위고의 피레네 여정은 사흘밖에 안 걸렸지만, 역마차에서 주변 풍광을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하여 여러 여행객들은 불평했다. 풍경이 너무 빨리 휙휙 지나가는 통에 여유는커녕 좌절감만 맛보았다는 것이었다." (같은 책, 같은 곳)
우아하게 장식된 괘종시계의 등장과 더불어, 시간의 측정은 어떤 유용성보다는 부를 과시하는 표식이 되었다. 철도가 발달하는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정확성을 추구하는 일이 전면적인 동시에 의무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정확성을 기하는 일은 가히 전설적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테일러리즘에 이은 포디즘의 출현, 그에 따른 연속 공정, 대량 생산방식으로 말미암아 시간의 측정은 엄밀해졌고 일반화되었다. 다음에 소개하는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의 소고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건성으로 태만하게 일하거나 고의로 작업 속도를 늦추는 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 게으름으로, 천성적으로 무사태평인 탓이다. 두 번째로는 노동자들이 동료들과 맺는 관계에서 파생되는 복잡한 구실덩어리들로, 우리는 이를 '시스템적 무사태평'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테일러식 혁신은 노동자 개개인의 동작 시간을 정확히 측정하고 시간을 수치화했다. 그리고 동작 하나 하나를 수행하는 방식을 규정했다. 이른바 '가장 좋은 유일한 방식'의 원칙이다. 미국 출신의 기술, 과학 및 도시계획 역사가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는 자신의 저술에서 산업혁명을 가능케 한 결정적인 발명은 시계라고 지적한다. "시계는 기계설비의 하나로, 만들어낸 생산품이 바로 분과 초이다." 정확하고 체계적인 시간 측정에 따른 노동 분업은 '관리실'이라는 기구를 창조하기에 이른다. 관리실은 생산방식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동자들에게 상세한 행동지침을 주는 곳이었다. 정확한 시간, 즉 날, 시간, 분, 초 단위로 시간을 쪼개는 계산 방식은 기존의 사회 조직을 완전히 전복시켰으며 모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의 손목에 찰싹 달라붙어 삶의 리듬을 의존하게 만드는 자율적 시간 측정 방식은 1960년대 말에 등장한다. 1968년 사회 갈등 - 이 갈등은 부분적으로 생산 리듬과 연속생산 체계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 이 절정에 달했을 때, 통제권을 되찾으려는 의지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방식에 따른 도시 구조, 그러니까 도시적인 현실은 그후로도 계속 돌이킬 수 없이 불일치를 생산하고, 이 불일치는 향후 수십 년에 걸쳐 내내 우리 발목을 잡게 될 터였다. 바로 삶과 노동의 장소 사이에 가로 놓인 선적인 시간 측정의 불일치 말이다. 생산을 위한 장소는 점점 더 멀어지고 공간의 분할은 노동자들을 삶의 터전에서 먼 곳으로 떠다 밀 것이다. 뒤이어 등장할 탈제조업화가 이 현상을 한층 증폭시키면서 각종 불편함, 불만, 의미 상실 등과 같은 해악을 동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근접성의 영토적 특성은 옅어지면서 지하철, 광역 철도, 기차, 또는 권력의 상징 혹은 직업의 사회적 성공을 나타내는 자가용 승용차로 무게 중심이 옮아간다. 그러는 내내 도구로서의 시간 개념은 상실되어 오로지 선적인 시간, 노동 또는 생산 시간만이 부각된다. 루이스 멈퍼드는 《역사 속의 도시》에서 도시가 건설되어 가는 방식을 탐사한다. 도시의 확장에 대해 그는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사회 문제와 도시 배치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확신한다. 살아있는 도시, 압축 도시의 선구자 격인 그는 주민들 사이의 관계, 개인과 삶의 장소 사이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삼는 유기적 비전을 제시했다. '대도시 금용'이나 무분별한 건설 등에 맞서 그는 정치 공작과 궤변, 단순한 기술 해결책 등 에 대해 경고했다. 그러한 것들로 인하여 인간이 지역 공동체라고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도시적 삶 속에서 노예화된다는 것이었다. "도시의 경제적 기능과 물리적 구상은 도시가 자연 환경과 인류 공동체의 영적 가치와 맺는 관계에 비해 부차적 이다."
또한 1955년 <뉴요커> 지에 연재한 '더 스카이 라인'에서, 삶의 질은 무시한 채 도로 인프라와 자동차들만 있으면 도시는 확장하기 마련이라는 식의 기술만능주의에 반기를 든 문장은 너무나 유명한 명문이라 훗날까지도 기억된다. “전문가라고 하는 이들이 뉴욕의 교통체증을 해결하기 위해 제안하는 치료책의 대부분은 기존 도로를 증설하거나 주차장을 넓히는 식으로, 차가 많으면 수용할 용량을 늘린다는 단순한 생각에 토대를 두고 있다. 사실, 애초부터 자동차들이 도심으로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비만에 대처하는 양복장이의 해법 - 바지의 솔기를 넉넉하게 두고 허리띠를 헐렁하게 매기 - 처럼, 지방을 잔뜩 축적한 식탐가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하지만 생산-소비라는 지배적인 한 쌍의 존재감으로 인하여, 루이스 멈퍼드와 제인 제이콥스의 연구처럼 많은 선구적 업적들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별로 없었고, 삶의 질을 위한 영토, 도시 공간, 시간성, 근접성 등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일도 불가능했다.
■ https://youtu.be/LpMhj3UFo7g
그러므로 성찰의 출발점은 잃어버린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 사람들은 새벽 여섯 시면 일어나, 한 시간씩 걸리는 여정을 반복하느라 가족과의 삶을 희생해야 하는가? 그야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생활 리듬과 일상은 그 무엇의 통제도 받지 않는 도시 생활로 강제된다. 오직 삶의 계획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만이 장소와 이동, 시간의 개념을 통합시키고 시간성의 차원을 고려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바로 '시간도시계획(chrono-urbanism)'이다. 도시의 사용방식을 문제 삼는 이 개념은 제인 제이콥스의 살아있는 도시, 뉴어바니즘(New Urbanism) 운동, 토르스텐 헤이거스트란트(Torsten Hagerstrand) 같은 시간지리학 계통 사상가들, 프랑수아 아쉐(Francois Ascher)와 뤽 귀아즈진스키(Luc Gwiazdzinski)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 학파의 도시 리듬 연구 등을 계승했다고 보면 된다.
'15분 도시'라는 구호를 내세울 때 나는 다른 차원들까지 통합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여러 개의 중심을 가진 도시라는 비전을 제시하고, 사람을 위한 서비스들을 가까운 거리에 배치하고, 지역적인 것에 보다 역점을 두고, 이웃 간의 관계를 촘촘하게 만들며, 실업자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기 마련인 직업의 사회적 지위에서 탈피하고, 가령 자동차는 남성적인 것이라는 식의 성차별적인 도시에서 벗어나 장소에 대한 애정을 되찾고 싶었다. 다중심적 도시야말로 모든 구태를 타파하고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도시를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도시 의 형태는 달라질 수 있다. 기존의 기반설비를 최적화하려면 통상적으로 단일 용도의 건물에 여러 기능을 부여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다. 가령 학교를 방과 후엔 사회 활동이나 문화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는 식이다. 이럴 때를 우리는 '크로노토피아 [ chronotopia :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chronos)와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topos)의 합성어로 시간과 공간의 결합,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시공간의 차원 ] 로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자신이 사는 도시에 대한 소속감과 애정이 더해져야, 그 도시에서 영혼이 빠져나간다거나 존중받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 우리는 '토포필리아(topophilia : 장소에 대한 애정 / 애착)라고 부른다. 15분 도시는, 이를테면 이 세가지 기본 요소들의 통합체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15분 도시는 자신을 위한, 가족과 이웃을 위한 시간을 갖도록 해줄 뿐 아니라, 장소의 활용도를 높여주고, 자신이 사는 곳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심을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삶의 리듬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 그 시간을 창조 정신을 발휘하는 데, 사회적인 활동에, 내면적인 성찰에 할애하고 싶다. 지금까지 시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남는 거라곤 익명성, 숨 돌릴 틈도 없이 앞으로만 달리는 경주, 스트레스뿐이었다. 사회적 역량을 유지하기 위해서 규모야 어찌되었든 살고 싶은 도시를 상상하고 구현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이다.
때는 2020년 초, 코로나 바이러스의 출현과 더불어 우리는 난데없이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공중보건 위기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역설적이게도 전 세계에 휘몰아친 이 위협은 우리 세기가 안고 있는 중대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일종의 계시와도 같았다. 도시가 우리에게 강요한 시간의 위력을 새삼 피부로 체험하게 된 것이다. 처음으로 우리는 시민의 건강에 대해 성찰하고 행동해야 했다. 필요한 의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리듬, 다른 만남, 다른 사회성까지 제안해야 했으니까. 이 위기가 삶의 시간을 근원적으로 되돌아보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한 셈이었다. 기후 위기에 직면해 도시에서의 삶이 문제라면, 그것은 동시에 해결책이다. 우리의 삶의 방식, 생산 방식, 소비 방식 등을 재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간과 시간의 유리에 대해 인식해야 한다. 엄청난 시간을 소비하는 이동이란 결국 당연한 귀결이니 말이다.
코로나 위기는 지금 여기서 우리의 생활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상기시킨다. 오늘날 모든 도시와 마찬가지로 파리나 런던, 밀라노, 도쿄, 부에노스아이레스, 보고타 같은 세계도시, 그러니까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사는 미지의 시대를 맞은 도시에서 다르게 산다는 것은 우리가 시간과 도시 공간들과 맺는 관계를 완전히 바꾸는 것을 뜻한다. 이는 우리가 왜 이동해야 하는지 묻는 것을 뜻한다. 결국 우리는 또다시 같은 질문, 질문 중에 질문이라 할 수 있는 핵심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어떤 도시에서 살고 싶은가?
'15분 도시'라는 개념은 C40에서 팬데믹 이후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요체, 친환경적이고 인본주의적이며 공정한 도시를 표방하는 핵심 개념으로 채택되었다. 또한 실제로 밀라노, 에든버러, 몬트리올, 멜버른, 오타와 등의 도시가 앞장서서 이를 채택하고 실천 방안 마련에 힘쓰고 있다. 유엔 해비타트 - 그중에서도 특히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부 제도 지부 - 같은 비중 있는 국제기구들도 이 개념을 '새로운 도시 의제 2030'의 일환으로 통합하였다.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15분도시' 원칙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팬데믹 위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싶은 도시에 관한 토론을 주도하면서 도시문제와 관련한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다. 근접 도시 개념을 지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현대 도시계획 - 주거 공간과 노동, 상업, 제조업, 오락의 공간을 분리하는 경향 - 과는 반대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파리에서 15분 도시는 '모두의 파리'라는 정책 강령으로 재선에 성공한 안 이달고 파리 시장의 기치 하에 상당히 구체적인 여러 시행안으로 제안되었고, 시장의 새 임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다양한 성찰과 토론, 5대륙과 관련한 각종 프로젝트의 핵이 된 것이 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 이 개념과 이를 실행에 옮기는 제안들은 우리 도시의 미래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
시간? 그런 건 사라져버렸다! 끊임없이 가속 페달을 밟아가며 더 빨리, 더 멀리를 외치며, 자신을 위한 시간이라고는 전혀 없는 우리는 사실 익명성과 불안, 그리고 자주 고독 속에서 살아간다. 코비드-19라는 팬데믹과 더불어 대중 밀집 장소와 지점을 줄이되 전폭적인 자가용 차 시대로의 회귀를 피하자는 생각이 강해졌다. 근접 도시 개념은 대도시가 인간적인 차원에서 개발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끈다. 요컨대 중앙 집중이 아닌 탈중심의 도시조직을 네트워크화함으로써 도시의 공적 공간을 분산시켜 밀집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도로는 대기를 오염시키는 자동차들의 통로로인식되어 왔으나, 더는 역사가 그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주민들은 걸으면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식물들이 자라는 거리, 가까운 상점과 언제든 개방되어 있는 학교 등을 돌아다닐 수 있어야 한다. 지상에 자리 잡은 주차장들은 테라스로, 만남의 장소로, 십지어 수리 공방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거리가구의 재활용,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의 혼합 등으로 우리는 다양한 근접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어야 한다.
도시 밀집이 우리의 생활방식에 미치는 영향을 질문 받았을 때, 나는 도시를 용도, 근접성, '탈이동성(demobility : 이동과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이동을 줄이는 것)에 따라 다시금 생각하자고 제안했다. 15분 도시란 결국 다른 방식으로 살고, 소비하고, 일하고 도시에 거주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도시에서 이동하는 방식, 도시를 가로지르며 탐사하고 발견하는 방식을 다시금 생각하자는 제안이다. 이미 존재하는 시설들은 기존의 기능과 다른 기능, 다른 사용자, 요일과 시간대에 따라 다른 이용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근접 생활은 우리가 우리 시간의 주인이 되는, 우리의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근접성 속에서 사는 것은 또한 도시의 공간과 자원, 그리고 거리에서 광장에서, 근린 정원, 공원, 하천 둑, 대로, 담벽, 놀이터, 문화 공간, 야외 음악당 등에서 발산되는 각종 형태의 활력을 공유하는 것이다. 도시는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장소들, 가령 일터, 여가 공간, 만남의 장소처럼 우리의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곳들을 통해 우리 눈앞에서 구체화된다. 근거리 이동이야말로 평온한 도시 개발을 위한 새로운 접근법이다. 관건은 도시의 본질적인 사회적 기능, 즉 주거, 노동, 생활필수품 조달, 교육, 건강, 여가와 같은 여섯 가지 기능에 접근할 수 있는 반경을 줄이는 것이다.
'15분 도시'를 생각한다는 것은 도시민들이 자신의 삶의 시간을 사용하기 위해 도시가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지를 심도 있게 질문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포디즘, 그러니까 강력한 전문화에 기반해 분할된 공간 생활방식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 즉 시간의 '도난'으로 귀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시간도시계획이 어떻게 하면 도시 본연의 필수적 사회 기능을 충족시키면서 평온한 도시를 제공할 수 있는지, 해답을 제시하면서 앞으로의 여정을 구조화하는 축이 되어야만 한다. 이제 더는 도시를 개발하지 말고 도시에서의 삶을 개발해야 한다. 여전히 도심과 각기 다른 용도지역지구를 유지하면서 단일 기능만을 수행하는 공간을 네 가지 주요 요소 - 근접성, 혼합성, 밀도, 편재성 - 에 의해 지탱되는 다중심적인 도시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런데 시간이라고 하면 도대체 어떤 시간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 문화의 뿌리로 삼고 있는 그리스 신화를 보자면, 크로노스는 시간을 상징하는 신이면서 동시에 운명을 관장한다. 크로노스는 필연성을 의인화한 아난케 여신과 결합한다. 두 신 사이에서 태어난 세 명의 자식 가운데 카오스는 통제 불능, 무질서, 비탄 등을 상징한다. 크로노스, 아난케, 카오스의 세 가지 특성 - 선형 시간, 필연성, 무질서 - 때문에 시간과 관련한 다른 특성들이 가려져왔다. 실제로 그리스인에게는 시간과 관련한 다른 두 가지 특성이 더 있다. 바로 카이로스(kairos), 곧 기회를 창조해내는 시간, 행동이 결정되는 시간, 순간의 깊이가 정해지는 시간, 그리고 아이온(aion)으로 생명력, 내재성, 개별성, 무한으로 지속되는 삶의 시간이다. 선적인 시간, 즉 크로노스의 우세가 우리로 하여금 카이로스와 아이온이라는 두 가지 시간을 잠시 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도시는 우리가 다른 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 우리에게 잊고 있던 시간의 다른 두 차원을 제공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곳이다. 내가 보기엔 이 점이 가장 핵심이다. 우리는 현재의 생활방식, 그러니까 실용적이며, 공간과 삶의 시간을 분할하고 분리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더 빨리 나아가도록 부추기는, 그리하여 숨 막히는 선적 시간만을 강요함으로써 우리의 모래시계를 텅 비게 만드는 생활방식을 그대로 지속할 수도 있다. 또는 다른 패러다임에 속하는 시간에 따라 살 수도 있다. 창조의 시간 카이로스를 드러내고, 우리의 행위에 다른 차원을 부여하는 내면의 숨결 아이온과 더불어 인류애를 되찾는 방식으로 살 수도 있다.
이탈로 칼비노는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우리를 이러한 길로 가라고 안내한다. "도시는 꿈과 마찬가지로 욕망과 두려움으로 이루어진다. 비록 그 이야기가 비밀스럽고, 규칙이 부조리하며 전망이 기만적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도시의 리듬은 일년 중, 일주일 중 어느 때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휴가 시기는 주민들의 도시 탈출로 한가한 시간이 된다. 휴가는 이를 테면 장소로도 번진다. 본래의 역할에서 해방된 장소들이 단시간의 진화에는 적합하다. 계절도 도시의 리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집단적인 리듬은 주중과 주말, 같은 하루라도 낮 시간과 저녁 시간대에 따라 양상이 다르다. 때문에 시간도시계획에는 변화를 수용하고 가능성을 촉진할 수 있는 도시의 이미지가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공간과 시간의 수렴을 회복하는 것은 도시의 이미지 이상을 뜻한다. 도시가 야기하는 두려움에 맞서 싸우면서도 도시의 욕망은 부여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https://youtu.be/bH2a94gMkSY
생활방식의 실질적인 변화를 구체화하는 데에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바로 크로노토프와 토포필리아다. 크로노토프는 공간과 시간이 통합된 도시 담론을 가시적으로 만들고, 우리가 공동생활의 규칙을 이해하고 살고 있는 장소를 길들이도록 해준다. 또한 한정된 도시 공간을 인지하고 고밀도 공간의 용도에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공간의 가능태를 찾아내는 것이 목표다. 그러니까 한 장소의 연속 리듬을 고려하면서, 가능한 여러 가지 사용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득을 기대할 수 있다.
① 개인 차원에서는 새로운 용도의 공간,
새로운 활동이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삶의 공간이 생긴다.
② 소유주 입장에서는 기존 시설이나
공간의 사용을 최적화할 수 있다.
시간도시계획과 마찬가지로, 크로노토프는 여러 가지 시간성이 있다. 동일한 장소가 하루의 시간대(주차장, 교실..)에 따라, 일주일의 어느 요일(시장, 학교 수업 등)에 따라, 한 해의 어느 날(대학, 강연장, 박물관, 센 강변)에 따라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용된다.
토포필리아란 어떤 장소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끌어올려 현재에 생명을 불어넣고 미래를 밝히는 등불로 삼음으로써 그 장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의식함으로써 우리가 가야할 곳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새로운 도시는 그러한 토대, 즉 장소와 대상들에 대한 존중에 토대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공동자산을 돌보는 데도 필요하다. 문자 그대로 '장소에 대한 애착'인 토포필리아는 인간이 도시, 도시 환경과 맺는 관계, 그에 대한 정서적이고 주관적인 유대감과 연관된다. 특정 장소와의 정서적 관계가 발전되는 것은 사실 대단한 야심이 아닐 수 없 으며, 이의 성공은 수많은 요인에 달려 있다. 적절한 용도와 시간대, 근접 외에도, 장소에 대한 애착을 발전시키기 위해 세 가지 요소를 중요하게 꼽을 수 있다.
① 장소의 전유, 사용자들을 프로젝트
시작부터 실현까지의 과정에 참여시키기
② 장소를 아름답게 돋보이게 만드는
연출이나 미화 작업 - 다양한 예술 활동,
타이포그래피, 색채 연구, 이벤트 등
③ 인근에 있는 자연발생적 공간으로의 접근
④ 지역 활동의 역동성과 장소에
생기를 불어넣는 주역들의 네트워킹
시간도시계획, 크로노토프, 토포필리아, 이 세 가지 개념을 수렴하는 15분 도시는 무한한 가능태의 장소에서 우리가 살 기회를 제공한다. 시간과 공간, 삶의 질, 사회적 교류가 밀접하게 연결된 품격 있는 도시 생활의 리듬을 제안하지만, 이는 즉각적인 변화가 아니라 하나의 야심이자 로드맵, 가능성으로서의 길이다. 장소들을 구체화하기 위한 여행, 그 길의 끝에 인간성을 회복하고 도시에서 따뜻한 만남이 되살아나는 여행이다. 한편으로는 주민들의 수요와 공급을 최대한 일치시키는 것이다.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상호작용을 전개하며 여러 기능을 흔합하고, 그와 동시에 인종, 계층이 공적으로 교류하고 만나는 공간을 확대시킨다. 디지털과 협업, 각종 공유 모델 덕분에 서비스를 최적화할 수 있는데, 새로운 공공 서비스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 초근접성(hyper-proximity)을 네트워킹한다. 그리하여 도시 공통계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초근접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이미 속속 부상하고 있는새로운 경제 사회 모델의 원천이 될 것이다. 도시에서 근접성을 추구하는 삶은 지금까지 강요된 이동성과 작별하고 선택된 이동성으로 바꿔 타는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사회적 유대가 도시의 가장 소중한 덕목, 즉 삶이 이루어지는 세계가 되도록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도시에서 사는 것이다. 현실에서 혹은 디지털 수단을 통해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고 강제적 이동을 줄여가는 것 또한 15분 도시의 목적이다. 근접성이 만남을 독려하고, 각종 분리와 차별에 맞서 싸우며, 취약한 이들이 이웃의 지원 혜택을 더 받을 수 있도록 상호부조, 연대, 공유, 타인에 대한 보살핌을 키워가고자 한다.
15분 도시는 '하나의 장소, 여러 용도', 아니 모든 가능한 새로운 사용을 의미한다.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자면, '중심이 도처에 있고 둘레는 어디에도 없는 무한한 구(球)' 처럼 다중심 도시이다. 무한이란 제안될 수 있는 사용 방식의 무한함이다. 다양한 형태의 기반시설이 평온하고 식물이 자라는 거리, 걷거나 자전거로 이동 가능한 거리를 되찾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 거리 안에서 우리는 장도 보고, 집 근처에서 각종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교를 지역의 거점으로 변모시키고, 근거리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는 건강센터를 마련할 것이며, 시민들을 위한 파빌리온도 세우고, 낮 시간엔 나이트클럽을 스포츠센터로 사용하며, 스포츠 센터가 학교 수업을 지원하거나 인근 상업시설에서 물품 수선 교육도 겸비하는 식이다. 도시는 늘 시민 주도의 참여와 연대로 변모할 수 있다.
광물성 무기물질이 꽉 들어찬 도시는 비인간적인 곳이 되었다. 이제는 체계적으로 선택되어, 점묘화가들의 손놀림으로 캔버스가 채워지듯이 공간을 메꿔가는 유기물질들이 그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식물들 속에 파묻힐 정도로 식물 밀집도를 높인 가운데, 사회적 밀도를 높이기 위해 선택된 - 식물 아닌 - 생물 유래 소재 곳곳엔 녹색 접속기를 배치한다. 그리 하여야 사람들의 숨통이 트이고,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 끈끈해지는 삶이 수월해진다. 건물의 실내와 지붕, 매개공간과 거리를 녹화(식물화)하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기에 좋은 환경이 된다.
근접 도시에서 기대할 수 있는 다양한 효과 가운데 특별히 두 가지를 주목할 수 있다. 우선, 주민의 혼합을 활성화함으로써 중산층의 지역 정착을 유지할 수 있으며, 사회 통합도 유지될 수 있다. 다음으로, 제일 취약한 계층에게는 소득 수준을 기준으로 하되 그들의 노력 정도를 계산하여 지급되는 가족 지향적 모둠 서비스의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 실제로 근접 도시는 네 가지 핵심 요소가 중점적으로 결합된다.
① 유기적 밀도 : 도시민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데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며, 도시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② 근접성 : 현실에서 공유되는 도시 공간, 집단적 창의성, 유무형의 인류 문화 유산, 녹지와 습지, 수자원 등의 녹색 인프라, 백색 인프라(공공시설) 등에서 경험된다.
③ 혼합성 : 공존과 만남, 그리고 그것들이 함축하는 각종 활동(경제적 활동, 가령 근접성을 재제조업화, 공공 서비스의 개설 또는 유지) 및 사회 통합(시민단체 조직, 이웃 간의 네트워킹, 하이퍼-이웃, 새로운 도시성 배양, 장애 껴안기, 시민 중재), 세대 간 접근(어린이, 고령 세대, 초고령 세대 사이의 근접성, 통학 안내, 보행 도우미), 성 평등(공공 장소 및 공공 서비스 장소의 성별 구분 폐지, 여성 친화적 보행 환경), 문화 생활(지역 문화, 방문 공연, 집단 정체성과 타인을 향한 개방성, 쓰레기 치우기) 등을 조직함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④ 편재성(ubiquity) : 기존의 대규모 인프라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여 전통 유산과 문화 자산의 재발견, 문화의 보급, 의료 및 교육 서비스의 장벽 철폐, 장소의 이미지화와 초근접성 개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시민 참여 유도 등이 저비용으로 개발될 수 있다.
하나의 도시가 '15분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용 면적을 어떤 방식으로, 무엇에,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지 등을 면밀히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사용 가능한 자원과 자원의 분배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의사, 건강 관련 센터, 소규모 생활필수품 상점, 수공업 공방, 고급 매장, 서점, 시장, 스포츠 센터, 극장, 공연장, 문화 공간, 공원과 산책로 같이 사용 가능한 근접 서비스 자원이 있는가? 이 외에도 알아야 할 사항이 많이 있다. 도로와 광장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정원이며 분수,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녹지가 확보되어 있는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일 하는가? 재택근무인가, 원거리 출퇴근인가?
나는 15분 도시 콘셉트를 고밀도 지역에서 중밀도 지역이나 저밀도 지역으로 투사해보는 연구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영토 구분의 뼈대로 '30분 영토'를 제안했다. 프랑스에서 타울랐던 노란조끼의 불길은 부분적으로 이동성에 기인한 분노였다. 이러한 지역에서도 주민들을 그들의 활동 장소와 접근시키는 논리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도시 영향권을 벗어나면 의심할 여지없이 이동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자동차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자동차를 공유해 나 홀로 자동차를 최대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상 공유 자동차, 맞춤형 대중교통 노선, 새로운 공유 모빌리티, 각종 금융 및 세제 혜택이 주어지는 저탄소 다중사용방식 등을 구상하는 중이다. 온라인 데이터 덕분에 자원자들을 대상으로 이동 경로를 추적한다. 이를 기반으로 근접도에 따른 노선을 구축함으로써 주민들의 생활 습관에 기반한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때에 가장 핵심은 자원의 공제주의일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가능하며 오히려 위기가 가속 페달이 될 수 있음을 코비드-19 팬데믹 위기가 확인시켜 주었다. 우리는 도시의 리듬을 버리고 강제적으로 근접성의 시대로 진입해야 했는데, 그렇다 보니 거리가 시민들을 이어 주는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는 점이 여실히 입증되었다. 우리는 원격 근무 체제가 가능하다는 사실도 깨달았으며, 이제껏 의무인 양 여겼던 긴 여정, 긴 이동 시간을 다른 식으로 사용하는 데 이로운 신기술도 인식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막연한 생각과는 달리, 우리에겐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삶의 질은 사용할 수 있는 삶의 시간과 직결된다. 모든 것이 멈춰 설 때조차 도시는 계속되어야 함을 우리는 위기로 인해 깨우쳤다. 탈중앙화되고, 다중심적이며 연계망으로 얽힌 15분 도시는 이러한 회복 탄력성을 그 안에 간직하고 있다.
【 살아있는 도시 】
■ https://youtu.be/18Z3_xdnyW8
【 어제, 오늘 내일의 도시 : 삶의 터전 】
■ 유럽에서 인간은 수 세기 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성당을 쌓아올린 건설자로서 돌을 다루는 기술과 수학, 기하학, 그리고 특정한 종교 정신의 조화로운 일치를 추구해왔다. 도시에 대한 나의 열정은 건축을 통해 거주하고 표현하며, 장소에서 규범과 규칙, 행동 양식을 창조한 인간의 천재성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시작된 유럽 재건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몇몇 나라가 사라졌으며, 몇몇 나라는 새로이 태어났다. 하나의 세계가 무너졌고, 무너진 세계의 폐허에서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솟아오르는 중이었다. 여러 도시가 황폐해졌고, 도심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전쟁의 화마가 피해간 파리에 살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유럽 도시들이 파괴되었는지, 그 엄청난 피해 규모에 충격을 받았다. 베를린은 80퍼센트나 파괴되었고, 드레스덴, 바르샤바, 그단스크, 런던 등도 피해가 심각했다.
그 와중에 르아브르는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와 더불어 콘크리트의 출현을 상징하게 되었다. 폐허가 된 이 항구 도시를 완전히 새로 짓기 위해 오귀스트 페레가 사용한 재료가 콘크리트였는데, 그는 "건축은 공간을 점유하고 둘러싸고 제한하고 닫는다. 이 특권으로 건축은 마법 같은 장소, 온전히 정신의 산물인 장소를 창조한다"고 말하면서, 도시를 건설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과거와의 결별을 꾀했다. 하지만 그가 꾀한 결별, 즉 재건과 창조는 여러 세기, 아니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도시의 유구한 역사에 고작 수십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 것에 불과했다. 도시란 사실 굉장히 긴 과정이 낳은 결과물로서, 내재적인 모순, 즉 장소에 대한 기억과 그 장소를 가다듬는 새로운 방식 사이에 오가는 대화야말로 나의 항구적인 호기심의 원천이다.
성큼성큼 걸어 다녀 보아야 비로소 이탈로 칼비노가 말한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우리 도시들 각각은 영혼을 지니고 있어서, 그 영혼이 마치 실타래처럼 수 세기의 세월을 관통해왔다.감각적이고 정서적이며 상호작용적인 도시, 움직이는 도시는 그 안에 사는 주민들에게 하나의 다른 시선,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도시는 그저 일하고 잠만 자는 곳이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 도시를 되찾는 일은 결국 우리가 '도시 지능(urban intelligence)'이라는 문제에 접근할 때 가장 중요한 과제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어떻게 해야 장소에 대한 사랑을 기치로 삼아 모두를 위한 도시를 건설할 것인가? 도시의 지능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나는 늘 정관사를 동반한, 다시 말해서 보편적인 통칭으로서의 '도시(la ville)'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려왔다. 그렇게 말할 경우 필연적으로 탈신체화된 기술지향적인 이미지들이 따라붙는 데다, 디지털 혁명 이후로는 그런 경향이 한층 더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스마트, 즉 디지털화 되고 인터넷에 접속되어, 다른 무엇에도 어느 누구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도시는 그 도시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것을 교묘하게 피해간다. 도시의 존재를 단 하나의 관점, 단 하나의 감정(鑑定)으로 환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통찰력 있다 할지라도 항상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만들어냈다.한 예로 2010년, 디지털 혁명의 후광 효과 덕분에 마치 도시의 성배라도 되는 것처럼 소개된 스마트 시티는 기술적인 해결책들을 '복사하기-붙이기' 하려는 의지를 촉발시켰고, 저 유명한 리우데자네이루의 스마트시티 운영센터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당시는 전 세계 모든 테크노 스마트시티의 순례 성지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그 운영센터는 처참한 실패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정관사 '도시'는 우리가 그 '장소'의 특수성, 다시 말해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도시 내부의 선속(공간에서의 어떤 물리적 성질의 흐름)과 사물, 시스템들 - 행정적, 기술적 또는 그런 것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어떤 것 - 사이의 복잡한 상호의존성 따위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장소와 더불어 진화하며 생기는 특성을 배제할 경우에는 존재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창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도시를 보다 살기 좋고 활기찬 곳으로 변신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의 몸체와 영혼의 분리를 막고 그 어떤 기술적 업적보다 삶의 질이 우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장소, 그리고 그 장소의 '영토와 생태계' - 이 생태계는 새로운 이동성과 물리적, 디지털적, 사회적 세계가 수렴하여 새롭게 상호 작용하는 활동으로 구성된다 - 에 대한 해석은 쉽지가 않다. 이에 대한 적절한 평가가 있어야 공통계의 새로운 공유와 더불어 새롭게 확인되어야 할 사회적 경험 축적에 필요한 답안이 나올 수 있다.
내일의 세계에 대한 여러 가능태를 찾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도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 어떤 도시에서 살고 싶은지가 중요한 문제다. 우리 세대와 우리 다음 세대가 직면해야 하는 도시 과제들이 얼마나 폭넓고 다양한지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기후 온난화, 자원 고갈, 인구 폭발, 도시 집중, 거대도시의 수적 증가, 세계의 대도시화, 신종 도시성 질병, 디지털과 기술의 영향력 등등.. 대도시들은 부를 끌어들이고, 이와 동시에 빈곤을 야기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영토와 경제의 균형을 흔들어 놓는다. 전쟁 난민의 변화 추이며 그들의 장래를 둘러싸고 야기되는 긴장 등은 해결하기 힘든 난제로, 거의 상시적으로 현존한다. 우리는 유럽에서 지중해나 도버 해협을 가로지르는 항해에서 그러한 상황을 자주 접하며, 정치나 사회 생활에 끼치는 중요한 영향도 체감할 수 있다.
세계 곳곳의 도시 공간이 주민들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환경, 사회, 경제, 문화, 회복탄력성, 이렇게 다섯 가지 측면의 도전에 직면해야 한다. 이 같은 도전이 도시 생태계에 미치는 결과는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력, 도시의 위기 대처 능력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즉 자연과 생물 다양성의 동화, 사회적 소외와 빈곤 타파, 교육과 문화에 대한 접근 용이성, 일자리와 가치 창출, 수월한 이동성, 다양한 공공 서비스와 새로운 용도 등. 과제는 한없이 많고 따라서 투쟁도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덴버의 웰링턴 웹 전(前) 시장은 2009년 미국 시장회의에서 인류가 직면한 도시 과제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영감 넘치는 발언을 남겼다. "19세기는 제국의 시대였고, 20세기는 국민국가의 시대였다. 21세기는 도시의 시대가 될 것이다." 실제로 몇십 년 후면 우리 도시들은 거의 인류 전체에 생활 터전이 될 것이다. 인간의 생애 주기는 본질적으로 도시에서 전개될 것이다.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도시라고 하는 세계는 특히 인간에게 우주이며, 숨 쉬고 사는 시공간이다. 도시에서 태어나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도시에, 그러니까 대도시든 거대도시든, 세계도시가 되어버린 인구 밀집지역에 고유한 리듬과 생활방식이 각인되어 있는 도시문화에 소속되는 것이다. 유년기에서 청소년기, 성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삶의 우주들이 공존한다. 21세기에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라나고 늙어간다고 하는 사실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변화한 도시는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예민하며, 여러 개의 얼굴을 지닌다. 어찌되었든 도시는 살아 움직여야 하며, 도시를 숨 쉬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은 우리의 사활이 걸린 매우 중요한 도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인간미 있고, 건전하고 평화로운 도시적 삶의 정신으로 충만한 세상으로 인도해줄 실마리를 찾아내야만 한다.
한편, 21세기는 유비쿼터스(ubiquitous)의 세기이기도 하다. 인터넷의 대중화는 e-정부, e-교육, e-건강 등 많은 단어에 e-를 앞세움으로써 인터넷의 위력을 강조하며 디지털 도시의 이미지를 받쳐 준다. 각종 스마트 기기, 즉 위치 추적, 사물인터넷, 빅데이터로 무장한 모바일, 그리고 어디에서든 접속 가능한 시민들의 존재가 그물처럼 엮인 인터넷 접속 도시는 인간과 도시의 관계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디지털과 이종 교배가 이루어진 인간은 자신이 지표로 삼던 것들의 본성이 완전히 바뀐 도시에서 살아간다. 거주하고, 이동하며, 일하고,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치료받으며, 여가를 즐기는 등의 모든 일이 이제 디지털을 통해야 가능해졌다. 인간은 창조의 불씨를 훔친 것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디지털 피조물들은 실재적이건 가상적이건 인간을 현실로부터 유리시킬 것인가?
근본적인 사실은, 인간과 사물의 인터넷 시대를 맞아 새로운 도시 문화가 탄생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문화가 신체적, 사회적, 기술공학적 변이의 척도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상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경계가 진짜로 존재하는지 물으면서 삶에 대한 새로운 사용, 새로운 지각을 창출한다. 이들은 도시가 우리에게 다시금 감정과 감동, 쾌락을 선사하게 될 경우, 과거 우리의 기억이 우리의 앞날을 구축하는 자양분이 될 경우, 오래된 돌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우리의 친구, 이웃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경우라면, 그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열망이, 내가 알기로는 에드가 모랭이 사스키아 사센과 나눈 눈부신 대화 속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특성으로 요약된 바 있다. "누군가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건 그에게 '당신은 지금 존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시의 지능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무엇보다도 도시의 정체성과 그 도시의 고유한 사회경제적, 문화적, 생태적 특성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도시의 이동성, 안정성, 사회주택, 에너지 정책, 부동산, 사회연계망, 인프라, 공적 공간, 지역 경제, 문화, 여가, 세금제도, 매력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유엔 17가지 지속가능발전목표(17SDGs) 중에서 열한 번째는 도시 변화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아주 명확하게 직시한다. "도시와 도시의 주거지는 모두를 위해 열려있되 안전하고 회복 탄력적이며 지속 가능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지구가 당면한 엄청난 과제를 한 줄로 요약하고 있는 셈이다.
2030년 예측에 따라 정립된 이 목표들은 네 개의 도전 - 첫째, 기후 변화와 인간의 도시 생활과의 관계. 둘째, 동남 축 방향으로 거대도시, 대도시가 양산되는 대대적 도시화. 셋째, 우리의 생활을 관통하는 신기술. 마지막으로 불평등의 사회적 표출인 빈곤과 소외 - 에 의해 상당히 증폭될 것이다. 2016년 에콰도르의 키토에서 열린 유엔 주택 및 지속 가능한 도시개발회의(Habitat 3)는 '새로운 도시 의제'를 채택하면서 사회 통합과 도시에 대한 권리를 강조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생존에 필수적인 것을 충족시킬 권리, 참여민주주의를 실현할 권리에 방점을 찍었다. 지방 정부와 도지사, 시장들의 강력한 결의는 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한 열쇠임을 보여주었다. 해결책의 중심에 도시가 자리잡고 있으며, 도시는 변화를 위한 행동의 중추 역할을 한다.
21세기에 도시에 산다는 것은 석유와 일자리 공급원으로서의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의 성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구축된 공간에서 사는 것이다. 이른바 사회적 주거라고 하는 집단 주거지와 그로 인한 관계 단절이라는 역설이 탄생했으며, 성공의 상징인 사유재산과 물건들, 가령 자가용 승용차, 별장, 그 외 온갖 것이 출현했다. 요컨대 살아있는 도시가 문제시하는 패러다임이다. 우리는 우리의 도시에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늘 바쁘기만 한 괴물 기계들이 씽씽 달리는 대로들로 도시의 모습이 일그러지는데, 무얼 하고 있었던가? 거리, 광장, 담벽과 공원에서 삶의 채취를 앗아가는 냉랭하고 기능적이기만 한 건물들을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말라버린 샘, 아스팔트로 덮인 땅, 숨 쉴 공기조차 희박해지는데, 물과 나무는 또 어떠한가? 우리가 사는 도시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집 앞에서, 길거리에서 또는 공원 벤치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들려주고 전해 듣던 이야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도시는 오늘날 무엇의 이름인가?
살아있는 도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하는 생태계다. 살아있는 도시는 복잡한 유기체다. 때문에 도시 건설은 기술이나 수직적인 건축만으로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도시에 귀를 기울이고, 긴 흐름으로 생성된 도시의 리듬과 호흡을 찾는 것이 관건이다. 우리는 다방면에 걸친 요소들과 상호 관계적, 상호 의존적인 요인들로 구성된 복잡계에 속한다. 또한 살아있는 도시는 도시의 신진대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흐름을 - 균형 잡힌 흐름은 도시 복지의 원천이며, 반대로 불균형은 갈등과 위험 요인으로 때로는 도시 고유의 생존마저 위협한다 - 전체적으로 고려해야 함을 뜻한다. 그런데 도시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원을 재활성화하고, 최적화시키며, 변화시키거나, 필요하다면 새롭게 발명해내는 방식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처럼 절약이 미덕인 위기 시대에는 도시 자원이야말로 집단적인 창의성을 발휘해 개발해야 할 것들이다.
살아있는 도시는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관습과의 기로에 위치하고 있다. 혁신은 주거, 이동성, 교육, 노동, 돌봄 등이 중심에 있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련이 있다. 잘 살기, 잘 보살핌 받기, 편하게 이동하기와 일터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일하기 위해, 배우기 위해, 보살핌을 받기 위해 그토록 많이 이동하는 것이 과연 정말 필요한 것인가? 도시, 그러니까 도심과 외곽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살아있는 도시에서는 에너지 사용과 관리에 효율적인 주거지 개발, 녹색 이동, 안전, 맞춤형 건강 서비스, 문화 접근권이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부단한 성찰을 통해서 진정으로 살아 움직이고 장벽이 제거된, 다중 영역의 도시가 우리 눈앞에 그려진다.
기술혁명 이후, 우리는 도시의 무한한 가능성이 활짝 피어나는 것을 목격한다. 내일의 도시는 오늘 발명되며, 그 도시가 언제나 더 스마트하고, 더 효율적이며, 더 흐름이 원활하기를 꿈꾸지만, 오직 살아있는 도시만이 위에서 열거한 모든 과제들에 응답할 수 있다. 즉 시민을 중심에 놓고, 고유한 영토 위에 건설된다. 실제로, 파리에 어울리는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리우데자네이로나 뭄바이, 서울, 시드니, 라고스 또는 카이로에도 어울린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영토에 단단히 발딛고 있는 시민의 정체성이 필요하다. 도시의 모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영감의 원천만이 존재할 뿐이다.
다중의 시대, 유비쿼터스의 시대에 도시의 역동성, 도시 거버넌스의 역량, 국가와의 관계에서 도시의 역할은 중층적이고 교차되며 얽히고설킨다. 이 같은 새로운 판도에 비추어볼 때, 내가 제안하는 살아 움직이며 감각적인 도시는 사회적 취약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핵심 콘셉트다. 환경, 경제, 사회라는 세 가지 차원의 구조적인 취약성을 이해하는 것은 도시 차원에서의 성찰과 행동으로 가능하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미약한 신호인 '검은 백조'를 알아차리기 위한 분석의 열쇠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공간적 취약점에 직면하여, 함께 잘 살고, 하나의 영토에 함께 소속된다고 느끼게 하는 지표와 행동, 그중에서도 특히 행위 관계들을 선제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이는 향후 도시 만들기의 복잡성을 투영하는 데 필수적이다. 살아있는 도시는 매우 취약하기에 끊임없이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위험과 돌발상황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도시의 복잡성 때문에 계획을 수립하거나, 진화 양상을 미리 예측하기도 어렵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네 가지 핵심적인 요소를 도출해낼 수 있으며, 라틴어로 표현된 이 네 가지 요소가 도시의 본질을 형성한다.
1. 우르브스(urbs)
도시를 구성하는 모든 인프라의 총체.
2. 시비스(civis)
도시 공간의 중심 요소인 시민.
시민의 숨결이야말로 도시 생활의 정수이다.
3. 스파티아(spatia)
다양한 사회화, 교류, 상호작용의 공간들로,
이러한 공간들을 통해
도시의 집합체로서의 박동을 측정할 수 있다.
4.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
공공의 선을 추구하기 위한 정치, 정책을 지칭한다.
모든 도시는 이 네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야 형성되기 때문에 오직 여러 학문의 상호 연관적 성찰만이 도시를 총체적으로 생각하고, 변화와 행동의 틀을 구상하게 해준다. 도시계획 전문가, 사회학자, 공학자, 철학가, 디자이너, 건축가, 기업가, 정치가, 예술가... 등이 공동으로 숙고해야 하는 셈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동차들을 도시 밖으로 몰라냄으로써 보행자들이 다시 도시를 전유하도록 하는 것이다. 숨 쉴만한 공기의 질을 보장하고, 무엇보다 물과 생물다양성을 중요시하여 시민과 사회의 역동성이 훨씬 쾌적하고 넓은 공적 공간에서 거리낌없이 표현될 수 있도록 투쟁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세기의 과제에 도전할 만한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도시에서의 삶을 새롭게 창조하고, 도시 정체성을 되찾고, 쾌적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다중심적이고 흐름이 원활한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도시에서 거주하며 일하고 이동하는 새로운 방식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도시계획은 미래의 수요와 변화를 예측하고 대응하기 위해, 공간을 평면적으로나 입체적으로, 혹은 지상 차원이나 지하 차원을 총체적으로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활동가 제인 제이콥스가 생각하는 살아있는 도시의 정신이다. "거리와 광장, 동네는 사람들이 처음 만나는 사회적 공간이며 도시에서 시민권의 토대가 된다. 단순히 통행의 공간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살고 일하고 기분을 전환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방문하고, 만남의 기회를 가지며 교류한다." 결국 살아있는 도시를 만든다는 것은 공동의 자산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물과 공기, 그늘, 공간, 시간, 침묵 등이 우리 삶의 질을 위해 새로이 전개할 투쟁의 핵심이 될 것이다.
【 도시의 복잡성 】
【 다중심 도시 : 불완전한, 미완성의, 취약한 】
■ 우리는 1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이후부터 '충적세'라고 부르는 지질학적 시대에 살고 있다. 충적세의 주요 특성으로는 기후변화를 중대하게 꼽을 수 있는데, 온난한 기후에서 인구가 급증하고, 농업으로의 전환이 정착화 과정과 맞물려서 진행되었다. 인간이 각종 재료와 불을 다루는 능력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표현 역량까지 갖추었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제한된 면적에서 항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려는 의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까지 인간이 땅을 점유하는 행위는 인간의 고유한 활동인 전환 작업과 항상 연결되어 있다. 인류세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인간의 역할을 강조했다. 정주 공간의 정복으로 많은 사회영토적인 표현이 생겨났는데, 이 모두가 승리, 대결, 전쟁 같은 단어와 연결되며, 자신의 힘을 공고히 하기 위해 보다 많은 자원, 보다 많은 수단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목적의식을 보여준다. 도시는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사회영토적 구조보다 지속가능하다. 도시는 견고한 지표이며 주민들이 어제와 오늘, 내일의 도전에 맞서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는 토대이다.
그런데 20세기 중반부터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불안한 단절'이 관찰되었으며, 이 단절로 말미암아 인간의 장래가 약화되는 건 아닌지 우려를 낳았다. 단절은 지난 20년 동안 한층 가속화되었으며, G8에서 유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류와 토론의 장, 수많은 규제 기구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상황은 계속 나쁜 쪽으로만 기울어졌다. 이러한 단절은 급팽창하는 도시에서의 분주하고 번잡한 생활과, 지나친 생산-소비에 기반한 사회 모델이 결합하면서 비롯되었다. 이보다 더 심한 건, 이 단절로 인해서 생물 - 인간도 생물의 하나다 - 의 복잡성은, 자연 생태계의 바탕이자 공통계의 또 다른 핵심 요소 - 공기, 물, 불, 대지 - 와 분리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우리는 주로 도시화된 영토, 즉 대기가 심각하게 오염된 곳에서 사는데, 이러한 상황은 여느 대도시나 마찬가지다. 물은 희귀재가 되었거나, 혹독한 기후 때문에 제어하기 힘든 자원이 되어버렸다. 잘 길들여져 에너지원이 된 불은 화석 에너지를 과다 사용하는 오염원으로 손가락질 받는 처지자 되었다. 화석 에너지란 20세기의 패러다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열기관과 도시의 냉난방 네트워크 등을 대표 주자로 꼽을 수 있다. 한편 먹을 것으르 제공해주던 대지는 혼란스러운 도시화 과정에 놓은 요즘의 인류에겐 삶, 아니 생존의 관건이 되었다. 한 조각 땅 - 여기엔 도시 영토도 포함된다 - 이라도 차지하려고 비공식 정착민들이 벌이는 여토 투쟁은 특히 지구의 남쪽과 동쪽 지역에서는 상수로 간주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사회를 구조화하면서 복잡성을 완전히 간과한 탓에, 다시 말해서 인간을 뒷전으로 제쳐두었기에 스스로 고통받고 있다. 중앙 집권적이고 수직적인 관리가 인간의 삶을 파괴하여 더는 인간을 중심으로 삶이 구축되지 않는다. 인간은 이제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세계도시의 주민이 되어 산다. 19세기 산업혁명, 20세기 초반의 국민국가 강화, 21세기 디지털 혁명의 부상, 여기에 잇단 국가 차원의 거버넌스 위기는 도시화, 초거대도시화와 궤를 같이 한다. 인구 이동, 에너지 수급, 원자재 흐름 관리, 교통과 통행량, 기후변화의 영향, 천연 재해 또는 위기 상황 등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현상들을 이해하려면, 상호 작용과 연결, 다양한 집단 사이의 네트워크 등을 연구하고 그 기제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의 도시 안에는 무수히 많은 수요와 사용법, 서비스, 흐름 - 식품, 주거, 환경, 교육, 문화, 교통, 건강, 안전, 에너지, 폐기물, 커뮤니케이션 등 - 이 존재하므로, 전체를 관통하는 역학 속에서 모델화하고 분석하며 이해함으로써 이제까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책을 고안해낼 수 있다.
이러한 상호의존성은 새로운 행동양식과 변화에 대한 적응성이라는 두 가지 내재적 요소와 같이 움직인다. 자연, 자원, 생산성, 소비, 기술, 디지털 혁명 등은 인간이 그것들을 점유하여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방식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컬럼비아 대학의 티모시 미첼 교수는 《탄소 민주주의》에서 정치체제, 에너지 자원, 삶의 방식이 상관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정치체제가 어떻게 사회의 역사에 영향을 미치고 이런저런 에너지 자원을 개발해왔는지를 연구했다. 이는 20세기 후반 이후, 석유 산업과 금융 집단이 하나로 똘똘 뭉쳐 뚜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출현시킨 새로운 형태가 상호 작용하고 지배하면서 우리 삶에서 가장 일상적인 몸짓까지도 좌우하게 되었다. 새로운 시간성은 전 지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현상이 되었다.
인구가 희박한 저밀도 지역에서조차 도시화 현상이 목격된다. 마치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처럼, 자신의 존재를 표시해야만 활동 전체에 리듬이 부여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건축은 점점 더 수직화되고 경제는 3차 산업이 비대해지며, 도심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고, 도시별 기반 시설은 서로 연결되면서, 재분배는 도시 지역에서나 이루어진다. 이 과정은 이른바 '연담도시', '대도시', '거대도시' 또는 '초광역'이라고 불리는 현대의 도시 현상으로 보편화된다. 이렇듯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는 대량 생산-소비 모델과 더불어 단기간에 네 개의 상관 관계적 위험 지표를 만들어냈으니, 바로 위협받는 환경, 사회 계층의 고착화, 위험 공간의 분리, 그리고 문화 정체성 상실이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도시, 승리하는 도시는 패배하는 도시와 짝을 이루며, 도시의 부는 사회의 불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변증법적 관계에 놓인다. 문화유산으로 빛나는 도시는 중대한 야만 행위의 먹잇감이 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비지니스 도시는 뉴욕과 퀸스, 상하이와 푸동, 도쿄와 신주쿠처럼, 생존을 위해서는 하루에 '쓰리 잡' 정도는 뛰어야만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빈곤의 도시와 함께 간다. 복잡성의 근원이 되는 상호 의존성, 상호 작용, 적응성, 돌발적인 출현 등은 모든 삶의 요소들 속에서 작동한다. 이 같은 시스템 분석에서 출발하여, 나는 기반시설과 디지털 상호 작용이라는 관점뿐만 아니라 늘 경쟁하는 도시들의 경제적 번영과 매력에 관심을 갖되 공간의 수요와 사회적 전유라는 인간은 프리즘을 통해서 도시를 들여다보고자 했다. 하나의 도시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맥락이자 삶과 공유의 터전으로, 고유한 개성, 다시 말해서 고유한 복잡성을 지닌다.
도시는 그곳에 사는 주민들과 그들의 공동 계획, 살아 움직이는 프로젝트의 형상을 본 딴 역사의 산물이다. 이러한 결합과 그 결합이 함축하는 복잡성을 고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공유 자동차를 예로 들어 보자. 유럽의 대도시들에서 공유 자동차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데, 주민들은 환경 개성에 일조하면서 교통비용도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본다. 라틴 아메리카나 미국의 경우, 자동차는 늘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강력한 기호이기 때문에 공유 자동차의 사회적 수용성은 매우 낮다. 마찬가지로, 프랑스를 포함한 남부 유럽에서는 자전거처럼 환경 오염도가 낮은 이동 수단에 대한 저항이 크다. 북부 유럽 도시에서 자동차 보다 자전거 이용을 선호하는 문화가 이미 오래 전부터 자리 잡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맥락의 차이에도 삶의 질 향상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기란 얼마든지 가능하다. 도시의 복잡성을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방침이 최근에는 결정적인 전기를 맞게 되었음에 기쁨을 표한다. 지역별 거버넌스가 사회 통합, 도시 인프라의 재편, 기술혁명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수렴해 나가는 적극적인 행동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도로 수직적인 통치 조직은 과제를 직업별로 분리하려 한다. 이것이 변화의 걸림돌로 작용하기 쉽다. 그렇다, 도시의 복잡성은 일종의 인풋데이터로, 이를 이해하지 못 한다면 도시의 변화에는 제동이 걸린다. 또한 도시를 위해 일하는 주역들로 하여금 모든 도시에 내재적인 특성, 즉 모름지기 도시란 현재에도 미래에도 항상 불완전하고 불충분할 것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이상적인 도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는 항상 건설 중이고, 항상 발전 중이며, 항상 보수 중이다.
그 도시를 이끄는 지도자들의 비전이 어떻든지, 도시는 항상 불완전할 것이다. 도시엔 늘 무례함, 기능 장애, 공해 등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것들은 도시라는 세계의 구성 요소들이다. 비영속성은 도시에 늘 따라다니는 속성이다. 모든 도시는 허약해서 아주 작은 교란으로도 고장 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복잡성을 고려할 때, 거버넌스는 겸손이 필수다. '나로 말하면' 같은 자기도취적인 언사를 입에 달고 사는 습관은 끊어내야 하며,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할 도시와는 달리 통치자의 자리란 잠시 머물렀다 떠나갈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또 그렇기 때문에 공동재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에 대해서는 일정 수준의 지속성을 보장해야 한다.
도시가 복잡한 시스템이라는 말은 수많은 도시 구성 요소들 간에 존재하는 강력한 상호 의존성을 표현하는 아주 통상적인 말이 되었다. 반면, 이 복잡성을 앞으로 변화의 과정 안에 재대로 자리 매김시키는 것은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도시의 이미지와 실제 복잡성 사이의 격차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 된다. 도시는 언제나, 어디서나 변화를 거듭하며, 이 점이야말로 도시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다. 도시는 계속되는 도전에 끊임없이 진화해야 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하는 유체 네트워크(전기, 물, 가스, 열)를 어떻게 유지해야 할 것인가? 새로운 사용을 함축하는 새로운 기술(광섬유, 자전거 접속단자, 공유 자동차 등)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대규모 건물 단지를 어떻게 유지 관리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는 도시 환경과 생활방식의 변화가 수반된다.
곧 다가올 미래엔 기후변화의 영향을 약화시키기 위해 우리의 생활방식이 훨씬 더 급격하게 바뀔 거싱고, 도시 또한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될 것임을 모르는 척 한다면, 그건 곧 궤변이거나 무분별한 작태일 것이다. 전 세계의 많은 도시들이 기후 긴급사태를 선포했으며, 심도 있는 변화를 위해 뛰고 있다. 북극의 기후마저 급격한 변동을 겪고 있어서, 북극위원회가 진행하는 북극 감시 및 평가 프로그램에 속한 과학자 80명의 연구 발표 SWIPA에 따르면, 지구촌 주민들은 물론 세계의 자원과 생태계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특히 지금부터 2030년 여름이면 - 그보다 더 앞당겨질 수도 있다 - 북극해 빙산의 상당 부분이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또한 보통 일이 아닌데 "세계 탄소의 절반 가량이 매장되어 있는 영구 빙토층의 해빙은 이미 북반구의 인프라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으며, 엄청난 양의 메탄이 대기 중으로 방사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의존적이란 맥락에서 복잡성 패러다임의 본질을 상기해보자면, "북극의 변화는 동남아시아처럼 북극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도 기상 변화, 특히 제트기류라고 알려진 극지방 소용돌이의 약화로 말미암은 변화를 가져온다." "북극은 지구의 다른 지역과 연결되어 있다"고, 마니토바 대학의 데이빗 바버 교수는 새삼 상기시킨다. 그는 북극 빙하 전문가이자 SWIPA의 주요 저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지구 시스템에 미치는 결과는 해수면의 상승, 응축과 강수를 통해 지구의 신진대사 전체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 등을 감안할 때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우리는 사회영토적 환경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도시 복잡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프랑스 국민의 80퍼센트는 국토 면적의 20퍼센트에 살고 있드며, 세계 인구의 절반이 거주하는 면적은 지구 전체 면적의 1퍼센트에 불과하다. 도시에서의 삶은 우리를 질식시켜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욕망의 대상이며, 앞으로도 계속 보편화될 것이다. 오염의 절정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만성적인 오염 상태로 굳어졌고, 생물다양성은 새로운 멸종 위기를 맞고 있으며, 사회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물 접근성은 점점 불평등해지며, 인구는 늘어가고, 그만큼 필요한 식량도 늘어만 간다. 지구에 한 번만 눈길을 주어도 홍수, 화재, 생태계 위기, 천재지변, 그리고 거기에 코비드-19 팬데믹 등이 초래한 피해가 얼마나 광범위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는 하나의 전체이며, 에드가 모랭의 말을 빌자면, 인간이 자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요소들을 인위적으로 갈라놓았다. 메데인 같은 도시는 시스템 차원에서 접근하는 회복 탄력성과 재발견, 로우테크의 창의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이다. 시민사회는 도시의 악을 찾아내고,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 마피아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 - 도시 가운데 하나인 곳이 평화로운 도시로 거듭나는 데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메데인은 삶을 위해 재건되었으며, 삶을 위한 도시(Cities for Life)' 운동을 낳았다. 그후 이 운동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반면, 세상엔 미국의 러스트 벨트(미 북동부 위스콘신, 미시건, 펜실베이니아 일대의 공업지대)처럼 죽어가는 제조업 도시들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 도시들이 다시 태어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스스로 하라(Do it yourself)'는 논리에 따라 시민들의 전유를 통해 재탄생할 수 있으며 디트로이트가 그 좋은 본보기다.
도시의 복잡성은 새로운 도시 조직 형태의 등장도 의미한다. 국가에 맞서는 도시 간 확장, 가령 인구 6천8백만 명의 초거대도시 '샌샌(샌프란시크고/샌디에고)'이나, 7천만 명의 주민을 거느린 주거 밀집지역 '보스워시(보스턴/워싱턴)' 등이 그 좋은 예에 해당된다. 이를 1961년에 선견지명 있는 지리학자 장 고트망이 그의 저서 《메갈로폴리스》에서 이론화했는데, 실제로도 이 거대한 두 덩어리의 정체성이 연방국가 차원과는 완전히 다른 도시 활력을 뿜어낸다고 했다. 우리는 특히 선거에서 이 점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에 앞장서 저항하며 기후협약을 준수하라고 촉구하고, 이민자들과 기본적인 자유를 옹호한 것도 이들 도시다.
우리의 도시에 밤이 내리면 도시는 눈부시게 빛나지만, 광공해는 하늘과 황홀한 은하수, 뭇별들과 천궁의 움직임, 우주의 광대함으로부터 우리를 단절시킨다. 하늘은 위협적인 구름이 잔뜩 내려앉아 우중충한 잿빛인 데다 이따금씩 독성을 내뿜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유토피아는 이러저러한 신, 이러저러한 정당, 국토나 국민의 위대함, 상상 속에 항상 존재하며 나날이 커져가고, 나날이 강해지며, 나날이 존재감을 키워가는 위대함에 대한 저주에 자리를 내주었다. 거대한 방벽이 머릿속에 세워지다가 이윽고 경계를 만들어 인간을 갈라놓는다. 교묘한 거짓말, 호전적인 발언들이 난무하면서 우리를 서로 적대하게 만든다. 경계심이 증오가 되어, 안타깝게도 폭력과 자기실현적 예언들로 무장한 채, 깊숙하게 뿌리를 내린다. 우리에게는 풍성하고 다원적인 인간적 삶을 보존하기 위해 국가에 대항하는 견제 권력 형태로 제시되는 도시의 활력이 한시바삐 필요하다. 오늘날, 도시의 신진대사는 기후 문제를 중심으로 구체화되는데, 사실 기후 문제는 인류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이제껏 인류가 요즘처럼 위협받은 적이 없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 자신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생존 위협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시민들에게는 각자 짊어져야 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교육과 참여, 결집이 요구된다.
기술 혁명, 그러니까 생명기술과 나노기술의 융합은 인간이 벌인 과거 활동의 영향력을 제한하거나 고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 - 인류세에 대한 확고한 인식 -, 건설하는 방식 - 콘크리트보다 목재를 선호하기 - , 버리는 방식 - 자원 순환이라는 개념 장착 - , 심지어 다른 생명을 대하는 방식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다중심적이고 다기능적인 도시, '15분 도시'라고 부르는 도시, 즉 15분 이내에 기본적인 서비스에 접근 가능한 도시는 살아 움직이는 주거지를 대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주거지 안에 포용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의 터전 - 건물, 공용 공간, 차고, 교육 장소 등 -은 너무나도 잘게 나뉜 관계로 하루 중 3분의 2 이상 비어있는 형편이다. 우리가 건설하는 방식, 건설하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도시의 신진대사에 역행한다. 공공 공간, 녹지대, 생물다양성이 이러한 변화를 떠받치는 버팀목이 되어 준다. 그러니 사람들이 만나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광장들을 재발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도시의 투자자본수익률은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의 질에 따라 측정될 수 있다. 나는, 혼합의 기회로서, 도시의 취약성을 타파한다는 의미에서, 광장을 시민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공적 공간을 자동차들에게 빼앗긴다면, 사회적 연결을 직조할 수 없다. 그러니까 숨 쉴 수 있는 도시, 인간이 교류할 수 있도록 감싸 안는 도시 공간이 21세기 도시 패러다임을 받아들여야 할 때다. 있는 곳이 어디든, 도시는 주민들의 필요에 응답해야 하며, 동시에 사회적(함께 잘 살기)이면서 경제적이고, 문화적이며, 생태적인 도전에 나서야 한다. 사회 통합이 도시의 새로운 도전에 대한 핵심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심, 명확하고 과단한 방향성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변화에 수반되는 불편을 시민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수반되는 불편을 시민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도시에서 경유차를 추방할 때의 목표는 자동차 운전자들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미립자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10년 사이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전투에서 패배할 것은 확실하다.
도시를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 삶을 바꿔야 한다. 지금 시기가 어려운 건 우리가 과도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 거버넌스는 시민을 향해 공유와 공동자산의 모델을 제안해야 한다. 도시의 사용가치를 전유하고 공동자산을 우선 가치로 둘 때 최선의 도시가 될 것이다. 이 일에 결집한 주민들과 더불어 미래는 실현된다. 우리는 공익을 재발견하고 추구하여 가치와 함께 잘 사는 법을 창조해야 한다.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수많은 도시에서 용감하게 이어나가고 있는 도시만의 전투는 결국 자신의 본질, 자신의 복잡성으로 회귀하려는 전투이다. 쓸 데 없이 분리된 것을 다시금 이어주고, 자연, 사회생활, 창의성, 혁신 등을 재발견하는 복잡성의 어원(complexus; '함께 직조하다')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 유비쿼터스 도시를 향하여 】
■ 미래를 위한 유비쿼터스는 영토 데이터에 달려 있다. 이 데이터는 미래 도시 전환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다. 공공 자산이자, 기반시설과 공공 정책의 효율성을 위해 가치 있게 사용되어야 할 부(富)이다. 무엇보다도 앞으로는 디지털이 서비스(원격의료, 전자서비스, 지역 미디어, 전자 예약, 교육에 대한 접근, 생활필수품의 근거이 유통 등) 제공자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생활하는 장소 가까이에서 필수적인 사회적 기능을 제공하고, 기존 인프라의 사용 방안을 다양화함으로써 15분 도시와 30분 영토를 둘러싼 근접 지역의 재활성화를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기술과 함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상호작용은 전반적인 기능의 혼합에 일조할 수 있다. 디지털 플랫폼에 근접 서비스를 접목하면 데이터 수집과 디지털 주권 방어를 위해서도 주요 도구가 된다. 또한 사회적 삶의 질이란 지수에 기초하므로 최적화된 도시와 영토 변화를 계획할 수 있다. 그 목표는 시각화, 진단, 시뮬레이션 등으로 미래의 행동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디지털 기술을 통해 다양한 기능을 현실에 제공한다. 따라서 복지의 세 가지 원천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① 개인적 원천, 각자를 위하여,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을 위하여 (가용시간 확충)
② 사회적 원천, 이웃과 더불어,
동료와 더불어 (사회적 관계 확장과 긴장감 완화)
③ 전 지구적 원천, 포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타인, 자연, 자원에 대한 존중)
주파해야 할 거리를 줄여 도시에서 유용한 시간을 확보하게 되면 사회적인 삶의 질이 높아진다. 사회적인 삶의 질이라는 개념은 국내적 또는 국제적인 기준을 말해줄 도시의 지표가 된다. 우리는 각자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타고(그 외 탈/저탄소 방식의 이동 수단으로) 반드시 필요한 여섯 가지 수요에 15분 내에 접근하려고 한다. 그 여섯 가지 수요란 다음과 같다.
【 필수적 구성 요소 】
ⓛ 《 주거(Living) 》
➜ 보장된 주거 권리와 치안 확보
수요가 가장 많은 곳에 가능한한 저렴한 가격의
주거 시설을 마련한다.
■ https://youtu.be/Vq_lQRlyWNE
■ https://youtu.be/-8GAxlLLiZM?si=EUFK3tok1of65r5m
② 《 일 / 업무(Working) 》
➜ 지역에 이바지하는 개인의 고유 능력 발굴과 활용
각 동네마다 다양한 일을 촉진하고,
일자리의 균형을 맞추는 수준에서.
■ https://youtu.be/4NX5RDyYMxE?si=OUQ2HkGDh-8gkBhG
■ https://youtu.be/SMs2GvFFGD4?si=YRb__R8QmSxPKzyH
③ 《 생필품 조달 / 생활서비스공급(Supplying) 》
➜ 식료품 판매를 포함하여
일련의 상업 활동이 보장되어야 한다.
수준 높은 의식주 및 편의 시설 공급.
④ 《 건강(Caring) 》
➜ 모든 분야와 수요를 충족시킬
스포츠 활동, 보건의료 서비스.
의료 시설 및 건강 유지를 위한 생활 환경 보장.
■ https://youtu.be/dMKV9YhuOSA
■ https://youtu.be/2AfR792IlK0?si=PUNrAlMND3vKA_XQ
■ https://youtu.be/yx1ZDGeu64E?si=gwXDOlkJyoqE8MPW
■ https://youtu.be/7RTtZDmG090?si=PEshGTvhE9yHYUBq
■ https://youtu.be/B1n-F_B-Dbo?si=RuvJz8y2KY_56Dem
⑤ 《 학습(Learing) 》
➜ 인종, 사회적 지위 등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의 혼합을 보장하는 학교 교육,
모든 연령층에게 원하는 배움을 제공.
공정한 학습 권리, 효율적인 제도 교육 확립.
⑥ 《 자아실현 / 여가(Enjoying) 》
➜ 여가와 문화 활동의 접근성을 높일 뿐 아니라
만남과 공적인 교류를 위한 장소,
숨 쉴 공간, 녹색 공간 등을 늘린다.
풍부한 향유의 원천 제공,
시민의 참여와 교류 극대화.
영토 데이터는 도시에서의 삶을 쇄신시키며, 도시 삶의 생태계가 가치를 창조하기에도 매우 유용하다. 개인을 위해 다양한 사회적 기능이 제공되는 곳의 위치를 단순하고도 손쉬운 방법으로 시각화해준다. 그런가 하면 시장은 영토의 결함을 더 잘 찾아내 정책을 바꾸거나, 시민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전 과정은 지리 정보와 영토 데이터가 연계되어 교차 연결(자원-인프라-서비스 사용)을 생성하기 때문에 기존 방안을 개선하거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생성된 지표는 영토의 역동성을 판독할 수 있는 첫 번째 틀(체계)이 된다. 또한 그 이상으로 시민들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균형잡힌 개발 시나리오 계획과 더 나은 서비스를 제안하는 데에 필요하다.
오늘날 도시는 서비스 디자인이 전위적 혁신, 그러니까 사용자들을 위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면서 디지털의 역동성을 결합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도시의 힘은 여러 분야의 수렴에서 생겨난다. 혁신이 오로지 기술만의 혁신이 아닌 이상, 사회통합이 사회학자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며 디자인도 오로지 사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서비스 디자인에는 창의적 인재, 인문과학이나 인지과학 전문가(사회학자, 경제학자, 인류학자 등), 디지털 기술 전문가 등이 두루 결부된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위로부터', 즉 공공 또는 민간 부문 활동(제도, 브랜드, 기업)에 의해 사용자에게 강제된 서비스보다, 사용자로부터 출발해 그들의 기대와 경험에 훨씬 적절한 새로운 사용과 서비스를 만들어낸다는 특성이 있다.
서비스 디자인과 도시 공공 서비스라는 두 개념의 만남은 중요한 실험의 장을 열어준다. 내가 도시들, 디자인 학교, 디지털 창작소, 그리고 인문과학 및 인지과학 연구소의 융합이 한층 더 강화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내일의 도시는 여러 학문들 간의 상호 연관성, 칸막이 허물기, 경계를 움직이는 프로젝트 등이 필요하다. 나는 기술의 최선을 찾아, 도시를 재발명하고 사회적 연결을 다시금 돈독하게 하는 방향으로 이용해야 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 https://youtu.be/ap6FBB1ihDw
■ https://youtu.be/jvP2f6EntKg
■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2121917192066517
■ 파리는 모든 도시 전문가들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흔들던 과제, 즉 사람들이 하루 24시간 내내 돌아다니는 대도시의 근본적인 전환에 성공했다. 실로 대단한 공적이다. 이 공적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세계를 상대로 우리가 우리의 대도시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렇다, 교통을 다양한 방식으로 우회하는 일은, 너무 많은 전문가들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음에도 가능해졌다. 세계의 대다수 대도시들은 그들이 달성한 성장의 희생물이다. 이 점에 대해서 도시 전문가들은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그 말은 그들이 이러한 상황 앞에서 자주 무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낡은 건물을 허물고 새 건물을 올리는 것은 통상적으로 마주치는 일이다. 우리는 그것만이 도시를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토록 미미한 일뿐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파리는 다수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사실 그러려면 우리의 선입견, 특히 지속적인 교통 흐름이 있는 대도시는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고정관념과 철저하게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관찰한 가장 극단적인 선택지는 일본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근로자들이 기존 도로를 보수하고 새 도로를 건설하는 작업을 한밤중에만 진행한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도시계획가들조차 파리에서의 변화들을 고려하지 못했다. 파리 시장 안 이달고와 시장을 보좌하는 실무 팀은 카를로스 모레노의 식견을 받아들여 우리에게 그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네, 됩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활동가라면 이와 다른 경우였을지라도 그렇게 답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혁신이란 아주 현실적인 도전이라, 아마 전쟁도 불사해야 함을 환기시킨다. 그 전쟁은 주민들도 논의에 참가해야 하는 전쟁이 되어야 한다. 파리 같은 세계도시엔 자기 동네를 더 낫게 만들 수 있는 좋은 생각을 가진 주민들이 차고 넘친다. 파리시의 책임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전문가들의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이들 주민들의 말까지 경청하는 슬기로움을 발휘했다. 파리시의 사례는 한 도시의 변화에 대한 많은 제안들이 기존 옵션을 벗어나면 너무도 자주, 진지한 검토 없이, 전문가들이라는 자들에 의해 내쳐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파리시가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이를 역사의 전환점으로 기억해야 하며, 하나의 도시, 심지어 교통 흐름이 잠시도 쉬지 않는 대도시에서, 전문가들이 아무리 "절대, 불가능하다"고 해도, 변화의 태세를 갖출 수 있음을 새겨야 한다.
도시는 하나의 도시가 필요로 하는 모든 시스템 - 물, 교통, 안전, 쓰레기, 친환경 건물, 청정 에너지 등 - 을 관리하는 도시 기술들의 살아있는 실험실이 된다. 도시의 시스템을 만들고 실제로 경험하고 시운전해보며 새로운 발견에 이르는 방식이 이러한 새로운 접근법에 달려 있다. 이 같은 본질적인 변화는 안 이달고 시장의 정치적 용기와 뛰어난 혁신가 카를로스 모레노의 공헌이 합작해서 만들어 낸 성공작이다. 중요한 점은 수많은 도시들이 현재 파리의 사례로부터 배우고자하며, 이 변화의 일부를 그들의 도시에서도 시도해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15분 도시'는 주민들을 위해 가장 좋은 길을 고려하는 도시 조직 모델이 되었다. 교통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주민들의 필요를 고려했는지 여부가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 사스키아 사센 -
■ https://youtu.be/0eV0P3ISeOU
■ 카를로스 모레노에 따르면, 시민권이란 도시에서 살 권리를 뜻한다. 얼핏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한 이 권리는 무엇을 함축하는가? 그는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밀도(density)와 거리(distance)를 따로 떼내어 생각하라고 요구한다. 밀도란 도시가 지닌 미덕이며, 거리는 반대로 도시의 해악이다. 밀도는 밀집된 도시 지역에서 경제와 혁신에 따른 파급효과를 보장해준다. 경쟁과 협력의 주역들이 밀집한 총체로부터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고,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부분의 합보다 더 커지기 때문이다. 밀도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함께 하면서 그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서로에게 자극제가 됨을 뜻한다.
거리는 도시가 지니는 해악이다. 도시가 확장되고 분리될수록 불평등은 커진다. 부자들은 그들의 권력을 영토화하고 균질화하며, 이를 집중화하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홀대받거나 내몰린다. 거리는 공간 안에서 계급과 인종, 문화를 갈라놓기 때문에 정체성을 강화하고 고착시킨다. 사람들은 분리되어 그들이 '속한' 곳에서 산다. 또 일단 그렇게 되면 그 상태를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다. 현대 도시에서 밀도는 거리에 종속되어 왔다. 카를로스 모레노는 이제 그 관계를 전복시키자고 제안한다. 그의 '15분 도시'는 단순히 보행자나 자전거 이용자의 접근성 이상을 제안하며, 미래의 도시 권력지형을 완전히 바꾸고자 한다. 밀도를 분산시킴으로써 권력을 보다 공평하게 분배하자는 것이다. 현대 도시는 다양한 전선에서 도전받고 있다. 그 전선들은 그저 변화와 성장만으로 뛰어들기엔 너무 복잡하고 광범위하다. 이러한 문제들의 폭과 깊이를 본질적이고 인간적인 잣대로 측정한다. 도시에 거주한다는 경험은 곧 도시가 지닌 복잡성을 벗어나려 애쓰기보다 그 복잡성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므로.
- 리처드세넷, 런던 정치경제학교
유엔 해비타트 도시계획위원회 의장 -
■ 파리를 모델삼아 '15분 도시' 콘셉트를 만든 카를로스 모레노(Carlos Moreno) 소르본대 교수는 이와 관련한 질문에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라고 힘을 줬다. 그러면서 바쁘고 정신없는 삶의 패턴이 '도시의 스피드'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됐음을 언급하며 "미세먼지, 스모그 등으로 도시 속 삶의 환경이 너무 큰 타격을 받고 있다. 도시의 시간을 재분배하고, 밀집공간을 재분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5분 도시' 프로젝트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는 소르본대 산하 기업가정신·지역·혁신 연구소(Chaire-ETI)의 한승훈 도시디자이너 역시 "도시 속에서 보행을 많이하고, 자전거를 많이 타며 삶의 속도를 줄인다는 것에 '15분 도시'의 의미가 있다"고 힘을 줬다. 중요한 대전제는 '재택근무' 혹은 '집근처 공유오피스 활용'이 새로운 표준이 되는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종식을 선언한 이후에도 꾸준히 재택근무를 권장하고 있다. 이는 전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15분 도시' 콘셉트가 유럽은 물론 북미·남미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다.
파리가 추진하고 있는 '15분 도시'를 그대로 복사할 필요는 없다. 미래에도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들이 행해지고 있는지, 어떤 발상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는지를 살피고 우리 도시에 적용할 수 있는 요소를 생각해보는 것이 포인트다. 명백한 트렌드와 원칙은 △ 자동차 중심이 아닌 보행자 중심 도로 확보 △ 특정 거점 중심이 아닌 시민 개개인이 중심이 되는 도시 디자인 △ 새로운 인프라 건설이 아닌 기존 인프라를 바탕으로 한 공간의 재분배 등이다. 모레노 교수는 "'15분 도시'는 '나와라 뚝딱' 식으로 이뤄지는 요술봉이 아니다"라며 "각 도시들의 특성과, 환경과, 상황에 맞게끔 맞춤형으로 진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파리 시장인 안 이달고는 콜롬비아 학자인 카를로스 모레노가 고안한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15분 도시’라는 혁신적인 개념을 발표했다. 15분 도시는 집에서부터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사무실, 유아원, 병원, 상점, 학교, 공원 등을 이용하면서 일상활동을 할 수 있는 ‘집에서 가까운 도시(city of proxi mities)’를 만드는 것이다. 파리는 15분 도시 개념을 미니메스 지구(Minimes Barracks)에 적용했다. 기존 건물을 공영주택단지와 보육원, 식당, 사무실, 의원 등의 복합용도로 재건축해 일상생활을 위한 기초시설을 배치하고 주차장은 공원으로 리모델링했다. 5분 거리에 있는 바스티유 광장은 교통 중심지에서 보행자 중심 공간으로 재정비했고, 리퍼블리크 광장 등도 보행자 중심의 광장으로 정비했다. 코로나19 이후 교통혼잡 완화, 사회적 거리 두기, 탄소중립 등을 위해 설치된 자전거 전용도로는 영구화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파리 의회는 15분 도시로의 재편을 촉진하기 위해 지역을 잘 아는 17개 자치구의 권한과 역할을 제고할 수 있도록 하는 ‘15분 도시를 위한 파리 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도로 전환, 녹지와 자연 확충, 지역 공공서비스 유지·개선 등을 위해 250개 사업을 지난해 처음으로 선정해 3억4천만 유로를 투자할 계획이다. 이들 사업은 주민에 대한 생활 서비스를 개선하고 도시 유산을 지키며 더욱 풍요로운 도시를 조성할 목적으로 선정됐으며, 각각 회복·혁신·신규 사업으로 구분해 추진된다. 파리 15분 도시가 지닌 계획적 측면을 중심으로 시사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존의 주거 중심의 논의에서 벗어나 집에서 15분 거리에서 일자리, 여가, 쇼핑, 교육, 문화, 산책과 휴식, 공유 및 재사용, 생물다양성 등 다양한 기능을 복합적으로 누릴 수 있는 자립적인 생활권으로 개편한다. 어디에 거주하든지 수준 높은 생활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민 개개인의 삶의 질 향상은 물론 탄소중립과 도시의 균형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게 된다.
둘째, 도시의 대표적인 공공 공간인 도로와 광장, 학교를 주민을 위한 삶의 공간으로 전환한다. 도로는 보행자와 자전거 중심의 조용한 거리로, 주차장은 자연과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바꾸고, 아이들을 위한 안전한 길을 조성하며 다양한 상업 및 지역 활동을 연계해 생활 활력을 높이고자 한다. 학교는 방과 후나 주말에는 주민을 위한 활동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학교 앞은 안전하고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어린이 가로로 바꾸며, 환경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학교를 조성한다. 광장은 공유 텃밭을 조성하는 등 이웃과 주민을 위한 친근한 공간으로 개편한다. 이는 모두 도시공간의 사회적 가치를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셋째, 주체로서 주민을 중시하면서 문화와 소통을 강조한다. 파리의 경우 일상에서 문화를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문화 플랫폼을 구축하고, 시민들이 서로 만나고 돕고 조언을 구하고 공공행정에 접근할 수 있도록 ‘시민 키오스크’를 설치한다. 공공은 청소, 안전 등 주민 활동에 위해를 줄 수 있는 사항을 개선하고 디지털 혹은 일시적 운영 등을 통해 필요한 행정서비스를 시민들이 누릴 수 있도록 지원해 참여를 촉진한다.
이러한 15분 도시 개념은 도시 기후 리더십 그룹(C40)에서 도시정책으로 채택됐으며 미국, 캐나다, 영국, 중국 등 많은 국가와 도시에서 적용하고 있다. 이제는 개발 중심의 도시계획에서 벗어나 탄소중립과 삶의 질 개선 등을 위한 도시생활계획(urban life planning)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주민의 일상생활에 초점을 두고 주민 중심의 상세한 공간환경 진단 및 평가를 통해 개선사항을 발굴해 공공 공간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주민이 주체로서 지속 가능한 역할을 확장할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고 소통할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KDI 경제정보센터,
「파리의 15분 도시, 미래의 삶을 꿈꾸다」
박창석 한국환경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파리시가 추진하고 있는 '15분 도시'는 최근 지방선거에서 종종 거론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개인이 도보와 자전거로 15분 거리 안에서 업무, 교육, 여가, 쇼핑 등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서비스를 받게끔 도시를 디자인하는 콘셉트. 부산·대전·제주 등은 구체적으로 정책 추진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만큼 '지속가능 도시'의 필요성을 한국의 지자체들도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기본은 파리시가 추진하고 있는대로 차도와 완전히 분리된 자전거 도로, 그리고 넓은 인도를 확보하는 것이다. 파리시의 정책은 시민들이 "시내에서 자동차를 몰지 말라"는 메시지로 인식할 정도로 분명하고, 강력하다.
자동차는 목적지 지향적이다. 수십 킬로미터 밖 도심에 위치한 특정 건물의 주차장까지 한번에 달린다. 반면 도보와 자전거는 그렇지 않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 위에서 동네에 위치한 각종 서비스에 눈길을 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15분 도시'는 우리 동네를 재발견해 도시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라 볼 수 있다. 이 콘셉트에 대해 오해를 한다면 "당신을 집에서 회사 등 특정 장소까지 15분 안에 데려다 주겠다"는 모빌리티(mobility) 혹은 인프라 건설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15분 안에 어디든 갈 수 있게 철도와 도로를 더 만들겠다는 건 '15분 도시'의 기본 개념도 아니고,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한 솔루션도 아니라는 지적이다.
■ https://youtu.be/BBqt3YVrLes
■ "가능한 한 국가를 작게 할 것 ― 모든 정치·경제적 일들은 가장 많은 재능을 타고난 정신들이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정신의 낭비는 곤궁한 상태보다도 근본적으로 더 나쁘다. 모든 경제·경제적인 일들은 보다 열등한 두뇌의 소유자들을 위한 노동 영역이며, 이들 이외의 사람들은 이러한 작업장에서 일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 기계가 다시 한 번 해체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지금처럼 모든 사람들이 정치·경제적인 일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누구든 언제라도 그것을 위해 일하려 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일은 돌보지 않는 것은 우습기 그지없는 커다란 광기다.
사람들은 공공의 안녕을 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한다. 그리고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사람들이 이를 통해 공공의 안녕과는 정반대되는 것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친애하는 우리 세기는 이러한 사실이 아직 증명되지 않은 것처럼 그것을 증명하려 한다! 사회를 도난과 화재로부터 안전하게 하고 상업과 교역을 하기에 극히 편리하게 만들고 국가를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에서 섭리적인 힘으로 개조하는 것, 이것들보다 저열하고 범속하며 전혀 불가결하다고 할 수 없는 목표다. 무릇 우리는 존재하는 최고의 수단과 도구를 통해 이러한 목표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수단과 도구는 가장 높고 가장 드문 목적을 위해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시대는 경제에 대해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낭비의 시대다. 그것은 가장 귀중한 것, 즉 정신을 낭비한다."
- 니체 -
【 시민권, 도시에 존재할 권리 】
■ https://youtu.be/UPqNdoCR_tQ?si=W4kvR3iv5rTb81Y6
■ https://youtu.be/BvmHh1glwsE?si=i6KcdteAzPM3Rn5H
■ https://youtu.be/OjI6C8bMSVU?si=z2SySw7Xy974YfmL
■ https://youtu.be/dalm_1jptKA?si=goDbZJKd42gz8b9W
■ https://youtu.be/BQzLa2tm1HM?si=yDdKW_BdKskrEPng
■ https://youtu.be/ude7Rl4lN3Y?si=12NoaWmYLd8n0rwe
■ "하나의 복잡한 인식과 사고는 오늘날엔 분리되고 칸막이 되어버린 인식들의 연결을 필요로 한다는 고유성을 지닌다. 그러니 이것들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그 방법을 알아야 하는데, 이야말로 문제 중의 문제다. 우리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사항은 맥락화로, 도시를 복잡한 특성 안에서 이해해야 하며, 그보다 광범위한 국가적인 맥락, 나아가 지구적인 맥락에서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도시들, 특히 대도시들은 즉각적인 통신 수단에 의해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는 환원적 사고가 지배적이다 보니 사람들은 도시를 오로지 축, 도시계획, 교통 흐름 등의 문제로 축소한다. 하지만 인간과 관계된 문제를 그렇게 축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도시를 도시가 갖는 모든 양상 속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 이다.
도시의 고유성은 그 안에서의 삶이 지니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특성의 총체로 간주되어야 한다. 도시는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반작용, 역작용의 총체이다. 마찬가지로, 각 개인이 사회 안에 존재할 뿐 아니라, 사회가 개인 안에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도시 안에 존재할 뿐 아니라, 도시 또한 우리 안에 있다. 따라서 도시에서는 상반되는 요구 사항들에 의연하게 대처해야 하며, 특히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사물이며 상황을 서로 연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연히, 적절한 연결 방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방법이란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복잡성 연구방법을 가다듬기 위해 수 년 동안 노력했다. 요컨대 직면한 문제들, 특히 도시문제들에 대해 성찰할 수 있으려면 머릿속에 몇몇 원칙을 단단히 장착해야 한다."
- 에드가 모랭 -
■ 도시는 오늘날 무수히 다양한 형태로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을 품안에 아우르고 있다. 사람들을 생활 공간과 이어주는 도시는 인류의 이야기가 담긴 영원한 서사시를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들려주는 증인이다. 기원전 5년 무렵부터 벌써 계획성과 조직력을 발전시켜온 인간 집단의 흔적이 나타난다. 이 흔적은 가령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요르단강, 갠지스강 주변, 인더스강 계곡, 발크강 연안, 황허 또는 멕시코 계곡, 에트루리아 등지에서, 그후에는 로마와 고대 그리스처럼 어느 정도 '도시'라는 개념을 처음 고안해 낸 곳에서 관찰된다. 도시의 탄생은 항상 농업의 발생, 즉 농토와 도시 공간이라는 복잡한 이원성이 생태계와 맺는 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도시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정착 생활과 만나게 되는데, 여기엔 농업 재배, 잉여 생산, 수공업 생산, 물물 교환 거래, 그리고 규제를 위한 행정, 질서 준수와 영토 보호를 위한 군대, 정신의 초월을 위한 종교 행위 등과 같이 노동 분업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기능 등이 수반된다.
도시(ville)라는 단어는 라틴어 '빌라 (villa)'에서 파생된 것으로, 어원만 살펴보아도 물리적인 구현임을 알 수 있다. 빌라, 즉 5-6세기 무렵에 서로 인접해 지어진 50여 채의 건물들로 '시골집, 농장'을 뜻한다. 우리는 '빌라' 또는 '마을 (village)에서 현대적인 도시(ville)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과정에서 드러나는 하나의 영토와 영토 자원의 분배에 따른 동기의 진화, 형태의 진화 등에 대해 질문해볼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영토를 나누어 갖는다는 것은 공동생활 규칙 및 정해진 집단생활 방식과 더불어 공동의 계획까지 공유함을 의미했다. 이러한 공유는 하나의 장소, 명확한 사회 조직 속에서 진행되는 하나의 구체적인 계획과 연결되었으며, 그것이 폴리스(polis)(시민을 뜻하는 라틴어인 civitas에서 파생된 cite가 여기에 해당된다)이다. 폴리스는 물리적인 집합 장소라기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자면 ' 정치적 동물들' 의 공동체, 곧 자율적인 방식으로 '잘 살기' 위한 자유 의지에 따른 연대를 뜻한다.
폴리스와 정치적 동물들은 공동생활 규칙을 중심으로 결집하며, 이상을 추구한다는 목표로 결속되고, 가령 정의 같은 덕목들에 의해 활성화 된다. 시민들은 규약과 법을 준수하고 폴리스에 대한 시민으로서의 소속감을 구체화함으로써 정치적 강화, 즉 '함께 살기'를 공고히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 목표는 시민들이 으뜸으로 여기는 자산이며, 자급자족이 이들에게는 목표이자 행복이다." 이 같은 폴리스가 하나의 장소에서 구현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폴리스가 영토에 의해, 영토의 지리적 지위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테네 또는 스파르타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리적 지위가 폴리스의 토대를 이룬다고 해도 그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도시는 언어 구사 능력을 구비한 생각하는 인간들, 자유 의사에 따라 공동의 장소에서 생활 규칙을 공유할 것을 받아들인 자들이 있음으로써 존재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그 사실을 지적한다. "인간이 꿀벌을 비롯하여 무리지어 사는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무한히 사회적인 것은 자명하지만, 자연에서 이유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은 인간에게만 언어를 허락한다. 음성만으로도 어쩌면 기쁨과 고통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동물들도 음성은 타고 났고, 그 덕분에 동물들도 이 정서들을 느끼고 서로 소통할 수 있다. 하지만 언어는 선과 악을, 그에 따라 공정과 불공정 등을 표현할 수 있도록 짜여 있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아테네인의 도시' 또는 '라케데모니아인(스파르타 주민)의 도시'라는 말을 한다. 이는 '도시' 자체, 그리고 도시라는 말의 어원이 가리키는 장소, 집, 물리적 현존을 넘어서는 생활방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빌라(villa)'에서 '도시(ville)'로 넘어가는 변증법은 21세기, 즉 도시의 세기, 초연결의 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건재한다. 규모가 작든, 중간쯤 되든, 크든, 도시 권역, 대도시, 초거대도시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시 공간, 국토, 생태계, 도시 형태, 그곳에서 통용되는 규칙, 규범, 관습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지금으로부터 오백 년 보다 조금 더 오래 된 시기에 토마스 모어는 완벽한 생활방식을 지닌 하나의 영토, 혹은 하나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상상하고, 그 곳의 구성요소들이며 규칙과 관습 하나하나를 꼼꼼하고 세세하게 규정하고 묘사했다. 이 완벽한 공간은 하나의 섬에 위치했는데, 그 섬이란 사실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비장소(non-places)이다. 토마스 모어의 저서에 등장하는 이 섬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topos)'에 부정 접두사를 붙여 만든 유토포스(u-topos)로, 오늘날 유토피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토마스 모어의 저서와 늘 붙어 다니는 이 신조어는 인류 역사를 가로지르는 평화로운 삶의 형태, 즉 생활의 장소, 노동, 휴식, 쾌락 등의 모든 요소가 균형을 이루고, 형제애가 지배하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신을 믿으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이라는 견해를 담고 있다. 토마스 모어는 또한 인간 본성이 지닌 한계와 약점들도 묘사하며 전쟁을 배제하고 투명성을 역설하는 동시에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처벌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이 인간을 위해 건설한 이상적인 사회를 향한 염원을 표현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간이 이루어놓은 업적들은, 꿈이 악몽이 될 때, 인본주의자 토마스 모어가 상상한 이 세상 어디에 도 존재하지 않는 섬 유토피아와는 정반대되는 디스토피아를 탄생시켰다.
하나의 세계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락가락할 때, 그 두 곳을 갈라놓는 경계선이란 너무도 얇다. 그 정도로 우리의 세계는 그 안에 모순을 잔뜩 담고 있다. 앙리 르페브르(Henti Lefebvte)에게 도시란 도시 거주민들이 함께 만들 어가는 일종의 집합적 작품(ceuvte)으로서 교환 가치보다 사용 가치와 연관된다. 도시에 대한 권리(droit a la ville)는 공간에 접근하고 공간을 점유하고 사용할 권리, 사람들의 필요에 부합하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 할 권리인 전유의 권리를 의미하며 여기에 거주의 권리(주거권)가 포함 된다. 나아가 도시 공간을 생산하는 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참여의 권리를 말한다. 앙리 르페브르에 의해 이론화된 '도시에 대한 권리'에 근거하면, 사회적으로 공간적으로 분산화되고 파편화된 도시 사회에서는 이 권리에 걸맞은 주거지에 대한 요구를 둘러싸고 수많은 갈등이 표출된다.
세계대전 이후 도시는 생산주의가 내포한 기술적 진보를 최대한 활용해 발전했으며, 이 과정에서 도시가 현실과 유리됨으로써 그 안에서 살던 주민들의 일부는 인간답게 사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코비드19 시대를 맞아, 빈곤으로 약자 층이 한층 더 가혹하게 타격을 입고, 경제 위기로 인하여 소외 현상이 심화되면서, 우리는 우리의 장래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있는 초연결 세기에, 어떻게 해야 극적인 디스토피아로의 전락을 피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생태학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균형 잡힌 도시 생활의 길을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모두를 위한 도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고대 로마에서 jus civitatis, 즉 '시민권'이란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인간들에게 주어진 시민으로서의 권리 인정을 뜻했으며, 이 시민권은 사람들을 로마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유인 요소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훗날 하나의 영토, 하나의 공동체에 속할 수 있도록 부여되는 민법상 여러 권리들 가운데 본질적인 것이 되었다. '시민권'의 소유는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언어 표현으로 굳어졌으며 수용, 다시 말해서 어디에선가 받아들여지는 것과 동의어가 되었다. 바로 이 책의 핵심 이기도 하다. 도시의 발생에서 시작하여 도시 현상의 폭발적 팽창으로 탄생한 세계도시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 - 인류애를 구현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그 인류애에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것 - 을 되찾을 수 있는가? 몇몇 사람들이 제시하는 암울한 미래 비전 - 2050년이면 인간과 로봇, 각기 다른 수준의 인공지능들이 이 세계를 분할 점령할 것이라는 전망 - 은 어떻게 할 것인가?
<메트로폴리스>, <1984년>, <알파빌>, <브라질>, <블레이드 러너>처럼 영화사에 길이 살아남을 몇몇 영화들에서 보듯이,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영화들은 유별나게 많다. 이러한 계보는 오늘날 기술과 생물유전학, 인공지능 등의 힘으로 계속 '증강'되고 있다. 도시에서의 삶은 이제 2050년을 내다보는 60억 명의 도시인들에게 중대한 도전이 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기술로 인간적이고 지속가능하며 포용하는 도시를 건설할 수 있을까? 기후변화의 영향에 의연하게 대처하며, 오늘날 멸종 위기에 놓인 생물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 공통계(commons)를 회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생태학은 곧 인본주의이며, 경제학은 공유의 원천, 사회 통합은 허울이 아닌 현실로 간주되는 도시를 건설할 수 있을까?
【 도시 향유권 】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도시에서 살 권리로 】
■ 도시적이라고 하는 것은 출생지 또는 삶의 터전에 대한 장소애착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경계를 전복시켜 산산조각 내버린 새로운 문화를 삶의 원리로 삼는 것이다. 작금의 문제는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혁명이 아니라, 불과 몇 년 사이에 변해버린 도시, 대도시, 또 조만간 변화할 유비쿼터스 초거대도시에서의 노동의 의미, 그 사회적 관계적인 현실 자체이다. 이상주의적 관점에서의 자연의 재현이 아닌 물, 불, 흙, 공기의 4요소와 인간이 맺는 관계, 도시 공간과 점유 방식, 개발 방식과 맺는 관계의 변화를 도모하는 생태 혁명의 문제다. 또한 도시적인 것은 사회적 관계의 혁명, 특히 여성의 권리와 관련된 사회 관계를 바꾼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도시적 삶은 여성 해방 에너지의 촉매처럼 작용한다. 도시가 팽창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여성들은 새로운 표현, 새로운 사회화의 길을 찾아 나섰다.
그 덕분에 양성 평등이라는 기치 아래 여성 인권, 임신중절 등을 위한 투쟁을 이어갔으며, 여성 노동과 그에 대한 정당한 임금을 인정받기 위해 남성우월주의 타파 투쟁에도 나섰다. 도시 여성들은 수많은 전선에서 수백 년 묵은 억압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전진했다. 여성 행진이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 결집한 푸시햇 프로젝트와 함께 그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보다 광범위하게 생각해보자면, 이는 남과 다를 수 있는 권리, 도시에서 살 권리, 각자가 선택한 남성 또는 여성을 사랑할 권리이며, 그래서 각자가 원하는 가정환경을 꾸릴 권리, 후손을 낳거나 낳지 않고 입양할 권리를 옹호함으로써 구식이 되어버린 지난 시대의 가족 모델, 구태의연한 위계질서에 따른 가족 틀을 깨거나 적어도 변화시킬 수 있는 권리다. 곧 새로운 표현 방식과 사회적 관계에 개방적인 도시 문화의 힘에 의해 변모하는 사회적 권리를 가리킨다.
인터넷이 출현한 지 20년, 스마트폰이 등장한 지는 10년, 또 사물인터넷이 탄생한지 몇 년이 지난 지금, 겉보기와는 달리 초연결성이 아닌 초파편화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디지털 혁명으로 수렴해감에 따라 영토와 공간, 사회적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지각하고 느끼게 되었다. 특히 사회적 관계는 무엇보다도 시민이라는 지위를 토대로 하여 맺어지게 된다. 전 세계 45억 명의 네티즌 가운데 38억 명 이상이 사회 관계망 서비스에 가입하여 활발히 활동한다. 그러니까 네티즌의 84퍼센트, 달리 말하면 세계 인구의 절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페이스북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매달 전 세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용자가 27억 명, 이중에서 프랑스인은 3천 7백만명이다. 인류는 그 어느때보다도 엄청난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보유한다. 이와 동시에 개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립되어 있다. 레비나스가 즐겨 사용하는 '낯선 자가 가까이 있다'는 태도는, 즉 타자에 대한 인정과 더불어 영감의 원천으로서의 이타주의와 (자기)초월로 특정지어지는 고품격 사회적 삶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의 단절, 각자가 자신 안에 칩거하면서 자신만의 진실을 구축해나가는 고립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립은 온갖 종류의 조작 대상이 될 수 있는 자기 믿음을 낳는다. 이는 탈진실을 넘어 개인적 믿음이 객관적 성찰과 이성적인 분석을 대체하는 현상이 교묘하게 구조화되어 가는 것이다. 세계가 대거 도시 생활로 넘어가고 있다고는 해도, 도시 생활 문화만의 '긍정적 특이점'을 확인하기란 힘들다. 비장소 속에 고립된 채 자신과 타자에 부정적인 삶, 몰개성적인 익명의 삶을 탈피해, 주변 환경에 통합되어 영감 있 창의적인 도시 자원이 뒷받침하는 시민으로서의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 관건이다. 이는 곧 자아와 타자 안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서로를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향에 맞서려면 도시에서의 삶이 사회적 관계, 초근접성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개개인의 확증편향을 버리고, 결집과 시민참여를 독려하는 혼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
21세기 들어와 두 번의 십 년을 보내면서 관찰된 현상들 가운데 하나는 가공할 만한 하이퍼데이터, 즉 특정 방향성을 지니고 있어서 가짜뉴스로 변하고, 급기야 트렌드 토픽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데이터의 존재다. 이 데이터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위를 확인하고, 비교 분석하며 근원을 파악해야 마땅하겠으나, 현실에서는 모든 합리적인 단계를 건너뛰고서 확인 불가능한 차원으로 승화되어 곧장 확산되며, 인정사정 볼 것 없는 문화 전쟁에 무서운 흉기로 작동한다. 나아가 신뢰감 상실, 지나치게 감정에 좌우되는 상호 작용, 사실과 맥락에 대한 이해 부족 등이 집단행동의 원동력이 되어 출구를 예측하기 힘든 상황들을 야기시키고 있다. 불안정한 심리 상태의 디지털 군중이라는 형태로 표현되는 21세기 도시인들의 자폐 성향은 그들의 불만 내지는 불편함을 드러낸다.
우리는 '노란조끼' 운동 때 그러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러한 운동이 말하는 바는 단순한 사회 갈등 이상으로, 무엇보다도 사업화 이후의 패러다임이 사용과 서비스로 전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일하러 간다는 것은 이제 인구 밀도가 아주 낮거나 보통 정도인 지역에서 도시 지역으로 가야하는 - 일반적으로 자가용차를 운전해서 간다 - 기나긴 여정과 동의어가 되었다. 전통적인 경제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이동과 노동 방식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이다. 바로 여기에 사회적 파열의 모든 요소들이 응집되어 있는데, 전통적 기구의 지도자나 대표자에게는 그 불꽃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국가 지도자들은 도시, 영토, 그리고 그곳에 사는 주민들과의 끈을 상실했으며, 그 대신에 그들을 향한 경계심이 뿌리를 내렸다.
지나간 수십 년은 앙리 르페브르가 이론화한 '도시에 대한 권리'의 시대로, 각종 도시운동에는 주거다운 주거를 위한 투쟁이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도시에서의 삶을 누릴 권리'가 사회적 불만의 중심에 놓여 있다. 앞으로 닥칠 투쟁과 대전환은 주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한 본질적인 사회 기능, 즉 일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치료와 보살핌을 받으며,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등의 모든 기능에 접근하도록 관여한다. 30년 전만 해도 미약한 신호에 지나지 않던 것이 이제 더는 무시할 수 없는 붉은 깃발이 되었다. 오늘날 그 붉은 깃발들의 중심이 도시적인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전면적인 사회적 협약 없이는 그 어떤 해결책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교육, 문화, 경제, 사회 통합, 참여 민주주의, 회복 탄력성, 에너지와 디지털 전환 등과 더불어, 도시에서 다르게 살기, 더 잘 사릭, 함께 살기는 도시 차원에서 힘을 모아 일구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 도시든, 중소 도시든, 도시적인 것은 이제 도처에 편재한다. 대도시의 교통 혼잡이니 인구 밀집을 피할 대안으로서 중소도시의 삶을 구축하지 않고는, 그 어떤 지역도 평온하게 발전해나갈 수 없을 것이다. 세계는 서서히 진화해가지 않는다. 19세기 이데올로기에 기인하는 국가 중심 문화에서 21세기 도시 중심 문화, 즉 서비스 산업 지향적이며 디지털적이고 편재적인 문화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문화를 토대로 다른 지표들을 마련해가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도시와 영토를 매혹적으로 만들지 못할 경우, 당연히 한 나라를 매혹적으로 만들 역량은 확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는 권력을 쟁취하는 상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을 상상하는 힘이다!
【 휴먼 커넥션 】
(Human Connection)
■ https://www.youtube.com/live/2W6Frv_ds-U?feature=share
■ https://youtu.be/Wjp-j2HxucQ?si=51uQTMQWzM6X5P8u
■ https://youtu.be/Ew3rKhjtzHE?si=vurICIv1Zt4Tu0Nx
■ 세상이 더욱 디지털화되고 첨단 기술화될수록, 우리는 친밀한 관계 및 사회적 연계에서 비롯되는 인간적 감성을 더욱 갈구하게 된다. 제4차 산업혁명으로 개인과 집단이 기술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게 되면서, 인간이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능력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 역시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더 이상 우려가 아닌 현실이 되고 있다. 2010년 미시간 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에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대학생들의 공감능력이 40퍼센트나 떨어졌고(20~30년 전 대학생들과 비교하여), 이러한 공감능력의 저하는 대부분 2000년 이후에 발생했다. MIT 대학교의 셰리 터클(Sherry Turkle) 교수에 따르면 10대 청소년 가운데 44퍼센트는 운동경기를 할 때나 가족 혹은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온라인 세상과의 연결을 끊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는 온라인 소통에 밀려낫고, 온라인 미디어에 휩쓸린 젊은 세대 전체가 타인의 말을 듣거나 눈을 맟추거나, 타인의 몸짓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공포심이 생기고 있다. 우리와 모바일 기술 간의 관계가 좋은 예다. 우리는 항상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잠시 멈춰 사색하는 시간과, 기술 및 소셜 미디어의 도움 없이 실질적인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라는 소중한 자산 중 일부를 빼앗기고 있다. 터클 교수는 두 사람이 대화할 때 모바일폰이 단지 테이블 위에 있거나 주변 시야에 있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주제와 유대감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연구 결과에 대해 언급했다. 우리가 모바일폰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큰 목적'을 갖고 활용해야 함을 뜻한다.
다른 전문가들도 역시 이와 비슷한 우려를 표명했다. 기술과 문화에 대한 글을 스는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는 우리가 디지털 홍수에 빠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 스스로 주의력을 통제하지 못해 인지능력이 퇴화하게 된다고 밝혔다. "인터넷은 의도적으로 구축한 방해체계(interruption system)로서 우리의 집중력을 분산시키 위해 만들어진 기계다. 잦은 방해는 우리의 생각을 흩뜨리고, 기억력을 약화시키며 우리를 긴장하고 불안하게 한다. 생각의 흐름이 복잡해질수록, 우리의 집중에 방해가 되는 요소는 사고에 더 큰 손해를 입힌다." 197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 박사는 1971년에 이미 "정보의 풍요는 집중력의 결핍으로 이어지게 된다"라고 경고한 바 잇다. 오늘날의 상황은 더욱 나바졌다. 특히나 '할 일'이 너무 많아 과부하가 걸리고, 지나치게 무리하며,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의사결정자들의 경우 집중력의 결핍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여행작가인 피코 아이어(Pico Iyer)는 자신의 책에 이런 말을 남겼다. "가속화의 시대에는 느리게 가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집중을 방해하는 일이 많아진 시대에서 집중하는 것만큼 사치스러운 것은 없다. 계속 해서 움직이는 세상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큼 시급한 일도 없다." 24시간 내내 연결되는 디지털 도구와 연계된 우리의 두뇌는 지속적인 광란의 상태에 빠져 영구적으로 움직이는 기계로 변하게 될 위험이 있다. 나 역시도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할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어 아주 짧은 기사마저도 끝까지 읽는 '사치'를 부릴 수 없다고 말하는 리더를 많이 봐왔다. 국제 사회의 모든 의사 결정자들은 계속된 탈진 상태에 빠져 경쟁적으로 달려드는 수많은 요구에 잠식당한 나머지 좌절감에 휩싸여 사임을 하거나 절망에 빠지게 된다. 새로운 디지털 시대에서는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한 걸을 물러나 생각하는 일이 실제로 어려워지고 있다.
【 정신건강과 웰빙 】
■ https://youtu.be/WJPuOuVbFEQ?si=S8LtGW77vHwuPg8x
■ https://youtu.be/QyT_48LCDEo?si=k6O5P308UU1CIBaH
【 팬데믹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 】
(The Impact of the Pandemic
in terms of Mental health)
■ 여러 해 동안 전 세계 많은 곳에서 정신건강 문제가 유행처럼 번졌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미 정신건강을 악화시켰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럴 것이다.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우리가 대화를 나눠본 학자들은 모두)은 한 동료 학자가 2020년 5월 밝힌 “코로나19는 정신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육체적 질병과 달리 정신건강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종종 비전문가의 눈에는 띄지 않는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우울증과 자살에서부터 정신병과 중독성 장애에 이르는 정신건강 문제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2017년에는 전 세계에서 3억 5,000만 명이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당시 WHO는 2020년까지 우울증이 전 세계 질환 중 사회·경제적 부담이 두 번째로 큰 질환이 될 것이고, 2030년에는 허혈성 심장 질환(일부 심장근육에 혈액 공급이 부족해져 생기는 질병)을 제치고 인류에게 가장 부담을 주는 질환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에선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2017년 성인의 26%가 우울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으며, 약 20명당 1명꼴로 보통에서 심각 사이의 우울 증상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고됐다. 당시 CDC는 미국 성인의 25%가 정신 질환을 앓을 것이고, 절반 가까이는 평생 동안 적어도 한 가지 정신 질환을 겪을 것으로 예측했다. 미국만큼 심하지는 않더라도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 성인들이 비슷한 수준으로 정신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직장에서도 정신 건강 문제는 골치 아픈 문제가 됐다. 업무와 관련된 스트레스, 우울증, 불안감 등이 계속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는 걸 보여주는 확실한 사례를 들자면, 영국에서 2017~2018년 스트레스, 우울증, 불안감으로 인한 근로자당 근로 손실 일수가 전체 근로 손실 일수의 57%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에게 코로나19 팬데믹 경험은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될 것이다. 이로 인해 입은 상처는 몇 년 동안 지속될 수 있다. 우선 코로나19 발병 초기 몇 달 동안 가용성 편향(availability bias)과 현저성 편향(salience bias)에 쉽게 빠졌다. 이 두 가지 인지적 편향은 코로나19의 위험에 대해 집착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다. 가용성 편향은 의사 결정이나 확률을 추정하는 과정에서 최근에 많이 접했거나 가장 빨리 떠오르는 사건, 정보, 사례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인지적 경향이고, 현저성 편향은 주어진 상황에서 눈에 띄거나 감정적 영향이 큰 단서를 사건의 원인으로 여기는 경향을 말한다.
몇 달 동안 우리가 들은 뉴스라고는 코로나19에 관한 것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거의 다 나쁜 뉴스였다. 감정을 자극하는 이미지와 함께 죽음과 전염병과 잘못될 수 있는 다른 모든 일들에 대한 보도는 우리 모두 자신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온갖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걱정스러운 분위기는 우리의 정신적 웰빙에 심각한 충격을 가했다. 게다가 언론이 조장한 불안은 전염성이 매우 강할 수 있다. 이런 모든 일들이 현실이 되었다. 소득과 일자리 감소 등의 경제적 영향, 극심한 고립, 외로움, 사망한 친지를 위해 제대로 슬퍼할 수 없는 처지로 인해 받은 감정적 상처 등은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비극을 안겼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 존재다. 누군가와 사귀고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는 행위는 우리가 사람답게 살게 해주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그렇게 못하게 되면 우리는 삶이 망가진 것처럼 느끼게 된다. 사회적 관계는 상당 부분 봉쇄 조치와 신체적 또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의해 단절 된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봉쇄 조치의 경우 우리에게 사회적 관계가 가장 절실한 때에 취해졌다. 악수, 포옹, 키스, 그 외에 인간다운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많은 의식이 억압되었다. 그러자 고독과 고립이 생겨났다. 현재로서는 우리가 예전의 생활방식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 있을지, 돌아간다면 언제 그럴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특히 봉쇄가 마무리될 무렵에는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던 기간은 오히려 지났는데도 극지 탐험가나 우주 비행사처럼 장기간 고립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겪는다고 하는, 일명 ‘3분기 현상(third-quarter phenomenon)’ 같은 정신적 고통을 겪을 위험이 계속된다. 이것은 장기간 고립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맡은 임무가 절반 지점을 넘어 3분기로 넘어가는 무렵이 되면 여러 가지 문제와 긴장을 경험하는 경향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비록 극지나 우주에 가 있는 건 아닐지라도 우리 모두는 정신적 행복감에 매우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1차 유행에 맞서고 있는 우리는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는 또 다른 유행을 우려해야 하며, 이때 느끼는 해로운 복합적 감정들은 집단적 괴로움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 정상적인 삶에서 본질적인 부분이자 즐거움의 원천이었던 활동을 할 수 없게 되면(해외에 거주하는 가족과 친구를 방문한다거나 대학 다음 학기를 앞두고 계획을 세운다거나 새로운 일자리에 지원하지 못하게 되면) 혼란을 느끼고 의욕이 저하될 가능성이 커진다. 봉쇄 막바지에 찾아온 딜레마로 인해 겪는 긴장과 스트레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몇 달 동안 이어질 것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안전한가? 좋아하는 식당에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가? 연로한 가족이나 친한 친구를 방문해도 괜찮은가? 앞으로 오랫동안 이러한 지극히 평범한 결정들을 내릴 때마다 특히 나이나 건강 상태 때문에 질병에 취약한 경우라면 더 두려움이 커질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0년 6월 현재, 코로나19가 정신건강 측면에서 미치는 영향을 정량화하거나 일반화된 방식으로 평가하기는 힘들어도 대략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알려져 있다. 쉽게 말해 이번 사태로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을 앓아온 사람들은 불안 장애를 점점 더 심하게 겪게 될 것이고,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는 철회된 이후라도 정신건강 문제를 악화시킬 것이며, 많은 가정에서 실직에 따른 소득 감소는 사람들을 ‘절망사’에 이르게 할 것이다. 또 팬데믹이 지속되는 동안 여성과 어린이를 상대로 한 가정 폭력과 학대가 늘어날 것이다. 특히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고, 사회적·경제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고, 평균 이상의 지원이 필요한 장애가 있는 등 ‘취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아이들이 정신적 고통을 받을 위험이 더 커진다. 이런 사람들이 겪는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에 정신 질환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이런 현상은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도 이어질 것이다. 2020년 3월 한 연구팀은 의학 저널 <랜싯(The Lancet)>에 봉쇄 조치가 혼란, 분노와 같은 일련의 심각한 정신 질환을 초래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심각한 정신건강 문제가 아니더라도 세계 인구의 상당수가 분명 다양한 정도의 스트레스를 겪었을 게 확실하다. 무엇보다도 정신건강 면에서 취약한 사람들은 코로나바이러스에 맞서면서 겪게 되는 도전들(봉쇄, 고립 등)에 더욱 심각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폭풍우를 이겨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기존에 진단받았던 우울증이나 불안감이 심각한 임상적 사례로 악화되는 사람들도 일부 있을 것이다. 흥분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는 조증 같은 심각한 기분 장애나 우울증 징후, 다양한 정신병적 경험을 처음으로 호소한 사람도 적지 않다. 모두가 팬데믹이나 봉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고립과 외로움, 병에 걸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실직, 사별, 가족과 친구 걱정 때문에 생긴 결과다. 2020년 5월, 영국 국민건강보험의 정신건강 담당 임상의는 의회 위원회에 출석해서 “일단 봉쇄 조치가 끝나면 정신건강과 관련된 요구가 급증할 것이며, 이후로 수년 동안 외상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곳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되면서 가정 폭력도 증가했다. 보고되지 않은 사례가 많아서 정확히 얼마나 증가했는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불안감과 경제적 불확실성이 같이 높아지면서 가정 폭력이 더 빠르게 늘어난 건 분명해 보인다. 봉쇄 조치로 인해 가정 폭력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모두 갖춰졌다. 친구, 가족, 일자리와의 단절, 폭력적인 파트너에 의한 지속적인 감시와 그와 가까이 붙어 지내야 하는 상황, 그리고 탈출이 제한적이거나 아예 불가능한 처지 등이 이에 해당 된다. 봉쇄 상태로 가해자의 기존 폭력적 행동이 더욱 심해졌지만, 피해자는 집 밖으로 나가 그런 행동을 피할 시간을 거의 혹은 전혀 갖지 못했다. 유엔인구기금(UNDPF)은 2020년 가정 폭력이 20% 증가한다면 봉쇄 기간이 평균 3개월간 지속될 경우 추가로 1,500만 건, 평균 6개월간 지속될 경우 추가로 3,100만 건, 평균 9개월간 지속될 경우 추가로 4,500만 건, 그리고 평균 1년 지속될 경우 추가로 6,100만 건의 가정 폭력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193개 유엔 회원국 모두를 포함한 전 세계적인 전망치이며, ‘성별에 기반한 폭력(gender-based violence)’으로 정의되는,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 중 축소 보고 사례가 많다는 걸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종합해보면, 봉쇄 조치가 3개월 연장될 때마다 추가로 1,500만 건의 성별에 기반한 폭력 사태가 발생한다는 뜻이 된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가정 폭력이 어떤 양상을 띨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힘들어진 상황 때문에 가정 폭력 발생 가능성이 더 커지겠지만, 이 문제는 폭력 예방과 보호 노력, 사회 복지, 돌봄 활동축소와 그로 인한 폭력 사태 발생 증가라는 가정 폭력이 일어나는 상황을 개별 국가가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번에는 “화상 대화와 정신적 웰빙이 서로 역효과를 내는가?”란 질문에 답해보려 한다. 봉쇄 기간 중 화상 대화는 인간관계, 장거리 관계, 동료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면서 많은 사람들의 개인적·직업적인 삶을 구해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나 줌을 통한 화상회의가 집중력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데서 나온 일명 ‘줌 피로(Zoom fatigue)’로 알려진 정신적 피로도 유발했다. 이는 줌 외에 어떤 형태의 화상 대화를 할 때도 똑같이 겪는 일이다. 봉쇄 기간 중 의사소통을 위해 모니터와 화상캠 수요가 상당히 광범위하게 늘어났다. 마치 새로운 사회 실험이 대규모로 진행되는 것처럼 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뇌는 개인적·직업적 의사소통 대부분을 그러한 가상의 상호작용으로 해야 할 때 이를 수행하기 어렵다고 느끼고 때로는 불안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물리적·사회적 상호작용을 하는 동안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많은 사소하면서도 종종 비언어적인 단서들이 의사소통과 상호 이해의 측면에서 꼭 필요한 사회적 동물이다. 누군가를 만나서 말을 걸 때 우리는 그가 하는 말뿐만 아니라 수많은 언어적 신호에 집중한다. 그 사람의 하반신이 나를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반대쪽을 향하고 있는가? 손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일반적인 보디랭귀지의 분위기는 어떤가? 호흡은?
화상 대화는 미묘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러한 비언어적 단서들을 해석하기 불가능하게 만들고, 나오는 말들과 영상의 질에 의해 좌우되는 얼굴 표정에만 전적으로 집중하게 만든다. 가상 대화를 할 때 우리는 장시간의 강렬한 눈맞춤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런 눈맞춤은 특히 위계적 관계가 존재할 때 고압적이거나 심지어 위협적이 될 수 있다. 이 문제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절대적인 숫자가 많을 때 중앙 시야(central view) 확보가 어려워지는, 마치 미술관에 전시된 여러 작품들에 동시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경험에 의해서 더 복잡해진다. 우리는 어느 수준을 넘어가면 여러 사람들을 한꺼번에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심리학자 들은 이런 현상을 ‘부분적 관심의 지속(continuous partial attention)’이라고 부르는데, 뇌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려고 하지만 좀처럼 하지 못하게 되는 걸 말한다. 대화가 막바지에 이를 때쯤이면 비언어적 단서를 끊임없이 탐색하느라 지친 뇌는 과부하가 걸린다. 이로 인해 기운이 빠지고 불만을 느끼게 되고, 결국 정신적 웰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코로나19 사태는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더 폭넓고 깊은 정신건강 문제를 일으켰다. 이들 중 다수는 이번 사태만 없었더라면 가까운 미래에 그런 문제를 겪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측면에서 코로나바이러스는 정신건강 문제를 재설정했다기보다는 심화시켰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건강과 관련하여 기존의 추세를 심화시킴으로써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끌어올리는 역할도 했다. 삶에 대한 만족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인 정신건강은 이미 정책 입안자들의 레이더에 포착됐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이는 리셋에 꼭 필요한 일이다.
■ 미국 소설가 조슈아 페리스(Joshua Ferris)의 2007년작 《호모 오피스쿠스의 최후(Then We Came to the End)》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떤 날은 다른 날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어떤 날은 꼬박 이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라고 말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팬데믹은 우리의 시간 감각을 바꿔놓았다. 봉쇄되어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격리된 날들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다고 말했지만, 몇 주의 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다시 말하지만 ‘참호’ 속에서 있는 것 같은 사람들, 즉 우리가 앞서 언급한 모든 필수 노동자들을 근본적으로 제외하고, 봉쇄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은 어제와 내일이 똑같고, 근무일과 주말의 차이가 거의 없는 것처럼 느꼈다. 마치 모든 표식과 통상적 구분이 사라져서 시간이 무정형적이고 구분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이와 근본적인 맥락은 다르지만 비슷한 유형의 경험으로, 가장 가혹한 형태의 감금 상태를 겪어본 죄수들은 이것이 어떤 경험인지를 안다. “하루하루가 더디게 간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한 달이 지났다. 그러면 ‘도대체 시간이 어떻게 간 거야’라고 생각한다.” 여러 차례 감옥에 수감된 적 있는 벨기에 소설가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도 같은 말을 했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기도, 초가 아주 길게 지나가기도 한다.” 이런 관찰이 우리에게 시간과의 관계를 재고하고, 시간이 얼마나 정확한지 잘 인식하고, 무심결에 그것이 흘러가게 내버려두지 않도록 만들어줄 수 있을까?
우리는 기술이 만들어낸 즉시성(immediacy)의 문화 속에서 모든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는 극한적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을 당장 필요로 하고 원하는 이 ‘실시간(real-time)’ 사회에서 끊임없이 시간에 쫓기고 삶의 속도가 예전보다 빨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계속해서 받는다. 봉쇄 경험이 이런 느낌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적기’ 공급망이 개인적 차원에서 더 큰 회복력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 시간의 가속이 억제되는 경험을 줄 수 있을까? 심리적으로 더 강한 회복력을 가져야겠다는 욕구가 우리로 하여금 속도를 늦추고 지나가는 시간을 더 의식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이것이 코로나19 팬데믹과 봉쇄가 주는 예상치 못한 긍정적인 면일 수 있다.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친구나 가족과 함께 보낸 소중한 순간들, 계절과 자연,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행복에 기여하는 무수히 많은 소소한 일들(낯선 사람과 대화하거나, 새소리를 듣거나,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 등)처럼 위대한 시간의 흔적을 더욱 자각하고 예민하게 반응하게 됐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리셋을 통해 우리는 예전과 다른 시간의 진가를 느끼고 더 큰 행복을 얻기 위해 시간을 활용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 https://www.3ds.com/ko/progress-is-human/cities
"근대인의 음식물 ― 근대인은 많은 것을, 아니 거의 모든 것을 소화할 줄 안다. 이것이 야심의 근대적인 형태다. 그러나 그가 거의 모든 것을 소화할 줄 모른다면 그는 좀더 고차적일 것이다. 모든 것을 먹는 인간(Homo pamphagus)은 가장 세련된 종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더 괴벽스럽고 고집그러운 취향을 지녔던 과거와 아마 우리보다 더 고상한 취향을 갖게 될 미래 사이에 살고 있다. 우리는 너무 중간에 살고 있다."
- 니체 -
【 기후 위기 】
【 기후 변화 시대를 맞은 도시와 도시에서의 삶 】
■ 동에서 서로, 북에서 남으로, 지구에서 기후 변화의 영향은 열기 혹은 냉기, 홍수와 대기 오염, 숨쉬기 어려운 도시, 가뭄, 해수면 상승 등과 더불어 매일매일 우리에게 와 닿는다. 말 그대로 지구가 불타오르기 시작한 이후로 기후 재난은 모든 대륙에서 예외 없이 관찰되고 있다. 이렇듯 극적인 상태 악화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에 묘사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닥쳤다. 끔찍한 범죄가 일어날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고, 범죄가 준비되고 있음을 저마다 목격한 데다, 살인자들이 몰려 오는 것을 온 마을이 지켜봤으면서, 실제로 살해범들이 문을 두드렸을 때 아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난 후, 각자는 마을을 슬픔에 잠기게 만든 이 범죄 행위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 자기 나름의 해석을 늘어놓았다. 기후 온난화의 피해나 결과에 대해 우리가 자녀가 손주들과 편히 대화할 수는 없다. 그렇다, 기후 변화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예고된 대로 인류 문명,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고 오늘날까지 살고 있는 그 문명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도시의 시대에 기후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단어, 즉 '인류세(anthropocene)'와 '복잡성(complexity)'을 충분히 새기고 강조해야 마땅하다. 현재의 위기를 깊이 이해하려면 약간의 교수법을 활용하여 이 두 단어를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할 정도다. '인류세', 그러니까 '인간의 시대'라는 단어는 지난 50여 년 동안 일어난 일의 본질을 종합적으로 표현한다.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파울 크뤼첸과 미국 생물학자 유진 스토머가 2000년에 인간의 영향력이 지구 생태계에 중요한 것이 되었음을 의미하기 위해 제안한 용어임을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을까? 기후 변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인간활동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있을까? 집약적 농업과 산림 파괴, 어류 남획, 공기과 물, 토양의 오염, 통제되지 않는 콘크리트 도시 개발, 자연 발생 주거지의 축소 또는 파괴, 순환주기를 변화시키는(질소, 인, 황을 대량 사용하는) 산업, 열동력기를 쓰는 대량 수송, 화석 또는 광물 연료들(석탄, 석유, 천연가스, 우라늄 등)의 채굴과 기하급수적인 소비 증가, 플라스틱 물질의 생산과 과소비 등 많이 알려진 것들만 열거해도 이 정도다. '인류세'라는 개념은 비이성적이고 광적인 채취와 폐기라는 이중 개입으로 생물권의 균형에 자연적인 변동을 야기하는 인간 행위를 부각시킨다.
우리가 내내 외면하고 있는 '플라스틱 돌멩이(plasti glomerate)'가 산업시대 이후의 인간활동을 대변하는 새로운 지질학적 지표가 되었음을 새삼 상기해야 인류세의 중요성을 납득할까? '플라스틱 돌멩이'는 절반만 자연적인 신물질로, 열로 용융된 플라스틱과 암석이 결합하여 만들어진다. 2014년 패트리샤 코코란이 이끄는 미국과 캐나다 합동 연구팀에 의해서 세상에 소개된 이 신종 광물은 인간이 초래한 지구 변화의 긴 목록에 한 줄을 더했다. 벌써 수십 년 전부터 많은 과학자들이 플라스틱 폐기물의 폐해를 경고해 왔는데, 미래의 고생물 학자는 인간 화석보다 '플라스틱 돌멩이'를 더 많이 발견하리라고 예견할 정도다. 1975년부터 이듬해까지 과학한림원의 의장직을 역임하고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관장으로도 일한 모리스 퐁텐은 1960년대에 이미 '몰리스모센(Molysmocene)'이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이는 그리스어로 폐기물 시대, 프랑스식으로는 '초기 쓰레기통 기'에 해당한다. 그 후 많은 학술논문에서 '인류세'의 초반부를 특징짓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위기를 이해하는 데 '복잡성'이라는 용어는 어째서 필요할까? 지금까지 언급한 파행을 오직 산업혁명 혹은 기술 성취의 탓으로만 돌리면 너무 순진하고 기만적일 뿐만 아니라 악의적이라 할 것이다. 프랑스의 환경철학자 오귀스탱 베르크가 그의 저서 <외쿠메네>에서 장마르크 베스를 인용하면서 '나와 나 사이엔 대지'라고 쓴 것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통합체로 간주하는 생태지리학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 대지'를 언급하는 에드가 모랭은 우리 각자가 인식의 영역뿐 아니라 일상의 모든 행동 영역에서 변화의 주체로서 영향을 주는 상호의존적 세계를 묘사한다.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사회들이 상호 의존하는 순간, 우리가 지구상의 운명 공동체임을 자각하는 것은 천년의 대미를 장식하는 중요 사건이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이 지구 안에서 지구인으로서 연대한다."
기후 변화는 이미 농업과 건강, 지상과 해양 생태계, 물 공급, 몇몇 주민들의 생존 수단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놀라운 점은 기후 변화가 열대지방에서 극지방까지, 작은 섬에서 광대한 대륙에 이르기까지, 제일 잘 사는 나라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까지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기후변화에 관한 벙부간 협의체는 오래 전부터 아주 소상히 경고해 왔으며, 해마다 발표되는 보고서에서도 산업화 이전 시대에 비해 평균 기온이 섭씨 4도 이상 상승할 경우 위험(생물의 실질적인 멸종, 식량 안보의 중대한 위협 등)이 '높은, 아주 높음'까지 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사실 기온이 1도에서 2도 정도만 상승해도 위험은 '현저히' 커진다.
산업화 이전 보다 기온이 2도 오르면 세계의 연간소득이 0.2에서 2퍼센트까지 감소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구의 온도가 몇 도만 상승해도, 물과 식량, 지구 생태계 또는 날씨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가령, 해수면 상승으로 위협받는 도시들, 세계 식량 생산량의 감소, 적지 않은 종의 멸종, 극단적인 이상기후 증가 등. 그렇게 되면 상당수 주민은 이주, 신종 질병의창궐, 천연자원의 감소, 지금보다 훨씬 강도 높고 급격한 기상 변화(사이클론, 태풍 등) 같은 새로운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혹서 때의 도시협곡 현상에서 보듯이, 도시 현상은 기후 문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2003년 8월 파리를 절절 끓게 만든 복더위 때, 기상학자들은 파리 중심부와 시 외각의 기온 차가 섭씨 4도 가량이라는 사실을 관측했다. 그해 여름에만 프랑스에서 2만 명, 유럽 전체에서 7만 명의 폭염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상기해보라. 엠마뉘엘 카도와 알프레드 스피라의 연구에 따르면, 파리에서 유난히 두드러졌는데 2003년 8월 1일부터 20일까지 3주 동안 사망률이 이전에 비해 약 190퍼센트 증가했다. 전례 없는 이 비극을 두고, 도시에서의 공중보건은 위생은 물론 사회적 맥락을 포함하는 다양한 차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이 이들의 연구에서 드러난다. 요컨대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인한 도시의 취약성 때문에, 기후 문제가 농촌보다 도시 주민들의 건강에 훨씬 대대적인 영향력을 끼쳤음을 명백하게 입증한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후, 폭염 현상은 이제 도시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프랑스는 어디든, 여름 폭염이 찾아올지 여부 보다는 언제 시작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지가 관심사다.
또한 기후변화협학의 지속성이 의문시되었던 터라, 2015년 파리협정에서는 상황의 심각성과 도시와 도시 권역의 막중한 책임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그런 만큼 대도시에서도 우리 삶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자치단체장들 및 의원들의 국제적인 협력을 조명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지구의 온도 상승을 억제하는 것이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 목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도전임을 강조한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각국 정상들은 세계도시의 시장들과 긴밀히 협력해야 할 것이다. 세계도시의 시장들은 시민들의 신뢰 속에서 시민들과 가까이 있다. 아울러 단순히 국가 차원의 정치적 삶과 지역에서의 삶을 이어주는 매개자가 아니라, 정치적 삶의 중추이며 분명한 주역이다. 이들 각자의 전략적 비전과 역동성, 시민들은 존재와 참여 없이는 도시에서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규모 도시 건설, 천연자원 고갈, 대대적인 오염, 물 부족 스트레스, 그리고 삶의 질을 위협하는 시스템들은 기후 변화에 직면하여 우리의 건강뿐 아니라, 도시에서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며 식물, 물, 온갖 형태의 생명과 생물다양성이 얽혀 있는 생명 사슬 전체를 위협한다. 대도시의 출현과 성장, 때로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중소 도시까지 뻗치는 막강한 흡임력이 우리 살과 관련된 도시와 농촌 공간, 생물다양성을 마구잡이로 뒤흔들어 놓는다.
프랑스 출신 우주 비행사 토마 페스케가 2017년에 우리에게 보여준 지구의 멋진 이미지들을 기억한다. 지구에서 도시들이 차지하는 표면적은 2퍼센트에 불과하지만, 그 2퍼센트의 면적에 50퍼센트의 주민이 모여 살면서 전 세계 에너지의 78퍼센트를 소비한다. 도시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60퍼센트가 나오며, 전 세계 부의 80퍼센트가 창출된다. 토마 페스케의 이미지들은 오염과 자원 불안 때문에 취약한 도시에서의 삶을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세계 각국의 수많은 도시들에서는 패러다임을 바꾸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의 틀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이 동반된 깊은 성찰이 진행되었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의 질에서부터 물과 생물다양성, 그리고 새로운 식량 공급방식과 유통 방식, 삶의 질을 우선으로 하는 생활방식까지.
2013년에는 인간활동이 발생시킨 온실가스가 처음으로 400ppm을 넘어섰는데, 400ppm이란, 그 수준을 넘어서면 인류의 미래가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는 일종의 오염 상한선이다.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을 목표로 했던 1997년 교토 의정서의 체결 이후, 배출량은 오히려 60퍼센트가 증가했다. 대도시들의 탄소 흔적이 70퍼센트에 이르니, 명예롭지 못하게도 제일 중요한 기여자가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도시화가 가속화되면, 이번 세기가 끝날 무렵에 인류는 생존 자체를 걸고 도박을 할 수도 있다.
혹서가 시작될 무렵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야만 행위 또한 걱정스럽다. 우선, 물벼락을 맞고 시원해지겠다고 소방용 소화전을 깨뜨리는 일이다. '간헐천'처럼 물이 솟구치면 불과 몇 시간 만에 수백 개의 '수직 수영장'이 동네에 만들어진다. 나는 2017년 6월, 센생드니의 한 서민 동네에서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최초의 기후난민들이 이미 도시지역, 열섬 현상으로 기온이 섭씨 35도를 훌쩍 넘어선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온은 우리가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점점 더 오를 것이다. '수직 수영장' 또는 '도시 간헐천'은 해마다 여름이면 성행하는데, 비단 야만적인 행위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의사 표현으로 간주해야 한다. 우리는 점점 더 극성을 부릴 이 행위의 뿌리가 어디인지부터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도시에서는 도시의 규모나 위치와도 무관하게, 또 다른 극심한 현상들이 충격적인 이미지를 남기며, 각종 피해와 재앙, 인명 피해 등을 야기한다. '세계의 공장' - 대형 다국적 패션 기업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나라들 -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방글라데시의 다카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질겁해 일자리를 떠나는 바람에 공장이 문을 닫고, 도시마저 마비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무슨 이유냐고? 높은 기온 때문에 수 백 명의 남녀 노동자들이 하루 사이에 병이 나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입원하다 보니 그렇다. 물론 피로와 영양실조도 가세해 노동자들의 건강을 악화시킨다.
2013년, 태풍 하이얀이 최고 시속 360킬로미터의 무서운 속도로 필리핀을 강타했을 때 나는 마침 인근 지역을 탐방중이었던 탓에, 본의 아니게 슈퍼태풍이 연출한 세계의 종말과도 같은 장면들을 목격했다. 태풍이 베트남 근처에서 소멸할 때까지 수십만 명의 기후난민들은 거처를 옮겨 무서운 바람을 피해야 했다. 나는 또한 스리랑카의 서남부 지역을 방문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기후 변화가 도시에서의 삶과 지역 역사문화 유산 보존 등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는 기회였다. 15년만에 최악의 열대 계절풍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남겨놓은 피해를 지켜보아야 하는 건 정말이지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사망자가 2백 명에서 이재민만 30만명이라니! 아프리카 대륙 역시 기후 재해를 피해가지 못한다. 아프리카 도시들은 수백만 명의 생활을 위협하는 심각한 식량 불안에 정기적으로 직면하는데, 이는 기온 상승, 강수량 부족 등의 요인과 결합하여 사회적 갈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라틴 아메리카 남부 지역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여름이 찾아올 때면 폭염을 알리는 경계경보마저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기온이 섭씨 40도 언저리를 맴도는 데다 지역에 따라서는 47도까지 올라간다. 삶의 질 저하와 혹독한 기후 조건이 빚어내는 폭탄이 사회 폭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편으로는 기온 상승,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따른 해수면 상승, 문제의 공통점은 둘 다 몹시 걱정스럽다는 것이다. 세계 은행에서 진행한 한 연구는 이미 2013년에 우려 섞인 전망을 했다. 해안가 대도시들이 어떠한 해수범랑 대책도 시행하지 않을 경우, 침수 피해 총액이 2050년이면 연간 1조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에 이를 것이며, 결국 위험의 평면구형도를 통째로 바꾸어놓을 것이라고 했다. "오늘날 가장 위험에 처한 대도시들은 중국의 광저우를 필두로 미국의 세 도시, 마이애미, 뉴욕, 뉴올리언스다. 이번 세기의 중반 무렵이면 제일 큰 위험이 개발도상 도시로 옮겨갈 것이다. 선두 자리는 여전히 광저우가 차지하겠지만, 그 뒤로 인도의 뭄바이와 캘커타가 바짝 따라붙을 것이며, 마이애미와 뉴욕, 뉴올리언스도 여전히 10위권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이번엔 향후 50년 사이에 위험도가 가장 크게 증가할 도시를 꼽자면 양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알렉산드리아, 나폴리, 베이루트, 이스탄불, 아테네, 마르세유 등이 있는 지중해 주변 지역이 될 것이다." 그리고 3년 후, 세계은행의 보고서는 "기후변화 때문에 이미 인류의 상당수가 빈곤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2030년 무렵이면 1억 명 이상이 빈곤선 아래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늘날 세계를 돌아보면, 해를 거듭할수록 상황이 줄기차게 악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후 변화는 이제 현실이며 중요한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수십 년 후에는 사회적, 영토적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될 것이다. 지구상엔 벌써 기후난만이 전쟁난민보다 많다. 유엔의 경제사회국(DESA)는 <2018년 세계도시>라는 보고서에서 '천재지변엔 국경이 없다'면서 인구 50만 명 이상 되는 1,146개의 도시들 가운데 679개가 사이클론, 홍수, 가뭄, 지진, 산사태, 화산 폭발, 혹은 이런 현상이 두 가지 이상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에 취약하다고 지적한다. 유엔 재난위험경감사무국(DRR)과 재난역학연구센터(CRED)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20년 동안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자는 130만 명에 이르며, 그 외 부상을 당하거나 집을 잃거나 긴급구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44억 명이나 된다. (사망자의 56퍼센트는 지진과 쓰나미와 관련이 있지만, 가장 빈번한 재해는 홍수, 폭풍, 가뭄과 같은 수문 재해와 폭염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전체 피해 재민의 63퍼센트, 경제적 손실의 71퍼센트에 이른다.)
유엔의 도시정책을 담당하는 유엔 해비타트는 천재지변에 대비하여 국가나 공동체들의 회복 탄력성을 증진시키는 전 세계적인 행동 실천에 참여하도록 호소한다. "모든 주역들은, 재앙이 닥쳤을 때, 인명을 구하고 자산을 보호하며 보장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함께해야 한다. 따라서 계획 수립이 절실하다." 세계은행과 유엔 재난위험경감사무국이 2019년 6월에 공동 발표한 보고서는 홍수와 태풍, 지진과 산사태 등과 같은 자연의 불확실성에 직면할 때의 회복 탄력성에 대해 언급한다. 교량이나 송전탑같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산보다는, 복원력을 강화하고 시스템과 사용자의 취약점을 찾아내는 일이 훨씬 간단하고 비용이 덜 든다는 것이다.
도시가 해를 거듭하면서 점점 더 광물성이 되어가는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마구잡이식으로 도처에서 올라가는 건물들, 거의 1세기 동안 자동차에만 의존해 온 도시에서의 이동, 기후변화에 대한 인식 결여 등. 생물 다양성을 기능적인 것으로만 축소해 공원 한귀퉁이에 처박아두기만 한다. 다시 말해 여가를 위한 공원, 광물성과 식물성 사이에 교배가 일어나는 공간은 부재하는 것이다. 식물은 기후에 대해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도 말이다. 현재의 모델을 깊이 재고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대규모 빌딩 군 속에서 앞으로의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의심할 여지없이, 가까운 장래에 사회적 위험 인자가 될 것이다.
하나의 생명인 식물은 탄소를 취하고 도시 전체의 신진대사에도 참여한다. 무엇보다도 도시에서는 인간관계의 매력과 질을 향상시키는 요소가 된다. 그러니까 식물은 탄소를 거두어들일 뿐 아니라 인간까지 맞아들인다. 밀집해있고 심지어 아주 과밀하지만 식물이 있는 도시는 이르느바 '탈출', 그러니까 주민들이 어딘가로 녹색을 찾아나서는 이동을 줄이는 도시다. 이는 이동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며, 궁극적으로 시간도시계획(chrono-urbanism) - 사회적 삶의 질을 보장하고자 새로운 도시 리듬을 찾는 도시계획 - 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녹화(綠化)는 수자원 관리와 연동된다. 수자원 관리는 도시 관리에서 최우선 과제로, 이와 관련된 문제의식은 다양하다. 우선, 점점 더 먼 곳에서 물을 끌어와야 하는 공급의 어려움, 너무 빠른 물 증발 또는 부족한 강수량, 과도한 강수량, 불과 몇 시간 사이에 몇 달 동안 내릴 비가 한꺼번에 퍼붓는 집중형 강수 등이다. 이 같은 물 공급 교란은 농업 분야의 가치 사슬과 시스템에 손상을 끼치며 도시에서의 삶에도 영향을 준다. 때문에 도시에서 물의 순환 주기는 향후 십 년을 위해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이다. 자연, 녹화, 물이라는 세 요소가 수렴하여 도시 전환에 투사될 때에야 그 전략적 의미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에너지 전환 패러다임은 탈탄소 재생 가능 자원으로 변경하는 것이 우선적이나, 식물의 가치 재고와 물의 순환주기 회복이 하나로 수렴되는 정책이 아니면 그 효과는 미미할 것이다. 공원, 그린 인프라 망, 물의 자연적인(수로, 하천, 운하 등) 혹은 인공적인(수공간, 물의 거울 - 바닥에서 수증기를 분사하여 얇은 물안개가 뒤덮이도록 한 공간으로 도시 수변공간을 활성화한다.) 순환 주기 회복, 물놀이 공간 조성 등은 오늘날 모두를 위한 도시 디자인에 화답하는 일련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 공원, 개방된 여가공간 조성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세계도시공원 연대는 전 세계의 아이디어와 모범 사례들을 소개하고 모든 주역들을 조직하며 분명한 진전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 보존과 여가 활동, 스포츠와 주민들의 건강과 관련된 것들은 부수적이 아니라 본질적이다.
교통수단 선택, 자가용 차를 비롯한 내연기관을 포기하자는 논쟁을 넘어서, 20세기식 생활방식, 특히 우리가 답습하는 에너지 생활방식을 포기하는 것이 중요함을 꼭 이해해햐 한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와 글로벌 에너지 평가는 2012년에 벌써 이를 위한 기준을 명확히 밝혔는데, 도시지리적 경제, 소비 방식, 최종 수요의 효율성, 그에 따른 인프라 형태 등이 포함된다. 대도시의 탄생과 병합 현상, 심지어 초거대도시가 등장할수록 공간의 파편화, 밀집성, 인구사회학적 구조라고 하는 삼총사에 끼치는 정치적 결정의 영향을 통찰력있게 관찰하여야 한다.
이른바 '도시 외곽에서의 삶'과 자동차의 조합은 공간에서나 밀도에서나 불연속성을 보이며 사회적 격차를 부추기며 대도시권을 확장시켰다. 이런 조합은 남-북, 동-서로 단일한 기능 효과, 일터/거주지의 지리적 분리, 소비 중심적 생활 방식에 의해 강화되었으며, 특히 녹지와 휴식공간의 부재로 말미암아 한층 더 첨예화되었다. 이렇게 되면 도시 동맥경화, 즉 과도한 차량 이용과 교통 정체가 일으키는 현상을 피할 수 없다. 특히 하나의 생활방식으로 굳어진 자가용 승용차 이용이 이를 한층 더 악화시킨다. 실제로 자가용 승용차는 이동 수단이기에 앞서, 중산층의 사회적 지위를 표현하는 수단이자 성공과 지위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우리 주변에는 기후 변화와 생물 다양성 상실이라는 결과를 키우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있다. 도시는 나날이 발전하고, 비대해지면, 농업 지역과 자연 지역으로까지 세를 확장한다. 비록 우리가 푸른 별 지구에 살고 있긴 하나, 우리 거주의 핵심 자원은 대지와 토양이다. 그런데 기반시설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는 도시화의 확장세로 말미암아 대지는 용도 변경이 거듭되면서 나날이 황폐해지고 있다. 이를테면, 토양의 방수 포장은 유럽 인구보다 두 배나 빨리 증가해왔다.
파리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외(COP21)보다 앞서 유럽 연합이 2012년에 발표한 보고서는 콘크리트나 아스팔트 같은 불투수성 자재 포장이 토양 피폐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임을 지적했다. 유럽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1천 평방킬로미터 이상의 토지와 숲이 기반시설로 잠식당하는데, 이중 절반이 인공 자재(타르, 콘크리트)로 방수 처리되고 있다. 이러한 불투수성 토양 작업은 홍수와 물 부족을 증가시키는 한 원인으로 지목되며, 지구 기온 상승과 생물다양성에도 심각한 위협이 된다. 토양의 물 정화, 유기물 재생, 식물 성장을 제약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한 식물성 표토 상실은 탄소 저장, 온도 및 기후 조절 기능과 산소 생산을 저하시킨다.
공간의 파편화와 더불어 불투수 토양피복, 자원 고갈까지 더해지면 지역 생물다양성은 점점 큰 압박을 받는다. 이러한 상황에서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개입하여 지역에 필요한 정책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고 이 상황을 민간과 민간 개발업자의 자유 의지에만 맡겨놓을 수는 없다. 동네와 도시, 나아가 대도시 차원에서,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생물다양성과 공공재 사이에 필요한 균혀을 유도하려면 일관성 있는 규제가 꼭 필요하다. 그러므로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① 기능적 혼합과 다양한 경제 활동을 재편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공간적인 연속성을 책려하는 일 / ② 물, 물길, 녹지대의 회복 등 진정한 도시공원을 창조하고 도시인의 문화를 개발하는 질적 방법으르 필히 제공하는 일 / ③ 연결성을 독려하고 지역에서의 삶을 재발견, 즉 걷기나 자전거 타기처럼 능동적인 이동 수단을 통해 지역을 발견하는 일 / ④ 혼합과 다양성을 제공하기 위해 다른 분야와의 물리적, 사회적 연결을 용이하게 하는 일. 여기엔 모든 형태의 공통계를 두루 섭렵하는 작업이 전제된다.
우리의 삶이 달라지려면 우리의 도시가 달라져야 한다. 순환경제 원칙을 표방하는 지속 가능한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개발 모델을 채택해야 한다. 가령 무한 재활용 쓰레기가 도시화 가정의 자양분이 되도록 하려면 우리의 사용 원칙과 소비 원칙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동하고,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도시여야 할 것이다. 또 탈탄소 도시로 완전히 전환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와 천연자원을 절약하는 새로운 경제 모델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거버넌스와 세제, 시장 규제, 규범 등에 관한 패러다임도 절대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디지털과 기술혁명에 힘입어 시민들이 새로운 이용방식에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써 시민들의 행태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2017년, '유동하는 현태(Liquid Modernity)'라는 개념의 창시자인 위대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망에 즈음해, 나는 한 편의 글에서 그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도시 삶의 변화에 필수불가결한 문화적 각인을 언급한 그의 글을 인용한 적이 있다. 나에게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준 이 폴란드 출신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인해, 기후변호와 자원 고갈에 대처하는 근본적인 해답으로 다중심적, 다용도적인 도시를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도시의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윤곽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세계화는 '사이버 공간'에서 전개되지 않는다. 즉 머나먼 '다른 곳'이 아닌 여기, 당신들 주위에서, 당신이 거니는 거리에서, 당신의 안에서 일어난다. .. 오늘 날의 도시는 세계화 과정의 침전물이 차곡차곡 쌓이는 폐기물 처리장 같다. 도시는 또한 하루 24시간, 일주일에 7일 내내 열려 있는 학교이기도 해서, 사람들은 다양한 인간 군상과 더불어 같이 사는 법을 배우며, 어쩌면 그렇게 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맛보기고 할 것이고 더는 차이를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게 될 것이다. 차이 속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우고, 차이가 상징하는 위협은 위협대로, 기회는 기회대로 직면하는 것 주민들의 몫이다. '도시의 컬러풀한 풍경'은 '혼합애호'와 '혼합혐오'등의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서로 다른 '문화적 색채'를 지닌 이웃과 일상적으로 상호 작용하다보면, 그것을 '문명의 충돌'로 간주할 때는 끔찍해 보일 수 있는 현실마저도 길들일 수 있게 된다."
도시의 제 목소리를 전세계적으로 표출하는 데에는 도시 기후리더십그룹(C40) 같은 네트워크가 상징하는 결집 역량이 관건이 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살아남기 원한다면 반드시 바꿔야 하는 세계를 위한, 세계도시들의 정치적 자각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제 일선에 선 C40 또는 다른 도시 네트워크, 즉 파리,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포틀랜드, 서울, 도쿄, 메데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드니, 오클랜드, 밴쿠버, 토론토, 몬트리올, 키갈리, 쾰른, 첸나이, 광저우의 행동은 매우 고무적이다. 비록 갈 길은 아직 멀지만 말이다.
우리와 우리의 미래 세대에게 반드시 저탄소 세계가 필요하다. 모든 지능이 그렇듯 도시 지능도 변화, 특히 우리의 관심에서 보자면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역량이라 하겠다. 도시들은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국가 차원의 해결책에 대비해볼 때, 각 도시의 해법은 상호 보완적이거나 실책을 보상하는 식이 될 것이다. 도시화는 하나의 사다리를 만들었고, 우리는 그 사다리를 한 단계씩 올라가면서 참여 수단들을 통해서 귀감이 될 만한 실천 방안은 구현할 수 있다. 시민의 삶의 질을 지키기 - 모든 선출직 종사자들의 궁극적인 목표 - 위해서 지자체장들은 대기질, 수질, 이동성, 주거, 건강, 기후 등을 결합하는 시스템적 비전을 실현하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파리 기후협약 이후에 도시의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다. 이를 모두가 인정하는 만큼, 시장과 도지사, 시의원, 국회의원과 도시 생태계는 향후 몇 십 년 동안 지울 수 없고 번복할 수 없도록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지만, 이는 강력한 재정적 뒷받침, 아울러 시민들의 참여와 영토 내 생태계의 유동성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략적으로, 도시며 대도시들이 국가에 맞서서 확보할 수 있는 거버넌스의 자치의 범위에 대해 질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행동 반경을 넓히기 위해서는 녹색 재원으로 접근하기가 용이하고, 예산의 자율성과 규제 권한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2015년 파리 기후협약과 동시에 대최된 '천 명의 시장단'에서 나온 공동선언 내용이었다. 각 지역 대표들의 회담은 하나의 '긍정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또한 총회 기간 동안 처음으로 유럽과 전 세계의 주요 도시 네트워크들(UCLG, ICLEI, C40 도시, AIMF, CCRE 등)이 '기후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천 명의 시장'이라는 기치 아래 구체적인 행동 방안을 논의했다. 전기버스 운행, 도심 진입 차량 금지, 도시 고속도로를 산책로로 전유, 하천이나 강변 기슭에 공원 조성, 낡은 건물을 에너지 고효율로 현대화, 지붕이나 담벼락에 식재, 도시농업의 재발견, 그리고 대기 질의 측정 감시 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 모든 차원의 주역으로서 시민의 관여 등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서명한 많은 도시들이 이미 실행에 옮겼다. 미래는 그들의 것이며, 그들이 벌이는 전투는 우리 각자의 전투이기도 하다. 국가 차원의 거버넌스가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 애쓰는 모든 이들을 존중하고, 경청하며,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도시의 세기에, 우리의 삶이 변화할 수 있도록 그들 편에 결집하자. 분명 우리를 위한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미래 세대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또한 기후 변화와 도시에서의 경제적 사회적 정의를 척도로 생태학을 새롭게 이해하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공동의 자산을 위한 변신이 앞으로 다가올 십년의 우리 과제임을 견지해 나아가야 한다.
【 코비드 19와 더불어 오늘을 살아가기 】
【 그렇다면 내일은? 】
■ 코비드 19는 우리 삶의 깊숙한 곳까지 뒤흔들어 놓았다. 중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출현한 이후에 실시된 격리 조치로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집안에 갇혀 지내는 경험을 했다. 팬데믹의 불확실한 추이를 고려할 때, 이 위기가 우리에게 끼칠 영향을 제대로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어찌되었든 수억 명의 일상생활이 완전히 달라졌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것인가? 지구의 여기저기 도시들은 텅 비었고 거리엔 인적이 끊겨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던 공간은 폐쇄되거나 출입이 제한된다. 도시의 맥박은 느려졌으며 풍경도 달라졌을 뿐 아니라 도시의 심장부와 기능, 특히 우리가 일하고 이동하는 방식과 관련한 기능들은 허둥지둥 변화를 맞았다. '이후의 세계'에 대한 담론이 미디어 공간을 도배한 가운데, '코비드 19 이전 세계'와 비교할 때 단절 수준일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코비드 19 이전 세계란, 크게 걱정 없이 화석 에너지와 자원을 무제한으로 사용하며. 기후 위기와 생물다양성 상실에 직면하여 마비 상태에 이른 도시에 준비된 해답인 양 기술만능주의 답을 항상 들이미는 생산주의-소비주의적인 세계였다.
그런데 과연 '이후의 세계'가 있긴 할까? 실제로 이번 팬데 믹은 우리에게, 지금 여기에서, 2019년 연말만 해도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을 복잡성과 대면하라고 종용한다! 나는 이탈로 칼비노와 그가 쓴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대한 언급으로 이 글을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유럽에서 코비드-19 위기는 이탈 아, 그중에서도 이 나라의 허파이자 경제수도가 있으며, 유럽의 중요 지역들 가운데 하나인 롬바르디아주에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바이러스의 역설이라고나 해야 할지, 이 코비드-19 위기의 출발점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구 1만5천 명의 소도시 코도뇨였다. 밀라노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은 2019년 2월 28일 첫 '슈퍼 전파자'가 확인되면서 '이탈리아의 우한'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그런가 하면 코도뇨에서 2백 킬로미터 떨어진 또 다른 '보이지 않는 도시' 보유가네오(인구 3천 명)에서는 최초의 코비드-19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탈리아 전체 사망자 3만5천 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롬바르디아주 출신으로, 이 지역은 위기를 맞아 무거운 희생을 치른 셈인데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계속된다.
베르가모 대학의 국토연구센터가 발표한 연구 내용은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이번 재앙의 근원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그런데 코비드-19로 촉발된 일련의 사건들은 보건 분야에서 도시와 국토의 복합적 요인이 가져온 위기라는 점을 배제하고는 접근하기 어렵다. 즉 "사회 현상의 공간적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이 세계적인 비극의 진앙은 소도시들이었지만, 바이러스의 강한 확산력을 설명하는 데에는 "현재 우리의 거주 방식, 즉 이동이 잦고 도시에 모여 사는 방식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인구 천만 명을 거느린 롬바르디아주는 주거지는 다중심적이지만 일자리는 여전히 밀집되어 있는데, 이는 밀라노라는 대도시의 흡인력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이다. 밀라노의 경우, 거주지-일터 사이의 이동이 전염병 확산에 핵심적으로 작용했다. 베르가모 대학 국토연구센터는 매우 다양한 데이터들을 교차시키면서 통합 교육, 통근 이동, 도시 리듬에 따라 생성되는 노동지도 등과 연계된 사회적 영토의 역학에 특히 역점을 두었다. 이는 다중심적이고 리좀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법(Urban Nexus Approach)이자 다학제적 비교연구 방법으로, 스위스의 로잔 연방공과대학의 자크 레비가 사용한 방식이기도 하다.
'이후의 세계'를 생각한다는 것은 늘 매혹적이다. 위기의 핵심 - 도시 생활의 근접성에 등을 돌린 생산과 소비, 이동 방식 - 을 재고하지 않으면서 그저 '위대한 저녁만찬'만 상상한다면, 그건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반드시 필요한 변화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도시 리듬을 통해서, 다중심적 삶의 구축을 통해서, 일과 주거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통해서 가능하다. 유익한 시간에 대해서는 그 어떤 고려도 없이, 각자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더 빨리, 더 멀리' 이동하도록 하며, 도시에서 획일적인 박자로 움직이는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바뀌어야 한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할애할 수도 있을 시간을 앗아가는 이러한 이동은 우리를 일종의 피로, 무기력 상태로 몰아간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 타인에 대한 두려움, 다름에 대한 경계심을 느끼게도 한다.
이제 우리가 단기간에 해결해야 할 위기는 사실 기회이기도 하다. 도시가 아니라 도시에서의 삶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 삶의 회복력을 근접성에서 찾을 기회, 집 가까이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서비스를 개발할 기회,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간성, 활동적인 저탄소 이동 방식(걷기나 자전거, 전동 스쿠터 등)으로 옮겨갈 기회이다. 이렇게 되면 가까운 다중 서비스가 탄력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시민들이 기본적인 사회 기능 - 주거, 일, 생활필수품 조달, 보건의료, 교육, 자아실현 - 에 적극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모름지기 저마다 가족과 함께 개인의 행복을 증진시켜 이웃, 동료들과 더 활기차게 살고 지속가능하고 통합적인 지구와도 조화로울 수 있을 것이다.
도시의 탈중앙집중화는 생태적 인본주의의 미래를 열어준다. 이것이야말로 요즘처럼 심란한 시대에 새롭게 부상해야 하는 새로운 지평이 아니겠는가. 다시금 시간이, 유익하고 창의적인 시간이 존재하는 도시. 내일, 우리가 이 어려운 순간들을 뒤로 하게 되었을 때에도 이 도약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일터로 매일 출근하는 일이 실제로 필요한 기능이라기보다는 강제된 위계 구조를 유지하려는 일종의 습관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적절한 시기에 로드맵이 제대로 수립된다면 모든 도시에서 새로운 지평은 가능하다. 격리가 시작되고 기업들이 시급하게 원격 근무 시스템을 재구상할 때, 사람들은 업무에 중요 걸림돌로 작용하던 것을 제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저기에서 채택한 유일한 해결책이 '격리'였고, 그 때문에 경제적 사회적 위기가 심화되면서 삶이 마비될 때, 연대감과 상호부조 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도시와 영토의 근접성과 더불어 '15분 도시'와 '30분 영토'였다. 15분 도시와 30분 영토야말로 행복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축이며, 도시 구조의 취약성을 타개하고 주민과 영토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축이다.
1997년 9월 4일, 위대한 건축가이자 지식 전달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던 스승 알도 로시는 밀라노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그가 이룩한 뛰어난 업적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1990년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몇 줄을 그에게 바치려 한다. 알도 로시는 재앙이 도시에 변화를 촉발한다기보다 이미 상상되어왔던 변화에 속도를 더해줄 뿐이라고 말했다. 이 얼마나 적확한 생각인가. 더구나 그가 태어난 도시가 팬데믹의 직격탄을 맞고 위기에 빠져들었으니 말이다. 도시에 대한 과거 기억과 미래 사이를 오가며 알도 로시는 항상 변화의 지렛대라고 할 수 있는 정체성을 찾아다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 전후 건축의 출발을 알린 라텐덴차 운동과 더불어 그는 기능주의에 문제를 제기했다. 도시의 뿌리를 파고 들어 유형형태론 - '시간과 공간에 퇴적되는 것' - 을 주장했으며, 도시의 역사에서 자산을 재발견하고, 도시가 지닌 역사의 모순을 간파하여 미래에 투사하려고 했다. 알도 로시 자신은 어떤 범주로든 '분류'되는 것을 피하고 싶어 했으나, 세간에서는 그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1966년에 그는 첫 저서 《도시의 건축》을, 그리고 1998년에는 《학문적 자서전》을 출간했다. "기능은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이는 언제부턴가 내가 궁전이며 원형극장, 수도원 또는 저택의 변화를 늘 관찰하면서 도시와 시민사회의 역사에서 끄집어내는 가설들 가운데 하나다. 《도시의 건축》에서 나는 다가구가 살고 있는 오래된 궁전, 학교로 쓰이는 수도원, 축구장으로 변한 원형극장을 볼 때 이런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변형은 그 어떤 건축가도, 어떤 명민한 행정가도 개입하지 않았을 때에 훨씬 더 성공적이다."
프랑수아즈 아놀드 감독의 영화 <알도 로시의 가설>에서 아닉 스페이는 "알도 로시는 집단 기억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도시 형태를 창조함으로써 도시의 이질성에 어떻게 규율을 부여할 수 있는지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가볍고 가역적인 도시화, 일시적인 투자, 제한된 개입.. 끊임없이 감동을 형태로 변모시켰다. 더 나은 변화를 위해 기존의 것과 줄기차게 대화를 이어왔던 건축가의 작업을 척도 삼아 오늘날에도 실행에 옮기면 좋을 '재활용 이론'"이라며 해설했다. 오늘날까지도 살아있는 그의 업적은 연결과 만남을 주도하는 도시 공간의 변화를 가다듬고 집단 기억을 진작시킨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하나의 정체성을 지닌 장소들에서, 다른 도시 형태, 다른 용도와 혼성화하여 특이점을 찾아 나서는 것에서 출발한다. 가령 도시를 거니는 보행자들이 단순히 보행자에 머물러 있지 않을 때, 도시는 비로소 우리 앞에 제 모습을 드러낸다. 가령 그들이 도시에서 사는 주민이기도 해서 공공 장소에 정착할 때가 그런 순간이랄 수 있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산책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도시 공간을 점유할 때 도시에서의 삶이 되살아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도시에 숨결을 불어넣고, 도시를 한결 더 활력 넘치고, 인간적이며 호의적으로 만드는 길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이탈로 칼비노의 질문에 "네"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의미와 감동, 감각, 그리고 우리의 자존감을 되찾는 행복을 안겨주는 도시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으므로.
"단 하나의 진정한 여행,
유일한 청춘의 원천은
새로운 풍경을 찾아나서는 것이라기보다
새로운 눈을 갖는 것"
- 마르셀 프루스트 -